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고질라 씨 문방구

  • 작성일 2005-08-23
  • 조회수 5,950

 

엄창석


그는 흡사 손풍금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다. 주름 통에 공기가 팽팽히 부푼 손풍금의 건반을 누르기만 하면 금방 뿌우, 소리를 내지르는 것처럼 누가 그에게 말을 걸면 지체 없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곤 했다. 그에게서는 어떤 자의식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마음에 심리적인 회로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사람 같았다.

그가 ‘미도 문방구’ 주인인 고질라 씨이다. 키가  백팔십 센티미터를 웃돌지만 오히려 둥그스름하게 보일 만큼 엄청난 덩치를 가진 그에게 위기가 닥친 것은 지난봄부터였는데, 유월이 끝나 갈 무렵에는 제법 심각한 상태로 변해 있었다. 그 위기가 그에게 어떠한 심리적인 균열을 안겨다 주었는지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손풍금의 건반 틈서리에 끈적끈적한 액체라도 들어간 것처럼 예측할 수 없는 반응이 그에게 나타났다.       

                                  

내가 그날 고질라 씨 문방구 앞으로 간 것은 오전 열한 시쯤이었다. 아침부터 일손이 잡히지 않아 며칠 전에 주문한 슬라이드 사진이나 찾아오자 싶어 사진관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의 문방구 앞으로 가보았다. 

나는 대구역 뒤편에 작업실을 마련한 뒤부터 거의 이틀에 한 번 꼴은 그의 문방구 앞으로 나갔다. 이 근방에서는 유일하게 쉴 만한 곳이었다. 점심 식사 후에 산책 삼아 골목을 어슬렁거리다 보면 저절로 문방구 앞에 이르곤 했던 것이다.

도시 중심부에 있는 역사(驛舍)들은 다 그렇겠지만 대구역사도 전방으로는 중앙로를 화려하게 응시하고 있으나 뒤편으로는 도시의 발전과 아주 무관한 오래된 동네 하나를 매달고 있었다. 여름 햇살에 지글지글 끓는 루핑 지붕과 새똥이 쌓여 거무튀튀하게 변한 슬레이트 지붕들이 딱지딱지 머리를 맞대고 있고 좁아터진 골목에는 온갖 광고 쪽지들이 들붙은 벽돌 담장이 끝없이 이어진다. 지대가 낮은 데다 이, 삼십 층 고층 빌딩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낮에도 어두컴컴하다. 언젠가 대구 항공촬영 사진을 본 대로 표현하자면, 달의 분화구 같은 지역이다.

하지만 바로 그 덕분에 나는 이곳에 작업실을 값싸게 마련할 수 있었다. 제법 번듯한 축에 들어가는 슬래브 단층 건물이었는데, 집주인도 따로 살고 주위도 조용해서 작업실로는 그만이었다. 그리고 이사 온 지 한 달도 안 돼 미로처럼 꼬불꼬불한 골목들이 정겨워져 버렸다. 그중에서도 골목 입구에 있는 ‘미도 문방구’ 앞은 최고의 자리였다. 백 살은 됨 직한 수양버들이 우람하게 서 있고 그 아래로 큼지막한 평상을 놓아 두어 산책 끝에는 꼭 이곳에서 엉덩이를 걸치도록 만들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은 누구나 시각에 따라 적절하게 평상을 이용했다. 아침에는 초등학생들이 학교 가다 말고 책가방을 던져 놓고 한바탕 레슬링을 벌이는 장소였고 오후에는 별 할 일 없는 사내들이 모여들어 바둑을 두거나 소주잔을 기울였다. 새벽에조차 역사 앞쪽에서 퇴근하는 핫팬츠 차림의 처녀들이 앉아 술 취한 목소리를 주고받는, 글자 그대로 24시간 길거리 카페였다.

“뭐 합니까? 아침부터?”

수양버들로 가까이 다가가자 문방구 주인인 고질라 씨가 평상을 뒤집어 놓고 톱질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가 허리를 펴며 손등으로 머리카락을 훔쳤다. 

“팽상을 좀 짤라 내야겠심더. 너무 흐벌지게 커 놔서요.”

평상 한 귀퉁이가 부서져 있었다. 부서진 형태를 보니까 포크레인 같은 중장비가 모퉁이를 돌면서 카터필드 바퀴로 으깬 것 같았다. 그 전에도 트럭 기사가 지나가기 힘들다며 평상을 옮기든지 세워 놓으라고 고함지른 일이 있었다.

“중장비 짓이네. 언제 이랬어요?”

“오늘 아직에 철한이 담임 선샘이 보자 캐서 학교 댕겨 오니까 이리 됐네요.”

그저께 고질라 씨가 연탄가스에 중독된 철한이를 병원으로 업고 간 적이 있었다. 칭찬이라도 하려고 불렀던 모양이었다. 선생이 직접 문방구로 찾아올 일이지. 사소한 것이지만 고씨를 무시하는 행동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그보다 평상을 노골적으로 으깨고 지나간 차에 대해 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에 들락거리는 공사 차량이 분명했다. 이곳이 대구역사의 뒤통수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많은 인구가 바글바글 모여 살아 작고 오래된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대로변에 짓던 고층 아파트가 거의 완공될 즈음 갑자기 초등학교에서도 대대적인 이노베이션 공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삼십 년이 넘은 건물에 보호막을 씌워 놓고 연일 소음을 뱉어 냈다.

“고씨요, 다시 한 번 학교에 들어가야겠네요. 운전한 놈 잡아 와서 평상을 고쳐 놔라 그럽시다.”

“에이, 대형(차) 함 몰아 봐요. 길가에 이런 거 걸기적거리모 짜증 나요. 시간은 없제, 길은 비잡제, 날씨는 덥제. 탱크 바퀴 달린 차는 커브 틀기도 힘드니더.”

고질라 씨가 히죽 웃으며 누구를 변호하는지 모를 소리를 했다. 학교로 오라는 선생이나 차량 운전사까지 자기를 대놓고 얕보는 데도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만난 지 이 년 가까이 되었지만 한번도 화를 내거나 남을 험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거 좀 잡아 주요.”

화를 참고 있는 내게 그가 덜렁거리는 평상 다리를 가리켰다. 하마처럼 큰 덩치가 톱을 들고 웃는 통에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사람이 어째 물풍선 같노. 

평상은 삼분의 일가량 잘라 내고 다리를 세워 못질을 했다. 네 사람이 두 사람씩 등을 돌리고 앉아도 될 만큼 넓었던 평상은 이제 반동가리가 되었다.

“너무 작아징근가요?” 

“작기는요. 걸상보다는 넓은데요, 뭘. 요샌 앉는 사람도 없잖아요!”

빈정거리는 투였지만 사실이 그랬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평상에는 예닐곱 명 정도가 늘 북적거렸다. 치렁치렁 흔들리는 버들가지 아래에서 바둑을 딱딱 두거나 소주잔을 기울이는 맛은 여간 즐거운 게 아니었다. 싸전하는 박씨, 연탄 장사 했던 노씨 영감, 공사장 잡역부인 조씨와 김씨 등 인근에 사는 사, 오십 줄이 넘은 남자들이 매일같이 오후 한나절을 평상에서 보냈다. 어떤 때는 훈제 돼지족발도 소주잔 사이에 오르고 더울 때는 웃통을 훌러덩 벗고 있어도 아무런 흠이 되지 않았다. 지난해 집을 옮겼던 택시 기사 김씨도 대구역을 지나가다 짬짬이 택시를 세워 놓고 달려올 만큼 이곳에서의 정을 못 잊어 했다.

그런 길거리 카페가 갑자기 썰렁해진 것은 단골들이 한꺼번에 이사를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싸전 박씨와 연탄집 노씨 영감이 훌쩍 떠나더니 잡역부 조씨와 김씨도 새벽 두 시까지 술잔을 기울인 다음 날 용달차에 올라타고 손을 흔들며 이곳을 떠났다. 대구역 뒤편 블록에 한 군데씩 아파트가 들어서더니 이제 문방구 바로 뒤쪽 블록까지 들어온 개발업자들에게 집을 팔고 떠났던 것이다. 사실 그런 조짐은 지난해 초부터 있었다. 대로변은 이미 포화 상태였고 마지막 남은 역사 바로 뒤쪽 지대에는 수십 년 전부터 내려오던 집들이 갯조개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개발업자가 손을 대기란 삽으로 갯바위를 훑는 것처럼 쉬운 노릇이었다. 물론 다 개발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도로가에 제법 번듯한 이층집도 있었고 다방이 있는 삼층 빌딩 주인도 절대 반대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더 있었는데, 미도 문방구 고질라 씨와 바로 옆집인 ‘빠마 육천 원’ 최씨였다.

무허가 미용실인 ‘빠마 육천 원’은 마지막까지 버티면 보상가를 더 받아 낼 수 있다는 주판알을 튕기고 고질라 씨와 연합 전선을 펴겠다는 눈치였지만 고질라 씨는 도리어 ‘빠마’집 최씨를 고마워했다. 최씨는 파마 기술자인 아내 덕에 살면서 가랑비만 내려도 비 온다고 일을 나가지 않는 위인이었다. 고질라 씨는 최씨가 걸핏하면 자기에게 이 등신 같은 게, 하고 비아냥거렸지만, 최씨의 모질고 야멸찬 성질이 개발업자에 대해서는 좋은 방패막이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문방구를 계속 하는 것이 고질라 씨의 소원이었다.

고질라 씨는 이십 대 때 레미콘을 몬 적이 있다고 했다. 물론 몇 년 버티지 못했다. 너무 빨리 차를 몰아도 안 되고, 수일에 한 번씩은 저절로 타이어에 펑크가 나야 하며 기름도 적당하게 빼먹고 회사에 청구서를 내밀어야 하는데 도통 고질라 씨는 그러지를 못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다른 기사들과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던 모양이었다. 작은 월급을 벌충하는 그런 방식은 기사들 사이의 오랜 관행이었으나 지나치게 정직한 고질라 씨의 두뇌로는 그딴 것을 계산해 낼 수가 없었다. 한번은 내가 좋은 운전 기술을 썩히는 게 아깝다고 하자, 고질라 씨가 손을 파리채처럼 흔들었다. 

“아아, 운전은 절대로 못 하겠디더! 내 몸띵이를 함 봐요. 운전석이 두더지 집매로 솔은데(좁은데) 핸들을 지대로 놀릴 수가 있어야제요.”

누가 들으면 자존심 때문에(현장에 적응하지 못한) 변명을 하고 있거나 거두절미하기 위해 말을 돌린다고 할 테지만 그게 아니었다. 실제로 운전석이 좁아서 그만둔 것으로 스스로 믿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남 탓을 해본 적이 없으니 그런 변명거리라도 찾은 모양이었다.

그 후 고질라 씨는 부모의 권유로 대구역 뒤편에서 점포 딸린 집을 사서 문방구를 열었는데, 문방구야말로 그의 천성에 부합하는 업종이었다. 초등학교 정문과도 백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아 위치도 좋았다. 역 뒤편 아이들이 학교를 가려면 골목 끝에 있는 그의 문방구 앞을 통과해야 하는데, 엄청난 덩치라는 구경거리에다 성격도 쾌활해서 당장 아이들의 관심이 쏟아졌다. 고질라라는 별칭을 붙여 준 것도 물론 아이들이었다. 그를 ‘고릴라’라 부르고 싶어 못 견디던 판에, 어른들이 그를 고씨라고 하자 아이들은 일제히 ‘고질라’로 바꾸어 불렀다. 돌연변이로 몸집이 거대해진 영화 속의 짐승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문방구를 차린 뒤로 고질라 씨에게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첫 번째가 아이들의 부모 노릇이었다. 역사 뒤편 집들은 어른들이 일찍 일을 나가 아침부터 텅텅 비는데, 어른들이 집에 있는 날은 비가 오거나 혹독하게 추운 겨울날이었다. 장마철이 되면 온 동네가 하루 종일 텔레비전 소리로 왁자해서 비로소 사람 사는 골목 같았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교육에 별다른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설령 관심이 있다 해도 실험 실습으로 가득 찬 신교과과정을 이해하지 못해,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준비물들은(학교에서는 매일같이 준비물을 가져오란다), 거의 문방구 고질라 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준비물을 사겠다고 돈을 달라고 조르면 부모들은, 우예 맨날 준비물 타령이고, 내 문방구 가서 알아보고 올끼다, 하고 아이의 반응을 떠보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거짓말인동 고질라한테 물어봐요, 하며 학용품비를 타냈다.

사실 아이들은 고질라 씨를 바보로 여기는 눈치였다. 조무래기들이 멀찍이 떨어져서, 바보야 낼은 실로폰 갖다 놔라, 하고 소리치며 달아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도 고학년들한테 ‘다구리’를 당할 때 고질라 씨가 번개처럼 뛰어가서 도와주면 다시는 바보 소리가 입밖에 나오질 않았다. 문방구에서 반경 오백 미터 안에는 어떤 폭력도 일어날 수 없었다. 한 번도 치안 질서가 잡힌 적이 없는 역사 뒤편 동네에 고질라 씨는 혼자 근무하는 경찰관인 셈이었다.

어른들이나 아이들이 그를 얕보긴 하지만 백번 양보해도 그의 두뇌는 생활에 불편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골목 안 아이들의 이름을 거의 다 외우고 있었다. 이틀 전에도 선생 한 명이 문방구로 나와, 고씨 오늘 박철한이 못 봤어요? 학교에 안 나왔는데, 하고 말해 주자 고질라 씨는 대번 철한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고질라 씨는 선생을 대신해 박철한의 집을 방문했다. 잠시 후 연탄가스에 중독된 철한이를 들쳐 업고 골목을 뛰어나오는 고질라 씨의 모습은 영락없는 119구급대원 같았다고 한다.

평상은 전보다 삼분의 일쯤 작아진 크기로 수리가 끝났다. 평상을 처음 만들었던 것도 고씨이다 보니 뜯어고치는 일도 감쪽같았다.

노란 장판을 덮어 잔 못질까지 치고 나자 아담한 맛은 있었다. 서너 명이 앉아 바둑을 두고 구경할 정도는 되었다. 나는 자판기에서 콜라 캔을 뽑아 고질라 씨에게 내밀었다. 그가 땀을 훔치다 그제야 내가 일찍 나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오늘 우째 일찍이 나왔니더?”

“아 예, 사진 찾으러 중앙통에 갔다가 오는 길에…….”

“사진예?”

나는 들고 있던 사진 봉투를 꺼내 보이려다 말고 골목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골목 안은 어둡고 한산했다. 문방구와 맞붙은 무허가 미용실에는 ‘빠마 육천 원’이 쓰인 함석판에 못이 하나 빠져 바람이 불 때마다 덜거덩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크레인 소리가 크르릉크르릉 울려 왔다.

               

학용품들이 빽빽이 들어찬 문방구 안은 네 평 남짓했다.

나는 종이 커피 잔을 들고 비좁은 통로에 서서 진열장 여기저기를 들여다보았다. 갖가지 필기도구와 공책, 물감, 딱지, 팽이, 실로폰 등등, 수백 종류는 될 성싶은 문구와 완구들이 천장까지 위태롭게 쌓여 있었다. 조금 전 고질라 씨는 도매점에 다녀오겠다며 나에게 가게를 맡기고 나갔다. 계집아이 하나가 벼루를 사러 왔는데 물건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고질라 씨는 아이들이 급히 필요하다면 도매점에 가서 사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나는 오전부터 혼자 평상에 앉아 있기가 민망해서 문방구로 들어왔다.

고질라 씨는 이 많은 학용품들의 가격을 어떻게 다 기억할까 싶었다. 언젠가 그가 내 작업실에 와서 책상과 책장, 방 모서리에 함부로 쌓여 있는 책을 보면서, 책이 어데 있는 동 다 알아요? 하고 물었다. 그럼요, 늘 보는 책인데 모르겠어요? 하고 대꾸하자, 햐아, 역시 작가는 다르니더, 하고 혀를 내둘렀다. 내가 보기엔 천장에 닿도록 쌓인 문구들에서 필요한 물품을 찾아내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워 보였다.

“헤헤, 뭐 닭머리라 캐도 숩게 알 수 있니더. 요새 애들이 쓰는 것은 개잡게 비치하고 글치 않은 거는 우로 올려놓지요. 맨날 같은 물건만 만지잖아요.”

“학교에서 필요한 것도 빨리 알아야 할 텐데요.”

“애들이 참새겉이 와서 조잘조잘 캐 주니더. 가끔은 선생님들이 직접 왕림해서 갈쳐 주기도 하고요. 내일 삼학년 과학 실험에는 비이커가 필요하데이, 일학년은 탁구공을 쓴데이, 카는 식으로요. 그래도 빠진 거 있으모 늦게라도 도매상에서 사가 교실로 날라 주모 되니더.”

나는 진열장을 꼼꼼히 살펴보다 카운터 안쪽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의자는 그 하나뿐이었다. 의자는 고질라 씨의 몸집에 맞춰 팔걸이가 쩍 벌어지고 앉는 바닥이 펑퍼짐하게 변해 있었다.

내가 사진 한 장을 찾아낸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사진은 선풍기 밑에 끼여 있었다. 교복 입은 여섯 명의 고등학생들이 트럼펫 색소폰 같은 악기를 들고 있고 그때도 몸집이 드러나게 큰 고질라 씨가 큰북을 안고 뒷줄에 서 있었다. 빛이 바랬다기보다 컬러 색깔이 제대로 나 있지 않았다. 그가 삼십 대 중반이니, 십오 년쯤 된 사진일 것이다. 

“이 사진…… 쪼매 볼래요? 머가…… 이상시럽지 않나요?”

언제나 쾌활했던 그가 목소리까지 더듬거리며 문제의 사진을 보여 준 것은 한 달쯤 전이었다. 그날은 평상에서 자정까지 바둑을 두다가 누군가 선동하여 술을 한잔 하러 가게 되었다. 싸전 박씨와 ‘빠마’ 집 최씨, 다른 몇 사람도 함께 인근 칠성시장으로 걸어갔다.

요즘의 재래시장들이 그렇듯이 대구에서 가장 큰 축에 들어가는 칠성시장도 낮보다 밤에 사람들이 더 북적거렸다. 불경기 탓이었다. 점포들은 어차피 거래가 안 되는 낮에 물건을 팔려고 하기보다 해가 빠지기를 기다려서 점포 앞 도로에다 포장마차 술집을 차렸다. 재래시장 특유의 분위기와 희미한 촉 전등 아래로 내놓는 멍게나 해삼 같은 안주가 젊은 술꾼들에게는 복고적인 맛을 풍기나 보았다. 새벽 두 시쯤 되면 좌석의 절반은 여자들이 채울 지경이었다.

그날 우리는 포장마차에 앉아 술을 제법 마셨다. 박씨와 김씨가 이사 날짜를 받아 놓은 탓일 것이다. 소주 서너 병을 너끈히 비우고 노래를 한 곡씩 뽑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질라 씨의 노래가 일품이었다. 목소리가 미성이었고 나무젓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두드리는 박자도 어쩐지 ‘니나노 젓가락’이 아니었다. ‘빠마’ 집 최씨가, 고등학교 때 뺀드부 했다 카지럴, 하고 말해 주었다. 고질라 씨가 밴드부를 했다니,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무신 나발을 불었노? 싸전 박씨가 아는 체하며 물었다.

“불긴 뭘 불어요. 큰북을 쳤디더. 대고(大鼓)라 카는데, 그거 수울 거 겉죠? 행진할 때모 북을 어깨에 메고서 가죽이 뚫어질 만큼 팡팡 쳐대야 하죠. 엔간한 애들은 팔띠기 빠지니더, 히히.”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고질라 씨와 음악과의 관계였지만 큰북을 쳤다면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진짜 북에 구멍을 냈어? 그 덩치에 북까지 멨으마 볼 만했겠네. 계속 큰북 얘기가 화제에 오르자 고질라 씨는 마지못한 듯 악기에 대한 얘기 하나를 꺼내 놓고 말았다.

“사실 빵구가 나모 큰일나지요. 뺀드부는 진짜 기합이 쎄요. 군대서도 군악대에 비하모 헌병은, 우리끼리 말로, 애들 놀이터라 캤니더. 악기를 두고서는 말도 못해요. 만약에 악기에 기스를 냈다던가 녹을 슬게 했으모 걔는 그날 기어서 집에 가야 돼요. 한번은 운동장 아침 조회 때, 후배 하나가 색소폰을 불다가 땅바닥에 떨가 뿌렀지요. 수업 끝나고 걔는 전 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한테 호되게 맞았죠.”

“흐흐, 고씨도 얘들 때려 봤어요?”

그가 워낙 성격이 순해서 내가 그렇게 물었다. 

“내가 먼첨 각목으로 스무 방을 쳤니더. 전쟁터에 나간 군인이 총을 내던져 뿌냐고 카면서요. 나도 무시꽁대기 만큼은 깡단이 있었심더……. 그런 일이 있고 한 멫 달 후에 교련 검열을 받을 때였니더. 와요, 우리 댕길 때 교련 검열이 젤로 큰 학교 행사였잖아요. 뺀드부도 멫 달간 준비를 하죠. 검열 받는 날, 그때 우리는 운동장 스탠드에 서서 연주했는데, 갑자기 내가 치고 있던 큰북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아입니꺼. 어깨에 멘 멜빵 쇠고리가 뿌라진 겁니더. 북이 해필이모 스탠드 모서리에 떨어져서는 퉁 하고 공중으로 튀어오르더니 운동장으로 마구 구불러 가는 겁니더. 북이 운동장으로 구불러 가자 사열 받던 애들이 낄낄대고 난리 나 버렸니더.”

“아이구, 그래서 어찌 되었소?”

“내가 삼학년이었으이, 누가 뭐라 카겠어예. 이학년 후배가 멜빵 관리를 못했다고 잘못을 뒤집어썼는데, 진짜 면목도 없고…… 전딜(견딜) 수가 없디더.”

선배라서 살았네, 다들 한 마디씩 했지만 고씨의 얼굴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고씨는 그게 아직도 괴롭다는 듯 소주잔을 거푸 들이켰다. 남을 탓하지 않는 고씨가 아닌가. 나는 그가 그 일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어릴 때야 그런 일들이 자주 있죠. 나도 가게 물건을 훔친 적도 있고요, 친구들끼리 엘리베이터를 수동으로 정지시키고 내려 버리는 장난도 쳤는데, 꼭대기 층에 사는 노인이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줄 알고 계단으로 걸어 내려오다 발을 잘못 디뎌 완전히 불구가 된 사건도 있어요. 다 어릴 때 모르고 저지른 일이죠. 내가 그의 기색을 살피며 위로조의 말을 건넸으나 그의 짙은 팔자 눈썹이 더 휘어져 보였다.  

그런데 나중에 알았지만 악대부 사건은 그의 마음에 생각보다 훨씬 깊은 상흔을 남겼던 모양이었다. 고질라 씨에게 어떤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그날 자리를 파한 뒤였다. 나와 조씨는 집으로 가려면 문방구를 지나가야 했다. 셋이서 문방구 앞에 이르자 고질라 씨는 소주를 한잔 더 하자고 우리의 소매를 끌었고 우리는 다시 평상에 앉게 되었다. 고질라 씨가 문방구 문을 따고 들어가 소주병과 함께 가지고 나온 것이 바로 이 사진이었다. 악대부원들끼리 찍은 사진. 

“이거 좀 봐 볼래요. 이거 흑백인가요, 칼란가요?”

“내 눈에는 뻐얼건 사진 겉은데?”

잡역부 조씨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건너다보며 말했다. 붉은 나트륨등 아래여서 색깔을 잘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원래 컬러로 찍은 사진이 분명했다. 고질라 씨는 침통한 목소리로 악대부 했던 애들이 모임을 갖자고 연락이 와서 옛날 사진을 꺼내 보았는데 사진이 자꾸 흑백으로만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내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사진을 그의 눈앞에다 대고 흔들었다.

“잘 봐요. 지금도 그래요?”

그가 사진을 들고 가로등 불빛에 한참 비추어 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네…… 낮에는 그러케 비앴는데, 그러케…….”

그가 말끝을 어물거렸다. 나도 술김에 들었던 말이다 싶어 그 뒤로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갔던 사진관에, 그저께 처음 필름을 맡기러 갔을 때였다. 십여 년 전에 잡지사에서 찍은 슬라이드 필름을 현상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중앙로에 가서야 겨우 현상이 가능하다는 사진관을 찾아냈다. 스튜디오가 좁기는 했지만 사진작가가 운영하는 사진관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산을 소재로 한 작품이 벽을 따라 전시되어 있었는데, 펜화처럼 가늘고 흰 줄기의 자작나무 숲과 눈사태가 일어나는 산허리, 거대한 짐승이 몸을 뒤틀고 있는 듯한 검은 산등성이가 집요하리만큼 치밀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사진가이시군요. 흑백 사진만 찍나 보죠?”

“흑백이 맛은 더 깊지요.”

나는 실소했다. 컬러 사진이 처음 나왔을 때 그런 말이 있었다. 유행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둥, 새로운 기술이 겉만 화려하다는 둥 해서 나온 말이나, 실제로 그 무렵 컬러 사진은 피사체의 색채와 워낙 동떨어지고 색도 물감을 칠한 것처럼 조잡했기 때문이었다. 시디(CD)가 처음 나왔을 때 엘피판 레코드로 음악을 듣던 감상자들이 오랫동안 코웃음 치던 것과 유사한 현상일 뿐이었다. 컬러 사진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지도 이십 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내가 어이없어하며 웃었기 때문인가. 내게서 받은 슬라이드 필름이 손상되지 않았는지 유리판에 비춰 보던 주인이 고개를 삐딱하게 들었다.  

“슬라이드 필름을 가져오신 분이, 흑백 사진에 대해서는 웃으시는군요.”

그때였다. 희번덕거리는 그의 눈동자에서 짧은 섬광 같은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고질라 씨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사진관에 오는 사람들 중에 컬러를 구별 못하는 사람이 있던가요?”

그는 나를 한번 보더니 대답은 않고 필름 봉투에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기재한 뒤 접수증을 떼 주었다. 나는 내 물음이, 흑백 작품만 찍는 그를 비아냥거리는 투로도 들릴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나는 오해를 하지 말라는 듯 느긋한 시선으로 액자들을 일별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그가 불쑥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제 사촌 누나가 그런 병을 앓았지요……. 그림을 그리려고 미국 유학 갔다가 육 개월 만에 돌아왔는데, 갑작스럽게 색맹이 돼 버렸다는 겁니다. 개처럼요. 개가 색채를 분별 못한다고 하죠? 희한한 일이죠. 실제로 붉은 고추를 사오라고 하면 푸른 고추를 사왔거든요.”

“네? 그래요?”

“혼자 외국 생활하다가 머리가 돈 거라 하기도 하고, 새벽에 화실에서 나오다 집단 폭행을 당해서 그리 됐다는 얘기도 있었죠. 충격을 받아서 색맹이 됐다니,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림 그리기 싫어서 그런 핑계를 댄다고 했어요. 암튼 누나는 색이 구별되지 않는다며 붓을 잡지 않았지요. 난 이상하게도 누나의 말이 믿어졌어요. 내가 여섯 살 때인데……. 나이가 들어서 나는, 그때 사촌 누나가 색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어요. 눈이 색을 뱉어 버렸다고 할까요. 색채는 빛 때문에 생기는 가변적인 현상이잖아요. 사물의 색깔은 인위적이고 사람의 욕망이 묻어 있어요. 솔직한 본질은 흑백 속에 다 스며 있다고 봐요. 그래서 나도 컬러풀한 색감을 싫어하게 된 지도 모르겠네요.”

사진가는 색깔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 같았다. 나는 그보다 색을 거부한다고 색맹이 되었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갑작스럽게 정신적인 충격을 받으면 눈이 멀어질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었다. 심리적인 원인으로 신경계에 이상이 오는 것을 전환 장애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전환 장애가 색깔을 구별하는 원추 세포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걸까. 나는 고질라 씨의 악대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해한 일이었다. 화가였다는 사진가 누나의 색맹 현상은, 그림을 그리다 받은 충격이 그림 자체에 대한 거부 현상으로 나타났다고 굳이 설명한다 해도, 고질라 씨의 색맹은 무엇으로 이해해야 할까. 자의식이라곤 없어 보이는 그에게 원추 세포를 흔들 만한 심리의 층들이 존재하는가.


점심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교문 앞에도 문방구가 있긴 했지만 아이들은 고질라 씨 문방구를 훨씬 많이 이용했다. 앞서 달려온 녀석들이 문 앞에 내어 둔 오락기에 매달렸고 골목 초입은 아이들로 바글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사각 딱지와 가수 스티커 사진 석 장을 팔았다. 총에 들어가는 탄환을 달라는 아이도 있었다. 값을 몰라 아이들에게 물어서 팔 수밖에 없었다.

“여기 적어 놓으면 돼요.”

몇몇 아이들은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에 자기 이름을 적고 문구를 가져갔다. 돈을 안 가져온 아이들에게 고씨가 그렇게 배려한 것인데, 이미 사, 오십 명의 이름이 비뚤비뚤 적혀 있었다. 가게를 맡은 나로서는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학용품에 대해서만 외상을 주는 원칙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안도했다. 두어 녀석은 내 눈치를 힐금거리더니 미리 적혀 있는 숫자를 손가락으로 지우고 지금 가져가는 것만 적고 있었다.

“요놈들! 앞엣것은 왜 지워. 똑바로 안 적을래?”

“잘못 적어서 다시 쓰는 건데요.”

한 녀석이 내 눈을 피하지도 않고 서슴없이 둘러댔다. 고질라 씨는 한 시가 넘어서야 돌아왔다. 내가 외상 장부를 엉터리로 기입하는 녀석을 셋이나 적발했다고 하자, “히히, 점심시간까지 돈 있는 애들이 멫 밍이나 될라꼬요. 내중에라도 갖꼬 오니더.”

“요새 애들이 얼마나 영악한데요. 아이스크림 사먹고 여기 와서는 외상 긋는다니까요.”

“걱정 놓으이소. 낸들 밑지는 거 없심더. 두 개 팔모 하나 흘러도 괘않아예. 글코오, 점심 먹읍시더. 자장면 자실래요?”

아이들이 들어가고 나자 길은 텅 비었다. 평상으로 나왔다. 그전 같으면 대여섯 명은 모여들 시간이었다. 간간이 자재 실은 트럭만이 평상 앞을 크르릉 대며 지나갔다. 다행스럽게도 새마을 아파트에 사는 우씨가 긴 소매 셔츠를 입고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근 한 달 만에 나오는 것 같았다. 지난해 겨울 후두암에 걸려 후두 적출 수술을 받은 후 어쩌다 한 번씩 평상으로 나왔다.

“하이고, 얼굴 잊어뿌겠니더! 새마을요, 점심은 자셨어요?”

막 중국집에 전화를 걸고 있던 고질라 씨가 문방구 밖을 내다보며 소리쳤다. 새마을은, 난 점심은 안 먹어. 그냥 막걸리만 먹지, 하고 손사래를 치고 사발술을 들이켜는 시늉으로 대신했다. 고씨는 자장면 곱빼기 둘만 시켰다.

“팽상이 와 이래 작아졌노.”

쉰다섯 살인 새마을은 그동안 집에만 있지 않았는지 여전히 얼굴이 검게 타 있었다. 아니면 오랫동안 현장 일만 하다 보니 피부 속까지 햇살에 그을려 있는 건지도 몰랐다. 허연 병색보다 검은 쪽이 건강해 보여서 좋았다.  

새마을 우씨와는 정말 모처럼 바둑을 두게 되었다. 우씨와는 흑으로 석 점을 놓는 바둑을 두었다. 그래도 동네바둑 이력이 쌓여서, 정석이나 행마는 법을 따르지 않았지만 판을 과격하게 전투로 몰고 갈 줄은 알았다. 후두를 떼어 내고 난 뒤로 행마가 더 거세진 것 같았다.

까만 인공 성대를 목에 갖다 대고 새마을이 끌끌거리는 새된 음성을 내보냈다.

“다 이사 갔다디이 진짠가 보네. 문방구 앞에는 트럭만 댕기고 말이오.”

그가 사는 사 층짜리 새마을 아파트는 재개발 구역은 아니었다. 내가 묵묵히 있자 다시 성대를 목에 붙였다. 인공 성대이다 보니 말이 가재걸음이었다.

“최씨는 갔어, 있어? 간판은 기냥 붙어 있는데, 빠마 약 냄새가 안 나네.”

그러고 보니 ‘빠마’ 집이 며칠 동안 일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평소에도 문을 닫고 미용 손님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부산 동생 집에 메칠 댕겨 온다디더.”

“그래? 으음. 떠나는 사람이 있으모 오는 사람도 있제. 그게 사람 사는 동네의 이치야.”

“바둑 두소. 이거 백 대마 숨통이 간당간당 하네. 여다 끊으모 죽나 사나?”

이 년 동안 두었지만 아직도 초보 수준을 못 벗어나고 있는 고질라 씨가 곁에 앉아서 돌을 가리키며 재촉했다. 사활의 결말을 보고 싶은 것이다.  

나는 밀림처럼 우거진 흑 진영을 빠져나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꼬리를 떼어 준 뒤에야 간신히 수습되었지만 계가(計家)에서는 지고 말았다. 오랜만에 두다 보니 판에다 바둑돌을 딱딱 때리는 맛조차 흥겨웠다. 나는 고질라 씨에게, 다방에 커피 석 잔을 주문하라고 말하곤, 이번엔 내기바둑을 두었다. 첫 판은 졌지만 연패는 할 수 없었다. 예전부터 평상에서 두는 바둑이지만 승부에 대해서는 치열했다. 아마 정직한 승부욕이 오랫동안 평상바둑을 유지시켰을 것이다.

갑자기 주위가 왁자지껄해진 것은 두 번째 판이 거의 끝나 갈 무렵이었다. 나나 새마을이나 바둑에 몰두하느라 주변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문방구 앞에 십여 명이 몰려와 소리치고 있는 것이었다. 낯익은 동네 사람들 앞에 고질라 씨가 엉거주춤 서 있었다.  

“도장을 와 안 찍어! 도로 끼고 있다고 유세 떠는 기야.”

“다른 데는 도장 찍고, 정리하고, 이사까지 갔어. 우리 덩어리만 남은 기야.”

“난 여서 문방구를 계속 할랍니더.”

고질라 씨는 습관적으로 입가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보상금 받아 딴 데 가서 문방구 하면 되잖아.”

“이게 일곱 평이니더. 고 돈 받아 갖꼬 어델 가서 차립니까.”

땅값이 아파트 분양 평당 가격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일곱 평 문방구를 넘기면 아파트 세 평을 살 수 있는 셈이었다.  

“오오라 보상금 더 받아 처먹을라꼬. 거지 거죽때기 겉은 점빵 하나 들고 팔자 고쳐 볼란다 이기제!”

두던 바둑을 멈추고 나와 새마을이 평상을 내려갔다. 우씨가 목에 성대를 갖다 대고 고함을 질렀다.

“아, 이사를 가고 안 가고는 자유지, 그걸 왜 남이 가타부타해.”

하필이면 이럴 때 ‘빠마’ 집 최씨가 없나 싶었다. 성격이 불같은 최씨가 있었더라면 동네 사람들이 함부로 고씨를 윽박지르지 못할 게 아닌가. 그러나 고씨에게 헛주먹질을 하던 남자가 ‘빠마’ 집 함석 문짝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최가는 어디 가뿌렀어? 안에서 기척이 있을 리가 없었다. 도망친 게지 어딜 가! 오십 줄 여자 하나가 화를 못 참은 듯 못이 빠져 덜렁거리는 ‘빠마 육천 원’ 간판을 뜯어 바닥에 내던졌다.

사람 없는 집에서 이러면 되느냐고, 나도 나서서 말렸다. 그러면서 괴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질라 씨에게는 절대로 도장 찍어 주면 안 된다고 언질을 줘놓고 자신은 자리를 피해 버린 게 아닌가. 사람이 없으니 어차피 도장을 찍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개발업자가 답답해할 때 나타나서 흥정을 하겠다는 요령이 아닌가.

사람들은 한층 더 사나워졌다. 나와 새마을이 말린다고 나서 봤지만 남의 동네 일를 간섭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여자 하나가 분해 못 견디겠다는 듯 고질라 씨의 허리춤을 잡고 흔들었다. 산 같은 고질라 씨가 꿈쩍도 하지 않자 옆에 있는 즉석 뽑기 과자통을 들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과자통이 뒤집히면서 구슬과자가 쏟아졌다.

고질라 씨가 과자통을 제자리에 세우며 아까 했던 말을 다시 하고 있었다.

“난 여서 문방구 계속 할랍니더.”

                                  

칠월이 되면서 나도 경황이 없었다. 내가 속해 있는 문학회에서 2박 3일 문학 기행이 있었고 연이어 안동에서 열린 전승문학(傳承文學) 심포지엄에 참석하느라 대구를 떠나 있었다. 심포지엄이 끝나고도 바로 작업실로 돌아오지 못했다. 대구 특유의 뜨거운 햇살은 단층 슬래브 작업실을 벌겋게 달구어 놓았을 것이다. 나는 동행한 작가들과 함께 인근 문학창작촌에 가서 방을 빌렸고, 거기서 밀린 원고까지 쓰게 되었다.

대구로 돌아온 것은 떠난 지 보름 만이었다. 함께 있던 작가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안동을 떠나기 전에 술 한잔을 더 했고 대구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열한 시가 가까웠다.

대구역 지하도를 앞에 두고 택시에서 내렸다. 떠나 있는 동안에도 시원한 평상에 앉아 바둑을 두던 일이 그리웠다. 미도 문방구에 대한 걱정도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재개발이 확정되면 아무리 도장을 찍지 않은들 강제 철거를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빠마’ 집 최씨에게 별다른 수가 있을 턱이 없었다. 고질라 씨는 또 어디 가서 일곱 평짜리 문방구를 차릴 터인가.

가로지르는 골목길이 있었지만 미도 문방구와 초등학교로 통하는 이면 도로로 길을 잡았다. 초등학교에는 이노베이션 공사가 거의 끝나 가는 모양이었다. 컴컴한데도 건물에 둘러쳐져 있던 공사용 가설물들이 제거돼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 자정은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어쩌면 평상에서 고질라 씨나 새마을 우씨를 만날 수 있을는지도 몰랐다. 우씨는 저번에 인공 성대로 마구 고함을 지른 탓에 구멍 뚫린 목이 상하지나 않았을까 염려되었다. 구멍이 뚫린 자리로 피가 흐르는 모습이 자꾸 눈에 아른거렸다. 그러나 버드나무가 보였을 때 실망스럽게도 평상에는 아무도 앉아 있는 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문방구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늘 열 시 정각에 문을 닫던 문방구였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밀려왔다. 

문방구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을 때에야 진열장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고질라 씨를 볼 수 있었다. 그가 놀란 듯 엉덩이를 들썩했다.

“웬일로 아직 있네요?”

며칠간 안동에 갔다 왔다는 말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전에도 길게는 열흘씩 평상에 안 나올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들어가는데도 고씨는 어깨를 수그린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하루에 열 번을 마주쳐도 언제나 왕왕 큰소리로 떠들며 반갑게 말을 거는 그여서, 무슨 일이 있었구나 싶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요?”

그가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낭패스러운 사건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와서 또 행패를 부렸습니까? 신문에서 종종 보도되는 것처럼 업자들이 깡패들을 동원해서 협박한 것은 아닐까. 저 엄청난 덩치가 깡패들에게 희롱을 당했다면 얼마나 안쓰러울 터인가. 부스스 몸을 일으킨 고질라 씨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빠마’ 집 최씨가 번쩍 머리를 스쳤다. 연대하자 해놓고 한창 시끄러울 때를 맞춰 자취를 감췄던 약빠른 작자였다. 혹시, 최씨한테 도장을 넘겼나요? 그자가 고씨 보상금까지 챙겨서 달아났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고질라 씨는 아무런 대답을 않고 진열대에 놓인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를 끼우고 있는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얼마 후,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나서 그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조합하는 순간 내 등골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 그런 기 아이고요…… 갑자기 색, 색깔이 안 비디더.”

“예? 정말요!”

“오늘 낮에 파란색 켄트지를 달라는 아한테 회색을 줬니더. 아가, 파란색요, 파랑 몰라요? 그 카는데 내 눈에는 모다 꺼므스름하게 빕디더.”

“그럴 수가…… 지금도 그래요?”

전에도 그런 말을 듣긴 했지만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였다. 잠시 있다 사라질 현상이겠거니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 말에 그제야 고질라 씨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지금은 잘 비요. 비니까 스티커(포스트잇)를 붙이고 있었제요. 빌 때 표시를 해 둘라꼬요.”

고질라 씨가 손바닥에 있는 포스트잇을 펴 보였다. 거기에 ㅃ, ㅍ, ㄴ, 주, 녹, 검 따위의 색을 뜻하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메칠 전부터 그런 기미가 있었니더. 저녁답에 한 아가 노란색 탁구공을 달라 카는데, 눈앞이 캄캄합디더. 곽을 통째로 꺼내 갖꼬 니가 골라 보래이 했지예. 저녁 묵고 난 뒤에야 눈이 지대로 돌아왔는데, 하나라도 빌 때 표시해 놔야겠다 싶데요.”

고질라 씨는 조금 전처럼 진열장 끝에 가서 등을 돌리고 앉았다. 내가 들어올 때도 학용품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이런 횡액이 다 있을까. 멀쩡하던 눈이 갑자기 색깔을 보지 못하다니! 나는 눈앞에서 벌어진 사태의 충격 때문에 저번 사진관에서 들었던 얘기나 그의 색맹 현상으로 고민했던 일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고질라 씨에게, 이런 것은 별난 일이 아니다, 라고 대수롭지 않은 거다, 라고 가장하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웃으며 말을 걸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유리 진열대 위에 있는 포스트잇을 끌어당겨 ㅃ, ㅍ, ㄴ 이니 하는 색깔 이니셜을 적어 주었다.

고질라 씨 앞에 있는 학용품의 색을 보며 이니셜을 적어 나가다 나는 다시 아연해졌다. 진열장 위로 천장까지 쌓여 있는 수백 종류는 될 듯한 학용품이나 완구들이 모두 빨강 노랑 같은 원색 톤의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숫제 문방구 안은 수채화 물감을 뿌려 놓은 것 같았다. 나는 그전에는 한번도 문방구가 원색들도 가득 차 있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바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고질라 씨에게 색맹 현상이 일어난 까닭이 얼핏 짐작이 되는 것도 같았다. 어떤 격한 거부감이나 공포심이 그의 시신경으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게 한 것이 아닌가. 그가 처음 색맹을 느낀 것은 악대부 사진이라고 했다. 악대부 사진과 문방구, 전혀 관계없는 것 사이에 도대체 어떤 보이지 않은 끈이 존재할까. 뭔가 잡힐 듯하면서도 이해의 끄나풀이 자꾸만 달아나고 있었다. 강박 증상이라면 모순이 결합된 것이다.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악대부 기억에서 시작된 심리적인 강박 증상이, 마치 파스칼의 원리처럼, 일종의 심리적인 수압(水壓)의 작용을 받아 문방구라는 관(管)으로 터져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그 반대로 문방구를 지키겠다는 강박증이 수압의 작용으로 악대부의 기억과 부딪쳐 한층 예민한 억압 증상을 형성한 채 되돌아 나왔든가. 문방구는 색깔로 가득 찬 공간이지 않나.

“여기 좀 적어 놨어요.”

나는 허리를 펴는 고질라 씨에게 얼른 이니셜을 적은 포스트잇을 내밀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채로 그가 유리 진열대 위에 있는 포스트잇을 거둬 갔다. 팔자로 휘어진 눈썹 아래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일시적인 현상일 거예요. 아주 일시적이요. 내일이면 괜찮아질 겁니다.”

두 시쯤 되어 나는 집으로 간다고 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는 진열장 아래의 셋째 칸에서 딱풀 곽을 꺼내고 있었다.


미도 문방구와 블록은 달랐지만 나도 이사를 가게 되었다. 집주인이 구월 중순까지 방을 비워 달라고 통보를 해왔다. 그 뒤로 고질라 씨는 포스트잇을 보고 문구를 파는지, 정말 일시적으로 그런 현상이 생겼는지, 색이 안 보인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나도 왠지 그것에 대해 따로 물을 수가 없었다. 이사를 갈 때까지 우리는 자주 평상에서 만났다. 어떤 때는 새벽 두 시까지 앉아 술을 마시기도 했다. 지난 이 년 동안 평상에서 만난 숱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때때로 그들의 바둑 실력을 평가하기도 했다.

우리는 미도 문방구에 대해서는 별 얘기를 하지 않았다. 아마 고질라 씨도 알고 있을 것이다. 문방구가 앞으로 어떤 절차를 밟게 될 건지를. 나는 방을 빼라며 찾아온 집주인에게서 직접 듣기는 했다. 빠마 집은 벌써 도장 찍었는데 문방구는 끝까지 안 찍었다대. 그럼 어떻게 되죠? 괜찮아, 아파트 공사가 들어가도 당장 헐리지는 않을 거야. 왜요? 거긴 화단 자리래, 화단.

이사 가기 전날. 이삿짐의 대부분은 책이었다. 밤이 늦어서야 묶어 놓은 책 꾸러미 사이를 비집고 잠을 잤다. ‘빠마’ 집은 뜯기고 미도 문방구만 혼자 남아 있는 꿈을 꾸었다. 문방구 뒤로는 공사장 담장이 높이 쳐져 있었다. 나는 이삿짐 트럭을 타고 가다가 문방구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고릴라인지, 유원인인지 털이 부숭부숭한 짐승이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꿈이라서 그런가, 모두가 흑백이었다.《문장 웹진/2005. 9》



추천 콘텐츠

튤립이 있는 식탁보

튤립이 있는 식탁보 강태식 존슨 카운티 외곽에는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거의 모든 면에서 깨끗한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집들이 - 지붕과 창문과 현관 손잡이와 마당을 두른 나무울타리의 모양까지 똑같은 집들이 - 거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진입로에는 작고 예쁜 우체통이 서 있고 - 어느 집이나 다 - 우유 배달 업체의 상표가 찍힌 낡은 주머니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팻말이 울타리 한쪽에 걸려 있으며 마당 잔디가 빗질 자국이 남아 있는 머리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화단에 심은 꽃들도 거의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아 보였다. 차를 몰고 천천히 지나면서 보면 그랬다. 어디선가 가끔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모든 음이 기계가 치는 것처럼 정확했지만 음이 정확하다는 것말고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연주였다. 얼마 전에 하나뿐인 아들 톰을 다른 주에 있는 대학에 보낸 벤 하우저와 로지 하우저도 그 거리에 있는 많은 집들 중 한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아들의 방문 앞에 멍하니 서서 그 안에 아들이 쓰던 물건들만 - 사인볼과 다 버리고 딱 두 개 남은 레고 모듈러 시리즈와 절대로 버리지 말라고 고집을 부려서 버리지 못한 낡은 청바지와 픽업트럭을 끌고 이케아 매장에 가서 사온, 벤이 꼬박 이틀 동안 조립해서 겨우 완성한 오래된 이층 침대와 디딤판에 노란색 번개 마크가 크게 프린팅된 스케이트보드 같은 것들만 – 남아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그런 물건들과 함께 - 한때 아들이 필요로 했던 물건들과 함께 - 그 집에 남겨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벤과 로지는 아들이 자기들 품을 영영 떠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 날마다 그런 짐작이 확고한 사실로 굳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 자기들이 톰의 방문을 바라보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벤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 창 너머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벤은 희미한 빛이 감도는 그맘때의 거실을 둘러보며 오래 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 로지가 외출 준비를 완전히 마치고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립스틱만 바르면 된다거나 스카프만 고르고 금방 나가겠다는 말말고 진짜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기다리고 있었다. 벤은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리모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손을 뻗어 TV를 켰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 뒤에 다시 TV를 껐다. “뭐 해, 벤?” 로지의 목소리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안방 문 너머로 들려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눈썹을 그리거나 파운데이션을 더 꼼꼼하게 바르면서 몸을 뒤로 틀어 소리 지르는 로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떼어내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보를 잡아 펴는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숱하게 보아 온 모습들. “아

  • 관리자
  •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 관리자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