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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공주님

  • 작성일 2009-07-28
  • 조회수 4,985


벌거벗은 공주님

 

 

 

노희준

 

 

 

 

 

“우리 집은 재벌인데 아이엠에프 때 망했어요.”

미라가 느닷없이 말했다.

“어느 재벌?”

지혜 짱이 짧게 물었다.

“거산이요.”

지혜 짱이 커피를 내려놓더니 반갑다는 듯 말했다.

“어머, 그럼 오빠가 성지호? 샌프란시스코 있을 때 파티에서 몇 번 봤는데. 잠깐, 근데 왜 성이 달라? 넌 백 씨잖아.”

두 사람은 스튜디오 한쪽에 놓인 소파에 마주앉아 스타벅스를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이 정면으로 보이는 작업대 앞에서 열심히 작두질 중이던 나는 자꾸 리듬이 엉켰다. ‘왜 성이 달라?’에서 싹둑, 싸악둑, 하다가 ‘넌 백 씨잖아’에서 싹둑, 싸악…… 누군가의 프로필 사진을 사선으로 자를 뻔했다.

“사실은…… 처음 하는 얘긴데…… 우리는 배다른…… 남매예요. 오빠는……”

까지 참다가 나는 끝내 동작을 멈췄다. 미라가 흐느끼고 있었다. 저렇게 연기를 잘하는데 왜 못 뜰까, 맘속으로 혀를 차는데 손수건을 꺼내 들고 미라 쪽으로 옮겨간 지혜 짱의 연기가 한결 더 훌륭했다.

“미안해. 난 또 그 집안에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모르고.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지혜 짱은 나를 보고 찡긋, 윙크했다. 나는 웃음으로 화답하지 못했다. 나는 이미 영혼과 육체의 분리 체험 중이었다. 갑자기 뱃속이 미식거려 얼굴은 이미 찌푸렸는데 하필 외출한 마음이 뒤늦게 웃기 시작하는 이율배반의 상황이 수 초에서 수 분간 지속된다. 원인은 미라 바이러스. 잘 죽지 않는데다 변이까지 재빨라 좀처럼 면역력이 생기지 않았다.

“죄송해요. 손수건, 제가 빨아다 드릴게요.”

완패이다 못해 참패당한 와중에도 잽싸게 전리품을 챙기는 스킬. 지혜 짱이 한사코 괜찮다고 하는데도 미라는 결국 명품 손수건을 제 가방 안에 넣고야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혜 짱은 미라가 그저 귀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혜 짱은 스튜디오 사장이자 뉴욕 음대를 졸업한 삼십대 초반의 피아니스트. 고작 열아홉 살인, 고졸 출신의 쇼핑몰 모델 미라가 지혜 짱보다 뛰어난 게 있다면 피부였다. 가증스런 거짓말을 하면서도 조금의 채도 변화도 없는, 붉게 푸르게 하얗게 환경에 따라 자유자재로 보호색을 바꾸는, 투명하다 못해 속에는 아무것도 든 게 없는 그야말로 순결한 피부. 하지만 명품 하나만 안겨 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저렴한 피부. 모두가 사랑해 마지않는 미라의 정체였다.

 

*

 

그해 여름 뙤약볕 밑에서 나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손님이 오면 차문을 열어 준 (다음) 무전기로 지시 받은 곳에 차를 정확히 세운 (다음) 키를 주차관리 박스에 맡긴 (다음) 다시 손님이 오면 차문을 열어 준 (다음)이 지긋지긋해지면 다른 (다음)을 상상했다. 차를 지시 받은 곳에 정확히 세운 (다음) 자동차 등록증을 찾아내 차번호와 주소지를 확보한 (다음) 지점토 따위로 자동차 열쇠를 복사한 (다음) 나중에 집으로 찾아가 차를 훔쳐 가지고 나오는 거다. 하지만 그 (다음)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항상 결정적인 (다음)이 없었다. 덕분에 배운 게 있다면 리듬이었다. 리드미컬하게 학교를 휴학하고, 리드미컬하게 알바에서 잘리고, 해 놓은 게 없다는 이유로 리드미컬하게 여자한테 차이고, 그래놓고도 정신 못 차리고 졸업한 (다음)이 무서워 달랑 한 학기를 남겨 놓고 또다시 휴학한 나는 구 년째 사진학과를 다니고 있는 대학교 오학년생. 자격증이라곤 면허증밖에 없어서 주차 아르바이트하는 아들에게 역시 평생을 리드미컬하게 살아오신 꼰대는 물었다.

“거기 외제차 많냐?”

꼰대의 유일한 자랑은 젊은 시절 외제차를 몰았다는 거였다. 그것도 모 기업의 제일로 젊은 이사님의 벤츠였다.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되자마자 젊은 이사님 집의 젊은 아내에게 집적댔다 이년 만에 잘리고, 오 년 동안 화물차 해서 겨우 빚 없이 사나 했더니 노름해서 다 날리고, 십 년 동안 회사 택시로 개고생하면 뭐 하나, 개인택시로 갈아타자마자 꽃뱀한테 낚여 그마저도 홀라당 까먹고 지금은 대리운전하시는 꼰대의 세계관은, 여전히 확고하고도 명쾌하시었다.

“차는 벤츠가 최고다.”

그해 여름 뙤약볕 밑에서 최고의 차를 주차하다 나는 딴생각을 했다. 범퍼를 살짝 긁었는데 견적이 백이나 나왔다. 팔 년 동안 사 모은 장비를 모두 팔았다. 남은 것은 달랑 펜탁스 스포매틱 하나. 그해 여름 나와 동갑내기인 필카 하나 달랑 메고 빈속으로 거리를 쏘다니다가 나는 나의 유일한 (다음)을 발견했다. 천 원밖에 없어서 삼각 김밥과 음료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내 눈에 ‘수제 햄버거+콜라=천 원’이라는 현수막이 운명처럼 들어왔던 것이다.

“구경 좀 해봐도 되겠어?”

한참 먹고 있는데 어리고 예쁜 여자애와 앉아 있던, 명품으로 온몸을 도배한 묘령의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이런 싸구려 카페와는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었다. 나는 천 원도 안 되는 샌드위치를 우적거리다 고개를 건성으로 까닥, 했다. 그는 꽤 능숙하게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더니 말했다.

“자네, 예술가의 눈을 가졌군.”

나는 순간적으로 사레가 들어 헛기침을 하며 되물었다.

“뭐라고요?”

엉뚱한 대답이 나왔다.

“이래서 난 이런 카페가 좋아. 수많은 프랑스 예술가들을 키워 낸 것도 바로 이런 소박한 카페들이었지.”

그는 빙긋 웃더니 덧붙였다.

“나한테는 사람 보는 눈이 있지. 시간되면 한번 찾아와 줘요.”

그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명함부터 내밀었다. 나는 얼결에 명함을 받아들고 굽실거렸다. 그때는 ‘쉬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있어 보였다. 스튜디오 쉬르. 사진작가 타쿠미.

 

 

“사진이 뭔지 알아요?”

“글쎄요.”

“빛이에요, 빛. 그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빛은?”

“글쎄요. 무지갯빛?”

“당신의 눈빛. 어떤 렌즈로도 복제 불가능한.”

“왜 이러세요, 창피하게.”

“진실을 창피해 하는 건 죄악. 어때, 언제 내 모델 한번 안 해주겠어?”

진실로 창피, 한 밤이었다. 창피한 줄 모르는 그들의 수작이 창피했고, 창피한 줄 알면서도 집에 못 가는 내가 창피했다. 그들과 나는 바에 일렬횡대로 앉아 있었다. 다현, 타쿠미, 미라, 나의 순으로. 내가 꼴찌인 서열이 쪽팔렸다. 미라가 비스듬히 등을 돌리고 앉은 건 쪽팔리지 않았다. 미라가 한 번도 나를 안 봐서 팔릴 쪽도 없었다.

다현은 인터넷 쇼핑몰을 하는 지혜 짱의 친구였다. 지혜 짱은 수익의 3할을 챙기는 타쿠미한테는 상의도 없이 다현에게 오십 퍼센트 디시를 해주었다. 미라는 그날 처음 봤다. 오전 내내 툴툴거리던 타쿠미가 태도를 싹 바꿨다. 예술적인 촬영이었다. 모델에게 포즈를 지시하는 짬짬이 작업 멘트를 섞어 넣는 스킬. 다리 살짝 교차시켜. 너는 청순함 속의 섹시야. 여신처럼 굴어, 여신처럼. 아주 스타 화보를 찍던 그가 지금은,

“다현 상은 돈이 아니라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야. 아이 엔비 유! 능력도 뛰어난데 이렇게 싱싱한 미모까지. 난 다현 상이 사장이 아니라 모델인 줄 알았잖아!”

아예 클라이언트의 발바닥을 핥고 있었는데, 다현이 우쭐, 우아한 ‘모델’ 워킹으로 화장실 쪽으로 사라지자마자 그는 또 미라에게,

“넌 남들과 눈빛이 달라. 나한텐 다 보여. 너는 크게 될 인물이야!”

웅변조로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 뻔한 말을 듣고 미라는 웃었다. 뻔한 여자처럼 웃는데도 뻔하지 않게 예뻤다. 그때 나는 타쿠미의 말에 처음으로 동의하고 싶었다. 미라의 말없는 미소 속에 특별한 것이 있다고 믿었다. 얼마 후 미소보다는 입속에 훨씬 더 특별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됐지만.

그러나 그날은 미라와 한마디도 해보지 못한 채 술자리가 끝났다. 다현 상은 나이에 걸맞지 않는 빨간색 BMW 미니를 대리운전하고 사라졌다. 하필이면 미라도 함께 태웠다. “편한 대로 하세요. 어차피 우리는 한잔 더 할 거니까.”를 주장하던 타쿠미는 그들이 가 버리자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택시부터 잡았다. 집에까지 모셔다드리겠다는 핑계로 쫓아 타 밀린 월급 얘기를 해보려는데,

“미안해.”

타쿠미가 먼저 말했다. 너도 양심은 있구나, 싶었는데,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

“네?”

“나이도 많은 놈이 여자들을 독차지해서 미안해. 괜찮아. 너한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더니만 곧 코를 골며 잠들어 버렸다. 택시에만 타면 항상 그렇듯 타쿠미는 카드만 있어서 그냥 집에 갔고, 현금만 있는 나는 택시비를 내고 남은 오천 원으로 가까운 피시방에 들어가 밤을 새웠다. 밤새 다현의 쇼핑몰에 있는 미라의 사진들을 홧김에 실컷 감상했다.

 

*

 

여자들은 착한 남자를 좋아한다. 잘나가는 친구한테 몹시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들었을 때, 오래 사귄 애인에게 슬슬 정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혹은 시험에 떨어지거나 직장에서 잘릴 위기에 처하면 그들은 잊고 있었던 보물 상자를 열어 보듯 자신의 착한 남자를 호출한다. 그녀가 당신의 과 후배건 아르바이트 동료건 같은 동호회의 회원이건 간에, 그들은 오랜 세월을 거치고 나서야 당신의 인간미를 알게 되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들은 남친에게보다 당신에게 더 솔직했을 것이다. 절친한테보다 당신에게 더 깊은 속내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 당신은 그녀의 불행 전문가가 되었다. 다만 그녀의 수많은 행복한 순간을 함께한 적이 없을 뿐이다. 만약 그녀가 헤어진 남친 대신 산부인과에 가 달라고 부탁하면 제발 거절해. 여자는 조금이라도 여지가 있는 남자에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으니까.

나는 세 번째에야 알았다. 산부인과를 나오면서 나의 다섯 번째 그녀는 최초로 나를 꼭 안아 주며 말했다.

“미안해요 오빠. 막상 연락할 데가 오빠밖에 없었어.”

막상 다시 안 봐도 괜찮을 것 같은 남자가 나밖에 없었겠지. 나는 다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어차피 이별이라면, 끝까지 착한 남자로 남고 싶었다.

 

 

타쿠미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였다. 나쁜 남자의 진짜 매력은 자신이 나쁜 남자임을 숨기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명품 아니면 안 쓴단다, 미친년.”

그는 스튜디오에 출근하자마자 이죽거렸다.

“누가요?”

나는 장비를 열심히 닦는 척하며 물었다.

“칠레산 와인은 목욕용이란다, 씨발년.”

“그러니까 누가요?”

“이년이.”

그는 대답 대신 핸드폰을 열더니 나에게 건넸다. ‘그년’은 벗고 있었다. 아주 홀딱 벗고 침대 위에 엎어져 있었다. 정말 싱싱한지는 몰라도 인생을 즐기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나는 자체적으로 유체 이탈했다.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고작 핸드폰 렌즈로도 복제 가능한 그녀의 몸을 맘껏 범했다. 몇 초 만에 불량 식품을 먹은 것처럼 살짝 배가 아팠다.

오전 내내 다현 상을 씹던 타쿠미는 점심시간에 하얀 바탕에 요란하게 글씨가 써진 가방을 하나 사 왔다. 포샵 작업하는 척 인터넷을 뒤져 보니 ‘멀리 컬러 우슐라’라는 백이었다. 조수는 두 달이나 밀린 시급도 안 주면서 만난 지 일주일 된 ‘그년’한테는 백오십만 원짜리 선물을 안겨? 보통은 여자한테 얻어 쓸 궁리만 하는 타쿠미가 이번에는 제대로 꽂혔나 보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빠 안녕? 오빠가 나 가방 사 줬다? 예쁘지.”

며칠 뒤 나타난 미라가 말했다. 언제 봤다고 대뜸 ‘오빠’라며 반말을 일삼는 행위 정도는 애교였다. 문제는 또 한 명의 오빠는 대체 누구이며, 그가 사 준 가방은 왜 또 하필 ‘우슐라’냐는 거였다. 내가 속으로 경기를 일으켜 굳어진 줄도 모르고 미라는 가방을 가볍게 들어 보이며,

“똥 아냐, 통이야. 졸라 센스 있지?”

그 귀여운 입으로 지껄였다.

“학생이 무슨 명품?”

내가 어색한 반말로 묻자 긴 생머리를 큰 동작으로 넘기며 말했다.

“나는…… 소중하니까요.”

잠시 후 소중한 사람은 또 왔다. 계단을 내려오는 요란한 힐 소리만으로도 미라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흠칫 놀라더니 자신의 백을 소파와 벽 사이의 좁은 틈에 숨겼다. 거의 동시에 다현 상은 우아한 모텔 워킹으로 등장했다. 팔에 미라의 것과 색깔까지 똑같은 우슐라를 걸치고서였다. 나는 순간 고수들만 할 수 있다는 공간 이동 마술을 본 것 같았다.

“아침부터 여기 웬일이니?”

“그냥…… 주위에 왔다가…….”

다현은 듣는 둥 마는 둥 백을 소파 위에 거의 던지듯 놓았다.

“타쿠미는?”

“글쎄요…… 야외 촬영 나가셨는지 아직…….”

“전화 좀 해보지? 그 전에, 사진은?”

말끝이 더럽게 짧았다. 사진은 이미 웹 하드에 올렸는뎁쇼? 하려다 나는 말았다. 스튜디오 한쪽의 사무실로 모시고 가 앉히고 냉커피까지 타다 바쳤다. 그러자 다현은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소리 나게 올려놓았다. 팁인 줄 알았더니만,

“나는 커피 빈 카페모카 아이스 브랜디드. 노 휘핑크림.”  

종업원에게 주문하듯 말했다.

나는 ‘이년’의 귀싸대기를 한번 후려칠까 생각한 (다음) 나도 모르게 가벼운 목례를 한 (다음) 기분 나쁘다는 티가 나지 않게 “알겠습니다.”라고 말한 (다음) 티켓 다방 종업원이 된 심정으로 사무실과 홀의 경계를 넘어선 (다음) 커튼 뒤에서 다 보았다. 미라가 다현의 우슐라를 비닐봉지 위에서 뒤집은 (다음) 비닐봉지에 거꾸로 담긴 물건을 자신의 우슐라에 쏟아 순서까지 그대로 옮긴 (다음) 소파 위에 쏟아 놓은 잡동사니를 다현의 것에 쓸어 넣은 (다음) 다현의 것은 소파 뒤에 숨기고 제 것을 소파 위에 올려놓는 것을. 삼십 초도 안 걸렸다. 삼십 초도 안 되는 사이에 내가 세 달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 ‘공간 이동’했다. 나는 다 보고도 못 본 척했다. 미라가 모든 일을 끝마치고 화장실에 간 뒤에야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직 미라의 특별함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실낱같은 희망을, 미라는 과연 저버리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왜 일을 끝내 주지 않느냐며 항의했다. 빨리 입금을 해 달라는 업계의 독촉도 만만치 않았고, 없는 사람을 찾는 이상한 전화도 몇 번 왔다. 나는 주인님이 시킨 대로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작품 활동 나가셔서 안 계십니다.”

최근 타쿠미의 작품 활동은 홈페이지 리모델링. 다현 상의 쇼핑몰을 공짜로 손봐주겠다고 큰소리치더니 며칠째 홈페이지 제작 요령을 검색하느라 진상이었다. 일도 안하고 타쿠미는 종일 모니터만 들여다봤고, 일만 하는 척 나는 주로 타쿠미의 뒤를 노렸다. 수박만 한 머리통은 이제 파마로도 못 숨기는 탈모가 진행 중이었고, 명품 셔츠로 포장된 넉넉한 등은 허리께가 점차 튜브의 형상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영락없는 곰이었다. 수많은 여자애들이 유년 시절 내내 껴안고 자는 침대 안의 포식자. 단지 품에 넣기 좋은 모양이어서 그렇다면 왜 돼지는 안 되는가. 왜 거북이는 아닌가. 테디베어와 뉴비틀을 몸서리치게 좋아하던 나의 두 번째 그녀는 결국 뉴비틀을 생일 선물로 사 준 띠 동갑의 테디베어에게 시집갔다. 그때 알았다. 곰 인형은 젊고 싱싱한 조개를 지속적으로 따먹으려는 배 나온 아저씨들의 음모임을. 모든 여자애들의 무의식 속에 자신들의 형상을 주입하기 위해 고안한 가부장제의 은밀한 세뇌 장치. 안전한 맹수. 어둠 속의 보호자. 강하지만 말 잘 듣는, 온전히 내 것인 그 무엇.

그런데 왜 타쿠미인가. 일본인이어서? 예술가라서? 설마 그걸 잘해서? 출근한 지 몇 주가 지나서야 그가 스튜디오 사장이 아님을 알았다. 한 달이 지나서야 나를 제자가 아닌 알바로 들였음을 깨달았다. 사진학과 구 년 짬밥에 그가 실수를 실험으로 포장하는 전형적인 삼마이임을 단번에 못 알아본 나도 곰이었다. 그러고 보니 타쿠미는 곰 자격이 충분했다. 곰은 속임수니까. 속임수는 아무나 부릴 수 있는 게 아닐 테니까.

 

 

“오빠가 선물을 너무 많이 사 주네. 벌써 가방만 다섯 개째라니까.”

미라가 말했다. 다현이 잡지를 넘기며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오빠가 나이가 많은가 봐. 아님 재벌가 자제든가.”

미라가 빙긋 웃었다.

“제가 젊은 거죠. 오빠는 여자 삼십만 넘어도 징그럽댔어요.”

제법 강 스파이크. 여유 있는 블로킹이 뒤따랐다.

“당연히 삼십대가 원조하면 징그럽지.”

미라가 호흡을 잃고 발끈했다.

“그럼 제가 원조란 말이에요?”

“설마. 너 아직 열아홉이니까 경찰 조심하라는 거지.”

미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모르는 건지 멍청한 건지. 다현이 만 원짜리를 꺼내자 벌떡 일어서서는,

“언니 커피 드시고 싶은 거죠? 제가 사 올게요.”

“언니가 아니라 사장님.”

“아 네 사장님. 카페모카 아이스 블랜디드 노 휘핑크림.”

사이보그처럼 되뇌더니 종종걸음으로 뛰어나갔다. 가뜩이나 뒷정리하느라 바쁜데 허드렛일을 덜어 줘서 고맙기는 했다. 살랑거리는 초미니 스내치 스커트 뒤로 언뜻 비친 분홍색 팬티도 고마웠고, 그보다는 잠시만이라도 미라가 없을 거라는 사실이 더 고마웠다. 볼 때도 반갑고, 보지 않을 때도 반가운 미라.

두 번째 쇼핑몰 촬영. 삼 주 만에 미라와 다현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곰 쟁탈전에 돌입해 있었다. 타쿠미는 즐기면서도 초조해 하는 눈치였다. 미라가 나가자마자 오늘은 지혜 짱도 왔으니 애들은 빼고 회식하자고 넌지시 제안했다. 오늘은 미라 말고도 예쁜 모델이 두 명이나 더 왔는데 왜 이러실까. 지혜 짱은 타쿠미의 잔머리를 단숨에 무질렀다.

“일한 사람끼리 가는 건데 왜 그래. 정 그럴 거면 내가 빠지고. 여자끼리 갈 테니까 촬영팀이 빠지든가.”

지당하신 말씀이셨지만 다현과 미라의 암투는 지혜 짱도 못 말렸다. 다현이 삼겹살을 안 먹는다고 해서 간 양구이집에서부터 신경전이었다. 미라는 시도 때도 없이 웃으며 타쿠미와 가벼운 스킨십을 하는데 혈안이 돼 있었고 다현은 그때마다 사업 얘기를 꺼내 분위기를 냉각시켰다. 타쿠미가 화장실에 갈 때마다 틈틈이 낚시질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라 너 원피스 예쁘다. 혹시 그것도 오빠가 사 준 거니?”

“사장님 완전 센스 있으시다. 딱 보고 아시네요. 사실은 샤넬이에요.”

“어머 정말? 어쩐지 예쁘더라.”

호들갑 떨며 바로 목 뒤로 확인 들어가는 치졸한 다현. 미라의 것은 설마 진퉁이거나, 하필 상표까지 복제된 짝퉁이거나 했다. 어쨌거나 무승부.

이 라운드는 이차로 옮기자마자 벌어졌다. 폭탄주를 만들어 미라에게 건네면서 다현이 다시 밑밥을 던졌다.

“모델도 좋지만 슬슬 진학도 생각해 봐야지. 고졸은 좀 그렇잖아?”

일차 방어에 성공한 미라는 기고만장했다.   

“어머, 저 이대 다니는데. 모르셨어요?”

“그랬어? 무슨 과?”

“의상학과요.”

“아 거기, 김지현 선생님은 잘 계시니?”

“어머, 지현 쌤 아세요?”

“그럼. 예전에 자문 구하려고 한 번 뵀지. 요즘 어떠셔?”

“잘 계시죠. 나 쌤이랑 완전 친한데.”

참붕어의 섣부른 입이 낚싯바늘을 덜컥 무는 순간,

“아 참 미안. 김지현은 숙대 교수였지? 근데 넌 김지현을 어떻게 아니?”

다현은 인정사정없이 낚싯대를 확, 낚아챘다. 개천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까불던 붕어는 속절없이 수면 위로 딸려 나와 초라한 잿빛을 뽐내며 온몸을 뒤흔들었고, 덕분에 개천물이 사방으로 튀기자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오염의 진원지로부터 고개를 틀었다. 타쿠미가 잔을 높이 들어 좌중의 관심을 돌렸다.

“자 우리 모두 아름다운 눈빛을, 예술을, 인생을 위해 건배.”

미라는 삼십 분도 채 안 돼 의자에 뻗어 버렸다. 나라도 뻗었을 것이다. 지혜 짱은 만 원짜리 몇 장을 쥐어 주며 나에게 미라의 방생을 명했다. 구겨진 샤넬에 포장된 채 늘어진 미라를 지렁이 꼬물거리는 얼굴로 다현은 훔쳐보았고, 이미 맛이 간 횟감이라는 듯 타쿠미는 외면했다.

미라를 집에 보내기는 쉽지 않았다. 거리로 나오자 그녀는 다시 활발하게 헤엄치기 시작했으므로.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신 후에야 진짜 취한 미라를 오래전부터 살고 있다는 청담동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모텔 침대에 눕히자마자 미라는 금세 곯아떨어졌다. 조용한 미라라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샤워기 밑에서 눈을 감고 흐르는 물의 감촉을 음미했다. 내 팔뚝에 안긴 채 팽팽해졌다 나긋나긋해지고, 휘어졌다 되감기던 그녀의 건강한 허리. 상반신이 흔들릴 때마다 감질나게 풍기던 어지러운 머릿내의 그녀는 그러나 내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울고 있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죽여 흐느끼는 듯했지만 욕실 문 앞까지 다 들렸다. 다행히 욕실은 객실 문 밖에 있었다. 나는 조용히 옷을 입고 모텔을 빠져나왔다. 말하는 미라보다 더 싫은 건 울고 있는 미라였다.

 

 

그 짓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딱 두 번. 입대 전날, 그리고 말년 휴가 중의 어느 날. 두 번 다 되지 않았다. 술도 별로 안 먹었는데 안 됐다. 첫 번째 그녀는 내가 지레 포기하고 그냥 잠깐 누워 있다 가겠다고 했더니 할 말이 없었는지 내 눈빛이 참 맑다고 해줬다. 두 번째 그녀는 내 성기를 열심히 빨아도 되지 않자 아 씨발 진짜 짜증나, 하고 말했다.

세 번째 그녀는 단란주점에서 만났다. 아마도 고딩인 것 같았다. 너무 예쁘게 생겨서 두 시간 동안 손도 못 잡았다. 이차가 안 되는 애들이라는 웨이터에게 성질을 부려 모텔로 데려갔다. 정확히 말하면 그 애가 나를 모텔로 인도했다. 순수해 봬는 빠순이라면 될 줄 알았다. 크림처럼 보드라운 그 애의 살. 고무처럼 말랑말랑한 그 애의 귀. 초딩처럼 납작하지만 감질나게 흥분시키는 그 애의 유두. 그 모든 것들을 가진 그녀의 샅은 차갑고 건조했다. 언제까지 만지기만 할 거냐고 짜증내는 그 애에게 나는 그냥 가라고 했다. 오빠는 좋은 사람 같다고 말한 그 애는 그냥 가지 않고 샤워를 했다. 구석구석 한참 씻더니 화난 사람처럼 문을 쾅 닫고 가 버렸다. 그제야 내 성기는 화가 났다. 혼자서 화난 성기를 내려다보다 생각했다. 좋은 사람에게, 저애는 왜 문을 쾅 닫고 가는 것일까.

 

 

몇 건의 사건이 더 있었다. 똑같은 형식이 반복되었다. 똑같은 낚싯바늘에 미라는 번번이 걸려들었다. 지혜 짱과의 대화를 끝으로 몰락한 거산 기업의 딸은 더 이상 스튜디오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현 상에 의하면 모델 일도 관뒀다고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녀를 미라라고 부르지 않았다. ‘빽미라’ ‘구라’, 혹은 ‘빽구라’라고 불렀다. 있을 때는 이름만 꺼내도 싫어하더니 사라지고 나자 너도 나도 그녀 얘기였다. 얘깃거리가 떨어지거나 좀 어색해졌다 싶으면 꼭 ‘구라’가 등장했다. 구라는 구라를 불렀다. 구라에 구라를 덧붙이며 사람들은 즐거워했다. 유쾌한 비난이었다. 미라가 피해를 끼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증거였다. 나는 왜 그녀를 미워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아직도 그녀를 미워하는 건 다현뿐이었다. 완전한 승자가 된 셈인데도 종종 그녀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다. 타쿠미는 다현 상의 전화를 자주 씹었다. 영계에 대한 집착은 여전했으나 최근 그의 영계들은 미라만큼 어리보기가 아니었다. 미끼만 수시로 떼먹고 사라지는 열대 어종. 화려한 패션과 핫 보디로 무장한 그들은 다현 상과는 아예 사는 물이 달라 보였다.

여름이 갔다. 월급이 밀려 있었고, 항의 전화가 많이 왔고, 타쿠미는 그때마다 없었고, 매일매일 스튜디오를 관두겠다고 생각했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다음)이 없었다. 똑같은 형식의 반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기치 않은 (다음)이 찾아왔다. (다음)은 아주 평범한 차림새의 아저씨와 함께 왔다. 기지바지에 반팔 와이셔츠를 입은 대머리 아저씨였다. 그는 다짜고짜 스튜디오에 들어온 (다음) ‘김공할 이 씨발놈 어딨어’를 외친 (다음) 죄 없는 의자 하나를 쓰러뜨린 (다음) 마침 스튜디오에 와 있던 지혜 짱에게 경찰을 부르겠다는 경고를 들은 (다음) 조금도 겁내 하지 않고, ‘그래, 제발 불러라, 경찰을 부르면 더 좋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풍경이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듯한 대화가 이어졌다.

“김공할 어딨어.”

“그런 사람 여기 없어요.”

“당신이 김지혜지. 한패인 거 다 알고 있어.”

“계속 행패 부리면 경찰을 부르겠어요.”

“불러. 제발 불러.”

“언제 봤다고 반말이세요?”

“이 여자 분위기 파악 못하네. 너, 존댓말 듣고 수갑 한번 차 볼래?”

지혜 짱은 고개를 외로 꼰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지혜 짱에게 (다음)이 없는 건 처음 보았다. 대머리 아저씨가 계속 욕지거리를 했다. 나는 대머리 아저씨를 소파에 거의 억지로 앉힌 (다음) 말했다.

“차가운 커피로 드릴까요, 뜨거운 커피로 드릴까요?”

 

 

타쿠미는 일본인도 아니었고, 일본에서 유학한 적도 없었다. 본명은 김공할. ‘공功’의 일본 발음이 타쿠미였다. 타쿠미가 스튜디오에 오지 않는 일요일을 기해 네 명이 모였다. 그를 뒷조사 중이던 미라에 의하면 우리의 타쿠미는 여기저기서 돈을 많이 해먹었다. 획기적인 3D 입체 촬영 시스템을 설치해 주겠다고 했으나 계약금만 받고 일 년째 일을 안 해줘서 ×× 성형외과가 그를 고소했다. 그의 새로운 사업에 투자했으나 이 년째 배당금을 나눠 주지 않아 △△ 스튜디오가 그를 고소했다. 적지 않은 개인 사업자들이 미래 지향적인 홈페이지를 제작해 주지 않아 그를 고소했다. 이 대목에서 다현 상은 사색이 되었다. 다현 상은 홈페이지를 공짜로 리모델링해 주는 조건으로 그에게 천만 원을 빌려 줬다. 지혜 짱도 그의 새로운 스튜디오 사업에 천만 원을 투자했다. 내가 네 달 동안 월급을 못 받았다고 했더니 지혜 짱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 달에 백만 원씩, 꼬박꼬박 결재해 줬단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삼백오십만 원을 그에게 기증한 셈이었다.

“그런 얘기를 왜 이제 해. 너 때문에 다 피해 보게 생겼잖아.”

다현 상이 미라에게 쏘아붙였다.

“언니들이 언제 제 말 듣기나 했어요?”

지혜 짱이 타이르는 말투로 거들었다.

“그래도 그런 얘기는 해야지. 우리 말고도 피해 본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

“합동으로 고소하자.”

다현 상이 말했다.

“뭘로 고소해?”

지혜 짱이 물었다. 다현 상이 곰곰 생각하다가 답했다.

“직원 월급 갈취. 그리고 원조 교제.”

지혜 짱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고 고소한다고 위협해서 돈 돌려받자. 그 뒤엔 내가 자를게.”

“그래, 이럴 때일수록 힘을 합쳐야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릴 찰나, 미라가 지혜 짱에게 쏘아붙였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뭐, 뭐가?”

“그래도 과거에 사랑하던 사인데 어떻게 그래요?”

“누, 누가 누구랑?”

“지혜 언니랑 타쿠미요.”

다현 상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지혜, 정말이야?

“누가 그래? 그 개새끼가 그러든?”

“네 그 개새끼가 그랬어요. 언니는 개새끼랑 자니까 좋아요?”

“나 그래서 언니가 나한테 잘해 주는 거 졸라 가식 같아 싫었어요. 언니는 타쿠미가 돈 없는 게 자존심 상해서 헤어진 줄 알죠? 천만에요. 타쿠미는 언니 가슴 성형한 게 역겨워서 헤어진 거래요.”

지혜 짱은 꽤나 고상하게 대처했다.

“얘는…… 뭔가 잘못 들은 모양인데 ……가슴은 다현이가 했지…….”

“뭐야 이년아? 넌 아예 얼굴을 통째로 조각했잖아.”

나는 유체 이탈했다. 유체 이탈한 채로 타쿠미가 스튜디오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미라의 설핏한 웃음을 보자마자 그를 부른 것이 누구인지 알았다. 지혜 짱의 얼굴에 차라리 다행이라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다현 상이 잽싸게 그의 허리띠를 잡아 소파에 끌어와 앉혔다. 타쿠미는 지나치게 별일이라는 표정을 지어서 모두의 의심을 확신으로 굳혔다. 하지만 어떤 얘기부터 꺼내 놓아야 그가 빼도 박도 못할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다현 상의 가슴이 터질듯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다현은 뜬금없이 우슐라를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해 봐. 이 백 진짜야 가짜야?”

타쿠미는 겨우 이거였냐는 듯 픽 웃더니 백을 들고 이것이 진짜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미라가 소파 옆에 두었던 쇼핑백 안에서 또 하나의 우슐라를 꺼내 놓았다.

“이건 짝퉁이라던데…… 어떻게 된 거예요?”

타쿠미는 선뜻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두 개의 백은 완벽하게 똑같았다. 둘 다 진퉁이라고 우기거나, 진퉁과 짝퉁은 원래 구별이 안 간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전혀 차이가 있을 수 없는 이유를 타쿠미는 아는 듯했다. 다현의 가슴은 마침내 펑, 터져 버렸다.

“그래. 나 지혜 너랑 썸씽 알고 있었어. 하지만 타쿠미 너 나한테 뭐라고 했어. 돈 때문에 할 수 없이 몸 대 주는 거라며. 독립 자금이 필요하니까 이천만 원만 빌려 달라며.”

미라가 불쑥 끼어들었다.

“거 참 이상하네요. 아까는 천만 원이라더니.”

다현은 못 들은 척 계속했다.

“얘는 또 뭐야. 갖고 노는 거라며. 그렇잖아도 머리 빈 거 짜증나서 버릴 생각이었다며. 그런데 감히 나를 저년이랑 똑같이 짝퉁 취급해? 너, 제정신이야?”

지뢰밭에 수류탄을 터뜨린 격이었다. 특히 지혜 짱은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돈을 주고 타쿠미의 몸을 산 여자. 나는 그래도 아직 지혜 짱의 지성과 품위를 믿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혜 짱의 변론은 매우 지성적이고 품위 있었다.

“난…… 사랑했을 뿐이야. 사랑이 죄야? 아직 성공을 못해서 나랑 결혼할 수 없는 거라고 했잖아. 우린 끝난 게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헤어져 있는 거라면서. 난 예술도 포기하고 네 성공을 위해…….”

“근데 뉴욕 대학에는 왜 음대가 없어요?”

“…… 혼신의 노력을 다했어. 내가 가불해 준 천만 원…….”

“아깐 투자한 거라며요?”

“…… 난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는 집안에서 아무리 반대해도 애 낳고 오순도순 살자며? 넌 내 가장 친한 친구까지 갖고 놀고…… 어떻게 내 친구를 창녀 취급할 수 있어? 처음부터 수준에 안 맞는 너를 사랑하는 게…….”

내가 있건 말건 거침없이 싸우는 여자들 틈을 뚫고 나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검색 엔진 사이트로 들어가 묵묵히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미라의 말대로 뉴욕 대학에는 음대가 없었다. 피아니스트 김지혜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숙대 의상학과에는 김지현이 없었고, 거산의 전 회장은 ‘성’ 씨가 아니었다. 나는 그제야 유체 이탈에서 돌아왔다. 무려 오 개월 간의 유체 이탈에서.

나는 다시 커튼 밖으로 나왔다. 현실로 돌아와 목도하는 공주들의 싸움은 처절했다. 더 이상 착하지 않은 내 눈에는 그들의 속셈이 훤히 비쳐 보였다. 타쿠미를 공격하는 척 그들은 서로의 옷을 벗기는데 몰두해 있었다. 맨살이 드러나고, 치부가 까발려지고, 급기야는 내장까지 쏟아 내야 할 판이 되었을 때, 성질 급한 다현이 백기를 들고 살려 달라고 외치듯 소리 질렀다.

“타쿠미, 네가 말해 봐. 대체 어느 쪽이 진실이야. 당장 말해지 못해?”

스튜디오가 조용해졌다. 이제는 돈이 아니었다. 자존심이었다. 분노가 아니었다. 유리 구두의 진짜 주인을 밝히라는 협박이었다. 기대와는 달리 타쿠미는 당장 대답하지 못했다. 선택의 손실분과 잠재 가치를 감가상각 하느라 골치 아픈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미라를 선택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지혜와 다현이 쌍둥이처럼 팔짱을 끼고 타쿠미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혜의 지성미 플러스 천만 원 플러스 스튜디오냐, 깔끔하게 다현의 이천만 원 플러스 가슴이냐를 놓고 모두가 침 넘어가는 걸 참고 있는데,

“나 임신했어요.”

미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을 깨뜨렸다. 곧바로 짜악! 지혜 짱이 타쿠미의 귀싸대기를 날려 태초의 선과 악을 갈랐다.

“넌 해고야.”

하더니 별로 슬퍼하지도 않는 미라를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어쩜 애한테 부끄럽지도 않니?”

쏘아붙이고는 다현도 지혜와 미라에게 발 빠르게 합류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극적으로 화해했다. 지혜와 다현은 진심으로 미라의 불행을 슬퍼하는 것 같았고, 타쿠미는 세상에서 제일 볼품없는 곰이 되어 멍청하게 서 있었고, 나는 세 여자의 극적인 화해에 진심으로 감동 받아 어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복학했다. 오학년 이 학기를 다니면서 일을 했다. 상쾌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다현 상의 지인이 운영하는 쇼핑몰의 야외 촬영 담당으로 취직했다. 특별한 일은 안했다. 타쿠미의 핸드폰을 발 빠르게 입수했을 뿐이었다. 지혜 짱은 내 남은 학기의 등록금을 내주었다. 다만 요즘 내 안부 전화를 잘 받지 않을 뿐이었다.

싱싱한 여자들을 원 없이 만났다. 그중 한 명과는 잠도 잤다. 다음날 맛이 간 얼굴로 일어난 그녀는 실수였다고 말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앞으로도 실수할 여자는 또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내가 실수한 게 아니기만 하면 된다, 는 게 요즘 내가 믿는 유일한 (다음)이었다.

미라에게 연락이 온 것은 그 애와 잔 다음이었다. 나는 몇 분간 고민했다. 혹시 또 산부인과에 가 달라고 하는 게 아닐까. 더 이상 착한 남자이지 않기로 결심한 다음이었다. 하지만 정반대로 그럴듯한 마지막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이라면 미라인 게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그녀는 여전했다. 여전히 투명한 피부였다. 내가 무엇을 알건 상관없다는 듯한 투명함. 긴 생머리, 짧은 치마, 깊게 파인 가슴골, 높게 솟은 킬 힐. 계절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그녀만의 형식. 긴 팔다리와 짧은 어휘력, 짝퉁 백에 진짜 가슴, 싸 보이는 몸짓과 있어 보이는 미소, 청순한 외모에 천박한 말투까지. 모 아니면 도. 올인 아니면 다이.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왔다.

“임신한 적이 없다고?”

“오빠는, 내가 개야? 개새끼 애를 배게? 그리고 그 새끼 무정자증이야.”

옆 사람들이야 듣건 말건 미라는 거침없이 말했다. 옆 사람들이야 듣건 말건 나는 큰소리로 웃었다. ‘그런데 왜 타쿠미가 가만있었어?’라고 묻지 않았다. 그냥 알 만했다.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만 타쿠미에게도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대신 나는 물었다.

“근데 임신했다는 말은 왜 했어?”

기대했던 대로, 예상외의 대답이 나왔다.

“씨 없는 거 숨기려고 그 새끼 항상 콘돔 쓰거든. 나랑 할 땐 안 썼다는 걸 그년들한테 알려 주고 싶어서.”

이해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맥주를 마시다 뒤늦게 사레에 들렸다. 격렬하게 기침을 하다 보니 이번에는 정말로 눈물이 났다.  《문장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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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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