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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07-01-31
  • 조회수 5,315

 



김남일



   

벌레 한 마리가 망을 향해 나아갔다. 벌레는 호기심에 가득 차서 쉬지 않고 더듬이를 움직였다. 벌레들은 하루에도 수천 수만 번 망의 의지와 관용과 능력을 시험했다. 그 과정에서 망이 그러했듯 벌레들끼리 서로 연합하고 동맹을 맺고 조합을 만들기도 했다. 때로는 변종과 이단, 그리고 무성 증식에 의한 클론과 라멧을 만들어 망을 노리기도 했다. 지금, 망은 피곤했다. 차라리 거대한 벌레 동맹이나 돌연변이 변종의 색다른 호기심이라면 망 또한 호기심을 갖고 대처할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뻔히 보이는 이런 따위의 벌레라니! 이제 갓 책보를 메기 시작한 유치원생 수준의 더듬이를 달고서도 마치 엄청난 소명을 지닌 듯 당당하게 대로로 다가오는 벌레! 망은 이런 종류의 단독자 벌레에 대해서는 방화벽을 발동시킬 의욕도 일지 않았지만, 어쨌든 길 잃은 애벌레의 접근조차 차단할 의무가 있었다. 망은 그렇게 했다. 벌레는 망의 입구에서 단칼에 제압당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늘 그래 왔듯이, 망은 자신의 전과 목록에 벌레의 침입 시도와 접근 경로, 제거 과정을 기록했다. 순간, 망은 무엇인가 휙 하고 자신의 몸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놀라운 속도였다. 망은 당황해서, 빛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간 그것의 꽁무니를 바라보았다. 자동으로 제2방화벽이 작동되었다. 벌레가 움찔했다. 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가 싶었다. 벌레는 순간적으로 탈바꿈하여 무수한 클론을 생산해 냈다. 그것들은 이미 벌레의 모습이 아니었다. 제2방화벽은 자동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망은 자기 눈앞에서 무수히 복제된 자기를 보고 기겁했다. 최고 단계의 경보가 발동되었다. 이제껏 어떤 것도 감히 이런 경보의 대상이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 망은 마침내 실전에서 그것을 발동해야 했다. 하지만 보라, 최후의 판관이라고 해서 저 무수한 클론들 속에서 어떤 것이 진정한 망인지 가려낼 수 있겠는가. 이 망인가 저 망인가. 0인가 1인가. 존재인가 무인가. 망의 진화 과정은 장차 지극히 단순해서 오히려 난감한 이런 질문에 대해서도 어떤 대비를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망이 아직 기나긴 진화의 도정에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만 질주하는 진화. 그런가. 그것이 옳은 방향인가. 그 순간에도 벌레는 꿈틀거리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전대미문의 혼란이 섬을 집어삼켰다.

버스카드가 오작동을 일으켰다. 전철역 출입구의 개폐기가 제멋대로 여닫혔다. 계류장을 빠져나가려던 비행기가 급히 멈춰 섰다. 착륙 허가를 기다리던 비행기들은 줄줄이 기수를 돌렸다. 대형할인점에서는 턱없는 영수증을 받아든 손님들이 ‘도대체 이 마트가!’ 하고 핏대를 올렸다. 한 계산원은 ‘네, 여기 이마트 맞아요’ 하고 물색없이 대답했다. 영수증은 하나같이 2,007,010원이었다, B3 물류 창고에서는 토끼고기가 기저귀로, 쥐포가 생리대로 분류되었다. 라벨을 붙인 아르바이트생은 빗발치는 매장의 항의에 시달리다 못해 자기 이마에 빈 라벨을 붙인 채 달아나 버렸다. 인근 대학 도서관도 마찬가지였다. 『맑스주의의 해부』는 해부학으로, 『핵폭탄 잉글리시』는 병기학으로 척척 분류되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토플이나 토익책만 들여다봤기 때문에 항의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금융전산망에도 오작동이 발생했다. ATM 기계들이 멈췄다. 온라인 송금이 중단되었다. 망은 곧 다운되었고, 전화는 언제 걸어도 통화 중이었다. 사정은 경찰, 검찰, 법원, 등기소, 주택공사, 철도, 항만, 아파트관리소, 구청, 동사무소, 화장장, 소각장, 재활용센터, 문화센터, 발전소, 병원, 수도사업소라고 다르지 않았다. 경찰은 뽕을 하다가 일곱 번째 붙잡혀 온 마약중개상을 불량청소년과 불량토끼 선도위원으로 임명했고, 검찰은 아무리 검경 갈등이 진행 중이라지만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고 전화통에 대고 악을 썼고, 법원은 1110호 법정에서 열 12건의 재판이 하나같이 토끼학대사건으로 분류되는 데 경악했고, 등기소는 시가 1,080,000,000원짜리 49평 아파트가 토끼 사육농가로 적힌 등기부등본을 버젓이 떼어주었고, 주택공사는 올해 분양할 임대아파트를 모두 토끼장 크기인 0.1평으로 짓는다는 보도자료를 만들었다가 기겁했고, 철도는 있지도 않은 역에 멈췄고, 항만은 태풍을 피해 정박한 배들을 난바다로 내몰았고, 아파트관리소는 주민들의 차는 막고 몰래 들어오는 옆 상가 차는 합법적으로 주차시키는 차단기 때문에 골이 쑤셨고, 구청은 모든 업무를 동사무소에 알아보라고 떠넘겼고, 동사무소는 그렇게 넘어온 업무들을 모조리 말 잘하는 청와대 소관이라며 떠넘겼고, 화장장은 바뀐 시체들을 마구 재로 만들어 조용히 유가족들에게 건네주었고, 소각장은 소각해서는 안 될 것들만 골라 소각했고, 재활용센터는 도무지 재활용할 수 없을 것 같은 물건들만 용케 골라 홈페이지에 소개했고, 문화센터는 불쌍한 임대방목장 토끼들을 위한 에어로빅 강좌를 개설했고, 발전소는 난데없이 벼락을 맞았고, 병원은 코감기 환자에게 관장을 실시했고, 수도사업소는 규정보다 열 배나 많은 황산알루미늄을 응집제로 풀었다가 급히 수문을 막았다. 얼이 빠질 대로 빠진 경찰, 검찰, 법원, 등기소, 주택공사, 철도, 항만, 아파트관리소, 구청, 동사무소, 화장장, 소각장, 재활용센터, 문화센터, 발전소, 병원, 수도사업소는 서둘러 모든 소관 업무를 중지했다. 그때부터 합산, 분류, 체계, 조작, 복사, 조립, 분해, 실험, 적용, 분리, 제거, 처분, 유통, 정리, 비교, 분산, 처리, 발송, 배포, 생산, 융합, 결합, 단축, 압축, 용해, 이관, 홍보 등의 업무가 일제히 정지되었다. 군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다. 섬의 지역 위수사령부는 예하 부대들에 비상 전통을 때렸다. 공격, 방어, 수색, 습격, 전술, 개념, 방진, 측지, 하강, 낙하, 공수, 상륙, 폭격, 모의, 도상, 입체, 진압 등 모든 훈련이 즉각 중지되었다. 그래도 불쌍한 병들은 쏘지도 않은 미사일을 찾아내라는 닦달에 해안가를 토끼 잡듯이 뒤졌고, 제대를 하루 앞둔 병장은 하사 임관을 축하한다는 전통을 받고 기절했다. 역전의 용사 예비군들은 달랐다. 그들은 훈련이 취소되자마자 중식대 3,500원은 물론이고 대통령선거가 있는 올해부터 별도로 지급되는 교통비 1,800원을 받지도 않고 썰물처럼 연병장을 빠져나갔다. 해병대나 불 맞은 토끼도 못 따라갈 속도였다.


기술자, 과학자, 테크노크라트, 고전적 관리, 사설 보안업체 직원, 국가와 지방정부 보안 업무 종사자들이 황급히 모였다. 그들은 미리 작성된 매뉴얼에 따라( 과다 트래픽에 의한 병목 현상, 자기복제 바이러스의 침입, 변종 해킹툴의 확산, 버퍼 오버플로우, 몬스터 보트의 공격, 신규 프로토콜상의 문제, 방호벽 제어 소프트웨어의 오작동, 스니핑, 전력 부족, 전기적 신호 체계의 이상, 하드웨어의 용량 부족, 보안의식의 해이 등.) 사태의 원인과 전개 과정, 예상되는 결과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분석의 전문가들인 만큼 그들은 능히 분석해 낼 터였다. 그들이 우려한 건 딱 두 가지였다. 첫째는 분석하면 저마다 자기라고 생각하는 자만심이었는데, 아슬아슬하지만 그들은 그런 자만심들을 용케 잘 조정해 나갔다. 나머지 하나는 처음부터 그들 모두 동의하는 게 결코 쉽지 않으리라 예상한 문제, 즉 모임 이름을 어떻게 붙이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들은 〈전대미문의 망 먹통사태에 대한 관계기관 비상대책회의〉라는 이름에 합의를 보았지만, 모든 걸 단축하고 압축하는 데 익숙한 그들에게 정작 큰 문제는 약칭이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망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방금 한몽모피의 주식을 처분하고 대신 해피제약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해피제약 미국 연구소에서 토끼를 상대로 한 체세포 복제 실험이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소식을 그곳 연구원으로 있는 지인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해피제약의 주식을 사들인 직후 사자 주문이 몰려들었다. 눈앞에 별이 번쩍했지만, 최종 책임은 스스로 져야 했다. 서둘러 이메일을 썼다. 여차하면 저차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메일 송신이 중단되었다. 뿅 소리와 함께, 화면에는 대문짝만 한 스팸이 불쑥 나타났다. ‘만국의 유령이여 단결하라! 토끼도!’ 아, 그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세월 저편으로 까마득히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아주 궁벽한 시골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술을 마셨고, 집에 돌아와서는 어머니를 팼다. 이유 없이 패지는 않았는데, 패는 이유가 떨어지는 적은 없었다. 어머니가 화장을 했다고 팼고, 안 했다고 팼다. 밥이 식었다고 팼고, 너무 뜨겁다고 팼다. 운다고 팼고, 어, 안 울어? 그럼 울 때까지 맞지 하면서 팼다. 누워도 팼고, 앉아도 팼다. 마침내 비극의 그날이 왔다. 술에 전 아버지는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토끼장 앞에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마침 새끼를 낳은 어미 토끼에게 질경이를 먹이느라 아버지가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그런 기회를 허투루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어, 아나, 토끼! 그래 넌 니 서방이 토끼똥보다 못하다 이거지, 하고 소리치며 돌확 같은 주먹과 쟁기 같은 발을 마구 날렸다. 대번에 피투성이가 된 어머니는 오직 한 마디 말만을 반복했다. 토끼, 토끼, 토끼. 그게 어머니가 지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어머니는 그 후 이십 년을 더 살았지만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토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게 바로 소년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날 아버지는 어미건 새끼건 할 것 없이 토끼들을 모조리 처분했다. 처분! 소년은 너무나 끔찍해서 두 번 다시 그 광경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이란 집요해서 소년이 자라 어른이 될 때까지 거의 매일 밤마다 꿈속에 나타났다. 마침내 그는 가부장적 폭력에 의해 처참하게 희생된 토끼들을 추모하고 그들의 영혼을 위무하지 않으면 진정한 해방세상은 있을 수 없다고 판단, RLF(Rabbit Liberation Front), 즉 토끼해방전선을 발기, 조직했다. ‘만국의 토끼여 단결하라!’는 그때 그가 내건 슬로건이었다. 훗날 망은 그의 결단과 헌신에 무한한 연대의 장을 제공해 주었다.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는 새삼 감격했지만, 어쨌든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토끼가 아니었다. 시간은 돈이었고, 이메일은 여전히 먹통이었다. 잠시 후 ‘만국의 유령이여 단결하라! 토끼도!’가 화면에서 사라졌다. 그는 얼른 익스플로러(버전 6.0) 상단의 단추를 눌렀지만, 망 자체가 그의 접근을 거부했다. 그 경우 통상적으로 하던 대로 했다. 즉, 전원을 껐다 다시 켜는 것. 그는 그렇게 했다, 거듭. 망에 접속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그래도 망 좀 한다고 했는데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망할 놈의 MS놈들! 망할 놈의 KT놈들! 문제는 아무도 그런 저주와 악담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막막했다. 그는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그런 경우를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 어떤 것이든 생각에 앞서 그는 늘 ‘먼저’ 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한때 토끼해방운동 과정에서 눈물을 흘리며 읽고 또 읽었던 책에는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씌어 있었는데, 그는 거기에 밑줄을 치고 형광펜으로 덧칠까지 했다. 그래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 그게 그 뜻이었을까. 그의 손이 그의 생각보다 늘 먼저 무언가를 한다는? 어쨌든 그는 몹시 불안했다. 주식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쫓아오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숨이 가빴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뱄고 등골이 오싹했다. 어서 들어가야 했다. 망 속으로! 하지만 망은 여전히 불통이었고, 그의 손은 마우스만 헛되이 깔딱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다른 방법이 있을 텐데. 그래, 망에 접속하는 다른 방법, 다른 경로가 있을 거야.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아내였다.  


기술자, 과학자, 테크노크라트, 고전적 관리, 사설 보안업체 직원, 국가와 지방정부 보안업무 종사자들이 모인〈  〉( 논란 끝에 약칭이건 뭐건 아예 이름을 안 붙이기로 결정했다.)에서 다각도로 사태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한 후, 대책을 논의했다. 대개 비상, 대체, 임시, 긴급, 우회의 대책이었다.〈  〉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고작 그런 대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데 자존심이 무척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벌레는 일년 365일 분석만 해온 그들 모두를 기겁하게 만들 만큼 난잡했다. 그래도〈  〉의 구성원들은 더 효율적인, 더 합리적인, 더 구체적인, 더 체계적인, 더 기술집약적인 대책은 없는지, 국민의 세금으로 녹을 먹는 자들로서 의무를 다하겠다는 각오로 분석에 분석을 거듭했다. 그 순간에도 ‘토끼똥만큼도 모르는’ 상부는 막무가내로 호통만 치고 있었다. 상부는 역시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는 영원한 아날로그였다. 


얼마 전 그는 친정에 왔다가 돌아간다는 아내를 우연히 만났다. 3년만이었다. 아내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놀라웠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아내는 헐벗고 굶주려 초라한 모습이어야 했다. 그래야 뒤늦게나마 후회할 테니까. 아내는 그가 토끼해방운동을 포기하고 대신 택한 길이 결국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알아야 했다. 논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당연히 그래야 했다. 아내는 ‘부정’을 저질렀다. 그런데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도 서슴없이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잘못(아내는 ‘발단’이라는 말을 썼지만!)은 전적으로 아내에게 있다는 것을 아내 스스로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아파트도 돈도. 아내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으므로 친권 문제로 다툴 필요도 없었다. 베란다에 우글거리던 그 많던 토끼들도 이미 그가 다 처분(오해마시라. 설마 그가 토끼들을 잡아먹기야 했겠는가!)한 뒤였다. 아내는 달랑 트렁크 하나와 태어난 지 보름밖에 안 된 새끼 토끼 ‘꼬토’만 들고 떠나면서 말했다. 당신도 다른 생이 가능하다는 걸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원래 당신도 그런 사람이었잖아요. 그는 코웃음을 쳤다. 무슨 생? 생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불륜을 저지른 주제에! 마지막 마당인데 사랑이라고 표현해 줄 수는 없어요? 아나, 사랑? 아내는 불륜을 저지른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뻔뻔스럽게도 사랑이라니! 그는 그 잘난 ‘사랑’이 얼마나 갈지 두고 보자는 심정이었다. 아내는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거나 돌아와 엉엉 울면서 용서를 구할 터였다. 논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그래야 했다. 하지만 날이 가고 해가 가도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 아내는 깊은 산 골짜기에서 농부의 아내로 살아간다고 했다. 그 농부는 시인이기도 했다. 호기심에 그의 시를 망에서 찾아 읽어보았다. 워낙 유명하지 않아서 검색 방법을 다양하게 시도해야 했지만, 어쨌든 시 두어 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웃겼다. 마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남으로 창을 내겠소 어쩌고 하다가 왜 사냐건 웃지요 하는 풍이었다. 또 한 편은 그가 한때 전선에서 불렀던 투쟁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제 보면 그건 노래도 아니었다. 원인과 결과를 총체적이고도 체계적으로 분석하지 못한 채 자신의 감상을 주체 못해 막연한 분노만 격정적으로 토해 내는 선동 구호,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선상에서는 한미 FTA, 신자유주의는 무조건 악이었다. 시위 구호 중에는 ‘조선 토끼 다 죽이는 한미 FTA 결사반대’라는 것도 있었는데, 일부 언론은 그게 토종 토끼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북조선 토끼들에 대한 노골적인 지지 표명이라고 정확히 비판했다. 모든 게 그런 식이었으니, 당연히 자신들은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렇지만 역사의 수레바퀴가 궁극적으로 승리의 그날로 데려가 줄 선택받은 종족이었다. 그는 혁명을 포기하면서 가장 먼저 그런 선민의식을 포기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내는 지친 그의 어깨를 보듬어 주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요. 사실, 혁명이 뭐 별거겠어요? 열심히 살면 되는 거지. 토끼도 살고 우리도 사는 방법, 그런 길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그 아내가 지금 어떤가! 그는 아내가 〈깊은 산 느린 편지〉라는 자기 블로그에 올려놓은 글을 읽었다.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매일같이 다니던 길인데 놀랍게도 오늘 처음 매발톱꽃을 보았습니다. 자주색 꽃잎이 매 발톱은커녕 새색시의 조바위처럼 예쁘게만 보였습니다. 돌아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시속 150km로 달리는 차에서는 이런 꽃을 볼 수 없을 거라고. 그들이 보고 믿는 건 오직 길도우미(내비게이션)뿐이지요. 천천히 가면 지도나 이정표 보고 그럭저럭 길도 다 찾고 길섶의 이런 꽃이 주는 행복도 맛볼 텐데 말입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차에 올라타고 싶지 않습니다. 내겐 서두를 이유가 하나도 없거든요. 집에 돌아와서는 ‘꼬토’와 한바탕 씨름했습니다. 마루 여기저기에 똥을 싸놨지 뭐예요? 참, 토끼똥 기억들 하시나요? 아이고, 얼마나 귀여운지! 정말 토기똥 같답니다. 그때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흥, 착하고 맑고 순수하기도 하셔라! 그는 유기농 농사를 짓는 한 선배를 알고 있었다. 그 선배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말이 좋아 무공해요 유기농이지, 이건 젠체하고 싶어 안달난 부자들을 위해 생쑈를 하는 건지도 몰라. 농약 안 치고 제초제 안 뿌리고 화학비료 안 주고! 말이 좋지, 주변 할아버지 할머니 눈초리가 어떤지 알아? 나야 그나마 젊은 축이니까, 그리고 가끔 찾아와 거들어줄 후배들이라도 있으니까 손으로 김매고 피 뽑고 한다지만, 그분들은 그저 깜깜절벽이야. 게다가 지구 전체를 보라구. 해마다 태어나는 인류의 5분의 1이 만 5세가 되기도 전에 기아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치유 가능한 질병에 걸려 숨진다고! 이런 판에 나는 팔자 좋게 ‘김 기사, 운전해’ 하는 사모님들을 위해 기를 쓰고 생산성을 무시하는 꼴이니! 그 말을 전처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누구는 당신처럼 살고 싶지 않나? 당신만 옳다고? 천만에! 어쩌면 당신이야말로 오직 당신만 아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야! 이래저래 그는 화가 치솟았다. 지구 도처의 절대빈곤을 악착같이 외면하는 이기주의를 박살내고 싶었다. 그의 손이 다시금 브라우저를 찾았다. 거기에는 분명히 해답이 있으리라. 그러나 망은 여전히 먹통이었다.


상황이 전혀 제어되지 않자, 지방정부 수반이 지역 위수사령부 사령관과 함께 비상계엄 발동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군에는 계엄에 준하는 데프콘이 발동되었다. 그렇지만 이미 자살, 구타, 폭력, 감금, 살인, 방황, 불륜, 고발, 절단, 고성, 방가, 방뇨, 왕따, 이지메, 난동, 폭주, 자해, 공갈, 사기, 협박, 고문, 강간, 횡령, 부도, 절도, 위증, 결석, 불참, 취소, 복수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부두와 해안 경비초소들에서는 섬을 빠져나가려는 시민들을 철저히 차단했다. 시민들은 하루 종일 골목 입구에 설치된 앰프에서 쏟아져 나오는 선무방송을 들어야 했다. 우리는 정량 정성 분석이 상대적으로 난해한 전대미문의 상황을 장악해 나가는 데 있어 비교적 놀라운 진전을 목도하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함부로 한눈을 팔지도 함부로 귀를 빌려주지도 말고 오로지 맡은 바 생업전선에서 소정의 임무를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열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적은 여러분의 주변까지 침투해 있습니다. 믿을 수 없다면 믿지 마십시오. 믿을 수 있어도 믿지 마십시오. 오직 여러분의 정부, 여러분의 군만 믿어 주십시오. 하지만 시민들은 아무래도 정부와 군보다는 토끼를 더 믿는 것처럼 보였다.   


고작 사흘이었다. 그는 그 사흘이 삼십년도 더 된 것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는 컴퓨터를 켜놓고는 있었지만, 망에 접속하려는 시도는 진작 포기했다. 되도록이면 모니터 화면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화면보호기는 아름다운 방목장을 보여주었지만, 어떤 토끼도 그를 위무하지 못했다. 지금 그를 위무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망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에 불안했다. 물론 그는 집 밖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시민들이 자기처럼 당혹스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한다는 사실도. 하지만 그는 시민들의 당혹감과 고통을 자기 것으로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에게 연대는 이미 낯선 언어가 되어 버렸다. 하물며 당혹과 고통의 연대라니! 그는 새삼 자기가 나서서 그런 연대를 주도하거나 동참할 의사가 없었다. 그는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허전함, 마치 죽은 붕어의 부레를 만질 때와 같은 이물감, 까마득히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발밑을 내려다볼 때와 같은 아득함을 시도 때도 없이 느꼈다. 그는 토끼해방운동 과정에서 남영동(치안본부), 서빙고(보안사), 남산(안기부)에 고루 끌려가 본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토끼에 관한 모든 것을 털어놓으라고 다그쳤다. 하다못해 왼발이 긴 토끼가 어떻게 북으로 넘어갔는지 순순히 자백하라고 몰아붙이기도 했다. 나중에는 토끼 가죽이 될 때까지 ‘조지겠다’고도 위협했다. 그때마다 물론 지독히 불안했다. 하지만 일단 매타작에 전기고문 물고문을 당하면 그런 불안감은 언제냐 싶게 사라졌다. (그는 그 모든 고통을 잘 감내했고, 자생적 사회주의자, 주사파, 트로츠키동맹 A파들과 함께 부르주아 법정에 섰다. 거기서 그는 토끼해방운동이 어째서 인류의 미래를 보장해주는지, 왜 사회주의 노선과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설파했다. 그런 ‘꼴 같지 않은’ 자생적 사회주의자들과 그 ‘아류’들을 이미 숱하게 보아온 검사와 판사는 무덤덤하게 지켜보다가 판례에 따라 십년 구형에 칠년 징역을 언도했다. 법원 정리들이 끌고나가려 할 때 그는 소리 높여 외쳤다. 역사의 법정에서 나는 무죄다! 만국의 토끼여 단결하라! 그는 스스로 자랑스러웠다. 감옥에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담금질하며 새롭게 벼렸다. 칠년이 걸리지는 않았다. 위기를 느낀 파쇼정권은 유화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감옥에서 나온 동료들이 우르르 공장으로 몰려갈 때, 그는 임시 방목장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토끼들은 그 엄혹한 시절을 무사히 견뎌냈다. 전적으로, 아직 결혼하기 전의 아내 덕분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불안감에 휩싸인 자신을 고스란히 목격해야 했다. 문득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난 무처럼 빈자리가 숭숭 뚫려 있었다. 전처가 책을 뽑아간 자리였다. 그는 한 번도 의식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빈자리가 마치 뭇별과 심지어 시간마저 집어삼킨다는 블랙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아주 잠시 그랬을 뿐이다. 그는 전처의 불륜을 용서할 수 없었다. 왜? 왜냐하면 전처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전처는 참으로 예뻤다. 전처의 몸에서는 늘 꿀 냄새가 났다. 그는 밤마다 전처를 품에 안았다. 때로는 은빛 구슬이 반짝이는 강을 헤엄치는 느낌이었고, 때로는 달빛 아래 온갖 과일이 농익은 과수원을 알몸으로 걷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 하얀 허벅지라니! 마치 천상의 직물로 짠 옷감 같았다. 그는 그 옷감을 걸치고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전처의 그 하얀 허벅지에 자기 아닌 다른 누구의 손길이 닿았다니! 그건 그의 생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모독하는 파렴치였다. 그는 망이 재개되면 지식검색에 물어보고 가장 그럴듯한 답변을 올리는 누리꾼에게 별점을 듬뿍 주고 싶었다. ‘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사람은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을 ?????(해)도 된다.’ 문제는 망이었다. 망만 연결되면, 그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낯설고도 복잡한 감정의 불균형 상태가 봄눈 녹듯이 해결될 거라고 거듭 생각했다. 그의 눈이 텅 빈 베란다에 가 닿았다. 거기, 토끼도 없었다.  


상황이 장기화되자, 안개처럼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지방정부가 지역 위수사령부와 공모하여 쿠데타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소문부터 방위산업체들과 재벌이 극우 집단과 힘을 합쳐 조기 선거를 요구한다는 소문, 사상 초유의 이번 사태 배경에 극단적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이라크에 군대를 파병한 중앙정부를 응징하기 위해 해커들을 대거 동원했다는 소문, 심지어 섬의 깊은 산에 있는 극소수 왼발잡이 해방토끼들이 만국의 토끼들을 부추기고 그리하여 토끼를 병적으로 사랑하는 만국의 전투적 토끼애호가들이 일제히 망 교란을 시도했다는 소문까지. 섬은 패닉 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리하여 자살, 구타, 폭력, 감금, 살인, 방황, 불륜, 고발, 절단, 고성, 방가, 방뇨, 왕따, 이지메, 난동, 폭주, 자해, 공갈, 사기, 협박, 고문, 강간, 횡령, 부도, 절도, 위증, 결석, 불참, 취소, 복수조차 언제 그랬냐 싶게 사라져버렸다. 극도의 패닉 상태가 오히려 극도의 안정을 가져온다는 사회심리학자들의 분석이 맞아떨어지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 안정이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더 큰 공포 앞에서 지극히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말하자면 폭풍 전야의 고요를 뜻한다는 사실은 저자거리의 ‘이삼김사’도 다 알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잘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처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었다. 전처는 진정으로 그 농부시인을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세상 모든 것을 뛰어넘는 그 어떤 것일 수 있다니까. 사회적 관습이나 규범, 제도가 두 사람의 만남과 사랑을 불륜이라고 낙인찍었더라도 그들은 당당했다. 그것만큼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는가. 인정하자. 어느새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처의 빈자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전처가 설거지를 하던 개수대, 앉아서 신문을 읽던 흔들의자, 잠에서 깨어나 부스스 눈을 비비던 침대, 하루에도 몇 차례 닦고 쓸고 하던 마룻바닥, 제 배로 낳은 아이를 보듯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토끼들을 돌보던 베란다, 그리고 책들을 뽑아간 책장까지. 그는 전처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두려웠다. 이혼 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다만 지금과 같은 경우 전처라면 무엇인가 바람직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전처가 택한 다른 생의 방식에 대해서도 새삼 눈길을 주었다. 한번쯤 시도해 볼만은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꼭 다른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전제로 한 이기적인 행위만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는 속도가 가속도를, 메가가 기가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86 컴퓨터로부터 열린 그의 컴퓨터 역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업그레이드의 그것이었듯, 모뎀으로 시작된 망의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게임을 하든 글을 쓰든 계산을 하든 주식을 거래하든 ‘친구’를 만들든, 늘 더 빠르고 더 많아야 했다. 더 빠른 CPU와 더 많은 메모리, 더 빠른 LAN과 더 많은 정보. 그것만이 진리였다. 그는 그런 눈부신 속도와 양의 진화에 빠르고도 정확하게 적응해 왔다. 왜냐하면 멈칫하는 순간, 뒤처지게 되었으므로. 뒤처진다? 그는 그 말을 곱씹어보았다. 뒤처진다니, 누구에게? 토끼에게? 전처에게? 그 농부시인이라는 작자에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정도라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한번 ‘쪽팔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걸 마치 영원히 뒤처진다고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갑자기 용기가 생겼다. 그는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1번은 그의 아버지가 30년째 있는 정신병원이었고, 2번은 그가 21세기 첫날부터 거래를 맺은 증권회사였다. 3번. 전처의 단축번호를 누를 찰나였다. 그는 3번이 없다는 데 퍼뜩 생각이 미쳤다. 전처가 떠나던 날, 과감하게 지워 버렸던 것이다. 뭐였지? 0111. 생각나는 건 오직 이동통신회사 식별번호뿐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모든 것을 압축키와 단축번호로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한 번도 전화번호 같은 것을 외운 적이 없었다. 당연히 그에게는 수첩도 없었다. 앨범도 없었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모두 망 안에 저장해 놓았기 때문이다. 웹하드는 엄청난 기가바이트를 자랑하는 창고였다. 거기에 그는 전화번호, 살아온 날들의 기록, 즐겨 들여다보곤 하던 예쁜 토끼들과 여자들의 사진, 그가 좋아하고 토끼들도 좋아하던 음악 파일들( 예: 바니걸스의 모든 노래, Jefferson Airplane이 1967년에 발표한 White Rabbit, 가사 중에 Run Rabbit Run이 나오는 Eminem의 Lose Yourself, U.N.K.L.E의 Rabbit In Your Headlights, 심지어 ‘だれかを愛する時 just alright= 다레까오아이스루토끼 just alright=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괜찮아’라는 가사가 나오는 보아의 노래 Winter Love까지.)을 두루 쟁여 놓았다, 말하자면 웹하드는 그의 일상이자 기억, 추억, 현실, 그리고 미래까지도 포함하는 또 하나의 〈그〉였다. 그런데 이제 그곳에 갈 수 없다니! 전처가, 아니 아내가 더욱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는 너무나 아득하고 먼 곳에 있었다. 깊은 산이 아니라 망 속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망 속에!


시민들은 섬을 빠져나가기를 포기했다. 대신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점점 분명해지는 지방정부와 지역 위수사령부, 재벌, 방위산업체, 그리고 어느 틈엔가 조류독감처럼 스며들었다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쿠데타 음모에 용기 있게 맞서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입에서 입으로 그 뜻이 전달되었다. 놀라운 속도였다. 아무도 그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다행히 시민들은 꽤 오래 전이기는 하지만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사수했던 놀라운 경험의 기억 혹은 그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긴 세월 동안 경험의 기억은 일상의 저편 속으로 사라지고, 유전자는 변이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제 그것들은 군대와 경찰, 일부 보안업체와 토끼가죽으로 핸드폰 커버를 만드는 섬 최대의 제조업체 래빗포휴먼을 비롯한 신자유주의 옹호 기업들, 그리고 극우 집단의 쿠데타 불가피론에 맞서 새로운 위력으로 성큼 자라나기 시작했다. 무장만이 억제할 수 있다! 무장만이 보위할 수 있다! 그건 새로운 시민혁명이었다. 망 하나 없이 전개되는 저 놀라운 구전전통의 힘! 섬은 섬은 누구 땅 섬은 섬은 우리 땅/ 망은 망은 누구 것 망은 망은 쟤네 것/ 우리 우리 흥하고 쟤네 쟤네 망해라! 골목에서 거리에서 저자에서 시민들은 눈빛만 마주치면 암구호처럼 그 노래를 불렀다. 산토끼든 집토끼든 토끼들은 천성이 그래서 그런지 이번엔 또 무슨 일일까, 토끼눈을 뜨고서 그 노랫소리를 듣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미안했다. 많은 것을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해준 게 없는 것 같았다. 물론 아내는 한 번도 보채거나 채근하지 않았다. 아내는 그가 디지털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말했을 때, 그렇겠지요, 하지만 꼭 그것만이 유일한 건 아니에요, 하고 말했다. 그런 정도였다. 아내는 엉뚱한 편이어서, 가령 다름과 차이, 틈과 사이, 휴지(休止)와 같은 가치 개념들에 대해서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이혼 직전, 아내는 밑도 끝도 없이 이런 시를 베껴 불쑥 건네주었다.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 나는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 나무여 영혼이여/ 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성장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온 일/ 정리는/ 전란에 시달린 이십세기 시인들이 하여놓은 일/ 그래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하략, 김수영, 「서시」일부). 사실, 그는 토끼해방운동을 포기한 뒤 한동안 심각한 무기력증에 젖어 있었다. 그가 아무리 헌신해도 토끼들은 그를 이해해주지 못했다. 의식화 교육을 받고도 우리를 뛰쳐나가지 않았고, 만국의 토끼들끼리 단결하지도 않았다. 토끼가 관심을 보인 것은 오직 섭취, 배설, 교배, 보전의 영역뿐이었다. 토끼에 건 희망은 사라졌어, 그는 스스로 패배를 인정했다. 물론 그가 애써온 덕분으로 망에는 무수한 토끼해방 관련 사이트와 블로그들이 생겨났지만, 솔직히 그는 그것들이 진정으로 토끼를 위하는 건지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블로그는 토끼를 그저 또 하나의 캐릭터 상품으로 이용하는 파렴치한 작태를 자행했다. (별 달린 베레모를 쓰고 시가를 문 한 해방토끼를 기억하리라. 그 토끼는 해방전선에서 진작 사살되었지만, 저금통, 티셔츠, 공책, 마우스패드, 핸드폰, 심지어 변기 커버에서도 볼 수 있다!) 또 대부분의 동조자들이 기껏해야 토끼를 페르시안 고양이나 이구아나처럼 애완동물로 기르는 것에 반대하는 것으로 해방운동이 완성된다고 믿는 형편없는 철학적 수준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르주아 법정에 함께 섰던 주사파 동료 한 사람이 찾아왔다. 동료의 입에서는 놀랍게도 주사파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하는 말이 나왔다. 물론 동료는 토끼해방운동에 대한 자신의 깊은 이해와 연대감을 말했으며, 아울러 토끼해방운동이 지니는 한계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동지, 핵실험을 봤지요? 그게 쾅 하고 터지면? 알죠? 끝장입니다. 자유고 민주고 나발이고 다 꽝입니다. 따라서 모든 문제의 근본은 그 자입니다. 그 자? 노통? 아니, 북의! 아, 그 자! 그래요, 그 자만 제거되면 남북의 토끼들도 평화롭게 살 날이 올 겁니다. 토끼들이 지금 열악한 주거 환경과 일부 몰지각한 토끼사냥꾼들의 총탄이나 올무 앞에서 신음하는 것, 의료혜택조차 받지 못한 채 평생 비정규직 토끼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는 것도 사람들이 미처 토끼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악의 축이 문제죠. 나는 누구보다도 신심을 가지고 북을 이해하고자 했지만, 결국 거기엔 어떤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동지, 우리 손을 잡읍시다. 그래서 우선 북정권을 타도하고 토끼도 자유롭게 사는 해방세상을 앞당깁시다! 감동적이었다. 그는 막혔던 물꼬가 한꺼번에 확 트이는 느낌이었다. 토끼에 실망했다고 인류의 진보에 걸었던 기대마저 포기할 수는 없지! 그 후 그는 동료가 개설한 사이트에 접속하느라 몇 날 며칠 컴퓨터 앞에서 밤을 지샜다. 보다 못한 아내는 우리 어디 바람이라도 쐬고 오는 게 좋지 않겠어요, 하고 말했다.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당신, 지금 때가 어느 땐지 알아? 그 자가 주민들을 얼마나 착취하는지 알아? 그 자? 노통이요? 아니, 북의! 그러자 아내는 알아요, 그래도 당신은 갑자기 너무 빨라졌어요 하고 두려운 듯 말했다. 그가 차세대 성장 동력, 우리 민족의 활로, 국민소득 3만불 시대의 비전을 말했을 때, 아내는 당신이 어쩐지 당신 같아 보이지 않아요 하고 말했다. 아내는 등산을 가자고 말했고, 가끔 〈풀꽃사람〉이라는 블로그를 찾아가 보라고 말했고, 잠시 컴퓨터를 끄고 한때 당신도 좋아한 박영근의 시집을 한번 읽어보라고 말했다. 어느 날 밤 아내는 저기, 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는 처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화분 좀 치워 줄래요, 아이고 재 좀 아무데나 털지 말아요, 이따 전화 오면 좀 받아 주세요, 따위 말이겠거니 싶어서. 하지만 어느 순간, 그의 귀속에 번개처럼 꽂히는 말이 있었다. 자기, 나 사랑해요? 아직도? 우리가 아직 같은 길을 가는 거 맞나요? 그는 아드레날린의 작용인지 그 말에 몹시 화가 났다. 어쩌면 그가 접속한 사이트에서 여전히 궤변을 늘어놓고 있던 예전 동료(트로츠키동맹 B파)의 글을 읽었기 때문인지도 몰랐고, 아니면 잠시 휴식을 취하느라 한 BVS 솔리테어 카드게임에서 열일곱 번 연속으로 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가 분명히 기억하는 건, 벌떡 일어나 아내를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는 사실뿐이었다. 안 맞으면? 내가 당신과 꼭 같은 길을 가야 해? 그게 사랑이야? 당신 입으로 다름이니 차이니 떠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뭐, 같은 길을 가는 게 맞냐고? 천만에! 나는 당신하고 같은 길을 가고 있지 않아. 분명히 말하건대, 앞으로도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는 지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다. 아내는 다만 모처럼 맥주라도 마시면서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건지 몰랐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니! 한때 박영근의 시를 읊던 입이었다. 한때 너 없이 백년을 사느니 너와 함께 하루를 살겠어 노래하던 입이었다. 한때 역사의 법정에서 나는 무죄라고 외쳤고, 만국의 토끼여 단결하라고 외쳤던 입이었다. 한때 한때 한때. 그는 기억만큼 인간을 처참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웠던 기억들이 어째서 송두리째 사라져버렸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연애 시절 아내와 함께 걷던 숲길이 사라졌다. 아내의 손에 제 손을 얹고 물수제비를 뜨던 강이 사라졌다. 지는 놀을 바라보며 아내의 어깨를 토닥여 주던 바닷가가 사라졌다. 그밖에도 많은 것들, 대개 하찮고 작고 미미하며 허술한 것들, 그렇다고 생각한 것들이 숭숭 사라졌다. 그는 아내의 살내음을 기억하고자 애썼다. 아내의 목소리, 잠에서 깨자마자 여보 이 햇살 좀 봐요 하고 말하던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자 애썼다. 아내의 손끝, 그가 술에 취해 아무렇게나 널브러졌을 때, 이불을 덮어주면서 그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던 그 손끝을 기억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아무것도 선명하게 기억해낼 수 없었다. 모든 기억이 너무 멀었다. 마치 평생 다가가도 닿을 수 없는 망의 중심처럼!( 망의 중심에 관해서는 ⅰ) 부재설: 망에는 처음부터 중심이 없다는 설, ⅱ) 존재설: 중심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설, ⅲ) 무의미설: 중심을 놓고 다투는 논쟁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설 등이 혼재한다. ⅱ)는 다시 무수한 주변이 곧 중심이라는 주변설과 보이지 않는 배후가 중심이라는 배후설, 그리고 미국의 앵글로색슨계 백인 프로테스탄트(WASP)와 유대인(Jews)이 중심이라는 WASP+J설 등으로 크게 나뉜다. (출처, 불명))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뜨거워졌다. 아냐, 이건! 그는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무심코 마우스에 오른손을 갖다 댔다. 그 순간, 환한 빛이 번쩍 하더니 눈앞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그는 평생 그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기본으로 설정해 놓은 포털 사이트의 초기 화면이었지만, 그게 그렇게 아름다웠는지는 처음 알았다. 그는 너무나 놀라서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마침내, 망이 살아났다! 


시민들의 표정은 내남없이 비장했다. 성직자들은 오직 위만 쳐다보라고 신자들을 다그쳤던 자신들을 반성하고, 처음으로 옆과 뒤와 밑도 보자고 호소하며 눈물을 흘렸다. 착한 신자들은 성직자들보다 훨씬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 신자들이 문밖에선 시민이었다. 시민들은 이제야말로 진정한 혁명의 때가 왔다고 생각해서 저마다 비장한 결심을 했다. 그 순간, 그들이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순간, 이제야말로 기계와 물질과 속도와 양과 가부장적 권위와 남성적 힘의 일방적이고도 폭력적인 지배를 벗어나 진정으로 사람답게 사는 혁명을 실천하려는 순간, 이른바 ‘느림과 다름의 철학’에 따라 시골로 산으로 쓰나미 피해지역으로 아프리카 오지로 간 사람들, 그리고 쌀 약품 비료 따위를 퍼주려고 북으로 간 사람들에게 보냈던 손가락질에 대해서 반성하려는 순간, 우리 모두 망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 호모사피엔스로서의 존엄과 권위를 되찾는 세상을 만들자고 입 모아 외치려던 순간, 망이 뻥 뚫렸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망이 복구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시민들은 순간 당황해서 만세조차 부르지 못했다. 혁명을 향해 떼려던 발걸음들이 어정쩡 허방을 짚었다. 누군가 꽁무니에 있던 시민 한 사람이 에이, 나같은 양아치가 혁명은 뭐, 하고 자조 섞인 투로 툭 말을 꺼냈다. 그 말은 순식간에 고병원성 조류독감처럼 온 섬에 번져나갔다. 시민들은 망이 된다니 일단 확인이나 해보고 혁명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겠지 뭐, 하면서 처음에는 슬금슬금, 조금 있다가는 허둥지둥, 조금 더 있다가는 후다닥 달려서 집으로 돌아갔다. 원래 거리에 있던 노숙자들만 도로 거리에 남았다. 바리게이트는 쌓기도 전에 무너졌다. 쿠데타 음모도 쉽게 제압되었다. 첨단 IT 시대의 말단 병들이 DMB폰을 통해 망 개통 소식을 주고받느라 무기를 들라는 구두 명령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의로 듣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말하자면 망이 개통되자마자 제압된 셈이었다. 망의 완벽한 승리였다. 시민들은 망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중앙정부가 군대를 섬으로 보냈고, 지역 위수사령부의 사령관은 ‘사내답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비겁하게 저만 살 길을 찾으려던 지방정부의 수반은 내연의 아내 집에서 권력 남용 혐의로 체포당했다. 기다렸다는 듯 방송은 새로운 광고를 10분마다 한 번씩 내보내기 시작했다. 재벌은 아주 예쁜 여자 탤런트를 내세워 우리는 늘 여러분과 함께 해왔다고 말했고, 한류를 주도했던 멋진 남자 배우를 내세워 앞으로도 영원히 여러분의 편이라고 말했다. 시민들은 당연히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자꾸 그런 광고가 이어지고, 무엇보다 믿음직한 포털 사이트에도 대대적인 광고가 나타나자, 워낙 착한 시민들은 아주 쉽게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불행을 겪은 이들은 누구보다도 간절히 행복을 추구하게 마련이니까. 상황은 종료되었다. 남은 것은 화합이었다. 화합만이 섬의 평화로운 미래를 보장할 거라고 계엄군처럼 들어온 군사령관이 말했다. 그 즉시 군사령관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자는 블로그가 칠백 개나 만들어졌다. 당연히 검색어 순위 1위는 그였다. 정확히 37분 동안만. 그 후에는 김명자가 검색어 순위 1위로 나섰다. 김명자는 바로 저만 살겠다고 달아난 지방정부 수반의 내연의 처였다. 지방정부 수반이 끌려갈 때 그녀도 범인 은닉죄로 함께 붙잡혔다. 누군가 그 광경을 휴대폰 카메라로 몰래 찍어 동영상으로 올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댓글이 쏟아졌다. 햐, 이쁜데? 미스 섬보다도 백배는 낫다. 나는 무조건 한 표! 검색어 순위는 다시 바뀌었다. 1위 애처녀. 2위 수반 패러디. 애처녀는 물론 된장녀나 개똥녀처럼 김명자에게 붙여진 망상의 이름이었다. 그와 아울러 애처로운 애처녀를 석방하라는 블로그와 사이트들이 망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새로운 민주주의가 활짝 꽃피는 순간을 감격스럽게 지켜보았다. 물론 그 순간에도 일부 몰지각한 시민들은 상황이 처음 시작되기 직전에 하던 일, 즉 스타크래프트나 고스톱에 접속해서 캐시를 벌어들이고 승점을 올리느라 그런 데 눈과 귀를 빌려 줄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토끼들은?


주식에서 그는 마음을 졸였던 것에 비해 큰 손해를 보지는 않았다. 그는 이제 두 발을 뻗고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의 참으로 낯설고도 불안했던 마음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는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아내? 천만에! 그는 아내의 빈자리를 전에 없이 크게 느꼈지만, 중요한 건 아내에게는 그가 들어갈 빈자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내, 아니 전처를 생각할 때마다 하얀 허벅지에 얹혀진 그 농부시인이라는 작자의 솥뚜껑처럼 큰손도 겹쳐 나타났다. 망이 개통되자마자, 그는 전처와 함께했던 기억을 웹하드에서 몽땅 지워버렸다. 대신 한 탈북자가 미국 의회 청문회에 제출한 북 인권 관련 테이프를 올려놓았다. 토끼? 천만에! 앞으로 그는 불가피하게 북 토끼들의 문제도 다루게 되겠지만, 어떤 경우든 토끼들의 무지와 비겁을 용납할 의사는 결코 없었다. 우리를 열어놔도 달아나지 않는 토끼들은 더 이상 그의 동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토끼들은 교활하기도 했다.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시세 유리한 쪽에 달라붙을 종족이었다. 그는 토끼와 함께 했던 기억도 웹하드에서 지워버렸다. 단 하나, 그가 아주 좋아했던 예쁜 여자 토끼 한 마리는 남겨 놓았다. 그는 옛 주사파 동료의 권유대로 자신이 다가올 총선에 입후보하더라도 그게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거나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도 문제가 될 행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그렇다면 누구에게? 그는 물론 그것이 꼭 호모사피엔스와 유전자 염기서열이 동일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 이제 모든 게 행복하게 잘 마무리되었다. (되었다?) 

사람들은 화해와 용서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싸이질을 했다. 신임 지방정부 임시수반은 이제부터는 지난 며칠간의 비극을 오히려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개발해야 하며, 나아가 ‘명품 아일랜드’를 만들기 위해 섬 전체를 오직 영어만 쓰는 IEI(International English Island: 국제영어섬)로 개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의 구성원들은 미국에서 날아온 MS 관계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사태의 원인과 경과 과정을 재분석한 후 이번 사태의 ‘기술적’ 문제는 새로운 최첨단 완벽 슈퍼 방화벽의 구축으로 인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못한다고 발표했다. 그 순간, 다 죽은 줄 알았던 벌레 한 마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벌레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벌레는 〈  〉의 구성원들이 미국에서 날아온 MS 관계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내놓은 ‘기술적’ 종합대책을 제 발금 보듯 훤히 꿰고 있었다. 벌레는 급할 게 없었다. 벌레는 천천히 나아갔다. 당당하고 위엄 있고 자신감에 가득 찬, 그러면서도 어딘가 빈틈이 있고 허술하고 헤퍼 보이기까지 하는, 말하자면 매우 ‘철학적’인 발걸음이었다. 기술, 과학, 문명, 합리성, 원인과 결과, 대책과 처방, 입력과 출력, 진단과 분석, 희망과 기대, 마침내 화해와 용서까지, 벌레는 그것들이 지니는 ‘근본적인’ 결함 혹은 틈을 자신의 먹이로 삼아 새로운 진화를 시작했다.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비약적으로 업그레이드된 망조차! 성직자들은 눈앞에 보이는 평화가 그저 고맙고 행복해서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고 하늘을 향해 찬송했다. 그 소리는 일찍이 복종과 예속의 굴레를 떨쳐 버리고 산으로 달아난 극소수 왼발잡이 해방토끼들이 뛰어노는 깊은 산까지 퍼져나갔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문장 웹진/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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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 관리자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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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소설 잘 읽었습니다. 읽는 내내 바투미 항구에 클럽 블랙씨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드네요.작가의 멋진 목소리가 소설의 이국적 배경과 잘 어울려 더욱 깊이 빠져들게 만듭니다.

    • 2010-08-27 00:00:1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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