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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기억

  • 작성일 2015-03-09
  • 조회수 1,407



모르는 기억




조우리



삽화-모르는-기억


바닥에 앉자. 양말을 신어야 하니까. 오른쪽 먼저. 그리고 왼쪽도. 이제 일어난다. 뒤로 돌면 거울. 거울 옆에 선반. 손을 뻗어 빗을 꺼낸다. 머리를 빗는다. 오른쪽을 먼저 빗고. 왼쪽이랑 뒤쪽도, 꼼꼼하게. 지금 뭘 하고 있지? 준비. 준비를 하고 있다. 외출 준비. 곧 나간다. 밖으로. 얼마만이지?
밖으로 나가는 것. 외출은, 얼마만이지. 대답이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재영은 머리 빗기를 멈추고 가만히 거울을 본다. 머리카락이 제법 자랐다. 짧게 잘라 주세요, 했더니 귀 밑에 바짝 붙었던 머리카락이 이제는 어깨 너머까지 내려와 있다. 삼십 분 전에 가격표를 떼어낸 회색 스웨터. 새것의 냄새가 난다. 소유의 흔적이 없는 냄새. 몸에 감기지 않는 빳빳한 청바지 역시 그렇다. 재영은 제자리에서 몇 걸음 걸어 본다.
이대로 나갈 수는 없다. 코트를 입고 머플러도 둘러야 할 것이다. 이제는 그런 계절이 되었다. 재영은 그것을 안다. 밖의 계절이 바뀌었다는 것을 안다. 이 방에 있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다. 그 정도만을 안다.
더운 계절에 이 방으로 들어왔다. 이사랄 것도 없이 여행가방 하나를 끌고 문을 열었다. 풀옵션 분리형 원룸. 계약서만 보고 도장을 찍은 방이었다. 현관에 들어서니 신발을 벗기도 전에 싱크대 앞이었다. 양옆으로 문이 있었다. 하나는 화장실, 하나는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왔더니 문과 문 사이. 재영은 잠시 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그 영화, 제목이 뭐였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면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또 문이 있는 방이 있고 그렇게 계속 문을 열다 보면 온통 문으로 이루어진 방이 나오고 또다시 문을 열고 방과 방을 오가면서 하염없이 문을 여는 남자가 나오는 영화였다. 그거, 제목이 뭐였지. 유진과 함께 봤었다. 커다란 극장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또 타고, 계속 위로 올라갔었다. 캐러멜 팝콘과 버터구이 오징어를 먹었지. 재영은 그 영화 속 남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 남자, 그래서 어떻게 되었더라.
침실에는 침대와 옷장과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크지 않은 창문이 있었는데 등을 켜지 않아도 온 방이 밝았다. 남향이라 좋아요. 계약서를 쓸 때 흘려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재영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조건이었다. 옷장을 옮겨 창문을 가렸다.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텅 빈 옷장은 그저 나무판자일 뿐이어서 생각보다는 가뿐하게, 하지만 그 무게에 어쩔 수 없이 더듬더듬 비틀대며 움직였다. 옷장과 벽 사이의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와 마치 옷장이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옷장 안에 무언가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 들어 있는 것도 같았다. 재영은 옷장 앞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그 빛이 사그라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방으로 들어온 재영은 수없이 문과 문을 여닫으면서도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재영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인터넷 쇼핑몰에 있었고 신용카드 결제와 택배 배송 시스템은 간단하고 신속했다. 문을 연다. 상자를 들자. 들어가자. 상자를 내려놓는다. 문을 닫자. 닫았다. 상자를 연다. 밥을 먹자. 먹는다. 잠을 자자. 잔다. 일어났다. 일어나자. 침실 문이 열리고 닫히고 화장실 문이 열리고 닫히고 가끔 현관문이 열리고 닫혔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생활. 오로지 자신의 의도로 오직 자신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상태. 재영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안전해. 안전하다.
정말? 정말 괜찮아? 유진은 자꾸만 물었다. 응, 괜찮아. 정말 괜찮아. 유진에게 말하자. 괜찮다고. 괜찮으니까. 정말. 난 좋은데. 좋아. 정말. 재영의 노트북은 전원을 켜면 자동으로 메신저가 실행되도록 설정되어 있었고 재영이 미처 그 사실을 인지하기도 전에 유진이 대화를 신청해 왔다. 무시하고 접속을 끊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리고 다시는 접속이 되지 않도록 설정을 바꿀 수도 있었겠지만 재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진에게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아니, 유진에게만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재영은 유진을 제외한 메신저 목록의 이름들을 차단했다. 유진을 남기자. 유진은 안전해. 유진은 괜찮아.
신발을 신자. 검은 구두. 오른쪽을 신고. 왼쪽도. 검은 구두는 유진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다. 유진은 생일 축하한다며 세 장의 구두 사진을 보냈고 재영은 그중 하나를 골랐다. 택배는 하루 만에 도착했다. 다음에 만날 때 꼭 신고 나와. 유진은 대화창에 웃는 얼굴을 표현한 특수문자를 찍었다. 그래, 그럴게. 그런데 유진아. 우리 전에 같이 봤던 그 영화. 제목이 뭐였지. 자꾸 문을 여는 남자가 나오는 영화였는데. 기억나? 유진은 자음으로 웃었다. 그거야, 재영아. 그 영화 제목이 바로 그거야.
문을 여는 남자. 그 남자는 끝까지 문을 열었나. 끝에 끝까지 문을 열고, 그러니까 결국은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을 문까지 열고. 밖으로, 나갔나. 그 남자 밖으로 나가려고 했나. 기억이 안 나. 어떻게 되었는지. 유진아. 그 남자 말이야. 그 남자가 문을 열고 그다음에.
문을 연다. 열었다. 나간다. 밖으로.


걷는다. 역으로. 일단은 직진. 보행신호를 기다린다. 기다린다. 바뀌었다. 건너자. 건넌다. 횡단보도를 건넌다. 건넜다. 걷는다. 재영은 보폭과 속도에 주의하면서 걸었다. 앞서 가는 사람을 앞지르지 않도록. 뒤에 오는 사람보다 뒤처지지 않도록.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또한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분주하지만 침착하게 시선을 옮겼다.
모서리가 깨진 보도블록으로, 앙상한 가로수 가지 사이사이로, 크기가 제각각인 간판들과 그 속의 글자와 숫자들로, 쇼윈도에 어른거리는 실루엣들로, 누군가의 가방에 매달린 작은 봉제인형에게로. 그렇게 점점 아무것도 아닌 곳으로. 마치 세상의 모든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처럼. 그런 스스로가 너무도 즐거운 사람인 것처럼. 본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손은 어깨에 걸친 가방의 끈을 잡고. 왼손은 코트 주머니에 넣고. 주머니 속에는 교통카드. 교통카드의 매끈한 평면. 양각으로 도드라진 카드번호. 둥근 모서리. 교통카드를 만지고 있다. 왼손으로. 걷는다. 역으로 가고 있다. 횡단보도. 보행신호를 기다린다.
재영 앞에 노란 승합차가 멈춰 선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혹은 슈베르트가 만들었을 멜로디가 딸랑딸랑 종소리가 되어 울린다. 잠시만 양보해 주세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복을 입은 강아지 인형이 승합차 지붕 위에서 확성기를 들고 있다. 어린이를 보호해 주세요. 어린이는 자라나는 새싹입니다. 소중히 지켜야 할 보배입니다. 천천히 문이 열린다.
여자 아이가 둘, 남자 아이가 하나. 폴짝폴짝 뛰어내린다. 셋이서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른다. 아이들의 입에서 퐁퐁 입김이 솟아난다. 안녕, 안녕, 또 만나요. 안녕, 안녕, 다시 만나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부를 수 있을 것만 같은 노래다. 아이들은 그런 노래를 좋아하지. 아무렇게나 부르고 아무데서나 멈출 수 있는 노래를. 재영은 그 멜로디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다른 노래를 떠올린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오래 알아 왔던 노래처럼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재영의 머릿속을 맴돈다. 안녕, 안녕. 차 안에서도 같은 노래가 들린다. 그러다 문이 닫히고 강아지 인형도 사라진다. 종소리가 멈추고 승합차는 떠난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이 있다. 아이들은 얌전히 보행신호를 기다린다. 재영도 보행신호를 기다린다. 기다린다. 신호가 바뀌었다. 건너자. 건넌다.
아, 하고 짧은 소리 후에 으앙, 와앙, 으앙 울음소리가 이어진다. 아이다. 세 아이 중에 하나다. 한 아이가 넘어졌다. 그런 것 같다. 넘어진 것 같다. 손을 잡고 있었으니 어쩌면 둘이 같이 넘어졌을 수도 있다. 피하지도 못하고 셋이 우르르 넘어졌을지도 몰라. 재영은 돌아보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다. 계속 걷는다. 오른손은 가방 끈을 잡고 있다. 왼손은 주머니 속에 있다. 횡단보도를 건넌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던 사람이 달려와 재영을 지나쳐 간다. 재영은 안심한다. 내가 아니야. 아니야. 저렇게 나를 지나쳐 갈 리가 없어. 내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달려갈 리가 없어.
길에 버려진 종이컵을 보며, 바닥에 검게 달라붙은 껌을 보며, 휘청거리며 속도를 내는 오토바이를 보며,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를 보며, 재채기를 하는 사람과 자꾸만 침을 뱉는 사람과 걷는 사람, 뛰는 사람, 갑자기 우뚝 멈춰서는 사람을 보며 재영은 안심한다. 아니야. 내가 아니야. 걷는다. 역으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손은 코트 주머니에, 왼손도 코트 주머니에. 걷는다. 걷고 있다. 역이 보인다. 역으로 간다.


유진아. 내가 정말 그랬을까.
상대방이 접속하지 않아 메시지가 전송되지 않습니다. 유진의 대답 대신 붉은 안내 문구가 떴다. 유진이 접속하지 않았을 때, 재영은 메신저 대화창에 많은 말을 적었다. 유진아. 나는 이제 잘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난다는 게 없었던 일이라는 뜻은 아니라는 걸 나도 알아. 그런데 정말이야.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이럴 수가 있을까. 내가 정말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어쩌다 그랬을까. 아니. 아니야. 나는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그렇게 웃을 수는 없어.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어. 정말 그랬다면 그럴 수는 없는 거잖아. 아니잖아. 그렇지? 유진아. 아니야. 나는 아니야.
재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화질이 좋지 않아 일그러진 영상 속에서 검게 움직이고 있는 형상이 자신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목격자가 있다고 했고 증거가 나왔다고 했다. 기자들이 찾아왔다. 왜 그런 행동을 하셨습니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의사가 말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아 왔다면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폭력적인 성향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일종의 병리 상태이기 때문에 본인이 기억을 하지 못할 수도 있죠. 경찰은 의사의 말을 받아 적었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으시는 분이 왜 그런 직업을 선택했어요? 이게 뭡니까. 왜 이런 피해를 만듭니까.
스트레스를 받았나. 잠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바빴으니까. 피곤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한참을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몸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아침이 영영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밤이 있었다. 괜히 밥맛이 없는 날도, 유독 편두통이 심한 날도 있었다. 그래서 그렇다는 걸까. 극심한 스트레스, 지속적인 극심한 스트레스, 이성을 잃고, 폭력적인 성향, 이성을 잃은 폭력적인, 병리 상태.
이것 좀 보세요. 경찰이 내민 것은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이었다. 까만 나무 아래에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여자의 주변에는 색색의 나뭇잎들이 널려 있었는데 나무는 비쩍 말라 마치 불에 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여자의 얼굴에는 까만 가위표가 쳐져 있었다. 보세요. 이거, 보세요. 경찰은 그림 속 여자가 재영이라고 말했다. 이렇게나 확실한데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겁니까. 정말 기억이 안 나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다 해결이 됩니까?
잔악무도. 후안무치. 인면수심. 그런 말들이 방송되었다고 들었다. 유진에게서. 어떻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는지 이상할 정도로 난리가 났었다고 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어떻게 된 일인지. 이게 다 뭔지. 재영은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정말 잘 모르는 일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유진이 말했다. 그러게, 정말 이게 다 뭔지 모르겠다.
뉴스와 신문기사를 찾아봤다. 재영은 이니셜과 모자이크로 등장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들을 꼼꼼하게 읽었다. 알고 싶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재영은 이십대 후반의 미혼 여성으로 자주 만나는 친구가 없고 가족들과도 연락을 끊고 지냈으며 평소 어두운 인상과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던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서술은 부정할 수 없는 재영이었다. 스물여덟 살. 가족이라는 말은 새삼 불편했다. 혼자 살고 있으며 그나마 유진과 간간이 서로의 안부를 물을 뿐 딱히 살갑게 지내는 친구는 없었다. 명랑하다고는 할 수 없는 성격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해 왔다. 사건의 목격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재영이 태연하게 회식에 참석해 노래를 불렀다며 분개했다.
노래. 불렀다. 회식이 있었고 노래를 불렀다. 삼겹살을 뒤집던 집게를 마이크 삼아 한 곡을 불렀다. 사람들이 환호했고 박수를 쳤고 재영은 웃으며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여러 번 술잔을 부딪치며 양껏 먹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재영은 기가 막혔다. 평소에는 억지로 끌어내도 한사코 사양했었다. 그런데 그날은 왜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났을까. 좋아하지도 않는 노래를 부르고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셨을까. 그날, 아무래도 좀 이상했던 걸까.
그래서 그랬던 걸까. 정말 그랬던 걸까.
한 번 시작된 의심은 도무지 떨쳐지지 않았다. 재영의 머릿속에서는 매일 재판이 열렸다. 재영은 피고이자 원고이며 검사이고 변호사였다. 판사이고 배심원이었다. 판결은 매번 바뀌었다. 많은 증거들, 증언들, 고백들, 질문과 대답이 반복되었다. 재영이 확신할 수 있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들이 훨씬 많았다. 자기 자신인데도.
새로운 사실들도 발견되었다. 그날, 재영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평소보다 늦게 집을 나섰고 그 때문에 타야 할 버스를 놓쳤고 예정된 시각보다 늦게 도착했다. 지각에 대해 추궁을 당했고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어 그저 고개만 주억거려야 했다. 그러다가 머리가 아파졌고 두통이 사라지지 않아 점심을 걸렀다. 이 사실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시 어떤 징후는 아니었을까.
재영은 두려웠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이. 벌어지는 일들을 알아채지 못하는 자신이.


재영은 세 대의 열차를 보내고 네 번째 열차를 탔다. 처음에는 문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쳐서. 그다음에는 누군가 재영의 어깨를 밀치고 급하게 열차에 올라타서. 세 번째는 아주 천천히 지팡이를 짚으며 열차에서 내리는 노인을 피해 옆으로 물러선 채로 열차를 보냈다.
노선도를 본다. 역을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여섯 개의 역이 지나면 내린다. 오른손은 기둥을 잡고 있다. 왼손은 주머니 안에 있다. 재영은 초조하다.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어야만 하는 것이 괴롭다. 열차 안에는 사람이 얼마 없고 빈자리가 많은데도 서 있다는 이유로 재영은 약간의 시선을 받고 있다. 어서 저 시선들이 사라지도록 재영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재영은 그것이 두렵다.
내가 커피 주문했니?
재영이 그렇게 물었을 때 유진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니, 커피는 내가 시켰어. 너는 주스를 시켰는데 아직 안 나왔어. 그리고 재영아. 테이블 위에 깍지를 끼고 있던 재영의 두 손 위로 유진이 자신의 손을 포갰다. 괜찮니? 너 나한테 세 번이나 물어봤어. 네가 커피를 주문했느냐고. 직원이 커피를 들고 지나갈 때마다 물어봤어.
유진과 헤어지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류장에는 재영뿐이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표시하는 전광판을 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술 냄새, 연기 냄새, 기름 냄새, 그리고 사람의 냄새가 났다. 술을 마시며 고기를 구워 먹은 사람의 냄새. 재영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싫다, 고 생각했다. 냄새가 점점 가까워져서 재영은 슬쩍 옆으로 물러섰다. 그 순간 요란한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술에 취해 있었고 발이 엇갈리며 차도로 뛰어들 듯이 고꾸라졌다. 마침 정류장으로 들어오던 버스가 남자를 발견하고 클랙슨을 울리며 멈춰섰다. 재영이 타야 할 버스였다. 문이 열리고 버스 기사가 내렸다. 재영은 버스에 탔다. 맨 앞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타박상 하나 없이 멀쩡했고 버스 기사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비틀거리며 인도로 올라섰고 계속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거 참 목숨 아까운 줄을 모르고 술을 드셨네. 버스 기사가 혀를 차며 운전대를 잡았다. 재영은 남자가 자신과 얼마나 가까이에 있었는지 가늠하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을까. 건드릴 수도, 밀칠 수도 있는 거리였을까. 저 남자가 싫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혹시, 어쩌면 혹시.
밤새 악몽이 재영을 괴롭혔다. 커피 수십 잔이 재영의 테이블에 놓였고 재영은 그 잔들을 모조리 깨뜨렸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뺨을 때렸다.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노인도 있었다. 잠에서 깨자 내내 긴장하며 움츠렸던 어깨가 저렸다. 일어났다. 일어나자. 냉장고를 열자. 물병을 꺼낸다. 물을 마신다. 재영은 스스로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서술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열차가 멈춘다. 멈췄다. 문이 열린다. 내리자. 내린다.


매표소가 보인다. 매표소를 향해 걷는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재영은 가방에서 출력해 두었던 인터넷 예매권을 꺼내 매표소 직원에게 건넸다. 교환 받은 티켓에는 유진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유진 감독 수상 기념 특별전. 상영관은 지하에 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기다린다.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 타자. 탄다.
하나. 둘. 셋. 지하 삼층. 내리자. 내린다. 재영은 상영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은 사람들을 본다. 유진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그 얼굴들을 조심스럽게 살핀다. 재영을 아는 사람은 없다. 상영까지는 삼십 분이 남았다. 재영은 화장실로 간다. 문을 연다. 들어간다. 문을 닫는다. 변기 뚜껑을 내린다. 앉는다. 오늘의 외출은 나쁘지 않다. 이만 하면 성공적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대로만 하면 다시 돌아가는 길도 어렵지 않다. 다음 외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괜찮지 않을까. 재영은 자신감이 생긴다.
이유진 감독님의 수상을 축하합니다. 화장실 문 안쪽에까지 유진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유진의 얼굴. 저 사진을 유진의 메신저 프로필에서 봤었다. 유진이 접속하지 않은 메신저 대화창에 한참을 떠들다가 프로필 사진이 바뀐 것을 알았다. 손톱만 한 사진을 눌러 보니 손바닥만큼 커졌다. 유진이 트로피를 들고 있었다. 트로피에 적힌 글자를 검색창에 넣었다. 유진이 만든 단편영화가 해외영화제에서 수상을 했고 그것을 축하하기 위한 특별 상영이 있다는 기사가 떴다. 주목받는 신예, 세계가 인정한 작품성, 관객들의 기대, 유진에 대한 서술들이 마음에 들었다.
유진의 사진을 본다. 유진의 영화가 곧 상영될 극장의 화장실에서, 변기 위에 앉아 유진의 사진을 본다. 재영은 트로피를 들고 있는 유진의 사진이 어딘가 허전하다고 생각한다. 꽃이 있으면 좋을 텐데. 유진이 꽃을 들면 좋을 텐데. 꽃을 사자. 일어선다. 문을 연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기다린다. 유진에게 줄 꽃을 사자. 엘리베이터를 탄다.
그런데 이 영화 보기가 좀 괴로울 것 같지 않니? 재영 옆에 선 두 여자 중 한 여자가 말한다. 왜? 다른 여자가 묻는다. 시놉시스를 봤는데 난 이런 거에 좀 약해서. 차라리 공포영화나 좀비 같은 게 낫단 말이야. 이런 건 너무 생생하고 진짜 같잖아. 그래서 마음이 아프더라고. 여자들의 손에는 팸플릿이 들려 있다. 얼마나 남았지? 이십 분 정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여자들은 카페로 들어간다. 재영은 꽃집을 찾는다.
겨울이라 좀 비싸요. 그래도 향이 좋고 싱싱해요. 꽃집 주인의 말에 재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흥정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 유진을 위한 꽃이니까. 예쁘게, 해주세요. 재영은 얼마만에 누군가에게 소리 내어 말을 건네는지 생각해 본다. 헤아려지지 않는다. 유일하게 대화를 했던 유진과도 목소리를 나누었던 기억은 아득하다. 유진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뭐였지. 오늘은 축하한다는 말을 해야지. 노란 프리지아와 하얀 안개꽃. 초록색 포장지와 초록색 리본으로 묶은 풍성한 한 다발. 유진에게 잘 어울릴 것이다.
극장으로 돌아간다. 오른손은 주머니에, 왼손은 꽃을 들고 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기다린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탄다. 재영은 엘리베이터 바닥에 버려진 팸플릿을 본다. 팸플릿을 줍는다. 사실 혹은 진실. 유진의 영화 제목이다. 팸플릿을 펼친다. 연출 의도. 모든 사실이 결코 진실일 수 없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하는 사건을 만난 뒤 이상하게도 어떤 의무감을 느끼게 되었다. 시놉시스. 한 아이가 울고 있다. 울고 있는 아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일은 분명히 일어났다.


영화가 상영된다. 영화를 본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 여러 아이들이 둘러 앉아 있는 그림. 아이는 초록색 크레파스를 들어 나뭇잎을 칠한다. 어디선가 불쑥 손이 끼어들어 아이의 손에 들린 크레파스를 빼앗는다. 그러고는 새 스케치북을 내민다. 재영은 아이가 새로 그리고 있는 그림을 알고 있다. 검은 나무와 붉은 옷의 여자가 있는 그림.
장면이 바뀌어 한 여자가 거울 앞에 서 있다. 이제 막 잠에서 깬 듯 부스스한 머리와 멍한 얼굴로 칫솔에 치약을 묻혀 입안에 넣는다. 그날 아침이다. 반쯤 졸며 양치를 하다가 잇몸을 잘못 건드려 피가 났었다. 계속 뱉어내도 피가 멈추지 않았다. 어딘가에 약이 있었던 것 같았다. 입안에 고인 피를 물고서 약을 찾았다. 어느 서랍 구석에선가 약을 찾았다. 막상 바르려고 했더니 피는 멈췄고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놓친 사이에 타야 할 버스가 지나갔다. 다음 버스는 한참 만에 도착했고 만원이었다. 누군가의 팔꿈치에 등을 찍혔고 누군가의 발을 밟았다. 십 분을 넘지 않은 지각이었다. 그에 비해 가혹하다 싶은 질타를 받았다. 김 선생,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이 지각이라니 말이 됩니까. 원장은 했던 말을 자꾸만 되풀이했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머리가 아팠다. 아이들과 아침 체조를 하면서도 두통이 사라지지 않았고 속까지 울렁거렸다. 결국 점심을 걸렀다.
면접을 볼 때 한 반에 열 명을 넘지 않을 거라던 아이들은 어느새 스무 명 가까이 바글거렸다. 아침 아홉 시부터 오후 네 시까지인 근무 시간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침 여덟 시에 회의를 했고 마중을 나올 보호자가 없다며 오후 여섯 시까지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주말에는 현장학습 답사를 다녔고 밤새워 교구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약속했던 금액과는 다른 월급이 들어왔다. 못 들으셨어요? 한 학기 동안은 수습기간입니다. 선생님.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사명감으로 일을 하셔야죠. 재영은 피곤했다. 말하자면 지속적이고 극심한 스트레스 상태였다.
봄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유치원 근처 놀이터에 나갔다. 둘씩 짝을 지워 줄을 세웠다. 싸우지 말고 조심해서 놀아요. 아이들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네, 하고 소리 높여 대답했다. 재영은 벤치에 앉아 이따금 아이들이 모두 있는지 머릿수를 헤아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같았다. 재영은 잠깐 졸았다.
선생님, 선생님. 한 아이가 재영을 불렀고 재영은 미끄럼틀로 다가갔다. 다른 아이들을 따라 제일 높은 미끄럼틀까지 올라갔다가 차마 내려오지 못하고 동동거리는 아이를 재영은 품에 안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신에게 의지하는 아이의 무게가 따뜻했다. 재영은 아이들을 불러 모아 술래잡기를 했다. 아이들 틈에서 모래를 밟으며 한참을 뛰었다.
교실로 돌아와 아이들의 손과 발을 씻겼다. 함께 책을 읽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아이들을 보내고 회식이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재영에게는 아무런 사건도 없었다. 그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스크린 속 여자는 교실로 돌아가지 않는다. 거리로 나간다. 여자는 아이들의 손을 거칠게 잡아끈다. 넘어진 아이를 돌아보지 않는다. 우는 아이를 달래지 않는다. 한 아이가 두려움이 가득 담긴 얼굴로 여자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여자의 옷자락을 잡는다. 여자는 아이를 힘껏 뿌리친다.
관객 중 누군가가 아, 하고 탄식했다. 영화는 멈추지 않고 아이들의 눈 속으로 들어갔다. 재영은 아이들의 눈으로 여자를 본다. 여자의 마음을 재영은 알 수가 없다. 재영은 모르는 일이다. 재영이 아니다. 아니야. 하지만 모르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재영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잡아 보았다. 이 정도, 였을까.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점점 더 세게 힘을 주었다. 이렇게, 힘을 주어서, 세게, 아이를 잡았던 적이 정말 한 번도 없었을까.
검은 나무 아래 붉은 옷을 입은 여자의 얼굴에 가위표를 그리는 아이의 뒷모습을 끝으로 영화가 끝났다. 유진의 이름을 시작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관객들은 멈추지 않고 박수를 쳤다. 재영도 박수를 쳤다.


유진과 영화를 보았다. 문을 여는 남자. 영화가 끝나고 극장 근처의 호프집에 갔다. 영화를 만들고 싶어. 사실 어릴 때부터 꿈이었거든. 유진은 수줍게 고백했다. 어떤 영화? 내뱉고 나서야 조금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유진은 성실하게 대꾸해 주었다.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영화. 오래 기억되는 영화. 이렇게 말하면 조금 거창할까? 유진은 웃었다. 재영도 웃었다.
유진아,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나 사실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오늘도 네가 보러 가자고 해서 왔지만 사실 잘 모르겠어. 그래도 나중에 네가 영화를 만들면 극장에 가서 볼게. 꼭 보러 갈게. 재영과 유진은 맥주 한 잔씩을 마시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거리를 걸었다.
어두운 방에서 메신저 대화창으로 그때의 일을 이야기했다. 그때 우리 참 어렸지. 사실 나 너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많이 부끄러웠어. 당장 숨고 싶을 정도로. 사실 지금 편집하고 있거든. 이틀째 밤을 샜더니 너무 피곤한데도 재미있고 신나. 꿈을 이룬다는 건 참 벅찬 일인 것 같아. 유진이 앞에 앉아 있었다면 얼마나 빛나는 눈을 하고 있을까.
꿈. 재영에게도 꿈이 있었다. 그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점점 알 수 없어졌다. 대체로 피로했다. 하루가 너무 길고 지루하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알아채면 며칠씩 훌쩍 시간이 흘러 있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한참을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놓고는 문을 나서면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몸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피로해서 아침이 영영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밤이 있었고 잠드는 것이 아까워 불을 끄지 못하는 밤도 있었다. 많은 날들이 있었다.
재영이 기억하는 날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날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날들. 재영이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날들. 그런 날들이 계속될 거라고 생각했다. 막연하게. 당연하게.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제 감독님을 모시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질문이 있으시거나 감독님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분은 언제든 손을 들어주시면 마이크를 드리겠습니다. 안내 멘트가 끝나고 유진이 들어온다. 유진을 본다.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유진을 본다.
누군가 손을 든다. 마이크를 받는다. 감독님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저는 비슷한 일을 겪었던, 어떻게 보면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잊히지 않는 기억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이라는 것도 있고요. 감독님의 영화가 저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어요. 박수가 나온다. 재영도 박수를 친다.
혹시 감독님의 경험이거나 실화인가요? 비슷한 이야기를 신문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요. 유진이 대답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작품입니다. 다큐멘터리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제가 생각하는 진실에 대해 담으려고 했습니다. 진행자가 말한다. 사실과 진실이 꼭 같을 수만은 없다는 말을 많이들 하는데요. 감독님께서 생각하시는 진실은 무엇일까요.
피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진이 말한다. 유진아. 난 정말 모르겠어.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그때 재영의 떨리는 손을 잡아 주었던 유진의 눈빛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재영아. 네가 알고 네가 믿는 것이 너야. 유진은 그렇게 말했었다. 재영의 손 위에 포개진 유진의 손은 따뜻했다. 곧 재영의 주스가 나왔다. 유진은 언제든 마음이 힘들 때 연락하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금방 잊을 거라고도 말했다. 난 네 말을 믿어. 그게 사실이고 진실이고 전부야. 그렇게 말하는 유진을 믿고 싶었다. 재영은 확신할 수 없는 스스로보다는 눈앞에 있는 유진을 믿고 싶었다. 주스는 달고 시원했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른손에 꽃을 들고 있다. 유진에게 줄 꽃이다. 감독님께 꽃을 드리실 건가요? 대답하지 않는다. 왼손을 내민다. 감독님께 질문하실 건가요? 유진과 눈이 마주친다. 마이크를 잡는다. 잡았다. 말하자. 말한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작가소개 / 조우리(소설가)

1987년생. 서울 출생.



《문장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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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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