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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속의 뱀

  • 작성일 2015-01-12
  • 조회수 2,760



풀 속의 뱀




이영훈



삽화-풀속의-뱀







갓 태어난 토끼의 털은 친절하다. 이 풀은 토끼의 털만큼 친절하고 부드러워.
말로 설명해 봤자 알 수 없겠지만.
하지만 한 번이라도 갓 태어난 토끼를 만져 본 사람이라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거야. 당장 만져 달라는 듯, 연약하게 유혹하는 털 뭉치 말이야, 그걸 만지려고 마음먹으면 어쩐지 조심스러워 손을 오므리게 되잖아. 너무 예쁜 것들은 만지는 것이 미안하지. 하지만 그럴수록 더 만지고 싶고. 이 풀이 그렇다는 거야. 토끼의 털처럼 친절하다. 토끼를 만질 때처럼 친절한 마음이 들게 돼. 아마도 토끼보다 먼저 이 풀을 만져 본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할 거야. 이 풀은 친절하군, 작은 동물을 만지는 것처럼.
오늘은 약을 먹지 않았어. 그럭저럭 말이 떠오르는 것은 그래서야. 그래서 그럭저럭.
풀 위에 서 있다. 바람이 불고, 제멋대로 머리칼이 헝클어진다. 날은 아직 추워. 숨을 쉴 때마다 젖은 콧속으로 자그마한 모래들이 들어차는 것 같다. 재채기가 나올 것 같지만 코를 문질러 참는다. 또 바람이 불고, 소름이 돋는다. 춥지만 병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눈을 돌려 언덕 아래를 바라본다. 직사각형의 병원 건물이 보인다. 건물은 네 층으로 되어 있고 한 층마다 스물두 개의 창문이 나 있다. 1층의 창문들은 군데군데 열려 있다. 대부분 의사와 간호사들이 일하는 진료실이나 치료실이다. 2층부터 4층까지의 창문은 모두 닫혀 있고 4층의 창문에는 쇠창살이 쳐져 있다. 겉에서 보기엔 살풍경한 모습이지만, 4층의 내부는 무척 화사하다. 처음 병원에 왔을 때 혹시 옥상에 올라갈 수 있을까 싶어 4층에 올라갔던 적이 있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찾기도 전에 4층의 벽에 그려진 벽화가 눈을 끌었다. 샛, 노오란, 해바라기가 벽에 가득, 피어 있었어. 해바라기는 얼마나 햇빛을 먹었는지 사람 머리통보다 크더라. 크더라? 아니, 크게 그려져 있더라. 환자복에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 하나가 나를 보더니 싱긋 웃으며 인사를 해서 머뭇거리며 고개를 마주 숙이긴 했지만, 갑자기 만난 사람, 그것도 말없이 헤실헤실 웃기만 하는 여자가 무서워서 그대로 병실에 들어가 버렸어. 원래는 병실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난리를 칠 생각이었는데 아쉽게 됐지 뭐야.
내가 머무는 병실은 2층에 있다. 맨 왼쪽에서 두 번째. 창문은 특수한 장치가 되어 있어 리모컨이 없이는 열 수 없다. 면회를 온 사람이 있을 때 부탁을 하면 간호사가 와서 리모컨으로 창문을 열어 주곤 하는데, 그럴 바에야 대체 왜 창문을 만들어 놓은 거야. 햇빛을 받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말을 하지만, 자꾸 햇빛을 받았다간 4층의 해바라기처럼 점점 부풀어 오르는 거 아냐? 해바라기는 꽃이니까 크면 클수록 좋겠지만, 사람의 머리는 커지는 데 한계가 있어서 어느 순간엔 펑 터져버릴지 모르지.
병원을 보다, 발끝을 본다. 하얀 실내화 끝에 흙이 조금 묻어 있다. 원래는 병원 안에서만 신을 수 있는 건데 바깥에서 신는 신발을 꺼내려면 간호사에게 부탁을 해야 해서 그냥 신고 나왔어. 양말은 신지 않았다. 병원 주변만 조금 돌다가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와 버렸다. 잠깐 망설이다 허리를 숙여 신발을 벗는다. 한쪽 다리로 풀 위에 서 있다가, 발가락부터 천천히, 풀을 밟아 본다.
아프지 않을 거야. 꾸욱, 발바닥으로 풀을 누른다. 아주 살짝 간지럽다가, 이내 차갑다. 그리고 따뜻해진다. 괜찮은걸? 남은 한쪽 신발도 벗고, 풀에 맨발로 선다. 풀을 밟고 있는 발을 한참 동안 보다가, 코를 훌쩍거리며 고개를 쳐든다. 하늘은 맑고, 구름이 움직이고, 바람이 분다. 휘잉 휭, 머리가 날리고 결국 재채기가 터진다. 핸드폰을 놓고 온 것이 떠오른다. 엄마에게서 전화가 올까? 혹은 아빠에게서. 전화를 받지 않으면 곤란해. 엄마가 걱정할 거야. 운이 좋지 않아 엄마의 걱정이 해바라기처럼 부풀어 오르면 내일 점심쯤 아빠가 찾아올지도 모르지. 아빠가 오는 것은 좋은데, 억지로 찾아오게 하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엄마의 걱정이 더, 점점 더, 아주 크게 더 부풀었으면 좋겠다. 그럼 엄마의 머리가 펑 터질지도 모르고, 그럼 엄마도 여기에 와 있어야 할지 모르잖아. 그럼 아빠는 집에 혼자 남을 수 없으니 아빠도 결국 여기로 올 거고, 그럼 집에서처럼 같이 지낼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전과 같은 일이 벌어질 거고, 그럼 나는 이제 어디로 가게 되는 거지?
멍하니 하늘을 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든다. 약을 먹지 않았어. 말은 떠오르는데, 여기 계속 있는 것은 좋지 않아. 집에 돌아가야지. 그러려면 우선 병원으로 가야겠지.
벗어 놓은 신발을 왼손의 손가락에 걸고 언덕 아래쪽으로 천천히 걸었어. 발밑에는 풀이 가득하다. 풀 주변엔 야트막한 돌로 길이 나 있지만 글쎄, 사람들은 돌로 된 부분을 더욱 길로 여기는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하기에 돌보다는 풀이 더 길 같아. 돌로 된 길을 걷는 건 어쩐지 내용을 누설 당한 이야기만 같다. 굉장한 반전이 있는 책이나 영화를 보고 있는데 어쩌다 그 끝을 알게 되면, 되게 시시하잖아. 돌로 된 길은 그런 느낌이다. 맨발로 풀 위를 걷다 돌로 된 길을 발로 툭 건드리며 나는 말했어.
“시시해.”
“시시하다고 말해도 될까?”
풀 사이에서 뱀이 고개를 들고 말했어. 길게 갈라진 혀를 쉬익쉬익 날름거리며 뱀은 고개를 흔들다 똑바로 나를 바라본다.
“돌로 된 길을 시시하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아.”
옳지 않아, 라는 말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옳으면 옳은 거고, 그르면 그른 건데, 옳지 않다는 건, 그르진 않더라도 그것이 옳지는 않은 어떤 상태라는 뜻? 의미는 알겠는데 그런 식으로 말해도 좋을지. 옳거나 그른 그 사이의 어떤 상태라는 건 결국 이도저도 아닌 말 같고. 다른 무엇보다, 뱀은 참 잘도 저렇게 어려운 발음을 해내는구나. 둘로 갈라지기까지 한 가늘고 빨간 혀로, 올, 치, 안, 아.
휘익, 몸을 흔들며 뱀은 돌로 된 길을 넘어 내 곁으로 왔어. 몸을 세우자 뱀의 머리는 종아리 정도에 올라오더라. 뱀을 자주 본 것이 아니니 어느 정도 나이의 뱀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저 정도 길이라면 자라는 도중은 아닐 거 같아. 굵기는 내 팔목만 했는데 아빠가 매일 말하다시피 나는 너무 깡말라서 말이야. 옆에 두고 보니 뱀은 무척 여리고 약해 보였어.
“어쨌거나” 뱀이 말했어. “이 길은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놓인 돌이란 말이야. 그런 걸 두고 시시하다고 하는 건 옳지 않지.”
다시, 올, 치, 안, 지. 그러니까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고, 대체 너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니. 병원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날아가고 나는 물었어.
“누구니?”
“보시다시피.” 슬쩍 몸을 틀어 고개를 모로 돌려 나를 바라보며 뱀이 말했어. “뱀이지.”
그건 알겠는데, “뱀이 말을 해?” 나는 물었어.
“보다시피” 재빠르게 혀를 내밀었다가 넣으며 “하는군.” 뱀이 대답했어.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어. “내가 아는 한 말을 할 수 있는 건 사람뿐이야.”
“그건 곤란하군.” 시큰둥하게, 아니 그러니까 진짜로 시큰둥했던 건지는 모르겠어. 말했다시피 뱀을 자주 본 게 아니란 말야. 어쨌든 내가 아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는 투, 혹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뱀이 말했어. “나는 하잖아. 그럼 나는 대체 뭐지?”
도리어 뱀이 물었어. 글쎄, 진짜 뭘까. 생긴 것은 뱀이고, 하는 짓도 그런데, 아니 자주 본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뱀은 뱀처럼 생겼으니 뱀이겠지만, 말을 하는 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서.
머리가 복잡해지고, 더 생각하기가 싫었어. 멍하니 몸을 흔드는 뱀을 보다가 다시 몇 걸음 걷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손이 흔들리고, 손끝에 슬쩍 걸쳐 뒀던 신발을 놓친 거야. 한 켤레는 풀과 흙속에, 그리고 다른 한 켤레는 뱀의 몸 위에 떨어졌어. 툭, 신발이 몸 위에 놓이자 뱀은 살짝 머리를 흔들더니 이내 능숙하게 몸을 구부려 신발을 이고 내게 다가왔어. 나는 풀 위에 떨어진 신발과 뱀이 가져다준 신발을 주웠어. 맨발로 병원까지 내려갈 순 없으니까 귀찮더라도 신발을 신어야 했어. 몸을 숙여 신발 한 켤레를 발에 끼웠어. 그러자 뱀은 잔뜩 몸을 세워 나와 눈을 맞췄어.
“이를테면 말이야” 살짝 혀를 내밀었다가 “내가 너에게 말을 걸고, 네가 묻거나, 내가 답하는 정도는, 그냥 착각일 수 있지.” 집어넣으며 뱀이 말했어. “들을 수 없는 걸 듣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신발을 가져다주는 건 좀 다르잖아?”
동의를 구하듯 뱀은 입을 다물었어.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렇지.” 하고 대답했어. 만족한 듯 다시 혀를 두어 번 내밀었다 집어넣으며 뱀이 말했어.
“그러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나는 뱀이고, 말을 하며, 분명히 여기에 있다고.”
그렇게 되는 건가, 하고 나는 생각했어. 확실히 뱀과 말을 하는 정도의 사람은 흔할 거라고 생각해. 당장 병원에 가면 뱀뿐만 아니라 벽의 그림이나 아무것도 없는 허공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걸. 그렇지만 손가락에 걸었던 신발이 떨어졌고, 그것을 뱀이 몸에 이고 가져다준 것은, 단순히 나 혼자 말을 듣고 대답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 질감이랄까, 기분이랄까, 아무튼 훨씬 현실감이 있는 일처럼 여겨졌어. 한쪽 신발을 신은 후, 다른 발에도 신발을 끼우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일단은 거기부터 시작하자고.” 뱀이 말했어.
시작, 대체 뭘? 하고 생각하며 두 발에 신을 신고 난 후 몸을 일으켰어. 풀밭과 돌길 사이에 한 발씩 딛고 뱀을 돌아봤어. 정확히 말해 뱀과 눈을 맞춘 곳을. 하지만 뱀은 흔적도 없었어. 휘잉, 바람이 불고 머리칼이 날렸고 우수수 소름이 돋아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병원으로 돌아왔어.


병실에 누워 핸드폰을 들여다봤어. 아빠에게서 네 통, 그리고 엄마한테 세 통, 전화가 와 있었어. 아빠는 문자를 보내기도 했는데 묘한 조형물의 사진이 찍혀 있었어. 어느 커피숍의 바깥 정원에 설치된 백설공주의 등신대 인형이었는데 나랑 닮아서 찍었다는 거야. 하지만 그 인형은 어딘지 텅 비어 보이는 표정에 무척이나 슬픈 눈을 하고 있어서 나는 그 인형을 닮기가 싫었지. 뭔가 답장의 내용을 떠올렸지만 마땅히 할 말이 없어서 ㅇ자를 두 개 찍고 나서 자리에 누웠어. 발이 까끌거리는 느낌이 들었고, 그제야 흙을 밟고 난 후 씻지 않았다는 게 기억났지만 어차피 조금 있으면 선생님과 상담할 시간이라 그때 일어나서 닦자고 생각한 후 눈을 감았어.
잠깐 좋지 않은 꿈을 꾸었어.
그리고 간호사가 몸을 흔들어서 눈을 비비며 일어났어. 더러워진 내 발을 보며 간호사는 난감한 듯 웃더라고. 모른 척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신고 상담을 받으러 갔어.
“좋아 보이네?”
의사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어. 의례적인 말이니까 특별히 대답할 이유가 없어서 그냥 목을 숙이고 발끝을 봤어. 흙이 묻은 발톱 끝이 새까매서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어. 선생님도 더러운 내 발을 흘깃 봤고.
“언덕을 걸었니?” 선생님이 물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흠, 하고 숨을 고른 후 다시 미소 지으며 선생님이 말했어. “맨발로 걷기엔 춥잖아.”
“좋아해요, 추운 거.” 나는 거짓말을 했어. 선생님은 그러니, 하고 답한 후 볼펜의 스위치를 눌러 톡톡 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라고. 선생님이 볼펜 소리를 내는 건 뭔가 잘 안 풀릴 때야. 처음 여기에 들어와 억지로 상담을 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너무 익숙하게 봐왔던 모습이고 소리야. 요 몇 주 동안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열심히 선생님의 비위를 맞춰 줬지. 그래서 저 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었어. 그래서인지 다시 그 소리가 들리니까, 어쩐지 좀 짜증이 나기도 하고, 괜히 미안해지더라고. 뭐든 먼저 입을 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슨 얘기를 할까 생각하다가,
“뱀이 말을 하는 경우가 있어요?” 하고 물었지.
또독, 볼펜 소리가 멈췄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선생님이 다시 넉넉한 웃음을 흘렸어.
“뱀이 말을 걸어왔어?”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했어. 빨리 집에 돌아가려면 어떤 대답이 좋을까.
“그런 건 아니고요.” 나는 말을 고쳤어. “그냥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선생님은 눈썹을 찡그렸어. 짐짓 심각한 척 음, 하는 소리를 내며 뭔가를 고민하더니 선생님이 고개를 저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뱀이 말을 할 순 없을 것 같구나.” 손가락 두 개를 곧게 펴서 입에 가져다 붙이며 선생님이 말했어. “말을 할 만큼 머리가 좋은 뱀이 있다 해도, 갈라진 뱀의 혀로는 제대로 된 발음이 어렵지 않을까?”
내 말이 그거야. 그 혀로 어떻게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입을 다물고 선생님을 바라봤어. 선생님은 한참 동안 나를 마주보더니 들릴락 말락 한숨을 쉬고 나서 볼펜의 스위치를 눌렀어. 다시 소리를 내려는 건가 싶었는데 이번엔 서류에 뭔가를 적기 시작하더라고. 손을 놀리며 선생님이 말했어.
“만약 뱀이라든가, 아니면 다른 뭐라고 해도 좋고, 아무튼 말을 할 수 없는 무언가가 너에게 말을 걸어온다면 그건 진짜로 말을 거는 게 아닐 거야.” 힐끔 나를 쳐다보며 선생님이 말을 이었어. “네게 필요한 말이 들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지.”
“기분요?”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어. “기분, 느낌. 그런 것들이 아주 강해진 거야. 선생님도 그럴 때가 있거든. 스스로를 다독이듯 머릿속으로 필요한 말을 되새기곤 하는데 아주 가끔은 그 필요한 말이 너무 강렬해서 진짜로 누가 옆에서 속삭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 그러니” 선생님이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 보였어. “뱀에게서, 혹은 다른 무엇에서 무슨 말이 들렸는지 내게 들려줄 수 있겠니?”
어쩐지 흥미가 싹 가시는 말이었어. 뭐야, 저게. 결국 내가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는지 고자질해 보라는 거잖아. 기분이 나빠져서 그냥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말했다시피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던 참이라 일단은 비위를 맞춰야겠다고 생각했어.
“진짜로 들은 건 아니고요,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고요.”
“음, 물론이지. 그러니 무슨 말을 들은 기분이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니?”
뱀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어. 그렇지만 정말 별거 아닌 이야기들뿐이라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 주면 좋을지 모르겠더라고.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버리면 좋을 텐데 선생님은 뱀의 이야기가 못내 흥미로운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것 같았어.
“정말 별거 아닌데요.” 한참을 망설인 끝에 나는 입을 열었어. “옳지 않다고, 했어요.” 다른 이야기가 훨씬 길었지만 어쨌거나 제일 기억에 남는 말이 그거였으니까 아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지. 말을 들은 선생님은 옳지 않다, 옳지 않다라, 하고 중얼거린 후에 선생님이 물었어.
“무엇이 옳지 않다고 했니?”
뱀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시시하다고 말했더니 그런 말은 옳지 않다고 했지. 하지만 시시하다는 말이 옳지 않다고 한 것은 어쩐지 정말로 시시하다는 말이 옳지 않아서 그랬다기보다 그냥 뱀이 내게 말을 붙이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뱀의 태도를 보면 특별히 나를 꾸짖고 싶어 하는 것 같진 않았거든. 그저 그 자리에서 내게 말을 붙여야 하니까 그렇게 입을 뗀 게 아닐까 싶은 거지. 하지만 그런 일들을 설명하면 틀림없이 선생님은 이것저것 물고 늘어질 게 뻔하고, 그랬다가는 저녁 식사 시간을 맞추지 못하겠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는 수 없이 나는 거짓말을 해야 했어. 내 대답이 실망스러웠는지 선생님은 몸을 의자에 젖히며 그래, 하고 중얼거렸어. 선생님을 쳐다보기가 미안해서 눈을 돌리다 벽에 걸린 그림을 봤다. 전에도 본 적이 있는 그림이었어. 처음엔 그냥 굵은 선으로 그려진 동그라미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건 자신의 꼬리를 문 뱀이었어. 그림을 살피는 내게 선생님이 말했어.
“우로보로스라는 거란다.”
선생님을 돌아봤어. 손가락으로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선생님이 말을 이었어.
“이렇게,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다 보면 시작도 끝도 찾을 수가 없지 않니? 그런 일들을 나타내는 그림이지. 영원히 계속되는 일들.”
영원히 계속되는, 이란 말은 어쩐지 무섭고 쓸쓸해서 나는 그림을 더 보기가 힘들었어. 나는 눈을 돌려 허공을 봤어.
“어쩌면 이런 걸지도 모르겠구나. 여기서 본 저 그림 때문에 네가 뱀을 떠올린 거야.”
선생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어.
“오늘 다시 보기 전까진 저 그림이 뱀이란 것도 몰랐는데요?”
“무의식.” 선생님이 말했어. “네가 알지 못해도 너의 안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저절로 쌓이게 된단다.” 슬쩍 그림을 바라보며 선생님이 말을 이었어. “사실 저 그림도 그런 일들을 나타내는 것이지. 우리는 누구나 끝이 없는 뭔가를 상상하고, 그런 일들에 매료되는 거야.”
바보 같은 소리였어. 대체 누가 끝이 없는 일에 매료된다는 걸까. 그런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잖아. 나는 입을 다물었고, 선생님 역시 마찬가지였어.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한참의 침묵 끝에 선생님이 말했어. “혹시나 다음에 이유가 기억난다면 꼭 말해 줬으면 좋겠다.”
아,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어. 돌아서려는 내게 선생님이 말했어.
“그리고 앞으론 언덕에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웃고 있지만 확고한 말투였어.
“날이 점점 추워지는데 감기라도 걸리면 곤란하잖니. 간호사 선생님에게 말해 둘 테니, 앞으로 언덕에 가선 안 돼.”
말을 마친 선생님은 다시 서류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어. 짜증이 확 치밀었지만 괜히 신경질을 부렸다간 지금까지 애써 참아 온 게 다 물거품이 될 거야. 화를 누르고 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말했어.
“바람을 쐬고 싶을 때가 있는데요.”
“건물 밖의 정원을 산책하렴. 언덕 쪽보다는 바람도 부드럽고 볼 것도 많으니까.”
가만히 선생님을 째려보다 돌아섰어. 그러다 어떤 생각이 떠올랐어.
“이런 건 어떠세요?” 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나는 말했어. “다음에 언덕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그때는 반드시 선생님에게 들려드릴게요.”
선생님이 내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어. 선생님을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어. “약속할게요.”
“약속이라.” 선생님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어. “대신 신발을 꼭 신어야 한다.”
그건 약속할 수 없어서 발을 깨끗이 씻겠다고 마음먹었어.
저녁을 먹고 일찍 병실의 침대에 누웠어. 그리고 뱀에 대해 생각했어. 원래는 아무 관심 없었는데 선생님이 얘길 꺼내니까 새삼스럽게 마음이 끌렸어. 다시 언덕에 올라가면 뱀은 또 말을 걸어올까? 알 수 없는 일이지. 어쩌면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그저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뿐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다음에 언덕에 올라갔을 땐 바람만 휭휭 불겠지. 바람이 불고, 머리가 날리고, 흙을 밟으며, 아는 노래를 흥얼거리다 내려오는 거다. 그건 나쁘지 않아. 좋은 일이야.
하지만 뱀의 목소리를 한 번 더 들으면 어쩌지?


“그런 관점도 있을 수 있지.”
다시 언덕에 올랐을 때 뱀이 말했어.
“사실 일반적으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더 타당하겠지만.” 몸을 말고 있던 뱀이 자신의 꼬리를 흔들었어. 휘리릭, 하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지만 그건 어쩌면 바람소리였는지도 몰라.
“그보다 중요한 건 너의 생각이지.” 똑바로 나를 바라보며 뱀이 물었어. “네 생각엔 어때? 내가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만히 뱀의 눈을 바라봤어. 기름을 바른 작은 콩알처럼 새까맣고 번들거리는 두 개의 눈을. 가끔 뱀이 혀를 날름거릴 때마다 잠깐 눈이 감겼다가 떠지고, 그때마다 뱀은 작은 머리를 주체할 수 없는 듯 흔들었어.
“너는 말하고 있어.” 나는 말했어. “그리고 여기에 있어.” 그리고 뱀을 인정했지.
“훌륭해.” 대답을 들은 뱀이 목을 까딱거렸어. “영리하구나, 너는.”
칭찬을 듣긴 했지만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니었어. 그도 그럴 것이, 뱀이잖아. 뱀에게 들은 칭찬을 곧이곧대로 들어도 될까. 그리고,
“처음 들어 봐.” 나는 말했어.
“뭘?”
“영리하다는 말.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봤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뱀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모로 꼬았어.
“영리하다는 말을 해준 사람이 주변에 없었어?”
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한 명도. 내가 주로 들었던 건 이상하다는 말이었어.”
“이상하구나.” 뱀의 혀가 빠르게 휘릭, 떨렸어. “너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그렇겠지.” 무심히 말했어. “말을 하는 뱀에 비하면 뭐가 이상하겠어.”
뱀이 가볍게 몸을 떨었어. 뱀에게서 짧게 바람이 새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마도 그건 웃는 소리였을 거야. 그렇군. 뱀은 웃을 수 있고, 저렇게 웃는구나.
“너는 재미있어.” 뱀이 말했어. “내가 아는 가운데 제일 재밌는 사람이다.”
“그런 말도 처음 들어 봐.” 시큰둥하게 말한 후 나는 입을 다물었어.
곧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불고, 풀이 흔들렸지. 나는 신발을 벗은 채 돌로 된 길에 앉아 그 바깥의 풀을 밟고 있었어. 뱀은 긴 몸으로 돌길을 가로질러 누워 있었어. 말없이 병원과 병원 너머로 이어진 아스팔트 도로를 봤어. 몇 달 전 아빠의 차를 타고 저 도로를 타고 왔을 땐 두 번 다시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셈이었는데 이제 와서는 돌아가는 것만이 목표가 되어버렸다. 돌아가서 무얼 할지는 몰라. 하지만 계속 여기 있어선 안 된다는 건 알아. 여기 계속 있기에 나는 너무 어리고, 여긴 너무 지루해. 하지만 바깥은 어땠더라.
“병원 바깥에 가본 적이 있어?” 나는 뱀에게 물었어.
“여기서 태어난 건 아니니까.” 뱀이 대답했어. “바깥이라고는 해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 바깥은 아니고.”
“네가 태어난 곳은 어딘데?”
“여기 말고 아주 먼 곳. 멀고, 높거나 혹은 낮고, 아주 어둡고, 축축하고, 차갑지만, 그래도 내겐 살기 좋은 곳. 그러니 내게 네가 아는 바깥을 묻는 건 무의미해.” 길게 누웠던 몸을 일으키며 뱀이 말했어. “나는 네가 살던 바깥을 모르지. 다만 짐작할 뿐이야. 그곳은” 진저리를 치듯 뱀이 몸을 흔들었어. “끔찍하지.”
그렇군. 그래, 그러고 보니 바깥은 끔찍하기도 했던 것 같아.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왜 바깥에 나가고 싶어 하는 걸까.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뱀이 말했어. “그곳이 끔찍하더라도 사람들은 거기서 살아가는 수밖에. 끔찍함을 견디며, 덜 끔찍한 것을 찾아 헤매는 거야.”
뱀의 말은 진지했어. 사실 그건 아주 이상한 일이었지. 어째서 뱀은 바깥이나 바깥에서 살아가는 일에 대해 말하는 걸까. 뱀은 뱀이고, 바깥과는 상관없이 언제까지나 언덕의 풀밭에서 살아갈 텐데. 그러면서 바깥의 삶에 대해 말하는 건 무책임하잖아. 뱀의 말이 틀리진 않았지만 사실 바깥의 진짜 문제는 끔찍하다는 게 아니었다.
“끔찍한 건 괜찮은데.” 숨을 뱉듯 나는 말했어. “그건 견딜 수 있어. 하지만.”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뱀의 시선이 느껴졌어. 조심스레 뱀이 입을 열었어. “무슨 일이 있었어?”
선생님에게 몇 번이나 했던 이야기였다. 하면 할수록 시시한 게 되어버리는 지나가 버린,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 그러나 누군가 새로 듣게 되면 흥미롭고 재밌으며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이야기.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나 자신조차 하면 할수록 이상해지는 것 같은 이야기. 그저, 친구들과 싸웠고, 싸우기 전에는 몇 번의 거짓말이 있었고, 난폭하게 멋진 남자애들과 남자들과 사람들이 있고, 못 견디게 예쁜 여자애들과 여자들과 사람들이 있는. 알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그 일들에 놀라는 것을 그만두었다가 이윽고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시시한, 이야기.
“육체와 정신의 부조화.” 뱀이 중얼거렸어. “몸과 마음의 어긋남. 흔한 일이지. 발달 상황에서는 그다지 특이한 일도 아닌데, 불운했구나, 너는.”
“불운이라.” 바람이 머리칼을 헝클어뜨리고 지나갔어. 나는 목을 흔들었어. “그런 일을 불운하다고 말해도 될까.”
“물론이지. 네가 바라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는 것. 그런 것은 불운한 거고, 그런 일들이 자꾸 벌어지기 때문에 바깥은 끔찍한 거다.”
그런 게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어. “그런 게 아냐.” 뱀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병원에 온 뒤 처음으로 진지한 마음이 들었어. 마치 뱀처럼. “그건 그런 게 아니야. 바깥이 끔찍한 건 괜찮고, 나는 불운한 게 아니야. 네가 말했듯이” 뱀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는 말을 이었어. “그런 일은 늘 일어나니까, 그건 괜찮아. 그것이 내가 의도한 실수든, 바라지 않았던 사고든 그건 괜찮아. 정말 나쁜 것은, 내가 그런 일이 되는 거야.”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던 뱀이 흐음, 하고 숨을 골랐어. 쐐기를 박듯 나는 덧붙였어. “정말 나쁜 것은, 내가 끔찍해지는 거야.”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어. 공기가 숨을 쉴 때마다 풀들은 흙 위에서 서로의 몸을 비볐어. 작은 새들이 가득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어쩐지 멍한 기분이었어.
“끔찍한 곳에 살아야 하면서”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뱀이 말했어. “끔찍해지는 것은 싫은가?”
“그건 다른 문제니까.” 콧물이 흐를 것 같아 훌쩍거리며 나는 말했어. “바깥은 끔찍하잖아.” 묻듯이 말하자 뱀은 그렇지, 하고 답했어. “하지만 그건 바깥이 그런 거니까 견딜 수 있어. 그런데, 내가 그 바깥이면 어쩌지?” 말하고 나자 새삼스레 덜컥 겁이 났어. 다행스럽게도 내 기분을 아는 듯 풀들이 몸을 흔들었고, 두려움은 조금쯤 누그러들었어. “그런 일들이 아무렇지 않아지면 어쩌지.”
문득 사위가 어두워지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었어. 어쩐지 속이 메슥거렸어. 나는 마치 돌로 된 배 위에 오른 사람이었어. 바람이 불 때마다 배는 흔들렸지. 심한 멀미를 참으며 둥실둥실, 어쩔 도리 없이 끔찍한 바깥을 향해 떠가는 거야. 그곳에서 나는 어쩔 도리 없이 끔찍해지고, 점점 더 아무렇지도 않게 끔찍한 바깥이 되는 거야. 앉은 채로 다리를 모아 팔로 안았어. 머리를 무릎 사이에 묻었을 때,
“정신 차려.” 뱀이 말했어.
무릎에서 눈을 돌려 뱀을 봤어.
“너는 아직 끔찍하지 않아. 그러니” 잔뜩 세운 몸을 내 쪽으로 돌린 채 뱀이 말했어. “아직 기회가 있어.”
“기회?” 몸을 세우고 되물었어.
“뭐 그건 천천히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뱀은 날렵하게 몸을 놀려 내 무릎에 머리를 얹었어. “너는 무엇이 되고 싶지?”
“무엇?”
“무엇, 아니면 어떤 것.” 뱀의 혀가 빠르게 나왔다 들어가고, “어쨌거나 지금과 다른 것을 원한다면, 그건 어떤 상태지?” 뱀이 목을 들었어. 코에 머리가 닿을 만큼 가까이 온 뱀이 나직하게 말했어. “생각해 봐. 어차피 이곳에 평생 있을 순 없어. 넌 바깥에서 왔고, 바깥으로 돌아가야 해. 네가 바깥이 되고 싶다면, 그 일부나 전체가 되길 원한다면 아무 문제없어. 왔던 것처럼 돌아가서 견디며 살아가며 그렇게 되는 거야. 하지만 그러기 싫은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흡족한 듯 뱀이 입을 찢어 웃었어.
“너는 착해.” 목을 흔들며 뱀이 말했어. “사실 아무렇지 않거든, 끔찍한 바깥이 되고 나면 누구도 그런 일들을 후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지. 그건 안개 속을 걷는 일과 비슷하지. 어딘가 불편한 기분이 들 때쯤이면 어느 샌가 온몸이 축축해져 있는 것. 혹은 밀폐된 좁은 방에서 숨을 쉬는 동안 공기가 희박해지는 일. 죽은 듯 잠이 든 채 말없이 죽어가는 일. 태어난 순간부터 시작되어 죽는 날까지 깨닫지 못하고, 저 바깥은 영원히 그 바깥으로 남아 있게 되는 거야. 그런 일들은 괴로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데” 떨리는 목을 가만히 내 쪽으로 겨누고 뱀이 말을 이었어. “너는 그러고 싶어 하지 않을 만큼 착해. 그러니 말해 보렴. 무엇이 되고 싶으니?”
무엇, 아니면 어떤 것. 어느 쪽이든 끔찍한 것은 싫다. 몸이 젖는 것처럼, 잠이 든 채 죽는 것처럼 바깥이 되는 것은 싫어. 그럼 나는 무엇이나 어떤 것이 되고 싶을까.
새삼스레 정신이 든 것처럼 풀들이 서로의 몸을 비빈다. 파도소리가 들리고, 머리가 헝클어졌다. 손가락으로 엉킨 머리카락을 고르며 발끝을 봤다. 발바닥이 간질거려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 발을 들어 살폈는데 정작 눈에 들어온 것은 내가 밟고 있던 어린 풀들이었어. 내게 밟힌 가느다란 풀들은 시체처럼 몸을 눕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어. 아마도 나는 풀이 되고 싶었겠지만, 그건 안 될 일이다. 멀리 물과 뭍에서 작은 동물들이 죽는 소리가 들렸다. 그보다 더 큰 생물들은 철과 돌 사이에서 죽고. 온 세상에서 죽는 소리가 들리는데 내가 풀이 되고자 하는 것은 얼마나 비열한가.
대답을 기다리는 뱀에게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재촉하듯 뱀은 몸을 흔들었고 나는 그래도 가만히 있었다.
“의외구나. 나는 네가 아주 간단히 대답할 줄 알았다.” 뱀이 말했어.
“간단한 답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너는 아주 쉽게 답할 거라고. 아마도 풀이나 돌이 될 거라고 말이지.”
뱀이 움직였다. 능숙하게 몸을 숙여 내 다리 아래로 들어오더니 무릎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치릿, 치리릿. 뱀의 빨간 혀가 나왔다 들어가고, 뱀이 말했어.
“마음이 바뀐 이유가 있니?”
안간힘을 다해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답할 수가 없어. 오늘 약을 먹었던가? 그런 일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생각했는데도 도무지 입을 뗄 수가 없어. 하지만 그래도 이런 대답은 할 수 있을지도.
“무엇인가 되려고 하는 것은” 잔뜩 힘 빠진 목소리로 나는 말했어. “그건 끔찍한 일이야.”
동의하듯 뱀은 흐음, 하고 숨을 골랐다. “그렇군.” 뱀이 말했어. “그건 미처 생각 못 했군.”
자신의 긴 몸을 내 무릎에 대고 뱀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 때문에 고민하는 것 같아서 조금은 미안해지려던 참에, 뱀이 고개를 들었어.
“그렇다면 이런 건 어떨까.” 나를 돌아보며 뱀이 말했어. “뭔가 되는 것을 택할 수 없다면 무엇도 되지 않는 거야.”
“무엇도 되지 않아?” 갸우뚱, 목을 틀었다. “무엇도 되지 않을 수가 있어?”
“관념.” 짧게, 힘을 주어 뱀이 말했어. “원칙적으론 불가능하지만, 그것은 현실의 문제일 뿐이지. 관념적으로는 무엇도 아닌 상태가 몇 가지 있어. 상자 속의 고양이라든가, 과녁을 날아가는 도중의 화살 같은 것. 물질과 양태로 수렴되지 않는 것들. 그것들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만, 그 이름은 답은 아니지.” 장난을 치듯 내 무릎을 자신의 머리로 툭 치며 뱀이 말했어. “깊이 고민해 보면, 틀림없이 있을 거야. 무언가 되면서도 끔찍하지 않은 것. 혹은 무엇이 아니라서 끔찍할 수 없는 것. 아무것도 아니므로, 너와 너의 바깥을 포함해 무엇도 해치지 않는 것.”
뱀에게서 눈을 돌려 물끄러미 풀을 본다. 우선은 흙이 있고, 그 위에 풀이 자라고. 그리고 풀이 자라지 않은 곳이 있고, 그 옆엔 돌로 길이 나 있었다. 나와 나의 바깥처럼 풀이 있고 그 바깥이 있었다. 풀은 풀이고, 흙 역시 마찬가지고, 확실히 돌이나 돌로 된 길이 아닌 것들. 그렇지만 그래도 그 사이에 무언가가 있으니, 굳이 말하자면 그 사이의 무언가가 내가 되려는 것인가? 아니, 내가 되려는 것은 무엇도 아닌 것이므로 나는 그 무엇도 아닌 것을 택해야 할 텐데. 그런데, 뱀은.
“왜?” 하고 나는 물었어. 뱀이 나를 본다. “이렇게까지 내게 답을 구하는 이유가 뭐야?”
“그야” 잠시 말을 고르던 뱀이 입을 열었어. “뱀이니까.” 씨익, 하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뱀은 잔뜩 입을 찢어 웃었어. “음험하고 끈질기거든.” 그리고 뱀은 서둘러 말을 이었어. “물론 다른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
“어떻게?”
“할 수 있으니까.” 뽐내듯 몸을 세우고 뱀이 말했어. “네가 무엇이 되겠다고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해줄 수 있지. 너는 착하고, 영리하고 재밌어. 그러니 네가 무엇이 되겠다고 하거나, 혹은 무엇도 되어선 안 된다고 하면 나는 그렇게 해주고 싶다. 그리고” 다시 웃음. “말했다시피 뱀이잖아. 유혹은 일종의 본능 같은 것이라서.”
믿음이 가는 얘기가 아니다. 뱀의 말은 어쩐지 꼬리를 물고 빙빙 도는 것만 같아서, 듣고 있으면 마음이 놓이다가도 갑자기 우울해지거나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울해하거나 겁을 낼 수도 없는 것이, 뱀이잖아. 말을 하는 뱀의 말에 우울해하거나 겁을 먹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울함을 떨치고, 덜컥 집어 먹은 겁을 토하기 위해 나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어.
“무얼 할 수 있지?”
“순환.” 뱀이 자기 머리 쪽으로 꼬리를 들어 올렸어. 뱀의 꼬리에는 묘한 돌기가 달려 있었고 그걸 흔들 때마다 바람이 통하는 소리가 났다. 저런 뱀을 뭐라 부르더라? 꼬리에서 소리가 나는 뱀. 아주 치명적인 독을 지닌 무서운 뱀. 휘익, 쉬잇. 뱀이 장난스럽게 자신의 꼬리를 무는 시늉을 해보였어. 입을 벌린 채 뱀이 말했어. “영원히 이어지는 무한의 연쇄. 물고, 먹고, 먹어 치우고, 다시 태어나는 사슬들.” 꼬리를 거두고 뱀은 목을 치켜들었어. 똑바로 내 얼굴에 자신의 머리를 들이대며 뱀이 말했어. “내가 너의 연쇄가 되어 줄게. 연쇄와 순환. 너는 끔찍하지 않게 무엇도 아닌 채로 바깥이 되지 않는 거다.”
그것은 아주 낮고 달콤한 목소리였어.
“어떻게?” 물으면 안 된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뱀의 목소리가 너무 근사해서 나는 질문을 뱉었다. 신이 난 듯 뱀이 몸을 떨었고, 바람소리가 났다. 휘이잇.
“간단해. 내게 너의 발목을 허락해 줘.” 곁눈질로 나의 발을 흘깃 쳐다본 후 뱀이 말했어.
“살짝, 아프지 않게, 아프더라도 아주 잠깐, 눈 깜박할 사이에 뾰족하게 무엇인가 왔다 지나가는 정도의 느낌이 스치고 난 후, 다섯이나 열을 세기 전에 너는 네가 택한 무언가가 되어 있을 거야. 그 무언가는, 그 무엇이 아니면서도, 전혀 끔찍하지 않고, 너는 더 이상 나쁘거나 앞으로 나빠질 필요가 없을 거다.”
“어떻게?” 이번엔 아무런 자각 없이 나는 물었다. 그것은 달콤한 목소리처럼 달디 단 이야기였지. 무엇이 아니면서도, 끔찍하지 않고, 나쁠 필요도 없는.
“할 수 있으니까.” 더없이 진지하게 목소리를 낮추고 뱀이 말했어. “물론 이건 믿음의 영역이야. 분명히 말해, 나는 할 수 있어.” 숨을 고르고 재차 힘을 주어 뱀이 말했어. “할 수 있어. 그러니 믿어 주었으면 좋겠군.”
믿다, 란 말은 몹시 헷갈린다. 그것은 아주 조금만 정신 차리지 않으면 몇 개의 선이 빗나가 밉다, 가 되어버릴 것만 같다. 누구를 미워하는 일은 지친다. 그런 것은 끔찍할 만큼 나빠. 나는 누구도 밉기 싫으니, 어쩔 수 없이 최선을 다해 빗나가지 않게 말하는 수밖에. 믿다, 믿는다, 믿어야 한다. 그런데, 누굴? 말을 하는 뱀을? 유혹을 본능이라 말하는 처음 보는 것을? 쉽게 대답할 수 없는데,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바로 우울해졌고, 억지로 대답하려 하자 겁이 난다.
“당장 대답할 필요도 없어.” 겁먹은 내 마음을 눈치 챈 것처럼 뱀이 킥킥 웃으며 말했어.
“나는 꽤 나이가 들었고, 기다리는 일엔 익숙하지.” 재빠르게 내 다리를 빠져나와 몸을 세우며 뱀이 말했어. “천천히, 다음에 만날 때까지 네가 되고 싶은, 무엇도 아닌 것을 결정하렴. 그럼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너를 만들어주지.”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어쩐지 마음이 놓였어. 나는 몸을 일으켰어. 뱀은 일어선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취릿, 재빨리 혀를 다신 후 말했어.
“훌륭하군.”
“뭐가?”
“오늘까지 우린 두 번 만났지. 그리고 다음에 만나면 세 번.” 장난을 치듯 뱀이 머리를 흔들었어. “셋은 묘한 숫자지. 하나, 만나고. 둘, 유혹하고. 셋, 결정해야 해. 그것은 아주 운명적인 일이지.” 천천히 풀밭 쪽으로 몸을 움직이며 뱀이 말했어. “다음에 만나면 대답을 들려다오.”
뱀이 풀 속으로 사라졌어. 언덕 아래 병원에 하나 둘 불이 켜지고, 나는 천천히 병원 쪽으로 걸었어. 한참 동안 풀을 밟고 있던 발은 따갑기도, 간지럽기도 했는데 딛는 걸음마다 뭔가 푹신한 것을 밟는 것 같았어. 간호사 몰래 방으로 돌아와 발을 씻으며 뱀의 말을 생각했어. 무엇도 되지 않으며 바깥이 아닌 것. 하지만 무엇이 되면 그것은 바깥이므로 내가 되어야 할 것은.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 줄곧 뭐가 될 수 있을지 생각했지만 어떤 답도 떠오르지 않았어.
설핏 잠이 들었을 때, 나는 풀밭에 서 있었다. 토끼 같은 풀들이 가득 자라 파도소리를 내는 곳. 나는 맨발로 풀 사이에 발을 딛고 세상을 바라본다. 불과 구름이 가득한 저 멀리에 내가 아는 사람들이 모두 살아가고 죽는다. 일단은 겁이 나지만 동시에 힘이 빠졌어. 취릿, 뱀이 혀를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맞춰 나는 침대에서 눈을 떴어. 사방이 온통 어두웠고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은 이마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아주 잠깐 나는 풀밭에 서 있는 것이 꿈인지, 침대에 누운 것이 꿈인지 분간할 수 없었어. 일어나 창문 앞에 섰다. 쇠창살이 쳐진 창문 밖으로 언덕이 보였어. 어두컴컴한 언덕에 가득 자라 있을 풀을 생각하자, 비로소 나는 내가 되어야 할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뱀에게 그렇게 대답하겠다고 마음먹으며 나는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어. 여러 가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정확히 무슨 소리인지 구분하긴 힘들었어. 어쨌거나 잠을 깨자마자 언덕을 오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자 어둠도, 밖도, 뱀도,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어. 나는 두렵지 않았고, 끔찍하지 않았어. 그것은 아주 행복한 기분이었고 그 때문에 아주 달게 잘 수 있었어.


아빠는 이른 시간에 찾아왔어. 정확히는 밥을 먹고 막 병원을 나서려던 참이었어. 병원의 현관 앞에서 아빠는 두 팔을 활짝 벌려 나를 안았어.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나는 아빠를 봤어.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아빠는 웃고 있었어. 병원 생활을 이것저것 물으며 아빠는 내 어깨를 안고 의사 선생님의 진료실로 갔어.
“나쁘지 않죠.” 또독, 볼펜을 튕기며 선생님이 말했어. “준비가 되셨다면 퇴원하셔도 좋습니다.” 슬쩍 내 얼굴을 살핀 후 선생님은 조용히 미소 지었어. “상당히 좋아졌으니까요.”
나쁘지 않은 것에서, 좋아진 것까지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어. 그동안에는 그렇게 밖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막상 이렇게 빠르게 일이 진행되니까 딱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겠더라고. 아니, 그보다 정말 나가도 되는 건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말이야 나는 뱀과 대화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뱀의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잖아. 아빠는 나를 꼭 붙든 채 옆에 서 있고, 선생님은 이미 퇴원을 위한 서류를 착착 적어 내리고 있는데 말야.
서류 뭉치 몇 가지를 아빠에게 건네며 선생님이 퇴원 후의 유의사항을 말하기 시작했어. 약을 먹는 법과 조심해야 할 행동들. 퇴원하더라도 여전히 집 근처의 병원에 다녀야 하고, 그밖에 필요한 사항은 따로 적어 건네겠다고 했어.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며 병원비를 처리하고 오겠다며 진료실을 나섰어.
“잘 됐구나.” 둘만 남게 되자 선생님이 말했어. “집에 갈 수 있겠어.”
집. 어리둥절한 기분이 가시고 푸근한 마음이 들었어. 그렇군, 정말로 나가는 거구나. 그런데 정말 나가도 괜찮아?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저 입을 다물고 배시시 웃었어. 겨우 나갈 수 있게 됐는데 일을 다 망쳐버리면 안 되잖아. 빤히 나를 바라보던 선생님이 한숨을 쉬며 뚜두둑, 볼펜을 튕겼어.
“뱀의 일은” 다 잊고 있던 일을 선생님이 꺼냈어. “잠깐의 착각이라고 생각하렴.” 또독, 볼펜 소리를 내며 선생님이 말을 이었어. “여길 나가게 되면 전부 나아질 거다.”
대답 대신 나는 고개를 돌렸어. 꼬리를 문 뱀의 그림을 한참 동안 바라봤어. 잠시 뒤에 아빠가 돌아왔어. 아빠는 나를 일으켜 세운 후 선생님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인 다음 진료실에 들어왔을 때처럼 어깨를 두르고 병원을 빠져나왔어. 아빠와 나는 병원 앞에 세워 둔 차에 올랐어. 조수석의 안전벨트를 둘렀을 때 영수증을 살피던 아빠가 나지막이 말했어.
“날도둑놈들.” 차의 시동을 걸며 아빠는 마저 중얼거렸어. “대체 하루에 얼마를 받아 처먹는 건지 모르겠네.”
아빠를 봤어.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아빠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어. 환하게, 혹은 화나게.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을지. 장난스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은 후 아빠가 차를 출발시켰어. 차창 앞의 풍경이 느리게 돌아갔어. 병원의 건물이 쓰윽 스치고, 언덕이 보였다가, 철문이 나타났어. 운전대를 두 손으로 잡으며 아빠가 말했어. “저녁은 엄마와 함께 외식을 할 거야. 먹고 싶은 것 있니?” 건성으로 음식의 이름을 몇 개 말한 뒤 나는 차창에 머리를 기댔어. 창에 닿은 오른쪽 이마에 냉기가 올라왔어.
“병원에 놓고 온 물건은 택배로 부쳐 달라고 했다.”
병원에선 무얼 택배로 부칠까? 어차피 들고 온 물건은 많지 않은데. 혹시 입고 있던 속옷이나 환자복 같은 것을 부쳐 주는 걸까? 그런 것은 아무 쓸모도 없다.
슬쩍 뒤를 돌아봤어. 언덕이 보였어. 꼬리를 문 뱀을 생각했고, 나는 대답을 떠올렸어. 무엇이 되어야 할지 겨우 알았는데 나는 속절없이 그것에서 멀어지고 있었어. 차는 튼튼한 도로로 접어들고 있었어. 돌과 선으로 확실히 구분된 바깥을 향해 나는 달려갔어. 뱀은 날 기다리고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몹시 슬픈 기분이 들었어.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어. 한 번 눈물이 나자 멈출 수가 없어서 나는 꺽꺽거리며 울기 시작했어. 아빠는 나를 돌아보더니 쓴웃음을 지었어. “그동안 정이 든 모양이구나.” 대꾸할 기분이 들지 않아서 나는 그냥 울기만 했어. 나의 대답이 내 어딘가에 적혀 있다면, 지금 흘리는 눈물에 온몸이 젖어 대답이 모두 지워지기만을 바라며 나는 그저 울고 또 울었어. 창에 대고 있던 이마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나는 추운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어.
한참을 우는 동안 나는 생각했어. 눈물이 그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모르는 새에 뱀에게 이미 발목을 허락해서가 아닐까. 그래서 뱀이 남기고 간 얕은 독이 몸 속 어딘가를 슬쩍 건드려 가만히 있어도 계속 눈물이 나는 거라고. 응, 그래, 그런 거라고, 나는 생각했어.




작가소개 / 이영훈(소설가)

1978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재학 중. 2008년 〈문학동네〉 신인상 소설 부문에 「거대한 기계」로 당선.



《문장웹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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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이 있는 식탁보 강태식 존슨 카운티 외곽에는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거의 모든 면에서 깨끗한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집들이 - 지붕과 창문과 현관 손잡이와 마당을 두른 나무울타리의 모양까지 똑같은 집들이 - 거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진입로에는 작고 예쁜 우체통이 서 있고 - 어느 집이나 다 - 우유 배달 업체의 상표가 찍힌 낡은 주머니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팻말이 울타리 한쪽에 걸려 있으며 마당 잔디가 빗질 자국이 남아 있는 머리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화단에 심은 꽃들도 거의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아 보였다. 차를 몰고 천천히 지나면서 보면 그랬다. 어디선가 가끔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모든 음이 기계가 치는 것처럼 정확했지만 음이 정확하다는 것말고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연주였다. 얼마 전에 하나뿐인 아들 톰을 다른 주에 있는 대학에 보낸 벤 하우저와 로지 하우저도 그 거리에 있는 많은 집들 중 한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아들의 방문 앞에 멍하니 서서 그 안에 아들이 쓰던 물건들만 - 사인볼과 다 버리고 딱 두 개 남은 레고 모듈러 시리즈와 절대로 버리지 말라고 고집을 부려서 버리지 못한 낡은 청바지와 픽업트럭을 끌고 이케아 매장에 가서 사온, 벤이 꼬박 이틀 동안 조립해서 겨우 완성한 오래된 이층 침대와 디딤판에 노란색 번개 마크가 크게 프린팅된 스케이트보드 같은 것들만 – 남아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그런 물건들과 함께 - 한때 아들이 필요로 했던 물건들과 함께 - 그 집에 남겨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벤과 로지는 아들이 자기들 품을 영영 떠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 날마다 그런 짐작이 확고한 사실로 굳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 자기들이 톰의 방문을 바라보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벤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 창 너머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벤은 희미한 빛이 감도는 그맘때의 거실을 둘러보며 오래 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 로지가 외출 준비를 완전히 마치고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립스틱만 바르면 된다거나 스카프만 고르고 금방 나가겠다는 말말고 진짜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기다리고 있었다. 벤은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리모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손을 뻗어 TV를 켰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 뒤에 다시 TV를 껐다. “뭐 해, 벤?” 로지의 목소리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안방 문 너머로 들려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눈썹을 그리거나 파운데이션을 더 꼼꼼하게 바르면서 몸을 뒤로 틀어 소리 지르는 로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떼어내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보를 잡아 펴는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숱하게 보아 온 모습들. “아

  • 관리자
  •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 관리자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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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 익명

    굉장히 재밌어요..... 이런 단편을 얼마만에 읽는지 모르겠어요.. 고맙습니다..좋은 글을 써주셔서... 언어유희로 인한 리듬감, 덜 자랐으면서 다 자란 소년/소녀, 환상성 내지는 모호한 현실 이런 점이 황정은 소설과 흡사한 느낌을 주었는데 서사 진행면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었어요 굉장히 재밌네요.......고맙습니다 이영훈 소설가님..

    • 2015-01-21 01:19:06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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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에스더

    재밌네요.여운도 많이 남고요. 무엇인가가 되려고 하는 것은 끔찍하므로 무엇도 되지 않는 것!

    • 2017-12-15 11:24:32
    홍에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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