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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는 이유

  • 작성일 2007-09-28
  • 조회수 4,175

 

일기를 쓰는 이유



문순태 



4월의 눈부신 햇살 아래 쪼그리고 앉아서 풀을 뽑는다. 한 달 내내 비가 오지 않아 땅이 단단하게 굳어 있어 잘 뽑히지 않는다. 바람은 가볍고 깔깔하다. 별장에 딸린 꽤 널찍한 묵정밭에는 온갖 잡초들이 우북하게 자라 있다. 내 생각 같아서는 제초제를 뿌렸으면 싶지만 별장 주인인 조 박사는 기어코 풀을 뽑아야 한다고 했다. 아침 먹고 시작해서 해가 정수리 위에 덩싯 올라오기까지 쉬지 않고 풀을 뽑았는데도 흙이 드러난 맨땅은 겨우 멍석 두어 장 넓이만큼이나 될까. 마당의 풀을 다 뽑자면 사흘도 더 걸릴 것 같다. 처음엔 이까짓 풀을 뽑는 일 정도야 누워서 코딱지 파는 것쯤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쪼그리고 앉아 있자니 허리가 아프고 관절도 삐걱거렸다. 손톱이 상했는지 풀의 밑동을 잡아챌 때마다 손가락 끝이 욱신거렸다. 차라리 등짐을 지고 말지 쪼그리고 앉아서 풀을 뽑기란 너무 답답하고 짜증스럽다.

 

 

묵정밭에는 망초, 질경이, 엉겅퀴, 민들레, 쑥, 자운영, 풀씨, 바래기, 쇠뜨기, 개여뀌, 며느리밑씻개, 코딱지풀, 쑥부쟁이, 냉이 등이 저마다 “나 뽑아봐라”하고 나를 놀리듯 쭈뼛쭈뼛 목을 내밀고 바람에 한들거린다. 엉겅퀴, 민들레, 개여뀌, 코딱지풀, 며느리밑씻개, 냉이 등은 술술 잘 뽑히지만 질경이, 쑥, 바래기, 쇠뜨기는 잘 뽑히지 않는다. 쑥과 쇠뜨기는 뿌리가 깊게 뻗어 있어 줄기가 삭둑 끊어질지언정 죽어라 뽑히지 않는다. 풀 중에서도 잎이 땅에 바짝 깔린 바래기나 질경이는 오드득 잎만 뜯겨질 뿐이다. 빨판을 가진 산 낙지처럼 땅에 찰싹 달라붙어 뽑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만 같다. 바래기를 뽑으려면 손톱으로 뿌리를 후벼서 파거나 끝이 뾰쪽한 호미로 캐내야만 한다. 풀을 뽑으면서 나는 터득한 게 있다. 키가 크거나 줄기가 긴 덩굴식물들은 비교적 잘 뽑히지만 키가 작고 잎이 땅에 깔린 풀은 뽑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키 큰 사람치고 옹골찬 사람 없다는 말이 자꾸만 생각났다.  

나는 풀을 뽑으면서 풀 이름을 하나하나 배운다. 모두가 낯설고 신기하기만 하다. 풀 이름을 하나씩 알게 될 때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소중한 지식을 얻은 듯한 기분이다. 내게는 풀 이름이 사람의 이름만큼 중요하게 느껴진다. 처음으로 풀을 대할 때마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마음이 설렌다. 재미 있는 풀 이름은 넝쿨이 무성하게 뻗는 며느리밑씻개다. 줄기와 잎이 까끌까끌해서 피부에 긁히면 따끔거리고 쓰리다. 시어머니 구박이 오죽 심했으면 이 이파리로 밑을 닦으라고 했겠는가. 손만 대면 술술 뽑히는 코딱지 꽃도 여기 와서 처음 보았는데 정말 코딱지만큼이나 작은 보랏빛 꽃이 앙증맞을 정도로 예쁘다.  

풀 이름은 별장지기 남촌 선생이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서 군에 입대할 때까지 줄곧 살았다는 남촌 선생은 풀, 나무, 꽃 등의 이름은 물론 생태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어떤 풀은 먹을 수 있고 어떤 풀은 언제 어떤 색깔의 꽃이 피며 독초와 약초를 구별할 줄도 알았다. 남촌 선생의 말로는 마당에 난 풀은 거의 먹을 수 있다고 하면서 질경이며 토끼풀 잎을 한 움큼 뜯어 질겅질겅 씹어 먹기도 했다. 남촌 선생은 한국화 화가다. 산수화나 나무와 풀을 주로 그린다. 숙소인 컨테이너 박스 벽에 걸려 있는 굽은 소나무 그림은 사진을 찍은 듯 소나무 그대로다. 그림이 팔리지 않아 별장지기로 겨우 연명을 하고 있다. 별장 귀퉁이 창고로 쓰고 있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나와 함께 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남촌 선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냥 조씨라고 부른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아무도 그를 화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과 같다. 하기야 그동안 전람회를 한 것도 아니고 그의 그림을 사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도 없으며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한 번도 소개된 적이 없는 그를 화가로 인정하지 않을밖에. 그는 2주 전에 이곳에 온 나한테 자신을 남촌 선생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예술가를 몰라 주는 것은 무식한 소치라면서 은근히 아호를 불러줄 것을 요구했다. 그의 컨테이너 박스에 빌붙어 지내게 된 내 처지에 그의 요구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내가 마을 사람들 앞에서 남촌 선생이라고 불러 주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그를 남촌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면 도시 물 먹은 사람이라 예술가를 알아본다면서 마을 사람들 앞에서 한껏 으스대는 표정까지 짓는다. 그런 그가 천진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남촌 선생은 별장 청소와 잔디를 손질하고 정원의 나무들을 관리하는 것 외에 텃밭에 별장 주인 식구가 먹을 고추며 가지, 상추, 오이, 호박 등을 가꾼다. 그는 또 주말마다 찾아오는 조 박사 가족의 바비큐 파티를 위해 불을 피워 주기도 한다. 남은 시간에는 냇가에 나가 고기를 잡아다 안주를 만들어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차분하게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별로 본 적이 없다. 별장지기 보수로 매월 30만원씩을 받는다. 군청에서 나오는 기초생활보호 보조금까지 합하면 혼자 살기에는 크게 부족하지 않다고 했다.        

나는 풀을 뽑으면서 문득 잡초 같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야말로 잡초 같은 사람이 아닌가 싶어 기분이 울적해진다. 누구인가 나를 뽑아서 낯선 이곳에 버렸을 것만 같다.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향기로운 꽃을 피우지도, 탐스러운 열매를 맺어 보지도 못하고 잡초처럼 살아온 나. 울적한 기분에 털썩 주저앉고 만다. 눈앞에 연보랏빛 코딱지 꽃이 햇살을 담뿍 받은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나는 차마 코딱지 꽃을 뽑을 수 없어 한동안 망설였다. 그때 풀을 뽑아낸 땅을 괭이로 파고 있던 남촌 선생이 허리를 펴고 서서 한참이나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코딱지 꽃을 남겨둔 채 잽싸게 두 뼘쯤 자란 망초를 뽑는다.

별장 주인 조 박사는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밭에 야생화 꽃밭을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나와 남촌 선생에게 묵정밭에 풀을 뽑고 고랑을 친 다음 산에서 야생화를 캐다 심는 일을 맡겼다. 2백 평 가까이 되는 밭에 야생화를 캐다 심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게 될지 모른다. 1년 아니 그 이상이 걸릴지도. 더욱이 별장 주인의 야생화 단지 계획은 이만저만 까다로운 게 아니다. 꽃이 피는 계절과 꽃의 색깔별로 따로 고랑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봄의 고랑에는 붉은 꽃, 노란 꽃, 흰 꽃, 녹색 꽃, 보라색 꽃으로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같은 꽃과 키가 크고 작은 꽃끼리 집단을 이루게 하자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남촌 선생이 잠시 쉬면서 막걸리 한 잔 마시고 하자며 컨테이너 박스에서 소주병과 종이컵을 들고 나온다. 나와 남촌 선생은 환장하도록 찢어지게 꽃이 핀 벚나무 밑 그늘에 퍼지르고 앉는다. 남촌 선생은 하루에 다섯 차례 이상 술을 마신다. 식사 때마다 반주를 곁들이고 새때와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어김없이 술을 마신다. 그가 하루에 마시는 주량은 두 홉들이 소주 두 병으로 정해져 있다. 이곳으로 온 후 나도 할 수 없이 그가 권하는 대로 똑같이 달근달근 술을 마시게 되었다. 한번은 저녁에 둘이 소주 네 병을 비운 적이 있다. 똑같이 마셨는데도 남촌 선생은 취해서 횡설수설하다가 골아 떨어졌지만 나는 맑은 정신으로 12시까지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나는 내가 주량이 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 별장 자리가 예전에 우리 수박밭이었다네. 여름이면 나는 원두막에서 춘원의 소설을 읽으면서 낮잠을 잤지. 자네가 풀을 뽑고 있는 곳이 밀밭이었는데, 열아홉 살 때였던가…… 저 밀밭에서 우리 앞집 과부 현주 엄마한테 동정을 빼앗겼다네. 서른 살도 안 되어 딸 하나를 낳고 과부가 되었는데 얼굴은 툽상스러워도 아담한 키에 통통한 몸매였어. 그 해 여름 저 밀밭에서 날마다 만나서 그 짓을 했어. 처음엔 황홀했는데 계속되니까 진력이 나고 또 소문이 날까봐 군대로 도망쳤지. 군에서 제대하고 와 보니 면사무소 마을에서 자전거포를 하는 늙은 홀아비한테 시집을 갔더구만.”

남촌 선생은 이야기를 마치고 소주 두 잔을 거푸 비웠다. 그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도 그 후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도시에 나가 살다가 홀로 되어 30년 만에 돌아와 보니, 그녀는 죽고 없더라는 것이다. 남촌 선생은 평소에는 말이 없다가도 술만 한잔 들어갔다 하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거침없이 술술 토해내곤 했다. 그는 과거만을 이야기했다. 그가 한 이야기는 주로 이 마을에서 살았을 때 겪었던 내용들이다. 고향을 떠난 후 지금까지의 일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이 마을에서 살았던 20년의 기억을 하나하나 되살리고 있었다. 유년시절의 친구들과 6?25를 겪었던 이야기며 청소년 시절 농사를 짓고 살던 때의 기억들을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렸다. 지금 그의 생각은 20세 이전의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제는 그가 열세 살 때 친구들과 마을 앞 늙은 느티나무에 높이 올라가기 시합을 했다가, 몸통 우듬지 부분에서, 심장이 덜컹거리고 다리에 힘이 빠져 후들거려서 더 올라가지도 내려오지도 못하고 쩔쩔맸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자신보다 공부를 잘하는 옆집 친구 순돌이보다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만용을 부렸다고 고백했다. 결국 마을 청년들이 사다리를 가져와서야 겨우 내려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때 그는 높이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오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쓸쓸하게 웃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어쩌면 그는 지금 인생의 내리막길을 힘겹게 내려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소주 두 병을 마셔야 심신을 지탱할 수 있는 것도, 의지할 곳 없이 홀몸이 되어 별장지기로 목줄 지탱하고 사는 것도, 지금 그에게는 버거운 내리막길인 셈이었다.

과거에 고향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의 창고에서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내게 털어 놓고 있는 남촌 선생의 이야기는 진지하고 엄숙하기까지 했다. 어쩔 때는 고해성사처럼 들리기도 했다. 남촌 선생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불쑥불쑥 내 과거에 대해 묻곤 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살아온 궤적에 대해 할 이야기가 없다. 46년 동안 살아온 내 기억의 창고 문이 굳게 잠겨 있기 때문이다. 주민등록증에 나타난 기록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란 병원에서 의식이 깨어나 한동안 치료를 받고 여기로 올 때까지로 한정되어 있다. 길어야 석 달이나 될까. 내가 의식을 회복하자 병원에서는 내가 소지하고 있던 주민등록증을 근거로 본적지와 주소지로 연락을 해 보았지만 나를 기억하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퇴원하자 갈 곳이 없는 내 처지를 딱하게 여긴 담당의사 조 박사가 임시로 이곳에 데려다 준 것이 1주일 전이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보다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프다.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날 저녁도 남촌 선생과 나는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남촌 선생은 일찍 잠이 들었고 나는 전깃불을 켜 놓고 비닐 방바닥에 배를 깔고 납작하게 엎뎌 일기장을 펼쳤다. 내가 이곳에 와서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은 잠자리에 들기 전 그날에 있었던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는 것이다. 그날 처음 알게 된 풀 이름에서부터 남촌 선생과의 이야기며 마을 사람들과의 만남, 여러 가지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을 낱낱이 기록한다. 너무 자세하게 기록하는 바람에 어떤 날은 노트 다섯 장이 넘을 때도 있다. 내가 하루하루 살아 가는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은 앞으로 남은 시간이라도 충실하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다. 망각된 과거의 삶이 모두 제로가 된 것에 대한 허무감을 달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잊어 버린 과거를 보상받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짐작하기에 결코 나는 향기로운 삶을 살아 오지 않은 것만 같다. 남에게 해악을 끼친 곰팡이 같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목적도 희망도 없이 잡초처럼 세파에 시달리고 짓밟히며 고단하게 살아 왔을지도. 그렇지만, 과거의 삶이 아무리 허탕하고 어줍지 않다 해도 흰 백짓장처럼 깡그리 망각되었다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낮에 벚꽃 그늘 밑에서 소주를 마시며 들었던 남촌 선생의 느티나무 높이 타기 시합 이야기를 기록하다 말고, 문득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부스럭거려 볼펜을 든 채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불현듯 한 여자를 폭행하는 장면이 뇌리에 맴돌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자의 머리 끄덩이를 잡아 채어 넘어뜨리고 발길질을 해대는 장면이 끊긴 필름의 흐릿한 장면처럼 심하게 떨리다가 지지직거리며 사라졌다. 그 여자는 누구일까. 여자를 폭행하는 사람은 혹시 나일까. 병원에서 의식을 되찾은 후, 가끔 조각난 기억의 파편 같은 순간의 장면들이 낡은 흑백영화의 영상처럼 반복적으로 뇌리에 떠올랐다가 금방 사라지곤 했다. 지금까지 스쳐 지나간 것들은 여자를 폭행하는 장면과 담배 연기로 가득 찬 싸구려 술집에서 행패를 부리거나, 휘주근한 남자들과 뒤엉켜 싸움질을 하는 장면, 누군가에게 쫓겨 어두컴컴하고 좁은 골목으로 도망치는 장면이었다. 이 같은 기억의 파편들은 서로 앞뒤 순서 없이 불쑥 튀어 나왔다가 사라졌다. 도대체 왜 그 같은 장면들이 머리에서 끊임 없이 맴도는 걸까. 혹시 내가 여자를 폭행하고 싸움질을 하고 쫓기는 사람이란 말인가. 망각된 내 과거의 삶이 그것이었단 말인가. 나는 자신이 두려웠다. 내가 그렇게 살아 왔다면 과거를 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기억의 파편 속에서 악몽처럼 얼핏얼핏 모습을 나타내는 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과거의 삶을 뉘우치고 속죄하기 위해서라도 오늘의 삶에 더욱 충실하고 싶다.

나는 일기장을 덮고 일어나 점퍼 안주머니에서 짙은 밤색 비닐 지갑을 꺼냈다. 지갑 속에는 내가 시장 앞 네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소지한 것들이 그대로 들어 있다. 지갑 속에는 주민등록증과 만 원짜리 지폐 두 장, 술집 바텐더 명함 한 장, 오래 된 버스 승차표. 휴대폰도 신용카드도 없었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들여다본다. 회색 점퍼에 물방울 무늬 넥타이를 매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 속의 나는 근육질의 얼굴에 지금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박문재. 630315-1550000.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 481-27. 조 박사를 따라 처음 이곳에 와서 남촌 선생을 만났을 때 나이를 말하자 첫마디가 왜 그리 겉늙어 보이느냐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실제 나이 45세보다 열 살은 더 많아 보인다고 했다. 그것은 부석부석해진 얼굴에 주름이 많고 앞니 하나가 부러져 있었기 때문일 거다. 도대체 나는 누구일까. 조 박사 말로는 경찰이 분명 주민등록증 주소지에 조회를 해 보았으나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비’라는 이름의 바텐더 명함을 추적해 보았지만 역시 헛수고였다고 했다. 버스 승차표는 두 달 전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오는 고속버스 표였다.

이곳으로 오기 전 나는 주민등록 주소지로 한번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그만 두기로 한 것은 불시에 뇌리를 스친 여자 폭행 장면 때문이었다.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내가 나타나 보았자 결코 환영 받지 못할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어쩌면 내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과거 속으로 내 삶의 궤적을 찾아 가다 보면 불쑥불쑥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과 똑같은 생활로 되돌아갈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냥 내 과거를 망각된 기억의 무덤 속에 잠재워 버리고 싶었다.


새벽부터 봄비가 구질구질 내리더니 날이 밝자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이 굵어졌다. 컨테이너 박스 지붕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물안개까지 푸옇게 산을 휘감아 음울하고 답답했다. 라면으로 아침을 때우고 풀을 뽑으러 나갔다가 흠씬 비에 젖고 말았다. 나는 전날 뽑은 풀을 한곳에 모아놓고 별장 처마 밑 데크의 의자에 앉아 비에 젖은 앞뜰 화단을 바라본다. 요염할 정도로 화사한 진홍색 홍매화 나무가 처연해 보인다. 내가 이곳으로 온 다음날 아침 꽃망울을 터뜨린 홍매화를 본 나는 그 화려한 빛깔이며 아름다움에 놀라 감탄했다. 남촌 선생은 홍매화를 기생꽃이라고도 불렀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것이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남촌 선생은 이런 날에는 술이나 마시자면서 소주 두 병을 들고 데크로 나왔다. 우리는 빗소리를 안주 삼아 소주 두 병을 금방 비웠다.

“도대체 자네 전직이 뭐였는가?”

남촌 선생이 뚜벅 물었다. 그는 이따금 내 과거에 대해 불쑥불쑥 물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똑같이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하다가 씁쓸한 미소를 떠올릴 뿐이었다. 나는 누가 내 전력에 대해 물어 올 때 당혹감을 느낀다. 도대체 내가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 왔는지 실마리조차 알고 있지 못하니 답답할 수밖에 없다. 남촌 선생은 내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네 혹시 그동안에 별을 달 큰 집에 있다 왔나?”

남촌 선생이 다시 물었으나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라 애매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아니면, 밤마다 뭣인가를 끄적거리는 것을 보면 혹시 글 쓰는 문필가였나?”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비는 줄기차게 내렸고 산을 친친 휘감고 있던 안개도 말끔하게 걷혔다. 남촌 선생은 컨테이너 박스로 뛰어 가더니 깍두기를 담은 보시기와 소주 두 병을 다시 꺼내 와 계속 술잔을 기울였다. 이러다가는 오늘 하루 흠씬 술에 절이게 될 것 같다. 비 오는 날 할 일도 없는데 술에 취하는 것도 크게 나쁠 것 없다 싶다.

둘이서 소주 한 병을 거의 비웠을 때쯤 은색 에쿠스 승용차 한 대가 별장 쪽으로 다가오더니 거침없이 마당 안으로 쑥 들어왔다.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승용차 안에서 어기적거리면서 나왔다. 점퍼 차림은 덩치가 컸고 색안경을 낀 사람은 작달막한 키에 건방져 보였다. 그들은 연탄집개 폼으로 삐딱하게 서서 시선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집을 둘러보았다. 남촌 선생과 나는 혹시 조 박사 친지들인가 싶어 술잔을 놓고 다급하게 데크 아래로 내려섰다.

“어디서 오셨습니까요?”

“그냥 집 구경 왔으니까 신경 쓰지 마씨오.”

남촌 선생이 묻자 색안경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색안경의 말투가 약간 거슬릴 정도로 강팔지게 느껴졌다. 그들은 나와 남촌 선생의 존재는 의식하지도 않은 채 집을 한 바퀴 돌아본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집 안까지 기웃거리고 나서는 데크로 나와 의자에 앉았다. 그들은 담배를 피워 물고는 집의 방향을 잘 못 앉혔다느니 집 안 목재가 부실하다느니 저들끼리 말을 주고 받았다.

“이것 보쇼, 도대체 당신들 뭐요?”

나는 술기운이 얼얼해 있던 터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턱 끝을 쳐들며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색안경 낀 남자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데크 바닥에 퉤하고 뱉으며 얼굴에 묘한 웃음을 버무리고 나를 째려보았다.

“아니 당신들이 뭔데 남의 집에 와서 생트집이야?”

“뭐? 생트집?”

덩치 큰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당장 내게 달려들 기세로 얼굴을 험하게 일그러뜨리며 노려보았다.

“생트집이 아니고 뭔데?”

나 역시 어깨에 힘을 주며 기세등등하게 맞대들었다. 당장 그에게 달려들어 한판 붙고 싶을 기세로,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발바닥에서부터 머리 끝으로 솟구치는 격렬한 기운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머리에 불이 붙는 것처럼 후끈 달아올랐다.

“집 구경 좀 하는데 웬 시비야? 정말 한판 붙기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색안경이 상반신을 흔들며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인상을 구기며 나를 노려보았다. 내 오른쪽 팔이 가볍게 떨려왔다. 남촌 선생이 두 팔로 나를 붙들었다. 그때 머릿속에서 조각난 기억의 편린이 휙 스쳐 지나갔다. 한데 엉켜 싸움질을 하는 장면이었다.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심신이 경직되면서 어깨에 힘이 빠졌고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남촌 선생이 나를 붙들고 끌어당겼다. 내가 물러서자 두 사내도 잠시 눈을 부라리며 으름장을 놓다가 자동차에 올랐다.

“자네 깡이 대단하드만. 내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싸움판이 벌어졌을 걸세.”

자동차가 클랙슨을 눌러대곤 위세를 부리며 밖으로 미끄러져 나가자 남촌 선생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날 밤에도 나는 배를 깔고 엎뎌서 일기를 썼다. 낮에 싸움이 벌어질 뻔했던 일도 자세히 기록했다. 특히 내가 기억의 파편 때문에 참아낼 수 있었던 부분을 강조했다. 만약에 그 순간 참지 못하고 싸움이 벌어졌다면 나의 앞날은 기억의 파편이 보여준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더라면 일기를 쓰는 것도 그만두게 될지도 모른다.

“자넨 밤마다 뭘 그렇게 쓰나?”

잠이 든 줄 알았던 남촌 선생이 내 쪽으로 돌아 누우며 물었다.

“일기를 씁니다요.”

“일기? 새삼스럽게 일기는 써서 뭣하게. 그딴 거는 살기가 편한 작자들이나 쓰는 거여.”

“지금까지는 헛살았지만 이제부텀이라도 사람답게 한번 살아 보려고요.”

“일기를 쓰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건가?”

“세상을 거짓으로 살아 갈 수도 있지만 일기는 최소한 거짓말로 쓰지는 않지 않아요. 인생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흐르지요. 그렇지만 일기는 자기 의지대로 쓰니까요. 앞으로 한 자 한 자 꼼꼼하게 자기 의지대로 일기를 쓰는 것처럼 산다면 후회가 없을 것 같구만요.”

내 말에 남촌 선생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묘하게 엉킨 시선으로 나를 되작거리며 바라보았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쓰면 아마 한 짐은 될 걸세. 살아 온 이야기가 너무 무거우면 오늘을 살기가 팍팍하다는데……”

남촌 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긴 눈빛이다. 그의 눈빛은 삶은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듯 끈끈한 회한에 젖어 있어 보인다.

“앞집 과부 현주 엄마가 부담스러워 군에 입대를 했는데 한 달도 못 되어 만나고 싶어 환장하겄드만. 현주 엄마만 생각하면 온몸의 세포들이 찌릿찌릿 스파크가 일어난 것 같으면서 입이 바싹바싹 탔어. 첫 휴가를 얻어 달려와 보니 그 사이에 시집을 갔드만. 그 길로 면 소재지 마을로 찾아갔지. 남편은 아버지뻘 되어 보이는 중늙은이였어. 현주 엄마는 남편 앞에서 놀라는 기색을 감추고 흔연스럽게 나를 맞아주었네. 남편한테는 앞뒷집에서 남매처럼 가깝게 살아온 처지라면서 고깃국을 끓여 점심까지 해 주었지. 눈빛 한 번 은근하게 마주치지 못하고 밥만 얻어 먹고 뒤통수 맞은 기분으로 돌아왔다네. 제대를 하고도 그녀를 잊을 수가 없어 몇 번 찾아 갔지만 여전히 동생 같은 뒷집 총각 대접을 받았다네. 나는 결혼을 한 후에도 그 여자를 잊을 수가 없어서 여러 번 면 소재지 마을까지 찾아가 멀찍이서 지켜보다가 돌아오곤 했지. 내가 초혼에 실패한 것도 따져 보면 그 과부 때문이었네. 남자는 동정을 바친 여자를 평생 잊지 못하는 거 같어.”

남촌 선생은 과거를 이야기하고 나서 이내 자리에 눕더니 코를 골았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쓴다면 한 짐은 될 것이라는 남촌 선생의 말이 오래도록 뇌리에 맴돌았다. 그러나 나의 과거는 텅 빈 항아리 속처럼 어둡고 공허하기만 하다. 그러고 보니 지나온 내 삶은 내 의지대로 살아 온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물 흐르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살아 온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일기를 쓰지 않았더라면 오늘 낮에 나는 끝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두 남자들과 한판 크게 붙었을지도 몰랐다. 내가 일기를 쓴다는 것은 내 의지를 키우는 일이며 자신을 제어하는 수단을 터득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 내게는 일기를 쓰는 것이 바로 성실하고 의미 있는 삶 그 자체인 것이다.

그날 밤 나는 기억의 파편과 똑같은 꿈을 다시 꾸었다. 떠올랐다 금세 사라지곤 하는 순간의 기억 속에서 내가 폭행한 여자가 꿈 속에 나타난 것이다. 꿈 속에서도 나는 그 여자를 폭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꿈 속에서 폭행 당한 여자의 모습이 처음으로 선명하게 떠올랐다는 점이다. 체구가 오동포동하고 동글납작한 얼굴에 눈이 크고 코 끝이 뭉툭했다. 파마머리에 헐렁한 쥐색 바지와 체크 무늬 블라우스를 입었고 잘 생기지도 못 나지도 않은, 별다른 특징이 없는 평범한 보통여자 모습이었다. 여자는 내 주먹질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고개를 바짝 쳐들고 앙칼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비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그 여자가 누구일까. 나와 어떤 관계일까. 왜 내 기억의 파편 속에 그 여자만 지워지지 않고 남아서 문득문득 악몽처럼 되살아 나는 것일까. 나는 꿈에서 깨어난 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꿈에 보았던 사금파리 같은 여자의 눈빛이 오랫동안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잠들면 그 여자가 다시 꿈에 나타날 것만 같았다. 나는 혹시 그 여자가 내 가족 중 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가족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왜 경찰 조사에서 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단 말인가.       

               

묵정밭의 풀을 뽑고 괭이로 파 엎고 흙을 고르기까지는 꼬박 사흘이 걸렸다. 고랑을 쳐 놓은 밭을 보니 마음까지 가지런해지는 것 같다. 나는 앞으로 남촌 선생의 도움을 받아 이 밭에 야생화를 심고 가꾸는 일을 하게 된다. 당장 내일부터는 봄에 가장 먼저 피는 복수초부터 캐다 심어야 한다. 오후에 비가 멎자 남촌 선생이 복수초를 보여 주겠다면서 나를 끌고 마을 뒤 골짜기로 갔다. 우리는 대나무 숲을 지나 쥐똥나무며 물푸레나무 노간주나무 등 잡목이 들어 찬 산기슭 그늘진 숲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나뭇가지들 때문에 햇살이 차단된 숲 속은 4월 하순의 완연한 봄날인데도 싸늘한 냉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마을도 하늘도 보이지 않아 음침하기까지 했다.

나는 눈 속에서 꽃이 핀다고 해서 눈색이꽃, 얼어 붙은 땅을 뚫고 꽃이 피어 얼음새꽃이라고도 부른다는 복수초 꽃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남촌 선생의 말로는 복수초는 아직 눈이 채 녹기 전인 4월초에 노란 황금색 꽃을 피우는데 저녁에는 꽃잎을 오므렸다가 아침 햇살을 받고 활짝 꽃잎을 펼치며 흐린 날에는 꽃봉오리가 열리지 않는다고도 했다. 남촌 선생이 추운 날에 꽃잎에 손을 대면 따뜻하다는 말을 하자 나는 피식 웃었다. 나는 복수초 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눈 속에서 꽃이 핀다는 게 신기해서 다른 야생화보다 한껏 관심이 쏠렸다.

“꽃을 보자면 꼬박 일 년을 기다려야할 텐데……”

남촌 선생이 말끝을 흐리며 나를 바라보는 것은 꽃이 필 때까지 이곳에 진득하게 머물러 있을 수 있겠냐고 넌지시 내 의중을 떠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나 자신도 모를 일이다. 나는 비록 앞으로는 내 의지대로 살고 싶다고는 하지만 내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예측할 수가 없다.  

한참동안 숲 속을 헤매던 남촌 선생이 참나무 잎이 수북하게 쌓인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한 뼘쯤 되는 줄기에 파란 잎이 어긋나 있는 야생초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잎들이 어긋나게 붙어 마치 깃 모양으로 가늘게 갈라졌다. 물론 나로서는 처음 본 야생초다. 그러고 보니 그 주변에 똑같이 생긴 야생초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직감적으로 복수초라는 것을 알았다. 남촌 선생은 자루에서 호미를 꺼내더니 익숙한 솜씨로 복수초를 캐기 시작했다. 호미 끝을 땅 속 깊숙이 찌르고 나서 힘껏 잡아당기자 흑갈색 잔뿌리가 흙과 함께 한꺼번에 뽑혔다. 남촌 선생은 흙을 털지 않고 한 포기씩 준비해 온 비닐봉지에 넣었다. 나는 한동안 신이 나서 복수초를 캐는 남촌 선생을 비켜 보고만 있었다. 남촌 선생이 뭘 구경만 하고 있느냐며 채근을 해서야 나도 호미를 들고 조심스럽게 복수초를 캐기 시작했다. 풀을 뽑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풀을 뽑을 때는 뭐랄까 약간의 짜증스러움과 난폭한 심리가 작용한 것이랄까, 암튼 풀을 뽑을 때는 고함을 지르거나 주먹을 휘두를 때처럼 야릇한 쾌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복수초를 캘 때의 기분은 조심스럽고 경건하기까지 하다. 꽃잎에 손을 살짝 대 보았지만 따뜻하지 않다.

우리는 참나무 숲에서 순식간에 스무 남은 포기의 복수초를 캤다. 나는 남촌 선생을 따라 등성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에 진달래 군락지를 지나 찬바람이 무섭게 일렁이는 작은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남촌 선생이 소리치며 쪼그리고 앉더니 나를 향해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그곳에 황금빛 복수초 꽃 한 떨기가 피어 있었다.

“복수초 꽃을 보다니, 행운이네. 내년 봄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어.”

남촌 선생이 복수초 꽃을 들여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도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줄기 끝에 피어 있는 한 송이의 황금빛 꽃에 눈길을 모았다. 오백 원짜리 동전 크기의 동그란 꽃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단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겹겹이 꽃잎과 수술이 많아서인지 조금은 탐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복수초 꽃의 아름다움은 화려함에 있지 않고 칼바람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우는 강인함과 아무데서나 볼 수 없다는 희귀함 때문일 것이다. 남촌 선생은 꽃이 핀 복수초를 캐지 않았다. 나는 남촌 선생의 그 같은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에 별장 주인 조 박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를 알고 있다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여자라고 했다.

“내일 오전에 별장으로 찾아갈 겁니다.”

조 박사의 전화를 받은 나는 컨테이너 박스에 앉아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 어둠 속을 서성였다. 가슴이 덜컹거리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비어 버린 기분이다. 불안했다. 나를 안다는 여자가 누구일까. 어둠에 묻힌 별장 주변의 벚나무들이 갑자기 사람들 얼굴로 변해 나를 노려보는 것 같다. 모두들 낯선 얼굴들이다. 나는 후닥닥 놀라 컨테이너 박스로 뛰어 들어오고 말았다. 남촌 선생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자네를 찾아온다는 여자가 누군지 아는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날 밤 나는 안절부절못해 하다가 일기를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남촌 선생이 감추어 둔 술을 몽땅 마시고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 앞산 편백나무 숲에 푸옇게 내린 안개가 걷히기도 전에 나는 일기 노트를 꾸겨서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서둘러 별장을 빠져 나왔다. 나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일기를 쓸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날이 새기 전에 되도록 멀리 가기 위해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 골짜기 산자락에서 꿩이 꿩꿩 울었다.《문장 웹진/200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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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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