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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 작성일 2008-05-30
  • 조회수 4,056

 

침묵




전혜정




우리는 양의 가죽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태양 아래, 그 눈부신 빛 가운데 자신의 두 발로 당당히 이 세상의 흙을 밟을 수 없는 인간들이었다. 우리는 기억할 수 없는 이전부터 인간임을 스스로 포기하기를 강요당한 이들이었다. 너희들은 인간이 아니다, 라고 그들은 말했었다. 왜, 라는 질문은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말했으므로.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려 하지마라, 만일 생각이 떠오르려 한다면 너희들의 머리를 날선 바위 끝에 힘껏 박아 버려라,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거라, 진정한 생은 육신의 죽음과 동시에 시작되리라…….

 

 

그들은 수없이 말했었다. 그들은 우리를 미개인, 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우리를 이단자, 라고도 불렀다. 그들에게 미개인은 곧 이단자이며 이교도였다. 차라리 우리는 이교도였음이 좋았을 것이다. 우리의 유일신을 자신들의 수많은 예언자중 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이교도들의 실체를 본 이는 우리 중에 아무도 없었다. 어떤 이는 이교도의 피부색이 석류처럼 붉거나 오디처럼 까맣다고 했고, 어떤 이는 그들이 말을 다루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 아무리 사나운 야생마라도 불과 수분 내에 온순한 여인처럼 길들일 수 있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그들이 기근이 들면 죽은 동족의 고기를 먹어 목숨을 부지한다고도 말했다. 이교도는 짐승과 진배없는 이들이었다. 인간과 짐승의 어중간한 곳에 위치한 우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는 차라리 짐승이기를 바랐다. 짐승은 그 피를 손에 묻히는 것조차 불결하다 하여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단칼에 숨통을 끊어 주기에. 우리는 스스로의 무지함으로 이교도의 신을 알지 못하여 이단자로 낙인찍혔다.

빛! 작렬하는 한낮의, 굵은 거품을 내뿜으며 끓어오를 듯한 사위의 빛 아래서 우리는 네 발을 가진 더러운 가축으로 화했다. 두 발로 섰을 때에는 볼 수 없었던 시시각각 다변하는 빛의 흐름이 가축의 자세에서는 놀랍도록 선명하게 보였다. 하늘로부터 여과 없이 내리 비춰 매끄럽다 못해 끈적이는 점성의 올리브유처럼 땅 위의 모든 것들에 슬며시 녹아드는 빛의 입자들. 양떼의 형편없이 엉킨 땟국 전 털가죽 위에, 곳곳에 박혀 있는 잿빛 반암 위에, 파헤쳐진 흙더미와 그 속에 꿈틀거리는 작은 땅벌레들의 반들거리는 등딱지 위에도 빛은 그들이 말하던 신의 공평함 같이 하등의 차별 없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현란한 빛의 향연 앞에 이윽고 우리의 두 눈은 거짓된 신의 섭리 앞에 캄캄해졌고, 시력을 상실한 육신에서 뻗어 나온 앞발이 된 두 손과 맨살의 팔꿈치를 제멋대로 웃자란 날선 풀숲에 사정없이 긁히며 생채기마다 배어 나오는 핏물에 내려앉은 대기의 갖가지 먼지와 양들 특유의 동물성 냄새를 오직 불분명한 감각으로만 느껴야 했다. 눈가에 매달린 어둠의 미세한 덩어리들을 애써 떨어내고 땅바닥과 맞닿을 듯한 고개를 간신히 들면, 눈앞에 수백의 실룩대는 허연 털투성이 궁둥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정경과 함께 그 빌어먹을 소음, 양떼들이 저마다 울어대는 구역질나는 소리가 귀청을 울려댔다. 그것들은 늘 그렇듯이 습관처럼, 주변을 배회하며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리는 늑대와 승냥이의 존재를 다른 양들에게 알리기 위해, 그리하여 허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들의 두루뭉술한 몸뚱이를 부디 보호해 달라고 주인에게 애원하기 위해 끊임없이 울어대는 것이었다. 고원에 방목 중인 양떼에게 위험은 언제나 도처에 널려 있었다. 방목, 자유롭게 놓아둔 가축의 무리. 그렇다. 그들은 우리를 양떼의 일부로 놓아두었다. 우리는 경계가 없는 이 고원에서 양으로써 자유로웠으며, 또 양으로써 양치기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애로운 신께 감사하라. 너희들은 이제 진정한 신의 양으로 거듭나기 위해 가축인 양들의 틈에서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극심한 고통으로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서 재판관은 우리에게 말했었다. 정말이지 그들은 놀라운 자들이었다. 어떻게 하면 말하지 않는 이의 굳게 닫힌 입을 열게 할 수 있는지,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송두리째 그들의 면전에 까발리게 할 수 있는지 소위 방법과 기술을 아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음란한 사탄의 자식들, 이라고 불렀다. 그 무엇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대죄를 지은 죄악 된 무리들이며 공의로운 신의 심판에서 결코 피해갈 수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우리는 왜, 라는 질문을 그들에게 결코 할 수 없었으므로 옥죄는 공포와 참회의 눈물 속에서 그들 앞에 납작 엎드려 용서를 구할 도리밖에 없었다. 용서를 구하는 탄원이 점차 거세질수록 그들은 더욱 무섭게 목청을 돋워 우리가 저지른 죄악의 세세한 항목들을 일일이 열거했으며, 그 엄청난 죄악의 양에 놀란 우리는 종국엔 말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엄습하는 눈물의 파도 속에서 우리 중 어떤 이가 그들에게  탄원했다. 하지만 재판관님! 저희들은 유일신을 단 한 번도 부정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저희들은……분절된 문장은 끝맺음 되지 못했다. 곧 분격한 재판관의 외침과 함께 우리는 전부 오라에 손과 발을 묶여 갖가지 고문대가 즐비한 마을의 광장으로 끌려 나갔다.

우리의 죄는 선과 악을 판별하는 능력이 전무했다는 것. 성스러운 능력의 원천은 유일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우리는 그때까지 자신들이 믿었던 관습과 전통을 모조리 부정하도록 강요받았다. 우리는 자신들을 부끄러워하도록 강요받았다. 부끄러움. 태초에 신께서 세상을 지으셨을 때, 최초의 인간 되었던 남자와 여자는 금지 된 열매를 따먹고 자신들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 부끄러워 엮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부를 가렸다. 부끄러움, 인간이 죄악에 다가갔을 때 느끼는 본능적 감정. 하지만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한단 말인가. 아악……아아아아악……아아아아아악……. 우리의 혈연들이 한 사람씩 고통에 몸부림치며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러대는 순간, 그 지옥의 밑바닥에서도 우리는 부끄러움에 대해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유일하게 느끼는 부끄러움은 지금, 양떼의 궁둥이들을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 멍청하고 무질서한 가축들의 뒤꽁무니를 쫓아 무성한 잡초를 우리의 앞발과 뒷발로 있는 힘껏 짓이기며 또 다른 산꼭대기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었다. 맨몸 위에 입은 양의 가죽은 해가 뜨기 전에 이미 육중한 철갑이 되어 우리의 영혼까지 짓눌러 대었다. 머릿속은 자연스레 하얗게 표백되어 어느 찰나 둥둥둥, 거리는 북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둥둥둥, 연속해서 들려오는 북소리는 전신을 무지막지한 구타처럼 후려갈기며 해가 정상에 오르기까지 무절제한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연주가 막바지에 이르면 흠신 두들겨 맞은 육신은 마약에 찌든 것처럼 노곤해졌고, 정오의 작렬하는 태양에 바짝 달구어진 뜨거운 흙이 거북이의 등껍질처럼 단단해진 네 발의 굳은 살덩이들에 불그스레한 자국을 점점이 새겨 넣었다. 우리의 네 발에 십 수개의 화인이 뚜렷이 새겨질 무렵, 뒤이어 사방을 에워싸는 공기의 미묘한 진동음이 양들의 울음소리 위에 덧입혀져 실로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에 휩싸이도록 우리를 유도하는 듯했다. 비록 우리가 원치 않을지라도. 그랬다. 그 감정의 실체는 분명 강요된 것이었다.            

영혼의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하긴, 어쩌면 회개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기도 했다. 우리 마을의 본당신부는 늘 설교 시간마다 회개를 강조하곤 했었다. 회개하시오. 신께 순전히 고해하시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여러분이 고하는 음성에 신은 언제나 귀를 기울이실 것이오. 인간은 신을 떠나서는 자신의 잣대로 궁극적인 선한 삶을 절대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명심, 명심하시오……. 그러면서 신부는 설교의 마지막엔 꼭 꽤 두툼한 책을 두 손으로 높이 들어 회당에 모여 앉은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값비싼 양피지로 제본된 그것은 여러 세기에 걸쳐 전해진 신의 말씀을 기록한 원본 성경의 필사본이었으며, 마을에 유일한 책이었다. 신부의 두 손에 들려있는 성경은 정작 설교보다 더 강력한 신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하곤 했다. 책은, 아니 성경은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으므로 우리는 살아 있는 신을 대하듯 그것을 우러러보았다. 사실 우리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천상의 신은 우리 같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먼 곳에 동떨어져 있어서 열렬한 믿음으로 화답하기에는 깊은 괴리가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감히 성경을 똑바로 마주볼 수도 없었고, 다만 두려움에 온 몸을 덜덜 떨어대며 누가 볼 새라 곁눈질로 슬며시 마치 허공의 저 편을 보듯 초점 흐린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대단히 위협적이며, 어떤 사술과도 비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닌 영물을 보듯이. 나중에 재판관인 그들은 마을의 신앙생활에 관해 우리가 하는 진술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특히 사술과 영물이라는 단어에 거의 경기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영물이라니! 혹시 성물을 잘못 말한 것이 아니냐! 갑자기 초조한 기색을 보이며 그들은 우리를 다그쳤다. 그러나 우리의 마을은 도시로부터 한참 떨어진 후미진 산중턱에 있는 곳이라 성물을 본 적도, 알 수도 없었다. 본당신부도 성물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영물이든 성물이든 간에, 주일마다 한 번씩 설교시간마다 잠깐씩 귀중한 모습을 드러내는 성경이 회당의 깊숙한 금고에 잠들어 있을 때면, 신부는 예의 그 거추장스러운 희디 흰 사제복을 벗어 버리고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통 좁은 바지와 허리끈으로 졸라매는 장옷을 입고 온 마을을 휘젓고 돌아다녔다. 표면상 이유는 온갖 유혹에 노출된 신의 어린 양 된 마을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일상에서 돌봐 주기 위해서였지만, 우리는 신부가 관심을 가지는 어린 양들이 어린 소녀와 과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신부의 관심사에 대해 뒷말을 쑥덕대며 비난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 역시 신부이기 이전에 마흔 살이 채 되지 않은 혈기 왕성한 남자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소소한 재미라도 없다면 어찌 따분한 시골 마을에서 언제 도시로 부름 받을지 모르는 답답한 상황을 견딜 수 있었겠는가. 신부가 도시에서 이곳으로 좌천된 것은 공공연한 사실로 알려져 있었다. 어떤 불미스런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우리 중 대부분은 신부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그 일이 일어난 후 신부의 평판은 걷잡을 수 없이 곤두박질하게 되었다.

붉은 머리의 두 여자.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허리께까지 똑같이 기른 모녀는 작은 몸집까지 비슷해서 뒷모습만 보면 여간해선 알아볼 수 없었다. 먼저 신부의 정부가 된 여자는 열네 살의 딸이었다. 얼굴은 못생겼으나 나이에 비해 유독 둥글게 부풀어 오른 가슴이 숙성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초경도 아직 치르지 않았다는 말이 분분했지만, 신부는 거리낌 없이 여자아이를 취했다. 문제될 만한 일은 없었다. 자신의 딸을 신부에게 취하도록 충동질한 이가 바로 그 애의 어머니인 또 다른 붉은 머리의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마을에서 맹목적으로 신부를 추종하는 무리에 속했던 여자였다. 신의 전능한 매력을 등에 업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저돌적으로 접근하는 신부에게 마을 여자들 대부분이 속수무책으로 이끌렸다.

우리는 늘 부족한 음식 때문에 굶주렸다. 멀건 귀리죽과 딱딱하게 굳은 호밀 빵으로 간신히 허기만을 면하고는 부족한 기력을 쥐어짜서 해가 뜨고 지기까지 우리의 소유가 아닌 땅을 경작하고 가축을 기르는 과도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마을은 도시에서 거주하는 어느 귀족의 영지였으나, 벌써 오 년이 넘게 그의 대리인인 관리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본당신부와 비슷한 연배인 관리는 마을에서 드물게 활력이 넘치는 사내였고, 몸집도 당당했다. 두 중년사내는 각각 우리의 정신과 생활을 지배했으며 자신들의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 서로의 영역을 결코 침범하지 않았다. 비록 이를 악물며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였지만, 나름대로 우호적인 관계였다. 붉은 머리의 두 여자가 그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기 이전에는 그랬다.

여자란 것들은 전부 죄악 된 존재들이다. 나중에 우리에게 새로운 복음을 전한 ‘그들’은 여자란, 스스로의 죄로 인해 주기적으로 피 흘리는 더러운 것들이라고 설교했다. 여자를 멀리하라. 될 수 있다면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희들의 두 눈이 더럽게 오염 될까 두렵구나. 그러나 완전한 금욕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어설픈 금욕 대신 완전한 방종을 택하라……. 우리는 정말이지 무엇도 알 수 없었다. 파멸의 구덩이는 우리를 한번에 삼키기 위해 서서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훗날 본당신부는 열네 살 된 붉은 머리 계집아이를 마녀, 라고 칭했다. 과부인 어머니가 차린 주점의 뒷방에서 그 어린 것이 어찌나 크게 여자의 은밀한 기쁨을 크게 소리 내었던지, 주변을 지나던 마을 사람 몇몇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여 우르르 소리가 들린 현장으로 몰려갔었던 것이다. 벌거벗은 여자아이는 자신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붉게 달아오른 음부가 훤히 보일 만큼 두 다리를 한껏 양옆으로 벌려 위로 치켜들고 있었고, 윗옷만을 입은 신부는 자신의 부풀어 오른 하체 일부를 막 여자아이에게 들이밀려는 중이었다. 신부는 숨을 헐떡이며 여자아이에게 말하고 있었다. 자, 이제 너에게 복음을 전한다! 신부의 말에 여자아이는 커다란 젖가슴을 마구 흔들어대며 키득거렸다. 열린 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들과 시선이 마주친 후에도 여자아이는 벗은 몸을 가릴 생각도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음탕한 여자아이의 웃음소리는 오래도록 우리에게 회자되었다. 우리들 중 여자아이의 웃음소리를 들은 이가 실제로 누구였는지는 곧 소문 속에 묻혀 버렸다. 모두들 자신이 그 상황을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소리 죽여 떠들어댔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끼리 농토와 방앗간과 주점에 모여 앉아 떠들어댈 적마다, 종일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려 지칠 대로 지친 이들에게 표현하기 힘든 기묘한 활력이 생겨나며 모두들 만면에 홍조를 띤 채 희희낙락하였다. 마치 계속되는 양떼의 지긋지긋한 울음소리처럼. 낮이고 밤이고 양들은 그 빌어먹을 울음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사방이 열린 산속 공간을 가득 메우며 퍼져나가는 양들의 울음소리는 가늠하기 힘들 만큼 먼 곳에서부터 메아리쳐 되돌아와 우리의 귓가에 한시도 쉼 없이 울려대는 것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것들은 양떼가 아니었다. 우리는 양들의 울음소리에 에워싸여 있었다. 그것들이 내는 울음소리가 우리를 견딜 수 없게 포박하며, 우리 자신을 죽음에 이르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그들이 왜 우리에게 그토록 관대하기 짝이 없는 판결을 내렸는지 이제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우리가 스스로를 벌하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우리가 공의로운 신의 이름 아래 자복하며 죄책감에 몸부림치다가, 종국엔 양들의 울음소리를 병풍 삼아 숭고한 자기 살해를 행하도록 예정되어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죽고 싶지 않았다. 죄책감은커녕, 뼛속까지 사무치는 극도의 분노만이 양의 가죽을 입은 우리의 몸속 가득 들어차 있었다. 매순간마다 솟구쳐 오르는 분노에 우리는 낮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마치 양떼처럼. 저 홀로 눈부시게 타오르는 태양, 그 빛나는 하늘로부터 내리꽂히는 수백, 수천 개의 확확 단 창살이 보이지 않는 감옥을 지어 네 발 달린 우리를 가두고 있었다. 살아 있는 빛의 감옥은 우리의 주위를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심지어는 네 발로 엎드린 채 오줌을 찔끔거리고 된똥을 눌 때에도.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태양의 날선 두 눈은 더럽고 허연 털 뭉치들 가운데 교묘히 위장한 마흔 두 명의 죄수들을 그예 찾아내고야 말았다. 부패한 노른자위 같은 태양의 샛노란 열기는 언제나 우리를 향해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다그치듯이 내리퍼부어졌다. 마치 그들이 우리에게 그러했듯이. 아아, 우리가 아직도 인간이었단 말인가! 왜 이토록 생생한 기억이 떠올라 우리를 또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우리에게 잔인했다. 우리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두 명의 병졸을 시켜 오라에 묶여 광장으로 끌려온 우리 중 한 사람을 무작위로 다짜고짜 중앙에 설치한 고문대로 끌고 나갔다. 마을의 유일한 목공의 스무 살이 채 안 된  둘째 아들이었다. 또래에 비해 키가 유난히 작아 아이, 라는 별명을 가진 청년이었다. 건장한 병졸들에게 양팔을 결박당해 끌려가는 아이는 두려움에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했다. 우리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좀 멍한 상태였다. 광장은 더 이상 우리가 늘 지나다녔던 곳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던 수동 맷돌이며 빵구이 화덕이 어느새 치워져서, 우리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흉측한 고문기구들이 열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놀라운 광경 앞에서 우리는 모두 침묵했다. 간신히 고문기구들이 눈에 익숙해지자, 저 끝에 우리의 키 높이를 두 배는 훌쩍 넘을 듯한 나무로 만든 단이 보였고, 그 단 위에 일렬로 앉아 있는 세 명의 재판관이 보였다. 심판관들의 얼굴은 거리가 멀어 세세한 이목구비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핏기 없는 밀반죽 같은 얼굴을 완전히 감싸고 있는 뾰족한 고깔 모양의 검은 모자가 하늘을 향해 도발적으로 솟아 있었다. 병졸들은 아이를 세 명의 재판관들 앞에 세워 놓았다. 기세등등하게 열기를 내뿜는 태양은 바야흐로 중천에 떠 있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울 만큼 지독하게 더운 날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침묵. 침묵 속에서 말없이 그들은 아이를 주시하고, 또 주시하고 있었다. 아이의 전신이 멀리 떨어진 우리에게도 뚜렷이 보일 만큼 격렬하게 떨리더니, 이윽고 입고 있던 바지가 조금씩 젖어드는 것이었다. 오줌을 지린 아이는 자리에 주저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갑자기 우리 중 뒤쪽에 있던 누군가가 어어어, 괴상한 소리를 내질렀다. 아이의 아버지인 목공이었다. 목공이 허공을 한 손으로 가리키며 뭐라고 이어서 소리를 지르려 하자,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병졸 몇몇이 튀어나와 목공의 입을 억지로 벌리고 마른 볏짚 한 뭉치를 집어넣고는, 서로 돌아가며 목공의 머리를 들고 있던 몽둥이로 세게 후려쳤다. 목공은 머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정신을 잃었다. 병졸들은 쓰러진 목공을 질질 끌고 광장을 가로질러 갔다. 병사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목공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기묘한 문양을 그리며 흙바닥에 흘러내렸다. 아이와 불과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옮겨진 목공의 사지를 네 마리의 말에 연결된 긴 밧줄로 단단히 묶었다. 우리는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영문을 알 수 없어 그저 숨죽여 웅크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양의 가죽 밑에 웅크리고 숨어 우리를 지긋지긋하게 쫓아다니는 태양과 양치기의 감시의 눈초리를 가까스로 피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에도 우리는 힘없이 시선을 내려뜨리며 우리가 믿는 유일신께 제발 될 수 있다면 그곳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기를 수없이 기도했었던 것이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는 결국 신께 전달되지 못했다. 침묵을 깬 그들은 아이에게 ‘그들’을 아느냐고 물었다. 아이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처 대답을 못하자, 그들은 새로운 복음을 전한다는 ‘그들’을 아느냐고, 또 물었다. 아이는 불에 덴 듯 전신을 격렬하게 떨어대며 울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 다시 물었고, 아이는 울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들 중 왼쪽에 앉은 재판관이 턱짓으로 단 밑에 서 있던 병졸에게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병졸은 지체 없이 사지를 묶은 목공에게 뛰어갔다. 허리춤에서 채찍을 빼어 든 병졸은 정신을 잃은 목공의 몸에 다섯 번의 채찍질을 연달아 했다. 목공이 신음소리를 내며 두 눈을 뜨자, 기다렸다는 듯 목공의 사지에 밧줄로 연결되었던 네 마리 말의 고삐를 쥐고 있던 네 명의 병졸들이 천천히 말들을 움직였다. 네 마리의 말들은 목공의 사지가 가능한 한 넓게 벌려지도록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말들에 연결된 밧줄이 팽팽해지자, 목공은 전신을 뒤틀며 무시무시한 비명을 질러대었다. 으아악……으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악, 목공의 비명은 하늘로부터 가득 쏟아져 내리는 열기를 갈가리 찢으며 광장의 전면에 튕겨져 퍼져나갔다. 우리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목공의 비명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높아지던 어느 찰나, 왼쪽 팔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우두둑,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몸통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말들의 움직임에 따라 목공의 왼쪽 팔이 기형적으로 늘어났다. 아, 압니다! 그들을 압니다! 돌연 아이가 흙바닥에 머리를 짓찧으며 소리쳤다. 아이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핏물로 주위의 흙이 검붉게 물들었다. 우리는 모두 그들을 압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지냈습니다! 아이는 울먹이며 말했다. 아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목공의 오른쪽 팔과 두 다리가 차례로 몸통에서 떨어져 나갔다. 목공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들이 우리 마흔두 명 모두의 머리 가죽과 등과 꼬리뼈에 양의 가죽을 꿰맬 때 어떤 비명도 지르지 못했듯이. 우리는 그들에게 제대로 변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애초부터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듣고자 하지 않았다. 우리의 말은 고작 몇 마디의 분절된 단어였으며, 하찮은 양들의 울음소리였다.

그러나 비록 형식상의 절차였을 뿐일지라도, 심문은 계속되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또 다른 ‘그들’에 대해 진술해야 했다. 그들은 묻고, 또 물었다. ……. ‘그들’이 언제부터 이곳에 왔느냐……. 너희들 가운데 누가 ‘그들’과 가장 가까웠느냐……. ‘그들’의 잘못된 설파에 왜 너희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느냐……. 왜, 왜, 왜. 우리는 코와 귀가 베어지고 눈을 뽑히기도 했고, 고환에 무거운 추를 달고 십자가에 거꾸로 결박당해 쇠못이 박힌 채찍에 맞기도 했고, 벌겋게 달궈진 인두로 이마와 뺨과 온몸에 낙인이 찍히기도 했고, 발이 묶인 채 나무에 매달려서 굶주린 개와 돼지에게 산 채로 뜯어 먹히기도 했고, 말뚝에 묶여 해충과 쥐가 득실대는 동굴에 한 달이 넘게 방치되기도 했고, 양 발에 식용유를 뿌리고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에 던져지기도 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이라도 말해야 했다. 만일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면, 오직 말하기 위해, 말을 지어내기라도 해야 했다. ……재판관님! 제발, 제에발 믿어 주십시오, 제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저는 ‘그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어수룩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단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하기 위해 우리를 심문했던 것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사실에서 진술이 멀어질수록, 우리의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은 강도를 더해 갔고, 우리는 자포자기하여 스스로를 기꺼이 파멸 속에 내던졌다. 마침내 우리는 자신들이 이단자임을 인정했다. 우리는 우리의 유일신이 약속한 천국에서 영원히 내침을 당하는 것보다 육체의 끊이지 않는 고통이 더욱 두려웠다. 그리고 이것 역시 그들이 우리를 이단자로 단정함에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되었다.

석 달 만에 마을 사람들의 절반이 이단재판으로 목숨을 잃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는 이미 눈물이 말라 버렸다. 그들과 ‘그들’은 우리에게 한결같이 신의 구원을 약속했었다. 본당신부는 우리에게 회개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했으나, 그 역시 파문되어 두 눈이 뽑힌 채 마을의 하나밖에 없는 석탑 안에 갇혀 기아의 형벌을 받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단 재판이 있기 사흘 전의 일이었다. 돌연 또 다른 ‘그들’은 행적이 묘연해졌다. 더불어 ‘그들’을 마을로 데려온 관리도 자신의 정부인 붉은 머리 과부와 함께 마을에서 종적을 감췄다. 전날 과부의 딸인 열네  살의 붉은 머리 여자아이가 자신의 정부였던 본당신부로부터 마녀시험을 받던 도중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두 명의 사내와 모녀가 뒤얽힌 치정사건의 발단은 신부 못지않은 관리의 과도한 정욕에서 시작됐다. 먼저 어머니인 붉은 머리 여자를 정부로 삼은 관리는 시간이 흐르자 그녀의 딸에게도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이미 서너 달 전부터 신부의 정부였던 붉은 머리 여자아이는 관리의 요구에도 별 스스럼없이 잠자리를 같이 했고, 이 난잡한 관계는 얼마 후 과부가 눈치 챌 때까지 계속되었다. 분격한 과부가 딸의 행실을 고자질하러 앞뒤 가리지 않고 신부의 침실로 뛰어 들어간 것을 계기로, 이들은 각자 서로의 짝을 맞바꿔 가며 온 마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으로 정사를 벌였다. 네 명의 남녀로 인해 마을 전체에 기묘한 활력이 생길 지경으로. 그러나 어느 날 신부와 여자아이의 밀회장소인 주점 뒷방에서 질펀한 정사를 나누는 모습을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관리가 목격했을 때 이들의 부적절한 관계는 갑작스런 파국을 맞았다. 흡사 간질이라도 걸린 것처럼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허연 거품을 입에 물고 벌거벗은 남녀를 지켜보던 집사는, 그대로 주점을 뛰쳐나와 이해하기 힘든 말을 연신 크게 되뇌며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었다. 신께 완전한 회개를 하기 위해 성지순례를 갔다는 풍문이 들려왔지만, 마을 사람들 중 누구도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관리는 세 명의 중년남자와 함께 마을로 돌아왔다. 세 명의 중년남자들은 소위 새로운 복음을 전한다는, ‘그들’이었다. ‘그들’의 교리에 깊은 감화를 받은 관리는 곧 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자신의 권한을 십분 활용하여 ‘그들’의 충직한 파수꾼이자 첫 번째 신도임을 자청했다. 극단적인 금욕을 강조하는 ‘그들’과 추락한 자신의 도덕성을 벌충하기를 원하는 신부의 이해가 맞물려 붉은 머리 여자아이는 사악한 마녀로 처형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무엇으로도, 신의 은총으로도 씻길 수 없는. 신민들에게 예정된 구원의 역사에서 영영 배제되어 버린 우리처럼.

여자아이는 밧줄로 양 손이 결박당한 채 성난 신부의 추종자들에 의해 마을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는 광장으로 끌려왔다. 치마를 걸친 둥 만 둥 맨발로 끌려온 여자아이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형편없었다. 산발한 붉은 머리는 엉켜 있었고 때 묻은 속옷은 구겨지고 찢어져서 밤새 격심한 정사가 있었음을 엿보여 주고 있었다. 광장의 중앙에 놓여 진 의자에 앉아있던 신부는 준엄한 어조로 붉은 머리 여자아이가 마을 전체에 음탕한 기운을 퍼트리고 있다고 말했다. ……틀림없이 태에서 나올 때부터 사탄의 어둠을 타고난 것이오. 심지어 이 아이가 다섯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자신의 아비를 사술로 호려 잠자리를 한 뒤 악마의 검은 연기로 질식시켜 죽였다는 제 어미의 증언도 있소. 신부의 추종자들 틈에 서 있던 붉은 머리 과부가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저 음탕한 아이가 내 딸일 리가 없어요! 필시 사탄이 내 진짜 딸을 악귀의 자식과 바꿔치기 한 것이 분명해요! 그때 신부의 앞에 강제로 무릎을 꿇려져 있었던 여자아이가 돌연 온몸을 마구 흔들어대며 큰 소리로 미친 듯이 웃어대었다. 광장에 울리는 발작적인 웃음소리에 깜짝 놀란 신부와 마을 사람들은 얼마 동안 침묵 속에서 우두커니 멈춰 서 있었다. 도저히 불가해한 현상 앞에서 말없이 침묵하는 것은 우리의 습관이었다. 습관은 오래 전부터 우리의 육체와 영혼에 선명하게 돋을새김 되어, 신께 버림받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무기력한 나날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었다. 살아가기 위한, 오직 살고 싶은 욕망을 위한 습관은 양들인 우리의 삶에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굴종이든 굴욕이든 우리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양 된 우리의 소망은 그늘 속에 피하는 것이었다. 양치기의 매서운 눈초리를 피해 이 지상에서 부디 우리의 털투성이 몸뚱이를 숨길 수 있는 곳을 갈구했다. 그것이 비록 작디작은 순간의 안식처일지라도. 광폭한 열기 어린 하늘과 맞닿을 듯한 이 고원에서는 여간해선 그늘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타오르는 지독한 갈증에 바싹 메말라 쩍쩍 갈라진 농토처럼 흉하게 각질이 일어난 입술을 백태 낀 혓바닥으로 연신 핥으며, 손바닥만한 그늘이라도 동족들보다 먼저 찾기 위해 눈을 번뜩였다. 우리는 완전한 양이 되고 싶을 때도 있었다. 미련하리만치 우직한 인내력으로 종일 입 안 가득 우물우물 풀을 씹어 대는 양떼의 진정한 일부가 되어 그늘 따위에 집착하는 한심한 짓거리는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내 나약한 우리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시원한 나무 그늘을 머릿속에 그리며, 아니 가시덤불이 드리우는 성긴 그늘일망정 우선 머리를 쑤시는 것 같은 태양빛이라도 피해 보려는 얄팍한 심산으로 쉴 새 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인간이었을 때 허기졌던 우리는 양으로 불리는 지금 역시 허기졌다. 위벽을 싹싹 철심으로 긁는 듯한 허기와 폭염이 사이좋게 손을 맞잡고 우리의 육체를 공격하면, 달리 호소할 대상이 전무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신께 소리 높여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양떼의 울음소리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진정 세상을 치리하는 지존한 당신의 뜻입니까! 신이시여, 제발 우리의 탄원을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물론, 우리의 신은 응답이 없었다. 네 발로 세상에 엎드린 우리의 소리 없는 외침이 또 다른 ‘그들’의 말대로 헛되고 헛된 것이었단 말인가. ‘그들’은 말했었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자들아. 유일신의 신성(神性)으로는 죄로 물든 너희들의 더러운 본성에 결코 응답하실 수 없다. 너희들이 어찌 신의 고결한 빛에 다가갈 수 있겠느냐. 빛이 임한다면, 너희의 두 눈은 어둠같이 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의 다른 속성인 인성(人性)에 다가간다면 너희들은 세상에서 구원을 얻게 되리라.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토록 불경한 말은 어디에서도, 누구에게서도,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신이 인성을 지니고 있다니! 만일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신이 비천한 우리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오줌을 누고, 똥을 싸며, 남자와 여자 사이의 추잡스런 성교를 통해 태어났다는 것이 아닌가. 충격 속에서 웅성거리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그들’은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이것은 모두 양피지에 기록된 성경에서 인용된 말이다! 성경이라니, 그렇다면 바로 책에 쓰여 있는 신의 전언이었으며, 문맹인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하고 신성한 영역이었다. 우리는 책의 휘광을 등에 업은 ‘그들’에게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그들’의 설교는 본당신부가 주일마다 하는 설교보다 우리의 실생활에서 보다 적용하기 쉬었으며, 유익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신이 인간과 동일한 위격에 놓여 질 수 있다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이 들었지만, 곧 성경의 구절을 조목조목 인용하며 알아듣기 쉬운 말로 우리를 가르쳐 주는 ‘그들’에게 설득되고야 말았다. 무엇보다 ‘그들’ 역시 우리가 대대로 믿어 왔었던 유일신을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이 신부가 전해주는 구교(舊敎)의 교리보다 더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에 호의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그들’은 신부보다는 도덕적이었다. 여자와의 동침 자체를 죄악시하는 ‘그들’은 임산부를 인간의 가장 부도덕한 행위의 결과라고 하여 시선을 마주치는 것조차 꺼려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극단적인 금욕에 별반 곤란을 겪지는 않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금욕을 권면했을 뿐, 강요하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그들’의 교리를 액면 그대로 지킨다는 것은 보통의 인간이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것은 ‘그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이런 실제의 삶과 교리상의 괴리를 메우는 방편이 바로 신의 인성에 기대는 것이었으며, ‘그들’ 역시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자신들의 욕망을 은밀한 경로를 통해 해결하곤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의 교리가 우리에게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그들’이 십일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설교에 대한 사례로 커다랗고 둥근 호밀 빵과 약간의 채소를 받을 뿐이었다. 십일조, 우리의 피와 살과 영혼을 갉아먹는 무시무시한 흡혈귀이자 간악하기 짝이 없는 세리. 매달 관리가 농토의 임대료로 요구하는 수확량의 삼분의 이와 마을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부과하는 인두세만으로도 충분히 가난에 허덕이는 우리에게, 신부는 갖가지 명목을 붙여 십일조를 강요했다. 심지어는 밭에서 수확한 순무와 가축에게도 십일조를 부과했다. 우리는 관리와 신부의 과도한 요구로 인해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었다.          

우리는 도시에 존재한다는 성 베드로의 적법한 계승자인 신의 지상 대리인이 그의 신민들에게 전하는 교서와, 마을의 본당 신부가 전하는 설교가 다를 수도 있다는 엄청난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었다. ‘그들’과 다른 그들은 우리에게 말했었다. ……너희들이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죄를 지었다는 자명한 진실 앞에서는 무엇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비록 이중에 몇몇은 억울한 누명을 썼을 수도 있으나, 이 마을 전체에 너무나도 강성한 사탄의 세력이 뒤덮고 있으므로 우리는 너희 마을 전체를 파문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 만약 억울함이 있거든 신께 그 사실을 고하라. 그러면 신께서 그 모든 사실을 알아서 판단하시리라. 우리의 주, 전지전능하신 신이시여…….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렇게 애걸복걸하면서, 죄를 사하시며 사랑과 은총을 베푸시는 주, 우리의 신께 매달렸어야 했었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우리를 이미 그들의 바람대로 하지 않았다. 설혹 그리 하고 싶었어도 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거듭되는 고문으로 주리를 틀리고, 쇠꼬챙이로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전부 찔려지며, 손과 발의 모든 뼈가 다 부러져서 커다란 바퀴에 몸이 묶인 채 고통으로 정신이 가물거리는 절명의 와중에서 우리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기에 결코 신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신께서 친히 판단하시기를 기다릴 여력이 없었다. 구원과 영생 따위는 짐승에게나 던져 버리고, 그저 어서 빨리 질깃질깃한 목숨이 끊어져 버리기만을 고대하고 또 고대했다. 죽음과 생명에 대한 욕망은 매번 우리의 곤고한 생 가운데 격렬히 대립했다. 우리는 삶을 원하는 찰나, 죽음을 갈구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저는 마녀가 아니에요! 붉은 머리 여자아이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처음엔 살기를 갈망했다. 마치 우리가 지금 무리를 이탈하기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네 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양떼의 뒤를 쫓고 있듯이.

광장을 가로지르는 좁은 길 양옆에 기름을 흠뻑 적신 짚더미 뭉치가 늘어서 있었다. 성인 남자 키를 두 배는 훌쩍 넘는 높이의 거대한 짚더미 뭉치는, 금방이라도 마을을 향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그림자 한 점 없이 내리쏟아지는 태양빛 아래, 널브러져 속살을 벌겋게 드러낸 여자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마을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들어 애원했다. 애원하는 붉은 머리 여자아이는 악덕의 화신인 듯 몹시 추하게만 보였으며, 그래서 우리는 여자아이에게 일말의 동정도 느낄 수 없었다. 동정은커녕, 잔인한 볼거리를 바라는 다급한 마음에 우리는 상기된 얼굴로 판결이 내려질 신부의 입만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느새 우리는 저도 모르게 긴 휘파람소리를 내었으며, 더러는 찢어진 여자아이의 속옷조각들을 두 발로 희롱하듯 이리저리 짓밟았고, 또 더러는 서로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키득거렸다. 뒤쪽에 서 있던 어떤 이의 입에서 ‘구멍 동서’란 단어가 나오자, 급기야 광장에 모여 있었던 모든 이가 그 음란한 단어의 속뜻에 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여 큰 소리로 웃어대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웃음소리는 여간해선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어떻게 보면 우습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얼굴이 창백해진 붉은 머리 과부 옆에 멀거니 서 있던 관리는 수치심으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신부는 짐짓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양 딴청을 피웠다. 우리의 웃음소리는 점점 커져 갔고, 오직 붉은 머리 여자아이만이 몸부림을 치며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마녀시험은 태양이 하늘의 중간을 막 넘어섰을 때 시작됐다. 광장을 메우던 웃음소리는 어느덧 사라졌고, 오직 여자아이의 죄목을 열거하는 신부의 낭랑한 목소리만이 계속되고 있었다. ……지난 삼 년간 내리 흉년이 들어 귀리와 콩의 수확이 형편없었던 것도 이 아이가 마을 주변의 냇물에 사술로 만든 독 가루를 풀어서 그리 되었다는 증언이 있었소. 덧붙여 돼지가 새끼를 배지 못하게 한밤중에 몰래 우리로 들어가 주문을 거는 모습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푸줏간 주인의 증언도 있었소. 과열된 금속판 같은 하늘에서 내뿜는 열기와 점차 더해 가는 공복감으로 우리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이기지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누군가에게라도 분풀이를 하고 싶은, 극단적인 폭력성이 우리의 내면에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사실 우리는 붉은 머리 여자아이가 과연 마녀인지 아닌지, 하는 따위의 문제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저 언제나 그랬듯, 아무리 씨앗을 뿌리고 땅을 일구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노동을 해도 결코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는 곤궁에 지쳐 잠시 주의를 돌릴 거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기어이 우리의 분노는 터져 나왔다. 우리는 더위를 저주하며 허공에 삿대질을 해댔다. 우리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천박한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죽은 듯 엎드려 있는 여자아이에게 침을 뱉었다. 우리는 열기 속에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여자아이의 붉은 머리채를 앞 다투어 손아귀에 휘어잡았다. 이런 소요의 와중에서도 신부는 별반 동요 없이 마지막 말을 이어갔다. ……만일 네가 마녀가 아니라면 타오르는 불꽃 가운데에서도 신께서 너를 반드시 지켜 주실 것이다. 신께서 네게 임하신다면, 네 몸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리라. 신부의 지시에 따라 길 양옆에 서 있던 두 명의 사내가 차례로 들고 있던 횃불을 기름 적신 짚더미 뭉치 위에 올려 놓았다. 순식간에 타오른 주홍빛 불꽃이 하늘로 승천할 듯 너울대며 솟구쳐 올랐다. 나란히 광장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불길이 흡사 지옥으로 통하는 입구처럼 보였다. 타닥타닥, 까맣게 그은 지푸라기가 연신 사방에 튀어 오르며 기세 좋게 타오르자, 불길을 둘러싸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뜻 모를 소리를 내며 북받쳐 오르는 정체 모를 감정에 몸을 떨었다. 이윽고 양 손이 묶인 붉은 머리 여자아이가 신부의 추종자들에게 이끌려 두 개의 불길 앞에 세워지자, 모두의 흥분은 절정에 다다랐다. 우리는 고함을 지르고, 발을 구르며, 주먹 쥔 손을 하늘을 향해 휘둘러 댔다. 우리는 피 냄새를 감지한 승냥이 떼처럼 오직 본능에 의해 행동했다. 우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여자아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불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가라! 어서 들어가라! 우리의 고함에 떠밀려진 여자아이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묵묵히 불길로 발을 내디뎠다. 거센 불길에 가려 여자아이의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뒤틀려 보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외마디 비명과 함께 불길 속에서 여자아이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여자아이의 몰골은 참혹했다. 붉은 머리카락은 타버려 벌겋게 피부가 일어난 얼굴 전체에 드문드문 굵은 실처럼 눌어붙어 있었고, 한쪽 눈과 코는 촛농처럼 흘러내린 살덩어리 속에 형체조차 불분명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여자아이는 손가락이 엉겨 붙은 두 손을 우리에게 내밀며 부풀어 오른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애원했다. 여자아이는 이미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짐승만도 못한, 그저 하나의 살덩어리로 보일 뿐이었다. 신은 여자아이에게 심판을 내린 것이었다. 여자아이는 신부의 말대로 마녀임에 틀림없었다. 마녀는 마땅히 죽여 버려야 할 존재였다. 마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우리는 하등의 죄책감 없이 하나의 살덩어리를 다시금 불길 속으로 떠밀었다. 여자아이는 불길 속에서 소리 높여 울었다. 그러나 불이 여자아이의 목소리마저 앗아가자, 광장엔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매캐한 탄내와 짚더미 뭉치가 타는 단조로운 소리와 우리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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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은 이제 경박한 몸놀림이 눈으로 보기에도 확연히 느려지고 있었다. 줄기차게 뜯어먹은 풀로 배를 가득 채운 터라 몸이 무거워져 슬슬 졸음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굶주린 위장은 등가죽에 달라붙을 만큼 오그라들어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태양이 뜨지 않아 푸르스름한 새벽부터 양들이 모두 잠든 저녁까지 오직 밤이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때서야 양치기가 닭 모이 주듯 우리에게 몇 움큼의 곡식 낟알을 일용할 하루의 식사로 던져주므로. 양들이 탐욕스럽게 먹어치운 풀밭 위에 흩뿌려진 곡식 낟알을 연신 고개를 우스꽝스럽게 까딱거리며 혀끝으로 정신없이 텁텁한 흙과 함께 주워 먹다 보면 어느새 고통과 굴욕감은 우리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영혼을 흙바닥 위에 내려놓고 허깨비 같은 털투성이 육신을 조용히 세상 가운데 유리시켰다. 우리는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있으나, 기실 세상에 없는 존재였다. 우리는 얼마간이나마 가까스로 스스로를 억압하는 분노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깜깜한 사위, 그 짙은 어둠의 천공 속에 수백 개의 조그만 얼음덩어리 같은 별들이 일제히 떠오르면, 쏟아져 내리는 별빛에 감화된 우리는 자신들의 저주 받은 삶과 죽음과 지속되는 고통을 잊어 갔다. 우리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며,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진실로 그들이 원하는 양이 되어 갈 것이었다.       

고원은 수그러드는 더위로 조금씩 식어 가고 있었다. 하늘은 차츰차츰 주홍빛에서 노란빛으로 바뀌며 다가올 어둠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양떼를 뒤쫓으며 무성한 잡초를 우리의 앞발과 뒷발로 있는 힘껏 짓이기며 또 다른 산꼭대기를 향해 전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양의 가죽을 입은 우리의 생이 종말을 고하기까지.《문장 웹진/200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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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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