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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 작성일 2008-08-29
  • 조회수 3,557

 

시선




박상우




1


내가 두 남자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밤 아홉 시경 강남대로 근처에 있는 일본식 선술집에서였다. ‘쇼부(勝負)’라는 제목의, 그러니까 뭔가를 결딴내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은 묘한 분위기의 선술집에 혼자 앉아 나는 맹물을 마시고 있었다. 서른다섯의 학원 강사인 내가 그 시각 거기서 맹물을 마시고 앉아 있었던 이유는 만나기로 약속한 여자가 나오지 않아서였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언급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 몇 남자에게 다리를 걸치고 살아가는 한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도 한심한 일이지만 그녀를 내 여자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기획 자체가 초장부터 죽을 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생각하면 악마와 악질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악마가 더 나쁜지 악질이 더 나쁜지,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녀는 나하고 섹스를 하다가도 다른 남자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받고, 그 시각이 새벽 한 시이건 두 시이건 전화를 걸어온 놈을 만나러 달려간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같이 있을 때 내가 전화를 걸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나에게 달려오기 때문이다. 요컨대 병적으로 남자를 밝히는 여자인 것이다. 그런 여자를 왜 좋아하는가. 남겨지는 문제는 그것뿐이다. 그런 여자에게 영혼이 사로잡혀 좌불안석하는 내가 한심하지만 그런 여자를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힘은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어쩌란 말인가.  

나는 말도 되지 않을 꿈을 꾸고 있었다. 그녀가 여러 놈을 만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내 여자로 만들겠다는 꿈. 그래서 나는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여자에게 만나자는 약속을 했고 그녀는 그것에 응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약속 시간인 일곱 시가 되었을 때 그녀는 그녀다운 문자를 나에게 전송함으로써 나의 가당치도 않은 꿈을 초장에 박살내 버리고 말았다.


급한 용무로 다른 사람 만나는 중. 못 갈 수도 있으니 너무 기다리지 마시길.


괴로운 심사로 앉아 있던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묘한 분위기의 두 남자에게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낮은 칸막이가 있긴 했지만 그들은 나와 같이 앉아 있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내 우측의 칸막이 너머에는 나이가 사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턱수염을 기른 남자가 전문가용 카메라를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준수한 용모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왼쪽 귀에 귀찌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몹시 잘 어울려 보였다. 하지만 소주잔을 마주 놓고 앉아 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견제하거나 탐색하는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심한 척하면서 두 사람의 대화에 은근히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래요, 나는 말이죠, 그런 걸 좋다 나쁘다 하는 식으로 재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감정이 있고 감성이 있으니 수만 가지 가능성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죠. 게다가 사랑인데 말해 뭣하겠습니까. 자, 우리는 사랑 문제 때문에 만난 거니까 그것에 대해서만 진지하게 생각하고 대화하도록 합시다. 마셔요.”

턱수염이 잔을 들어 귀찌에게 건배를 제안했다. 그러자 귀찌가 두 손으로 잔을 들어 건배했다. 턱수염의 나이가 훨씬 많아 보임에도 불구하고 반말을 쓰지 않는 걸 보면 두 사람이 절친하거나 자주 만난 사이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사랑 문제 때문에 만났다는 대화의 일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들이 동성애자일 가능성은 더더욱 없어 보였다. 턱수염을 기른 남자도 중후한 분위기의 남성미를 지니고 있었고 귀찌를 한 상대방도 대단히 세련된 남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가 완연함에도 불구하고 근원을 알 수 없는 미묘한 탐색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황 선생님께서 이 문제를 자꾸 사랑의 문제로 몰고 가려고 하시니까 저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저를 가볍고 한심한 인간이라고 나무라신다고 해도 별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사랑에 대해 많이 생각해 봤지만 저는 아직 그것에 대해 별다른 확신을 얻지 못하고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아니라 뭐랄까…… 저는 관계라는 단어가 편안합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수많은 인간관계를 맺게 되고, 그것은 이런저런 양상으로 발전하거나 절로 정리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관계를 아주 좋아합니다. 억지를 부리거나 무리한 변화를 도모하지 않는 거죠. 그냥 그렇게 사는 게 편하고 좋으니까요.”

“관계…… 참 좋은 말이죠. 하지만 인규 씨가 내 아내와 유지하는 관계는 내가 보기엔 단순한 관계라고 말할 수 없어요. 나의 의견으로 말하자면 그건 전적으로 사랑이에요. 그렇게 애틋하고 그렇게 절실한데 그걸 어떻게 흔하고 흔해빠진 뭇사람들과의 관계에 비유합니까. 예를 들어 새로 이사 간 동네의 부동산 업자를 알게 되는 것도 관계인데 그런 관계와 아라와의 관계가 조금도 다를 게 없다는 뜻인가요?”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관계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죠. 사랑도 관계의 일종일 수는 있지만 사랑이 관계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는 거죠. 사랑이라는 게 꼭 그렇게…….”

“인규 씨, 중간에 말을 잘라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건 말이죠, 내 생각으로는 인규 씨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세상을 무척이나 건조하게 살아서 그런 걸 거예요. 나처럼 십 년 넘게 결혼생활을 해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어요. 결혼생활을 통해 사랑의 환상이 스러지지만 오히려 그것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지금 인규 씨 입장에서는 이런 내 말이 황당하고 어이없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건 내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니 새겨들어도 나쁠 건 없을 겁니다. 내 나이 마흔다섯입니다.”

그 지점에서 나는 맹물을 홀짝거리는 일을 그만두고 소주와 안주를 주문했다. 내 옆자리에 앉은 두 사람의 대화가 맨정신으로는 듣기 어려운 엽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의 여자 문제도 여자 문제이지만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는 근원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어 보였다. 턱수염 기른 남자의 아내와 귀찌가 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얘기인데 귀찌는 그것을 단순한 관계라고 주장하고 있고 남편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아닌가.

소주를 거푸 두 잔 마시고 나는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다. 옆에 앉은 두 사람이 나를 의식하지 않도록 문자 전송을 하는 것처럼 자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정부와 남편’ ‘관계와 사랑’ 따위의 문자를 별다른 필요도 없이 메모하며 딴청을 부린 것이었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 턱수염 앞에 앉아 있는 존재가 정부라면 어떻게 남편이란 존재가 저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정부라는 존재는 어떻게 자신이 관계를 맺고 있는 여자의 남편을 만나 저렇듯 뻔뻔스런 표정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턱수염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그 사이 귀찌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 폴더를 열었다가 문득 동작을 멈추고 물끄러미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쉰 뒤 휴대폰 폴더를 닫고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웠다. 순간, 나는 약속을 무시하고 다른 놈을 만나고 있을 문어 같은 여자를 떠올렸다. 그런데 웬일인지 다른 때처럼 화가 나지도 않고 분하지도 않고 안타깝지도 않았다. 인생이란 다 그런 거지 뭐, 하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거지 뭐.

턱수염이 화장실에 다녀온 뒤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귀찌를 찍으려는 것인가, 순간적으로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 동작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턱수염이 카메라의 전원을 켜고 LCD 패널을 귀찌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 주려는 모양이었다. 순간 귀찌가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바투 들이대며 한껏 놀라고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나는 사진이 너무 궁금했지만 내가 앉은 방향에서는 도저히 그것을 훔쳐볼 방도가 없었다. 다만 귀찌의 표정을 통해 불륜의 현장을 찍은 사진이 아닐까, 하는 상상만 부풀릴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군요.”

사진을 다 보고 난 뒤 귀찌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뒤에 고개를 숙이고 몇 초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턱수염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아니 자신이 원한 건 결코 그런 게 아니라는 몸짓으로 황급히 손을 뻗어 흔들어댔다. 그러고는 귀찌에게 보여 준 사진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말하기 시작했다.

“아름답잖아요. 진심으로 나는 당신과 아라가 아름다운 커플이라고 생각하고 이 사진들을 찍은 겁니다. 내가 사진작가라서 당신들을 피사체로만 바라본 게 아니고 나의 예술적 심미안이 당신들을 아름답게 바라본 겁니다. 인규 씨가 아라의 어깨를 감싸고 한강변에 서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사진 찍는 것도 잊은 채 물끄러미 뒷모습에 취해 있었어요. 뿐만 아니라 인규 씨가 뮤지컬 무대에서 공연하고 있을 때 객석에 앉아 황홀한 표정으로 인규 씨를 바라보는 아라의 표정을 찍으면서도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단지 내가 당신들 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숨어서 사진을 찍는다는 게 미안했지만, 난 정말 당신들이 아름다운 커플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언젠가 때가 되면 당신들에게 이 사진들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원하면 사진을 출력해서 액자에라도 담아 주고 싶었어요. 아름답다는 건 그것 자체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겁니다. 정말, 그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 부분에서 나는 턱수염이 사진작가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귀찌가 뮤지컬 배우라는 것도 알았다. 두 사람 다 예술 분야에 종사해서 대화가 이렇게 고상한가, 순간 나는 배알이 뒤틀리는 걸 느꼈다. 자신의 아내가 다른 놈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는 걸 알았는데, 두 사람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워 눈물을 글썽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인간의 진심일 수 있을까. 나는 진정 의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자리를 벗어나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옆자리로 불쑥 상체를 들이밀고 물어보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 봐, 지금 연기하는 거지?

순간, 나는 뮤지컬 배우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배우라서인가, 그는 표정을 조금도 일그러뜨리지 않은 채 맑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상대방의 감정을 존중하고 그가 평정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려 주려는 심사인 것 같았다. 이윽고 눈물을 훔치고 나서 뮤지컬 배우가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런 뒤 이를 데 없이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내밀한 감정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아라 누나는 저보다 다섯 살이나 연상입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제가 아라 누나에게 이성적인 관심을 가졌던 건 아닙니다. 아라 누나의 연기 지도야 세상에 정평이 나 있으니 더 이상 드릴 말씀도 없습니다만 지난번 작품 연습할 때에도 정말 혼신을 다해 저를 지도해 주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저도 모르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런 감정이 결국 이성적인 영역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아라 누나는 개성과 주관이 강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날 어린 동생으로만 생각했는데…… 어느 날 저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난 내가 선택해야 사랑이 되니까 네가 선택 당해라, 내가 너한테 선택 당하는 건 싫다…… 그래서 전 흔연히 선택 당했습니다. 그런 관계가 저에겐 더 편안하게 느껴졌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선택과 선택 당함의 이면에 선생님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타인의 불행과 고통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나의 춤과 노래가 정말 끔찍스럽다는 생각이…….”

“아니,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아라는 나에게 이미 오래전에 인규 씨에 대해 말했어요. 그리고 자신이 인규 씨를 선택한 거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밝혔어요. 그랬으니 숨기고 몰래 한 짓이 아니죠. 오히려 내가 두 사람을 사진으로 찍은 일이 숨기고 몰래한 짓이죠. 그러니 지금 사진을 봤다고 해서 괴로워하거나 자책하지 말아요. 자, 편안하게 술이나 마십시다.”

두 사람이 건배할 때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들이 정말 기이한 종족 같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당신들은 외계 행성에서 왔나요?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무려나 두 사람은 건배하고 곧이어 다시 건배했다. 그러면서 차츰 서로에 대한 경계와 견제의 기운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오래잖아 참으로 흔연한 표정이 되어 뮤지컬 배우가 물었다.

“그럼 선생님은 앞으로 아라 누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 나가실 생각인가요?”

“그런 문제야 이미 답이 정해진 거 아닌가요. 난 아라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 줄 작정입니다. 그녀가 이혼을 원하면 그리 해줄 것이고 이 상태를 유지하며 계속 살겠다고 하면 또 그리해  줄 작정이요. 문제 될 게 뭐가 있겠소. 그녀가 사랑으로 고무되고 사랑으로 생동감 있게 살아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난 행복하기 때문이요. 그걸 진정 존중하고 지켜 주고 싶다는 뜻이요. 그러니 인규 씨도 아라보다 나이가 몇 살 밑이긴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 그녀의 사랑을 존중해 줬으면 좋겠소, 그녀의 사랑을 단순한 관계의 일종으로 치부하지 말고 좀 더 신중하고 섬세하게 존중해 줬으면 좋겠다는 뜻이요. 나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소.”

기이한 종족들은 다시 건배했다. 그들이 건배를 할 때마다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내가 그들보다 한 템보 빠르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은 취기가 오르면 오를수록 나에게 물을 먹인 여자, 남자에 치여 죽는 게 소원이라는 여자에 대해 이를 데 없이 너그러운 마음이 생겨났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뭐. 인생이란 게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뭐. 미주알고주알 팥이야 콩이야 따진다고 해서 해결될 게 뭐가 있겠어.

나도 취할 만큼 취해서 그 뒤부터 그들의 대화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 정확하게 전달할 수는 없지만 어느 순간인가 두 사람의 대화가 음악 얘기로 바뀌었다가 사진 얘기로 바뀌었다가 다시 아라라는 여자 얘기로 바뀌었다가…… 어느 순간인가 뮤지컬 배우가 갑자기 한없이 맑고 슬픈 목소리로 슈베르트의 연가곡 ‘보리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보았네……


뮤지컬 배우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실내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노래가 끝나자 실내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뮤지컬 배우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는 걸 보았다. 사진작가가 그의 옆자리로 옮겨가 어깨를 감싸고 위로하며 이제 그만 가자고 말하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자 뮤지컬 배우가 자조적인 표정을 지으며 사진작가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 노래방 갈까요?”


   

2


술에 만취한 두 남자가 내 택시로 다가와 흥정을 시작한 건 새벽 두 시 사십분 경이었다. 나는 그때 강남대로 교보빌딩 근처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술손님도 거의 끊겨 한껏 스산해진 도심의 9월 밤, 만취한 취객들만이 간간이 몸을 흐느적거리며 나타났다 사라지곤 할 뿐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그걸 지켜보노라면 비현실적인 홀로그램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하지만 분명한 현실의 중심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떠올리면 갑자기 세상살이가 괴롭고 배알이 뒤틀린다. 세상 모든 고생을 나 혼자 짊어진 것 같아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나밖에 없는 딸년은 자정 무렵부터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 번 정도는 신호가 들어갔지만 그 뒤로는 아예 휴대폰 전원이 꺼진 상태였다. 중3이랍시고 친구 집에서 공부한다는 핑계를 심심찮게 대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제 어미와 갈라서던 작년 초부터 이미 교복을 볼썽사납게 줄여 입고 깻잎머리를 하고 방과 후면 화장까지 하고 다닌 터라 넉넉히 낌새를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다스릴 자신이 없었다. 이혼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지만 그 아이도 어느덧 제 어미와 비슷한 근성을 보이며 여자로서의 성깔을 부릴 때가 많았으므로 지레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전처는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주변 여자들과 어울려 성인 나이트를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술에 만취해 새벽에 들어오거나 아예 외박을 하고 오는 날도 심심찮게 있었다. 처음에는 싸웠지만 도저히 나로서는 그녀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그녀는 눈이 뒤집히면 세간을 집어던져 박살내고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내 몸에 손톱자국을 남기거나 머리털을 쥐어뜯곤 했다. 이혼할 때도 그녀는 날더러 아이를 맡으라고 했다. 택시기사 만나서 인생 망가졌는데 아이까지 달고 나가 앞길 캄캄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아저씨, 우리 지금 바다 보러 갈 건데…… 갈래요?”

술에 만취한 두 남자 중 왼쪽 귀에 귀찌를 한 남자가 물었다. 그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고 턱수염을 기른 남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젊은 남자와 어깨를 겯고 서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들이 취중에 장난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놈들은 술에 만취해 평양으로 가자거나 러시아로 가자거나 이스탄불로 가자고도 하니 취한 놈들이 나타나면 으레 경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 두 시 사십분에 비틀거리며 나타나 다짜고짜 바다를 보러 가자니, 태평양으로 가자는 것인가 대서양으로 가자는 것인가.

“아저씨, 경포대로 갑시다, 경포대!”

내가 윈도를 내리고 말없이 자신들을 주시하자 이번에는 어깨에 커다란 카메라를 멘 턱수염이 물었다. 그래서 나는 얼마에 가길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턱수염이 얼마에 가고 싶으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나는 잠시 궁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 강남대로에서 출발해 강릉까지 가면 아침 여섯 시경에 당도할 터이고 돌아오면 아홉 시가 될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몸이 엄청 피곤할 것이고 내일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이다. 돈 많은 놈들 술 퍼먹고 기분 내겠다는데 요금이라도 많이 받아야지 시시하게 받고서야 갈 수 있겠나.

“20만 원!”

나는 좀 과하다 싶었지만 후려치는 기분으로 불렀다. 단 몇 초, 나는 한껏 부풀어 오른 긴장감을 억누르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흥정에서는 표정 싸움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지금처럼 새벽에 어떤 삼십대 중반쯤의 남자가 한껏 취한 채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무조건 대구까지 가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30만 원을 불렀고 그는 흔쾌히 빳빳한 10만 원권 수표 세 장을 나에게 지급했다. 출발하자마자 나는 물었다. 이 야심한 밤에 그곳으로 굳이 택시를 타고 가는 이유가 뭔가. 그러자 그가 만취한 와중에도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날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자가 너무 보고 싶어서요, 그 집 앞에 가서 잠시라도 서 있다 오려구요.

“좋아요. 20만 원에 갑시다!”

짧은 순간 뒤, 턱수염이 흔쾌히 결정을 내렸다. 나는 옳거니, 하는 심정으로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아이 때문에 가라앉았던 심사가 갑자기 상승 기류를 타는 것 같았다. 콘솔 박스에서 박카스 한 병을 꺼내 마시고 곧바로 출발했다. 차량 통행이 드문 새벽이고 영동고속도로도 길이 좋아져 두 시간 반이면 족히 강릉에 당도할 수 있을 터였다.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은 이미 강릉에 당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한껏 달뜬 어조로 연신 바다 타령을 해댔다.

“지금 바다로 출발하면 일출을 볼 수 있을 거야. 정말, 내가 일출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질 않네. 일출이란 건 정말 오묘하고 신기한 구석이 있어서 사람들은 삼대가 덕을 쌓지 않으면 온전한 일출을 볼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하지. 내가 카메라에 처음 미쳐 사방팔방을 떠돌 때는 정말 많은 일출을 보았는데……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온전하게 맞이한 태양이 몇 개나 될지 모르겠어.”

“전 지금까지 제대로 된 일출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요. 선생님처럼…….”

“어허, 또 선생님이라고 부르네! 같은 예술대학 출신이니 선배님이라고 부르라니까!”

“아, 네!”

“그럼 아라하고는 여행을 한 번도 다녀오지 않았나?”

“네, 여행은 아직…….”

“이런, 무슨 사랑을 그런 식으로 하나? 아라와 나의 연애 시절은 거의 여행으로 채워졌어. 결혼을 한 이후에도 한동안 여행을 자주 했지. 촬영 때문에 해외여행도 자주 가고…… 아무튼 여행은 뭐랄까, 사랑에 있어서는 훌륭한 부력 역할을 해줘. 타성과 관성으로 침잠하는 일상을 수면 위로 밀어 올려 주는 판타지 역할을 한다는 말일세.”

“그럼 저도 아라 누나에게 여행을 가자고 해야겠군요.”

“그래, 좋은 생각이야. 그녀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게. 하지만 그녀는 보나마나 자네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여행지를 선택하고 스스로 준비를 할 걸세. 잘 생각해 봐. 아라에게 선택받은 자네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말야.”

“저, 궁금한 게 한 가지 있는데…… 그럼 선배님도 아라 누나에게 선택을 당하신 건가요?”

“하하, 정말 기막힌 질문이로군. 의외의 답으로 들리겠지만 그녀는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 딱 세 번 선택을 받았다고 말한 적 있네. 첫 번째는 부모님, 두 번째는 나, 세 번째는 무대…… 그러니까 타인으로서 그녀를 선택한 사람은 아직까지는 나밖에 없는 셈이지.”

“그럼 아라 누나가 저 말고 다른 남자를 선택한 적이 또 있었단 말씀인가요?”

“아니, 마흔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네. 기회가 되면 자신이 선택하겠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지만 이번처럼 그녀 스스로 남자를 선택하고 사랑에 빠진 건 이번이 처음일세. 그래도 자네가 행운아가 아니라고 할 텐가?”

나는 운전을 하면서 룸미러로 뒷좌석의 두 사람을 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건성으로 그들의 말을 듣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도 모를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 나도 모르게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의 오장육부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뭔가, 이 미친놈들이 지금 주고받고 있는 얘기가 도대체 뭔가 말이다. 그들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도 아닌데 도무지 나의 머리는 회전을 하지 않았다. 자기 마누라의 애인을 만나고, 술을 처먹고, 같이 택시를 타고, 바다를 보러 간다?

남의 일인데도 왠지 모르게 팔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전처가 성인 나이트를 쫓아다니며 숱한 놈들과 밤을 보내고 돌아올 때에도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린 적은 없었다. 그때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녀에 대한 미련이 터럭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잠을 자고 오거나 말거나 그런 건 간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지랄발광하지 않고 적반하장 격으로 기물을 부수거나 나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더 이상 바랄 게 뭔가.

나는 사랑 같은 걸 믿은 적이 없다. 그런 건 아직 인생의 질감을 모르거나 그것을 알고도 외면하는 놈들이 만들어 낸 가당치도 않은 환각제 같은 거라고 믿고 있었다. 우리처럼 자고 싶어도 못 자고 먹고 싶어도 못 먹고 놀고 싶어도 못 노는 인간들에게 사랑이란 거저 줘도 마다할 애물단지 같은 것일 뿐이었다. 차라리 자지, 차라리 먹지, 차라리 놀지, 그런 걸 왜 부둥켜안고 생고생을 하나.

“자넨 지금 사는 곳이 어디지?”

“홍대 부근의 오피스텔에 살고 있습니다.”

“아라도 물론 거길 가 봤겠지?”

“네…… 몇 번.”

“그럼 자넨 우리 집에 와 본 적 있나?”

“아뇨. 설마, 제가…… 집엔 한 번도 방문한 적 없습니다.”

“그렇군. 그럼 앞으론 자주 오게. 내가 없더라도 자주 와서 아라와 시간을 보내고…… 내가 있을 때도 와서 같이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자구. 사는 게 어울려야 맛이 나지 각자 경계를 엄격하게 구분해 놓으면 정말 답답해. 네 구역 내 구역, 네 사람 내 사람…… 인생이 그게 뭔가.”

“그럼 선배님은…… 혹시 달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아니 없어. 난 아라를 사랑하지. 진정 아라를 사랑하네. 그 말이 그렇게 모순되게 들리는가?”

“아뇨. 놀라워서요.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전 정말 선배님처럼 그렇게 여자를 완전하게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어쩌면 그렇게…….”

“아니, 아니. 이건 허세도 아니고 과장도 아닐세. 그냥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문제야. 사랑을 소유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가 행복해지는 걸 원하고, 그녀를 나의 소유물로 생각하지 않아. 그래서 그녀의 영혼을 우주적인 영역으로까지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가 있다네. 그게 뭐가 그리 어렵겠는가. 또 반대로 내가 그녀를 소유한다고 해서 뭘 얻겠는가. 그녀의 육체? 그녀의 마음? 그런 걸 도대체 무슨 수로 소유할 수 있겠나. 사람들은 육체를 소유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런 거야말로 정육점 주인 같은 생각일세. 사람은 사람을 소유할 수 없고, 단지 상대의 정신적 영역을 고무시키고 확장시키는 일을 할 수 있을 뿐일세. 그게 아닌 한 모두 상대방을 괴롭게 만드는 소유의 문제로 전락하고 만다네. 그러니 자네도 아라를 소유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말고 그녀의 영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하네. 그것이 우주를 바라보는 유일한 인간적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사람이 어떻게 우주를 한눈에 볼 수 있겠는가? 오직 한 가지,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감지하는 것으로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일세.”

“정말…… 감동입니다.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선배님처럼 그런 영혼의 소유자가 되지 못할 것 같아요.”

순간 귀찌가 우욱, 하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구토를 하려는 자세였다. 나는 재빨리 차를 갓길에 세우고 운전석을 벗어나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턱수염이 귀찌를 부축해 밖으로 나와 등을 두들겨 주었다. 나는 속이 메슥거려 담배를 피워 물었다. 속이 메슥거리는 이유가 구토를 하는 귀찌 때문인지 그들이 주고받던 황당한 대화 때문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무려나 분명한 건 속이 메슥거려 미치겠다는 것뿐이었다. 젠장, 횟배를 앓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나.

다시 출발하자 턱수염이 휴게소가 나타나면 곧바로 진입해 달라고 말했다. 그래서 몇 분 뒤에 만남의 광장으로 진입했다. 그러자 턱수염이 휴게소 편의점으로 가 물과 몇 가지 음료를 사 왔다. 그는 나에게도 드링크제 하나를 건넸다. 그런 뒤 귀찌에게 토한 뒤이니 물을 좀 마셔 두라고 권했다.

만남의 광장을 빠져나와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하자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잠이 들어 버렸다. 그들이 주고받던 얘기의 충격에 비하면 너무나도 허망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후방에서도 전방에서도 달리는 차가 없어 오직 내 차의 헤드라이트만이 어둠의 심장부를 꿰뚫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전처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사는지, 딸년은 또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모든 것이 너무 막막하게 여겨져 눈두덩이 욱신거렸다.

30만 원을 주며 대구로 가자던 남자는 지금 다른 여자를 만나 잘 살고 있을까? 어쩌면 나처럼 여자에 질려 두 번 다시 사랑 따위는 믿지 않으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문제가 되는 것이니 불신자의 눈에 신자들은 모두 맹신도 아니면 광신도로 보일 뿐이다. 그것 없이도 세상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지지고 볶아야 하는가.

그날 밤 나에게 30만 원을 주었던 남자도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곯아떨어져 버렸다. 나는 그가 불쌍하고 가련하다는 생각을 하며 운전을 하다가 화장실에 가기 위해 옥천휴게소로 진입했다. 그런데 화장실에 갔다가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돌아와 보니 뒷자리에 곯아떨어져 자고 있던 그가 깨어나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도대체 여기가 어디냐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자초지종을 말하자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는 다짜고짜 다시 서울로 가자고 말했다. 할 수 없이 차를 돌려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가 요금을 얼마에 흥정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30만 원이라고 사실대로 말했다. 대구까지 가지 않았으니 나에게 주었던 돈에서 얼마 정도를 되돌려 달라는 요구를 하려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지갑을 꺼내 나에게 10만 원권 수표 세 장을 다시 건넸다. 나는 아랫배에 힘을 주고 그것을 다시 받았다. 그가 너무 불쌍하고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을 믿고 사는 놈들은 이렇게 비싼 수업료를 치러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으로 양심 같은 건 발가락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은 것이었다.

택시기사를 하면서 나는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태웠다. 별별 사람, 별별 사연을 다 보고 들었다. 하지만 세상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살아간다고 해도 나는 고작 남자 아니면 여자밖에 만난 적이 없다. 그리고 그들이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사연 중에 인생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고작해야 인간, 고작해야 인생살이뿐인 것이다. 마누라 애인하고 술 마시고 바다를 보러 가겠다고 20만 원씩 질러대는 저런 호사가들에게나 사랑은 씨알이 먹히는 환각제일 뿐이다. 가증스럽고 한심한 인간들, 너희가 인생을 알기나 하느냐. 나는 룸미러로 뒷자리에 곯아떨어진 인간들을 노려보았다. 그때 귀찌를 한 남자가 끙끙 신음소리를 내다가 불현듯 잠꼬대를 터뜨렸다.

“난 떳떳해!” 



3


두 명의 취객이 택시에서 내린 건 새벽 여섯 시가 좀 지난 뒤였다. 그때 나는 비치호텔 앞쪽의 백사장으로부터 경포해수욕장 입구 쪽으로 산책을 하듯 천천히 걸으며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었다. 바다를 찾는 사람들이 버리고 간 과자껍질이나 술병, 휴지조각 같은 걸 수거하기 위해 나는 날마다 동이 트기 전에 집을 나서 경포해수욕장까지 걸어온다. 그리고 상가 건물 일층에서 마대자루와 수거용 집게를 꺼내 들고 해변을 천천히 걸으며 갖가지 쓰레기를 수거한다. 칠 년 전 할멈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부터 시작한 유일한 세상 활동이다. 나이 칠십이 넘어 할 수 있는 세상 활동이 거의 없으니 이렇게라도 살아 있다는 걸 확인받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걸어 다니면서도 반송장 대접을 받을 건 불을 보듯 훤한 일이기 때문이다. 늙는다는 것,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일인가.

할멈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나는 진정한 혼자가 되었다. 진정한 혼자가 되기를 기다렸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라는 걸 처음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지금을 제외하고 평생 나는 혼자인 적이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여자 복이 많다고 친구들 앞에서 누차 자랑을 하며 살아온 터였다. 물론 그것 때문에 가정을 등한시하고 할멈에게 마음고생을 많이 시켰다. 캐나다로 이민 간 아들 두 놈은 할멈이 죽었을 때 얼굴 한 번 비치곤 지난 칠 년 동안 나에게 전화 한 통 걸어오지 않았다. 물론 아들놈들 나무랄 만한 입장이 아니다. 놈들이 어렸을 때 나는 딴살림을 하고 있었고, 사업을 한답시고 세상을 떠돌며 도처에 현지처를 만들어 동거를 했으니 나를 애비 취급하지 않으려는 심사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와 이 나이에 무슨 대접을 바라겠는가.

내가 경포호가 있는 초당으로 돌아와 묵묵히 죽음을 기다리는 건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나로 인해 평생 마음고생하다 세상 먼저 떠난 할멈에게 기이한 채무감이 남아서 이러는 것이다. 혼자라는 것, 그것을 독하게 견디며 나는 숱한 시간을 혼자 보낸 할멈에게 빚을 갚고 싶다. 혼자인 적이 없었던 젊은 날, 내가 찾아다닌 건 사랑이 아니라 여자였다. 사랑과 여자가 어떻게 다르냐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도끼로 장작을 쪼개듯 분명하게 잘라 말할 수 있다. 여자는 사랑이 아니고, 사랑은 여자가 아니다!

할멈이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겨진 뒤에야 나는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다. 젊은 날 나를 스쳐간 숱한 여자들 중에 진정한 사랑의 의미로 아로새겨진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돈과 섹스, 허영과 사치, 쾌락과 방종…… 애초부터 내가 찾은 게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여자였으니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말과 여자라는 말이 나에게는 도무지 섞일 수 없는 말처럼 여겨진다. 여자는 오히려 사랑이라는 말을 훼손하는 대상, 아니면 사랑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대상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살아생전 할멈을 여자로 본 적이 없다. 할멈이 나로 인해 마음고생을 하며 살게 된 연유가 바로 그것이고, 그것 때문에 할멈은 죽은 뒤에 비로소 나에게 사랑의 의미로 아로새겨진 것이다. 하지만 칠순이 넘은 뒤에 얻게 된 이 깨달음을 어느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아침마다 해변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우며 나는 평생 내가 버린 쾌락의 잔흔을 수거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세상 먼저 떠난 할멈을 향해 이렇게 중얼거리곤 한다. 이것 보시게, 그래도 평생 나에게 사랑의 의미로 남겨진 사람은 임자밖에 없네. 그걸 아는가? 평생 만석꾼 아버지의 재산을 다 말아먹고 칠순이 넘어 쓰레기를 줍는 나를 보고 아주 고소해 하시게나. 그리고 내가 저승으로 가거든 거기서는 임자가 나에게 유일한 여자가 되어 주시게. 클클.

택시에서 내린 두 남자가 서울에서 왔다는 걸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새벽마다 해변에서 쓰레기 수거를 하다 보니 나름 감식안이 생긴 것이다. 서울에서 온 사람들의 차림은 현지 주민들과 다를 수밖에 없고, 바다를 옆에 두고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술을 마셔도 바다가 간절해지지 않는 법이다. 새벽에 서울에서 택시를 대절 내거나 자가용을 타고 달려오는 족속들은 대부분 술의 힘으로 오는 경우가 많으니 바닷가에 설 때쯤엔 술이 깨고 기분이 황당해져 머쓱한 표정으로 해변을 어슬렁거리다 지친 기색으로 돌아가기 일쑤이다. 저들도 그런 부류려니 하고 나는 마대자루와 집게를 손에 들고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두 남자는 오는 동안 택시 안에서 잠을 잔 기색이 완연했다. 얼굴이 부석부석하고 머리 모양새가 많이 헝클어져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별다른 표정 없이 묵묵히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파도가 밀려오는 곳까지 바투 다가가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일출이 시작될 무렵이라 수평선 주변으로 붉은 기운이 변화무쌍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흰 티슈 한 장을 발견하고 내가 그들 뒤쪽으로 사박사박 걸어갔지만 그들은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사랑은 일출 같은 거야. 아주 짧고 아주 화려하지.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장엄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남겨질 수도 있지. 한낮의 태양을 올려다보며 일출의 순간을 되살리려고 기를 쓰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남겨지는 건 그저 빛뿐이지. 그런데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사랑에 대한 끈덕진 편견은 사랑이 항상 일출 상태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거야. 그것이 스러지는 걸 미치게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하는 거지. 그래서 사랑이 스러졌다고 난리를 치고 사랑이냐 아니냐를 놓고 싸우는 거지. 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빛의 소중함을 몰라. 어둠이 온 뒤에야 비로소 빛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알게 되니까 말야.”

“선배님 말씀은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는 선배님의 아내인 아라 누나를 일출로는 사랑하지만 빛으로는 사랑하지 못하는 거죠. 실제로 저는 그렇게 온 세상을 뒤덮는 평범한 빛이라면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할 거예요. 아라 누나가 아직은 저에게 찬란한 일출이기 때문에 사랑하지만…… 그게 저의 한계인 모양입니다.”

“이봐, 빛이 없다면 세상 모든 것들이 부패해. 빛이 어느 곳은 비추고 어느 곳은 비추지 않으면서 차별을 두던가?”

“…….”

“아라는 그런 빛이야. 그녀에게 일출이 되기를 원하지 말게. 만약 자네가 그녀에게 그런 걸 기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녀는 엄청난 상처를 받고 좌절하게 될 걸세. 그녀가 강하기 때문에 그만큼 상처를 많이 받게 될 거고, 그녀가 자네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상처는 더욱 깊어질 걸세. 일출이 아니라 그냥 빛으로 그녀를 사랑할 수는 없겠나?”

“…… 자신이 없습니다. 정말…… 이런 기분을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라 누나 때문이 아니라 선배님 때문에 기분이 점점 더러워지고 있어요. 이건 뭐죠, 도대체? 지난밤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선배님 스타일로 아라 누나를 사랑해 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으니 절더러 선배님 대역이라도 해 달라는 건가요? 미안한데 말이죠, 전 그냥 아라 누나와 불륜을 저지르고 싶어요. 선배님 모르게 짜릿한 스릴을 느끼며 아찔한 곡예를 하고 싶다구요. 한 여자 놓고 둘이 같이 살자는 것도 아니고 뭡니까, 이게, 도대체!”

말을 하고 나서 젊은 친구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훠이훠이 백사장의 모래를 짓이기며 턱수염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일출이 시작될 무렵, 턱수염은 일출을 향해 굳은 듯 서 있고 젊은 친구는 일출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극명한 선택의 순간, 나는 문득 태양을 등지고 걸어가는 젊은이에게서 내 청춘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묘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나의 가슴이나 머리는 어느 쪽으로도 선택을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다만 기억의 자서전이 있을 뿐이었다. 턱수염도 젊은 친구도 더 이상 나로서는 선택할 수 없는 망상의 영역일 뿐이었다. 내가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건 오직 쓰레기뿐이었으니까.

“할멈, 나도 당신 살아생전 이렇게 위해 줄 걸 그랬나?”

나는 등을 보이고 선 턱수염을 지나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파도 소리 때문에 나의 말이 그에게 들렸을 리 없겠지만 나는 그가 처해 있을 난감한 처지를 넉넉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가능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다는 건 그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완성되지 않았다는 건 감정과 감성에 대한 충실 지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의 사랑을 흉내 낸다고 해서 신기루가 실물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누나, 미안해. 난 이제 더 이상 누나를 만날 자신이 없어. 난 정말 이런 걸 원한 게 아닌데…… 저 개자식은 나에게 성자 같은 사랑을 요구해. 정말 소름이 끼쳐 못 견디겠다구.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도대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는 거냐구!”

쓰레기를 수거하고 해변 입구 쪽으로 걸어 나오자 턱수염에게 등을 돌린 젊은이가 해수욕장 입구의 벤치 앞에 서서 격렬한 제스처를 써 가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눈부시게 솟아오른 돋을볕이 그의 지친 육신을 포박해 빛의 영역에 고스란히 감금당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손을 흔들 때마다 벤치에 기댄 그의 긴 그림자가 망자의 혼령처럼 한없이 불온하게 흔들렸다.

일출이 끝날 무렵.《문장 웹진/2008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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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1
우리는 작고도 찐득한

우리는 작고도 찐득한 전예진 나는 작년 가을에 태어났다. 세진이 막 취업 준비를 시작한, 피딱지의 말처럼 영 좋지 않은 시기였다. 오른쪽 코 안쪽에 몸을 늘어트린 피딱지는 세진이 한동안 코 파기를 멈춘 시절을 전설처럼 이야기했다. 피딱지의 말에 따르면 세진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코 파는 습관을 고쳤다. 고등학생 때 밤샘 공부를 하다 가끔, 주위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코를 후비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자주는 아니었다. 코 파는 습관은 세진의 대학 졸업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학창 시절보다 3밀리미터 더 기른 무자비한 새끼손톱과 함께. 우리 중 누구도 피딱지가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알지 못했다. 피딱지는 세진의 손길에 조금씩 뜯어졌지만, 남은 손으로 피와 이물질을 그러안아 매번 되살아났다. 피딱지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오지랖이 넓었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촐싹거리며 점막을 두들겨댔다. 우리는 점막을 타고 울리는 피딱지의 말을 들었다. 피할 길이 없으니 듣는 수밖에 없었다. 무릇 코딱지는 코로 들어오는 공기에 실린 먼지와 세균을 거르며 생겨나는 존재다, 이 말이야. 이 한몸 바쳐 비강을 지키는 역할이라는 거지. 그러려면 세진의 몸과 마음에 들어오는 이물질을 걸러 줘야 해. 공기에 바이러스가 있다? 그럼 잡아야지. 세진이 악몽을 꾼다? 그것 또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일이야. 피딱지는 사람의 목소리도 낼 수 있었다. 비강 안쪽을 향해 소리치면 세진은 잘못 들은 소리나 이명 정도로 생각하고 애꿎은 귀를 후볐다. 기껏해야 늦었으니 일어나라, 자전거 조심해라, 같은 짧은 말에 불과했지만, 어쨌거나 코딱지가 말을 한다니 얼마나 놀랄 일인가. 적어도 막 태어난 나에게는 코 아래 입이라는 곳이 있고 그곳엔 혀가 돌아다닌다는 말만큼이나 놀라웠다. 피딱지는 심지어 아주 희미하지만 냄새도 맡는다고 했다. 콧속에 오래 살면 그럴 수 있다고, 서당 개 삼 년에 풍월을 읊듯이 오래 버텨낸 코딱지는 냄새를 맡게 된다고 말했다. 처음에 나는 피딱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또 들었다. 피딱지가 하는 모든 말이 흥미로웠다. 그러다 몇 번의 대학살을 겪었다. 친하게 지내던 코딱지들이 몇 초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즈음 나는 더 이상 아주 작은 코딱지가 아니었고 피딱지의 말은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노인의 잔소리로 들렸다. 시간이 지나면 너도 이해하게 될 거야. 피딱지는 말했다. 삶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작고 그럼에도 또 중요한 존재인지. 그날 오후 피딱지는 새끼손톱에 뜯겨 나갔고 그 말은 피딱지의 유언이 되었다. 세상을 떠난 많은 코딱지들처럼 나도 몇 번의 위기를 맞이했다. 다른 이들이 쫓겨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콧구멍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코털에 맺힌 먼지와 이물질을 싸잡아 몸집도 불렸다. 마침내 콧구멍과 비갑개 사이, 그러니까 콧구멍 가장 안쪽 천장에 자리 잡았을 때쯤 내 몸은 우리의 숙적 새끼손톱보다 두 배는 컸다. 어느새 나는 오른쪽 콧구멍에서 가장 크고 오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코끝에 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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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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