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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과 미로

  • 작성일 2008-10-31
  • 조회수 662

 

미궁과 미로




이치은




1. 미궁(迷宮, Labyrinth)-첫 번째 주회로를 타고 9시 방향을 향해 시계 방향으로 돌다

 



내가 어느 순간 최고의 수학자들과 회계사들을 동원하여 미분방정식이라도 돌리지 않는 이상 찰나의 내 재산이 얼마인지 도저히 계산할 수 없을 만큼 부자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때부터 나는 더 많은 그리고 더 특별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사진가 G였다. G는 주로 건물을 찍는 사진가였는데, 세계를 돌아다니며 판에 박힌 듯한 구도로 평범해 보이는 건물들을 찍었다. G와 알게 된 후 그의 사진전에 몇 차례 초대 받아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가끔은 더 엉뚱하고 더 유쾌한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다는 사실만 빼면 실은 썩 내키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의 사진은 대체로 지루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사진 속에 사람들을 비롯해 움직이고 있는 사물들은 통 볼 수 없다는 공통점을 알아채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통 단조롭고 무의미해 보일 뿐이었다. 

작년 가을 <부서진 도시들>이란 그다운 이름의 전시회에는 별로 사람들이 없었다. 단풍이 한창인 주말 오후라 사람들이 전시회 같은 데서 시간 낭비하는 게 아깝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나같이 시간이 펑펑 넘치는 사람도 그렇게 느낄 정도였으니. 하품을 참으면서 따분한 사진들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눈에 들어 온 사진이 있었다. <꿈의 정원-첫 번째 주회로를 타고 9시 방향을 향해 시계 방향으로 돌다>라는 기다란 제목이 붙어 있는 흑백 사진이었다. 초점이 잘 맞지 않아 윤곽이 흐릿하고 더러 지우개로 지워진 것처럼 뭉개진 검은 폐곡선이 그려진(혹은 인쇄된?) 사다리꼴 종이와(혹은 천과? 판대기와?) 그 밖엔 흰 여백과 검은 여백이 다인 이상한 사진이었다. 다시 보니 고대의 고누판처럼 보이기도 했고, 아주 조그만 무늬를 확대해서 찍은 것 같기도 했다. 그거건 저거건 제목과 사진의 묘한 불일치가 눈에 띄었다.

 



 

“이 사진이 맘에 드나?”

나는 부자가 된 이후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느니 침묵을 지키는 게 낫다.

“자네도 알겠지만-물론 나는 몰랐다. 몰랐으므로 입을 닥치고 있었다-미궁엔 갈림길이 전혀 없지. 이른바 인간의 주된 죄악인 초조를 물리치고 끝까지 걸어갈 수만 있다면 미궁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네. 미궁은 그게 아무리 길다고 해도 끝까지 걸어가면 막다른 길이 나오지. 그걸 확인하고는 돌아왔던 길로 다시 걸어 나오면 되는 거야. 그게 다라네. 너무 간단하지. 비결치고는 너무 간단하지. 하지만 대부분의 범인(凡人)들은-나는 그에게 내가 어떤 범주에 속하는 인간인지 물어보지 않았다-막다른 끝까지 가지 못하고 길을 잃었다고 착각하며 중간에 돌아 나오게 되는 거야. 그리고 십중팔구 돌아 나오다가 또 그 ‘초조’라는 죄악 때문에 또다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반대로 걷게 되는 거야. 그런 거라네. 인생은 미궁처럼 갈라지는 길도 교차점도 없는 외길인데, 그 위에서 우리들만이 진자처럼 우왕좌왕 떠돌다 생을 낭비하게 되는 거지. 거듭 말하지만 미궁은 갈림길이 전혀 없는 길이라네. 갈림길은 사람의 마음속에 정확히 말하자면 초조 속에 있는 거라구, 미궁 속이 아니라.”

나는 뭐든지 대꾸를 하고 싶어졌다. 한 사람은 그저 말하고 한 사람은 듣기만 하는 관계란 결코 건강한 관계가 아니다,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으니.

“그게 무슨 상관이지, <꿈의 정원-첫 번째 주회로를 타고 9시 방향을 향해 시계 방향으로 돌다>라는 거창한 제목과는?”

나는 제목을 끝까지 암기하여 말할 수 있었던 내게 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기가 사람들이 초조를 이겨내는 거의 유일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네. 나 역시 마찬가지고.”

“뭘 어떻게 이긴다는 거지?”

“우리는 들어가고, 또 나온다네. 같은 길을 돌아 돌아 같은 구멍으로 말이지. 꿈에선 그게 돼.” 

나는 꿈에 길이 있다는 말이 맘에 들지 않았다. 나로 말하자면 근 십 년간 꿈을 꾼 적이 없었다.

“자네의 설명이 맘에 드는구만. 이거 얼만가?”  

내 침실 벽에 지금 이 <꿈의 정원-첫 번째 주회로를 타고 9시 방향을 향해 시계 방향으로 돌다>가 붙어 있다. 예전 거기다 걸어 두었던 그림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 후로 죽 비워 두었던 바로 그 벽에 말이다.

내 잠 속에 길도 미궁도 막다른 골목도 또 초조도 없으니 사 놓고 걸어 두기라도 하는 수밖에.



2. 미로(迷路, Maze)-38,723개의 분기점이 있는 꿈으로부터 귀환한 천재적인 기억력의 건축가 태정 


나와 내 친구들은 양쪽으로 깃발들이 잔뜩 달린 좁은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3층 베란다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처음엔 여남은 명이 넘는 무리였는데, 새벽이 다가올 즈음엔 엄청나게 돈이 많다는 것 외에는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폴과 역시 돈이 많기는 하지만 돈보다는 천재적인 기억력으로 더욱 유명한 괴짜 건축가인 태정, 그리고 둘과 달리 항상 돈이 궁한 나, 그렇게 셋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바람은 시원했고, 우리들은 새벽까지 위스키와 맥주를 마셨지만 그다지 피곤하지 않았다. 좁은 거리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또 껑충껑충 뜀박질을 하며 떼를 지어 다양한 방식으로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그때 폴이 문득 이렇게 말했다.

“꿈엔 갈림길이 없어. 우리는 들어갔던 길로 나오게 되지.”

한동안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도시의 명물인 연푸른색 비둘기가 녹이 슨 금속 난간 위를 곡예라도 하는 것처럼 위태롭게 걷고 있었다.

“들어갔던 길로 다시 나온다는 게 무슨 말이지?”

나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한참 후에 그렇게 물었다. 거리 아래쪽에서 하늘을 향해 쏘아지는 조명 덕분에 폴의 얼굴은 한결 홀쭉해 보였다.

“입구도 현실이고 출구도 현실이란 말이야. 일단 꿈으로 들어가면 거기엔 어떤 갈림길도 없단 말이지.”

“누가 자네에게 그런 생각을 불어넣은 거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태정이 난데없는 기습을 받아 비명을 지르는 꼬마 인디언처럼 입을 열었다. 비명의 꼬리가 채 사라지기 전, 나는 머릿속 작은 칠판에 다음과 같은 단어의 연쇄를 낙서했다.





“사진가 G가 내게 했던 말이라네. 자네들도 알다시피 내겐 멋진 말을 만들어 내는 재주는 없다네. 단, 그게 쓸 만한 말인지 아닌지 맛은 좀 볼 줄은 알지. 나는 G의 말이 마음에 들어 <꿈의 정원>이라는 그의 사진을 한 장 샀지. 할 수 없었다네, 나는 꿈을 꾸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으니까.”

나는 사진가 G의 사진들이 얼마나 비싼 값에 팔리는지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단지 사진가의 말이 멋지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자신이 꿈을 꾸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G의 사진을 샀다는 폴이 부러웠다. 물론 난 사진가의 말들이란 고사상 죽은 돼지 입에 꽂는 돈처럼 불필요할 뿐더러 추악하다고까지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폴처럼 부자가 된다면 그 모든 걸 용서할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네 말처럼 꿈엔 갈림길이 없어, 꿈을 꾼 사람이 만들기 전까진 말이지. 하지만 일단 만들어 놓고 나면 꿈에서 빠져나가기 전까지 그 갈림길들은 사라지지 않는다네.”

한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는 태정은 듣기 좋은 목소리로 계속 또박또박 말했다.

“어쨌건 자네가 사진가 G에게서 그런 생각을 들었다니 정말 다행이네. 혹시라도 미로가 시간으로 조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기꾼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나는 자네들에게 꿈속에 갈림길이 있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을 거야.”

“그 얘기는…….”

내 말의 허리가 다시 태정에 의해 싹둑 베였다. 나는 다시 머릿속 작은 칠판에 낙서를 했다.





“꿈속에 다른 공간들을 이어 주는 갈림길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야. 시간적인 갈림길이 아니라.”

“그렇다면 가역적이라는 건가?”

폴이 대화에서 빠지지 않겠다는 듯 이렇게 물었다. 질문을 마친 폴은 들고 있던 물방울이 잔뜩 맺힌 맥주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나를 은밀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콧등을 살짝 올리며 웃었다. 폴은 내게 태정의 이야기에 뭐 그리 특별한 관심이 있는 건 아니야,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리고 폴 역시 틀림없이 그 꿈속의 갈림길이라는 태정의 이야기에 홀랑 빠져 있었다.

“좋은 지적이야. 늘 그렇지만 폴 자네는 이야기의 앞길을 짚어 내는 혹은 망치는 묘한 재주가 있어. 그래, 맞네. 돌아올 수도 있어, 그리 쉽지는 않지만.”

“어떻게 갈림길을 만든다는 거지? 꿈속으로 삽이나 뭐 포클레인이라도 가지고 들어간다는 말인가?”

나는 꿈속에 세워진 벽을 곡괭이로 파는 상상을 하며 담배를 깨물었다. 파르스름한 담배 연기가 견고한 새벽하늘의 성곽을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낙서 하나가 머릿속에 다시.





“재미없는 농담 같으니라구. 내 힌트를 주지. 똑같은 방식이야, 첫 번째 꿈으로 들어가는 방식과. 이치은, 자네는 정말 모르겠나?”

“나는 알겠네.”

폴은 애써 자랑스러움을 숨기려 들지 않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나는 보았다, 회색 수염으로 덮여 있는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리는 걸. 폴의 우쭐대는 미소를 얼마나 자주 봐 왔던지.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폴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구. 

“그러니까, 자네 말은 꿈에서 또 잠을 잔다는 거 아닌가? 그렇게 해서 또 다른 꿈으로 넘어간다?”

“빙고”

태정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또 거의 동시에 소리를 지르자 아무도 쳐다봐 주지 않는 곡예를 되풀이하던 비둘기가 새벽의 청회색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게 가능해? 꿈에서 또 꿈을 꾼다는 게?”

“연습을 하면 되네. 처음엔 쉽지 않지 물론. 꿈이라는 공간은 어차피 누구에게나 낯선 곳일 수밖에 없거든. 그런 곳에서 입맛에 딱 맞는 잠자리를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폴에겐 불가능한 일이겠군, 그래.”

나는 자신의 집이나 5성급 호텔이 아니면 여간해서 잠을 자려 하지 않는 폴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폴이 함께 어울려 놀던 친구들이 다 잠든 새벽에 홀로 내 서재의 책상머리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책을 읽던 광경을 몇 번이나 보았다. 

“난 어차피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자자자, 싸우지들 말고 내 얘길 들어 보라구. 그러니까 이런 식이란 말이야. 첫 번째 꿈에 도착하면 꿈속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를 받지 않을 만한 조용한 곳을 찾아 거기서 다시 억지로 잠을 자는 거야. 거위 털 이불이나 침대보를 방금 간 퀸 사이즈의 침대가 없다고 해서 불평해서는 안 되네. 잠이 오지 않으면 첫 번째 꿈속 마을을 전속력으로 한 바퀴 달려 몸을 피곤하게 만들어도 좋구 말이야.”

나는 점점 태정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이 자리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자마자 태정의 말대로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잠이 들고 또 꿈을 꾸게 되면, 꿈 A에서 꿈 B로 넘어가는 거지.”

“거기서 질문 두 개.”

폴이 기묘한 각도로 휘어진 것처럼 보이던 오른팔을 번쩍 들었다. 나는 그 모습이 우스워 웃음을 터뜨렸지만 아무도, 나조차도 내 웃음에 주목하지 않았다.

“첫 번째 질문, 그걸 어떻게 갈림길, 아니 분기점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거지? 그건 단지 꿈 A에서 꿈 B로 넘어가는 일종의 도약대일 뿐이잖아. 그리고 두 번째…….”

“자네가 특별히 반대하지 않는다면, 첫 번째 질문부터 먼저 답을 하고 싶은데…….”

태정은 웨이터를 불러 똑같은 맥주를 세 병 더 갖다 달라고 했다, 죄 손짓으로만 말이다. 나는 태정의 그 세련된 손동작을 보면서 다시 낙서를 해보았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그걸로 끝이라면 다이빙의 스프링보드와 다를 게 없지. 하지만 분기점을 만들, 그러니까 꿈속에 미로를 설치할 방법이 있다네. 가령 꿈 B 속에 분기점을 설치하고 싶다면, 꿈 B에서 다시 꿈을 꾸어 꿈 C로 넘어가는 거야. 그런 후에 곧바로 다시 꿈 B로 돌아온다네. 그리고…….”

“아니, 잠깐, 미안하지만 그게 바로 내 두 번째 질문이라네. 자네는 꿈에서의 이동이 가역적이라고 했었잖나. 그래 대체 어떻게 돌아온다는 거지?”

나는 거의 끼어들 틈이 없었지만 뭐 딱히 소외당한다는 기분은 아니었다. 내게는 폴과 태정이 볼 수 없는 작은 칠판이 있었으니.

“아차, 그 설명을 하지 않았군. 내가 그 분기점들이 모두 시간이 아니라 공간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았나? 그 자리에서, 그러니까 꿈 C에 도착한 그 장소에서 다시 잠을 자고 꿈을 꾸면 꿈 B로 돌아올 수 있다네.”

“그럼, 만약 꿈 C에서 자신이 그 꿈으로 들어온 바로 그 장소가 아니라 다른 장소에서 잠을 자면 이번엔 꿈 D로 가는 거고?”

“맞아. 자네 같은 학생만 있었다면 선생질을 그리 빨리 때려치우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나는 새 맥주를 따서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켰다. 이번엔 좀 새로운 형식의 그림이 필요했다.





“좋아, 다시 앞으로 돌아가지. 꿈 B에 도착한 후 꿈으로 도착하게 된 그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꿈을 꾸어 꿈 C로 들어간 후, 바로 앞에서 설명한 방식으로 다시 꿈 B로 돌아온다네, 여기까지는 아까 했지? 그래, 그 다음에, 이제 자네들도 알겠지만…….”

태정은 마치 내가 그의 말을 잘 듣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착한 학생이라는 증거로 그에게 맥주병을 들어 보였다.

“다른 장소에서 잠을 자는 거야. 그러면 이번엔 꿈 C’가 생겨나는 거지. 이제 꿈 B가 분기점이 되는 거지.”

이젠 거의 자동이었다.

 

 





다시 폴이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이론상으로는 꿈속의 갈림길이 꼭 두 갈래의 갈림길일 필요는 없겠군 그래. 여러 가지 꿈을 꿀 수만 있다면 C’뿐만 아니라, C’’, C’’’, C’’’’, C’’’’’ 그런 식으로 무한한 개수의 갈림길이 있는 분기점을 만들 수도 있겠는데.”

“해보지는 않았지만…… 그럴 수도 있겠군 그래.”

역시 폴이야,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꿈속 흑판을 지우고 고쳐 썼다.

 

 





그때 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일어나 보겠네.”

“왜 그러지? 한 시간 정도만 있으면 싱싱한 홍합을 아침으로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이 문을 열 텐데. 밥을 먹고 가지 그러나.”

“아니, 사진가 G를 찾아가서 자네 얘기를 들려줘야겠어. 나는 꿈을 못 꾸니까, 그에게 자네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근사한 사진을 하나 찍어 달라고 해야겠네. 아 재미있는 얘기 즐거웠네. 답례로 계산은 내가 하지.”

폴이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언젠가부터 머릿속에서 자라나던 물음표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 이렇게 폴을 그냥 보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자넨 내가 내 꿈속에 분기점을 몇 개까지 만들어 봤을 것 같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정작 중요한 건…….’

“분명히 깜짝 놀랄 거야, 자넨. 하나의 꿈에 자그마치 32,837개의 분기점을 만들었다구.”

마치 태정의 말이 망치가 되어 내 머릿속 얇은 얼음판을 쾅하고 내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잔금들이, 수많은 분기점을 만들며 잔금들이 한 점으로부터 벋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구 태정 자네는 오늘 여기에 와 있는 거구. 32,873개의 분기점들이 있는 꿈속이 아니라.”

“그래, 그게 뭐 잘못 되었나? 자네 표정을 보니 마치 그게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 같은데.”

“그래서 우리가 자네를 기억의 천재라고 부르는 거구…… 자네는 꿈들 간의 통로가 가역적이라고 했지만 그건 어쨌거나 개별 통로에 대한 얘기구…… 결국 현실로 돌아오려면…… 자네의 이론대로라면 첫 번째 꿈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나? 하지만 폴은…….”

“내 친구, 아니 우리 친구 폴은 괜찮네. 자네도 들었잖는가? 폴은 꿈을 꾸지 않는다네.”

날이 아주 빠른 속도로 밝아오고 있었다. 청색이 폭발하듯 빨리 백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도로 털썩 앉았다. 나는 예전에 사진가 G가 자신의 전시회에 걸었던 사진들 중 몇 점이 태정이 설계한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났던 불유쾌한 소동도. 태정은 사진가 G가 오로지 자신과 자신이 설계한 작품을 모독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또 전시한다며 공개적인 장소에서 분노를 폭발시키곤 했다. 술이 취해서는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쳤고,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의 건물을 찍은 G의 사진들을 폐기해 버리도록 만들겠다고 장담했다. ‘내 건물을 저 따위 저질 사진사의 카메라 파인더에 강탈당하는 걸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단 말이야. 뭐든 하지 않고는 안 되겠어.’ 하지만 태정은 사진가 G의 전시회에 내걸린 자신의 건축물 사진들을 끌어내릴 법적인 이유를 찾아낼 만큼 수완이 있는 변호사를 끝끝내 만나지 못했다고 나는 들었다.

“하지만 사진가 G는…… 길을 잃을 수도 있을 거야, 꿈속에서 말이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지라니? G가 영원히 현실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구.”

“그렇게 단정 지어 이야기할 수는 없네. 꿈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으니까. 꿈속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만나 거기서 결정을 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을 현실의 시간으로 전환하면 0.1초밖에 걸리지 않을지도 몰라.”

나는 0.1초짜리 악몽을 꾼 기분이었다. 나는 앞으로 꿈 따위는 꾸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기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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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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