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 작성일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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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장진영
박정상이 과일 바구니를 들고 찾아왔다. 병문안하는 사람처럼. 교복 차림으로 미루어 보건대 박정상은 고등학생이었다. 과일 바구니도 무리해서 샀을 것이었다. 인디핑크 색깔의 광택 없는 종이로 고급스럽게 포장된 과일 바구니 안에 애플망고가 대여섯 개 담겨 있었다. 마치 크고 탐스러운 알 같아서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박정상은 마르고 키가 컸으며 자신의 기다란 팔다리를 어떻게 가눠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큰 키 탓에 눈을 내리깔았는데 거만함보다는 주눅 든 모습에 가까웠다. 과일 바구니를 든 오른손은 안정적으로 허벅지 부근에 떨구어졌고 아무것도 들지 않은 왼손은 불안스레 허공을 맴돌았다. 기타를 치는지 오른손만 손톱이 길었다.
처음에 부모님은 박정상이 누군지 몰랐다. 떨떠름하게 현관문을 열었을 뿐이었다. 문을 연 사람은 아빠였다. 잡상인이거나 종교인이겠거니 싶었다. 그럼에도 문을 열었는데,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기에 스스로 놀랐다. 심지어 안전고리도 걸지 않았다. 앞으로 아빠는 그 이유에 대해 자주 생각할 것이었다. 박정상이 “안녕하세요. 저는 박정상입니다.”라고 말하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거울을 보고 여러 차례 연습한 것 같은 동작이었다. 아빠는 박정상이 누군지 몰랐다. 초면이었고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누군지 알 것도 같았는데, 아슬아슬하게 참아 내는 재채기처럼 그 앎을 흘려보냈다. 아주 잠깐의 평화를 위한 안간힘이었다. 박정상이 자신을 박태섭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자 아빠는 기절했다. 허물어지듯 넘어진 게 아니라 만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통나무 모양으로 뒤로 쓰러졌다. 퍽, 하고 전구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부엌에 있던 엄마가 달려와 비명을 질렀다.
박정상은 움찔했지만 정면을 바라본 채 꼿꼿이 서 있었다.
처분을 기다리는 듯했다.
엄마는 식칼을 들고 있었다.
기절했던 아빠가 금세 정신을 차렸다. 몸은 그대로였지만 눈은 번쩍 뜨였다. 자신과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본능에서 비롯된 초인적인 힘 때문이었다. 아니면 그저 장하나가 아빠의 가슴팍을 밟고 지나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장하나는 외부인인 박정상의 발 냄새를 곰곰이 맡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아직 쓰러져 있는 아빠의 손바닥에 엉덩이를 가져다 댔다. 때려 달라는 뜻이었다. 장하나의 동생 장하다는 스탠드형 에어컨 위에서 식빵 자세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닐 수도 있었다. 장하다는 사시였다.
아빠는 자신이 왜 현관 바닥에 큰대자로 뻗어 있는지 알아차리느라 한참 헤맸다. 그러던 중에 식칼을 든 엄마를 발견했다. 아빠는 엄마와 박정상을 번갈아 응시하더니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달려들다시피 엄마를 끌어안았다. 혹시라도 엄마가 저지를지 모르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 기절하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는 다소 뜬금없는 행동이었다. 엄마가 “왜 이래!” 소리치며 몸을 마구 흔들어 댔다. “놔! 아니니까 놓으라고!” 몸싸움이 격해지면서 식칼이 이리저리 휘둘렸다. 엄마는 아빠를 떨구려 했지만 아빠의 힘이 더 셌다. 엄마는 아빠의 팔 안에 가두어졌다. 두 사람은 숨을 헐떡였고 그 헐떡임은 울음으로 바뀌기 쉬운 종류였다. 눈물을 흘릴지 말지는 선택하기 나름이었다. 둘 중 한 사람의 주도하에 그들은 점점 천천히 호흡했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숨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한데 맞추어졌다. 부모님은 거의 언제나 울지 않는 쪽을 택했다. 혼자서는 달랐으나 둘일 때는 그랬다.
박정상이 과일 바구니를 가만히 내려놓고는 무릎을 꿇었다.
박정상은 늦둥이 아들이었다. 박정상의 아버지 박태섭은 아들을 데리고 다닐 때마다 손자가 참 잘생겼다는 칭찬을 듣곤 했다. 한번은 손자 아니라고 오해를 바로잡았는데 “아, 증손자 분?”이라는 말을 들었고 그 뒤로 박태섭은 그저 감사하다고 대꾸할 따름이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박태섭은 예나 지금이나 노인 같았고 박정상은 훌쩍 컸기에 박정상은 비로소 박태섭의 아들처럼도 보였다. 박태섭을 데리고 온 교도관은 깨지지 않도록 강화유리로 만든 창 너머의 박정상을 보며 부자가 닮았다는 생각을 전혀 거리낌 없이 했다. 접견인 명단에서 미리 관계를 확인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교도관이 박태섭을 접의자에 앉힌 뒤 자기 자리로 가 앉았다.
“어쩐 일이냐?” 박태섭이 아들 박정상에게 물었다.
“어떻게 지내세요?”
“변비 걸렸어.” 박태섭이 애처럼 투덜거렸다. “화장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똥이 나올 리가.”
박태섭은 인생에서 오직 두 가지만을 신봉하며 살아왔다. 자유, 그리고 프라이버시. 건강도 행복도 부도 명예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굳이 좇지 않아도 이미 박태섭에게 주어져 있던 것들이었다.
“무슨 체면을 차린다고 그러세요.” 그런 짓을 해놓고, 라는 말을 박정상은 참았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박태섭이 오른손으로 왼손 엄지손톱의 거스러미를 뜯자 수갑이 잘그랑거렸다. 창살 사이로 햇빛이 비쳐 들어 그 안에서 먼지가 반짝거렸다. 해는 이런 곳에도 공평하게 들어왔다. 점심시간이 지난 뒤였고 교도관이 식곤증으로 하품을 했다. 입을 닫자 턱에서 딱 소리가 났다. 벽시계의 초침이 움직였다. 박태섭은 처음 보는 물건인 양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들에게 허락된 시간이 차곡차곡 지나가고 있었다.
“사과 안 하세요?” 박정상이 본론을 말했다.
“무슨 사과?” 박태섭이 진짜 모르는 것처럼 반문했다.
박정상은 인내심을 갖고 설명해야 했다. 아버지는 죄를 지었고 죽은 아이의 부모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박태섭은 고음악 동호회 사람들과 가평에서 잣막걸리를 마시고 잠깐 눈을 붙인 뒤 자신의 제네시스를 운전하여 서울로 올라가던 중 스쿨존에서 교통사고를 내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었다. 혈중 알코올 농도는 면허정지 수치였다. 이변이 없다면 박태섭은 교도소에서 생을 마감할 터였다. 박태섭은 너무 늙었기에 남은 수명으로는 형을 다 살기도 어려웠다. 장수해야 하는 이유였다. 나쁜 사람이 오래 사는 이유이기도 했다.
“너한텐 미안하게 됐다.” 박태섭이 사과했다. 박태섭은 그날의 일을 정말로 후회했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었다. 특히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고3 아들에게 아비로서 미안했다.
“아니. 아니. 아니.” 박정상이 세 번 반복했다. “저한테 말고요.”
박태섭이 자기 손목을 보여 주었다. 수갑을. 아마도 죗값을 치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의사소통했다. 짐짓, 함축적으로. 아버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점잖은 양반이라고 여겼다. 아버지는 먼 옛날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약물 중독으로 군대는 면제되었고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는 교수가 된 이후에 차차 땄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대지주였던 덕으로 아버지는 교수가 되었는데 교수치고는 돈이 많은 편이었다. 꽤 많았다. 아버지는 간혹 불법적인 일에 연루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감옥에 갇힌 적은 없었다. 몇몇 짓궂은 인사들은 아버지를 ‘대표님’이나 ‘형님’으로 칭했다. 정년퇴임 후 아버지는 골프를 치거나 고음악 연주회에 다녔다. 마음에 드는 연주자를 후원하기도 했다. 더 마음에 들면 집으로 불렀다.
“그럼 누구한테 하랴.” 박태섭이 말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걸.”
“아버지.”
“내가 사죄하면 다른 뜻이 있다고 오해할 거다. 탄원서라든지 그런 걸 바란다고 생각하지 않겠니. 일전에 말했다시피 항소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난 이미 늙었어. 재판하다 죽을 게다. 그보다, 돌이킬 수 없는 일로 사과하는 건 큰 실례야. 실례고말고. 그 애,” 갑자기 목이 콱 막혀서 박태섭은 목청을 큼큼 가다듬었다. “그 집 부모한테 말이다.”
이들 부자는 그 일을 두고 옥신각신했다. 의견은 대립했으나 둘 다 조용조용 얘기했기에 싸우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볼륨을 아주 낮게 해 틀어 둔 라디오 같았다. 곧 약속된 시간이 끝났고 교도관이 졸음에서 깨어나 박태섭을 접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박태섭이 스스로 일어나겠다는 시늉을 하자 교도관이 인권 존중 차원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박태섭은 노화와 운동 부족으로 다리에 근육이 빠진 터라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접의자가 삐거덕거리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박태섭은 평생 자동차를 자기 신체의 연장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안경이라든지 틀니처럼 말이다. 남들은 달구지 끌고 다닐 때 스포츠카를 뽑았다는 건 박태섭의 오랜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보라. 자동차가 박태섭을 어떻게 새 다리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또 자동차가 어떻게 사람을······. 박태섭이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는 순간 박정상은 그 모습에서 눈을 돌렸다. 창살과 빛과 먼지가 보였다.
박정상이 과일 바구니를 사 들고 우리 집을 찾아오기 사흘 전 일이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애플망고를 씻었다. 식칼 ― 그 식칼 ― 로 무른 과육을 가르고 껍질을 벗겼다. 여덟 개로 조각내려다가 여섯 조각을 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한 과일이었다. 고등학생이 이런 비싼 과일을 무슨 돈으로 샀을까. 심지어 그 집 가장도 지금······. 엄마는 칼 든 손의 손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찬장에서 가장 예쁜 접시를 꺼냈다. 시집올 때 장만한 혼수였고 고이 모셔져 있다가 월세에서 전세로, 그리고 마침내 내 집 마련에 성공했을 때 집들이에 쓴 이후로 처음 꺼내는 것이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즉시 힘겨워졌기에 나중에,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는 먼 훗날에, 마저 생각을 이어 나가기로 했다.
불청객이 사 온 애플망고를 엄마는 가까스로 손질해 내왔다. 박정상은 그때까지 현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한 세기 정도 흐른 것 같았다. 누구도 박정상을 일으켜 세우지 않았으므로 박정상은 스스로 뻘쭘하게 일어나야 했다. 엄마, 아빠, 박정상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세 식구처럼 보였다. 장하나가 다가와 식탁으로 점프해 올라왔다. 여섯 조각 난 애플망고에 코를 대고 벌름거렸지만 맛을 보지는 않았다. 남의 음식을 탐내지 않는 것은 고양이의 큰 미덕이었다. 장하다는 여전히 에어컨 위에 식빵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어딜 보는지 알 수 없었다. 둘 다 길에서 주운 고양이로 장하나가 먼저 우리 집에 왔고 장하다는 일 년쯤 뒤에 왔다. 장하나는 길에 흔히 보이는 코리안숏헤어 치즈태비였고 장하다는 신비롭게 생긴 청회색 러시안블루 ― 아마도 품종묘 ― 였다. 집에 놀러 온 손님들에게 둘째 고양이 이름을 맞히게 하는 건 아빠의 고약하고 재미없는 취미 중 하나였다. “얘는 장하나, 그리고, 쟤 이름은 뭐게?” 손님들은 십중팔구 “장두리.” 했다. 그러면 아빠는 엄청나게 만족하며 껄껄 웃었다. “장하다.” 장하다는 착하고 약간 자폐였고 부모님은 언뜻 장하다를 편애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알게 모르게 장하나를 더 좋아했다.
세 사람은 접시 위에 놓인 애플망고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빠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박정상의 멱살을 잡았다. 엄마는 아빠를 말리지 않았고 그저 의미를 해독하려는 듯 쳐다보기만 했다.
“너. 너······.” 엄마가 말리지 않자 아빠는 당황한 듯 우물거렸다. “너 이 자식.”
엄마는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아빠를 말렸다. 아빠는 약간 안도하며 박정상의 멱살을 놓았다.
그때 엄마의 내부에서 조금 의심하는 마음이 싹텄다. “혹시······.”
“아뇨. 아뇨. 아뇨.” 박정상이 손사래를 쳤다. 항소, 탄원서, 접견실에서 아버지가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해가. 어쩌면 아버지가 옳았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거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런 거 아니에요. 저는 그냥······.”
“그냥?” 엄마가 뒷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듣고 싶은지 아닌지 확신이 없었다.
“사과하러 왔어요.” 박정상이 약간 포기하듯 말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러자 보고 싶지 않았던 걸 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아까부터 박정상의 시야에 들어오던 게 하나 있었던 것이다. 굳게 닫힌 흰 문. 다른 방들의 문은 살짝 열려 있었는데 저 문만 고집스레 닫혀 있었다. 그 너머에 뭐가 있을지 박정상은 가늠할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있을지 없을지.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일지, 아니면 하나도 빠짐없이 치웠을지.
“죄송합니다.”
박정상이 사과하자 엄마는 뺨을 맞은 사람처럼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아빠가 이번에는 진짜로 화를 냈다. “너 이 자식!” 왜냐하면, 박정상에게는 사과할 자격이 없었다. 사과해야 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도 기특해.
그날 얼굴에 나이트 크림을 바르고 잠자리에 든 엄마의 뇌리에 잠깐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다.
다음날 엄마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출근해 총 마흔세 가구를 방문했다. 엄마는 삼천리 도시가스 검침원이었다. 사람들은 점점 외부인을 믿지 않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곤 했기에 엄마는 일터에 진입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일터에 진입하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사람들은 엄마를 잠재적 살인자 취급했다. 엄마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엄마는 녹초가 되었다.
엄마는 검침원이자 ‘기억 친구’이기도 했다. 가스를 점검하러 가는 김에 치매 노인이 잘 계신지도 체크하는 역할로, 지자체에서 임명했다. 엄마는 임세라 할머니가 사는 행복주택에 방문했다. 잘 아는 할머니였다. 임세라 할머니는 엄마가 방문할 때마다 화들짝 놀라 하늘 ― 천장 ― 을 올려다보곤 했다. 새똥을 피하는 사람처럼 자기 머리를 보호하곤 했다. “비행기.” 임세라 할머니는 그렇게 뇌까리곤 했다. 엄마는 임세라 할머니가 거주하는 곳에 방문하기가 싫었다.
엄마가 찾아오자 할머니는 허리를 수그리고 머리를 가린 채로 거실을 가로질러 와 엄마를 이끌어 식탁 아래로 숨겼다.
“임세라 할머니.” 엄마가 임세라 할머니를 타이르려 하자 임세라 할머니가 쉬이, 하고 엄마를 조용히 시켰다. “괜찮으세요, 할머니?” 엄마가 임세라 할머니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요, 할머니.” 엄마가 임세라 할머니를 안심시켰다. 엄마는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쉬이.”
둘은 한동안 숨죽이고 있었다.
엄마는 옴짝달싹 못 했다. 움직이면 진짜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그렇지만 엄마는 다리가 저렸다. “임세라 할머니.” 엄마가 임세라 할머니의 상체를 감싸 안자 자디잔 진동이 느껴졌다. 추워하거나 무서워하는 듯했다. 엄마는 임세라 할머니의 팔뚝을 쓸어 대며 마찰로 열을 냈다. “임세라 할머니.”
임세라 할머니는 점점 심하게 떨었다. 임세라 할머니가 흐느꼈다. 엄마는 임세라 할머니의 머릿속에 떨어지는 포탄 소리를 들었다.
엄마가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불렀다. “세라야.”
가스는 문제없었다. 점검 기록을 마친 뒤, 기억 친구이기도 한 엄마는 매뉴얼대로 보건소에 임세라 할머니의 상태를 보고했다:
특이사항 없음.
그 시각 아빠는 배달 중이었다. 아빠는 원래 은행원이었는데 아빠가 다니던 S은행에서 만 40세 이상에게 희망퇴직을 받았다. 처음엔 그만둘 생각이 없었지만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집에 우환이 닥친 터라 아빠는 겸사겸사 일을 그만두었다. 퇴직금으로 대형 로펌 변호사를 사서 박태섭과 법정에서 싸울 생각이었다. 애초에 원심의 형량에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8년. 고작. 아빠는 박태섭이 뻔뻔하게 항소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박태섭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항간에는 지은 죄가 많아 오히려 감옥 안이 안전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누가 알겠는가?
아빠는 음주운전 사망사고에 살인죄를 적용하고자 국민청원을 넣고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는 등 백방으로 뛰었지만 사람들의 동의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여론은 부모님에게 꿍꿍이속이 있다고 의심했다. 부모님을 장사치라고 생각했다. 아빠는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도보 배달을 나가기 시작했다. 잡스러운 생각이 들어서지 못하게 몸을 움직여야 했다. 변호사비로 쓰였어야 할 퇴직금이 생활비로 야금야금 줄어드는 것도 보기 싫었다. 그렇게 모르는 사이에 배달 일이 직업이 되어버렸다. 아빠는 쿠팡이츠와 배달의민족을 동시에 켜놓고 하루에 2만 보 넘게 걸었다. 오토바이를 탈 생각은 없었다. 아빠는 많이 걷고 싶었다.
사람들은 점점 배달을 안 시키려 했다. 경기도 어려워지고 살림살이도 팍팍해져서 집에서 만들어 먹거나, 아니면 날씨가 따뜻해졌으니 밖에 나가서 사 먹는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은 모처럼 단비가 내려 콜이 많이 뜨는 편이었고 우천으로 인해 배달 단가도 높았다. 아빠는 검은 판초형 우의를 입고 열심히 걸었다. 모자에 달린 투명 캡에 빗물이 맺혔다 흘러내렸다. 아빠는 휘파람을 불었다.
빙수가게 문을 열어젖히며 아빠가 외쳤다. “안녕하세요, 배민 2만 9천 원짜리요.”
아직 음식이 준비되지 않았고 다른 콜도 뜨지 않은 상태라 아빠는 젊은 여자 사장과 한담을 나누었다. 우천이 아빠에게는 호재였지만 사장에게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 주문이 마수걸이라고 했다. 사장은 하얀 니트릴 장갑을 낀 손으로 빙수에 토핑을 얹고 조그만 플라스틱 종지에 연유를 짜서 담았다. 굉장히 느릿느릿한 동작이었다. 왜 별점이 낮은지 이해되었다. 사장이 은박 보냉 백에 빙수를 포장하는 동안 아빠는 가게 내부를 구경했다. 버릇처럼 위생 상태를 살짝 체크했는데 크게 더러운 곳은 없었고 그제야 부수적인 것, 그러니까 인테리어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벽에 사진이 가득했다. 피사체는 모두 같은 사람인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빙수가게 사장이었다. 사진마다 모습이 딴판으로 달랐다. 호기심이 동한 아빠가 실례를 무릅쓰고 사진들을 유심히 보자 사진 속 주인공이 사정을 설명했다. 영화 촬영 현장이라고. 그 사진들은 빙수가게 사장의 필모그래피였다. 그러니까 사장은 배우였고 독립영화 몇 편에 출연한 경력이 있었다. 또한 이 빙수가게는 지난 코로나 시국 때 그녀의 꿈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차려진 곳이었다.
아빠가 공사판에서 교복이 반쯤 찢긴 채 각목에 힘겹게 기대 서 있는, 콧등에 뽀로로 밴드를 붙인 불량 청소년 사진을 가리켰다. “이건 무슨 영화예요?”
“<펑키 정키 럭키>요.” 추억에 잠기려는지 젊은 여자 사장의 눈에 초점이 풀렸다. 사장이 영화에 관련된 이런저런 비화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아빠가 맞장구를 쳐 주자 신이 났는지 이야기가 사방팔방 뻗쳤다. 썩 흥미롭기도 해서 더 듣고 싶었지만 아빠는 빙수가 녹기 전에 말을 끊어야 했다. 아빠 가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가게의 별점을 사수하고 싶었다. 이 가게는 잘되어야 했다. 생각보다 오래 중단된 그녀의 꿈을 위해서. 사장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봉지 손잡이를 예쁜 리본 모양으로 묶어 아빠에게 건네주었다.
어차피 가게의 첫 주문이었고 아빠가 도착한 이후 더 들어온 주문 건은 없었기에, 즉 이곳에서 한 번도 ‘띵동, 배달의민족 주문, 배달의민족 주문’ 소리를 듣지 않았기에, 다른 건과 혼동될 리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아빠는 봉투에 붙은 영수증을 확인했다. 2만 9천 원. 요즘 사람들은 밥보다 비싼 디저트를 먹는 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아빠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콜 수가 늘어나는 데다 가볍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런데 아까 배달을 수락할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참 야리꾸리한 메뉴 이름이었다. “애망빙?”
그 시각 장하나는 사냥에 여념이 없었다. 엉덩이를 씰룩거리고 꼬리를 뱀처럼 움직였다. 동공이 확장되고 수염이 바짝 섰다. 그리고 폴짝. 발톱 세운 발로 맨땅을 짚고 미끄러졌다. 장하나가 지그재그로 폴짝거리며 맨땅을 두들겨 팼다. 그러니까 장하나는 그 애만이 볼 수 있는 가상의 쥐를 사냥 중이었다. 혼자서도 잘 놀았다.
장하나는 길거리 시절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하나는 그 시절을 감각하곤 했다. 시멘트 바닥, 길에 핀 잡초, 화단의 꽃, 뜯어먹으면 기분이 좋아졌던 풀, 개미, 찢긴 쓰레기봉투, 친하게 지내던 까마귀, 가끔 싸움을 걸던 까치, 맛있지만 사냥하긴 까다로웠던 참새, 마음씨 좋은 사람이 따 주었던 참치 캔,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누군가가 구조한다고 훔쳐 간, 아직 눈도 채 뜨지 못한 새끼 고양이. 그리움과는 달랐다. 이곳이 싫은 것도 아니었다. 그때는 그때, 지금은 지금. 그렇지만 장하나는 지금 그때를 살 수도 있었다.
투명 쥐를 잔인하게 살육한 뒤 장하나는 스크래처를 발톱으로 박박 긁으며 여흥을 즐겼다. 도기 그릇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생각난 김에 바로 옆 그릇의 사료도 두 알 깨물어 먹었다. 그런 다음 장하나는 닫힌 방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머리를 디밀고 몸통을 딱 붙이고 걸으면서 꼬리로 자기 냄새를 묻혔다. 한 바퀴 크게 빙 돌아 다시 문 앞. 장하나가 문을 올려다보며 미요 울었다. 열라고 항의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들은 원래 문이 닫혀 있는 걸 싫어한다.
장하나의 귀가 쫑긋거렸다.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임세라 할머니 댁과 임세라 할머니의 기억 속 전쟁터에서 가스와 정신 상태를 모두 점검하고 퇴근한 엄마가 운전해 돌아오고 있었다. 애망빙과 떡볶이와 그릭요거트를 배달한 아빠도 더 이상 콜이 뜨지 않자 우의를 부스럭거리며 걸어 돌아오고 있었다. 장하나가 들은 건 어제 과일 바구니를 들고 찾아왔던 박정상이 백화점에서 구움과자를 사 들고 다시 찾아오는 소리였다.
그 시각 장하다는
동그란 회색 솜뭉치처럼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박정상은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찾아왔다. 평소 엄마는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일했고 아빠는 집에 가기 싫다는 생각으로 일했기에 퇴근했을 때 박정상과 마주치는 건 주로 엄마였다. 엄마는 하루는 화들짝 놀랐고 하루는 무서웠고 하루는 지긋지긋했고 그러다 이제는 슬슬 박정상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고3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럴 시간이 어딨다고. 엄마는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때렸다. 앞으로도 엄마는 고등학생 자식을 둔 엄마가 되지 못할 터였다.
엄마의 걱정대로 박정상은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고 학습량을 벌충하느라 밤을 새우곤 했다. 그러다 결국 피로가 극심해진 박정상이 코피를 흘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엄마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박정상을 집 안으로 이끌었다. 되는대로 서랍을 열어 손수건을 꺼냈고 박정상의 코를 틀어막았다. 박정상이 고개를 젖히려 하자 엄마가 박정상의 뒤통수를 받쳐 제지했다. “젖히면 안 돼.”
코피가 났을 때 박정상에게 고개를 젖히면 안 된다고 알려 준 사람은 살면서 한 명도 없었다. 부친은 언제나 공사다망했고 모친은 누군지 몰랐기 때문이다. 박정상은 고개를 뻣뻣이 든 채 자신이 서 있는 공간을 보아야만 했다. 싱글침대와 하트 모양으로 누빔이 된 분홍색 차렵이불. 단단해 보이는 체크무늬 책가방. 책장을 빽빽하게 채운, 거의 새것 같은 하드커버 동화책들. 선반을 따라 죽 늘어선 티니핑 장난감들. 은색 연필깎이. 지점토로 직접 만든 연필꽂이에는 조그만 지문 자국이 무수히 찍혀 있고, 거기에 꽂아 둔 색색깔의 펜들. 사각형의 시간표. 원형의 생활 계획표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꿈나라’와 눈 감은 달과 별 그림. 노란 초승달의 코에서 흘러나와 위로 솟구치는 콧물 방울 그리고 ZZZ. 벽에 투명 테이프로 고정해 둔 빨간 색종이 카네이션. 리본의 한쪽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엄마 아빠’, 다른 한쪽에는 ‘사랑해요’.
기회를 틈타 장하나가 잽싸게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로 폴짝 뛰어올라 몸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으며 난리를 피웠다. 장하나의 몸에서 골골거리는 진동이 울렸다.
도어 록 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마지막으로 피자 배달까지 마치고 귀가한 것이었다. 판판하고 넓어서 배달 가방에 안 들어가고 그래서 잘 식고 또 한쪽으로 쏠리기 일쑤라 컴플레인이 자주 들어오는 데다 그러면 온전히 자기 돈으로 물어 줘야 해서 아빠가 굉장히 꺼리는 음식이었다. 그렇지만 콜을 거절하면 배차에 불이익이 있다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았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지만 신경이 곤두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뾰족한 상태로 아빠가 집에 돌아와서 목격한 건 엄마와 분홍색 티니핑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있는 박정상이었다. 그리고 그 둘이 서 있는 방. 기억보다 훨씬,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아 보이는 방. 아빠가 나타나자 박정상과 엄마는 어쩐지 부정을 저지른 사람처럼 얼어붙었다. 처음에 아빠는 엄마가 박정상을 구타한 줄로 오해했다. 아니라는 걸 서서히 깨달았다.
아빠는 두 사람을 남겨 두고 문을 꽝 닫고 나갔다. 장하나가 침대에서 뛰어 내려와 닫힌 문 앞에 서서 미요 울었다.
사고가 일어난 날 박태섭은 술이 깰 만큼은 충분히 자고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막걸리는 술보다는 밥에 가깝다는 게 박태섭의 지론이었다. 그렇지만 신발에 발을 꿸 때는 살짝 비틀거렸다. 술기운 때문이 아니라 운동 부족 때문이었다. 자고 났더니 입안이 잣막걸리 냄새로 쿰쿰했다. 고음악 동호회 총무가 와서 박태섭의 팔을 붙들었다. “형님, 어디 가요?”
박태섭은 팔을 휘휘 저었다. 저리 꺼지라는 뜻이었지만 원체 점잖은 양반이라 말은 하지 않았다. 뭔 상관이람. 어디 가는지는 박태섭의 프라이버시였다. 그리고 어딜 가든지 말든지 그건 박태섭의 자유였다. 박태섭이 입을 연 건 그로부터 삼십 분 뒤 사고 신고로 출동한 경찰관이 내민 음주측정기 앞에서였다.
“비행기.”
엄마는 임세라 할머니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하교 시간에 맞춰서 퇴근하려던 참이었다. 아직 ‘기억 친구’로 임명되기 전이었고 ― 제도도 마련되기 전이었다 ― 그저 검침원으로서 임세라 할머니가 사는 집에 처음 방문한 날이었다. 엄마는 임세라 할머니의 상태를 몰랐기에 몹시 당황했다. “비행기요?” 엄마는 북한이 쳐들어온 줄 알았다. 포털 사이트에 공습 사실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세상은 평화로웠다. 평화로웠다, 세상은. 몇 차례의 공허한 질문 끝에 엄마는 세상이 아니라 임세라 할머니의 머릿속에 문제가 일어났음을 알아챘다. 엄마는 겁에 질린 임세라 할머니의 어깨를 흔들었다. “괜찮으세요, 할머니?”
“쉬이.”
임세라 할머니의 식탁 밑에서 엄마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교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노인을 두고 도대체 어떻게 간단 말인가.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된 상태였고 지금 출발해도 늦을 게 뻔했다. 혼자서도 알아서 잘 찾아올 테지만, 아무렴 얼마나 똑똑한데, 그래도 아직은 곁에서 지켜봐 주고 싶었다.
아빠는 은행 창구에서 대출을 팔고 있느라 엄마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전화가 온 건 봤는데 이내 핸드폰을 뒤집었다. 애초에 엄마는 일하는 시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광고회사를 그만두고 검침원 일을 시작한 거였는데 특유의 오지랖 때문에 오히려 제시간 안에 일을 끝낼 때가 드물었다. 아빠는 당일에 오후 반차를 내는 일이 잦아져 지점장에게 찍힌 상태였다. “자네 와이프도 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 거야, 구 과장.” 회식 때 지점장은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 주며 조언했었다. 근무 평정까지 얼마 남지 않은 터였다. 아빠는 승진하고 싶었다. 대출을 다 갚고 식구들이랑 진짜 내 집에서 살고 싶었다. 파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어쩌면 파는 입장이라서 더더욱, 대출이라면 꼴도 보기 싫었다.
두 번째로 전화가 울렸을 때 지점장이 커피를 쏘겠다고 말했다. 노곤해도 졸지들 말라는 경고였다. 서 대리가 괜히 찔려서는 “배달시킬까요?” 하고 나섰다.
“내가 그냥 얼른 다녀올게.” 그렇게 말하고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대출 창구에 대기하는 손님이 없었다. 지금 배달을 시키면 못해도 한 시간은 걸릴 거였다. 걸어가면 5분도 안 걸리는데 말이다. 몸이 찌뿌둥해서 바깥바람을 쐬고 싶은 것도 있었다. 아빠는 엉덩이가 가벼운 편이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은행원은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았다. 색맹 때문에 포기했지만 원래 아빠의 꿈은 강력계 형사였다. 적성에도 안 맞는 은행 일을 어쩌다 보니 십 년 넘게 하고 있었다. 오로지 가정의 안녕을 위해서였다. 메가커피로 향하는 길에 아빠는 아까 “담배도 피울 겸.”이라는 사족은 괜히 달았나 하고 잠깐 후회했다. 주문대 앞에 서고 나서야 아빠는 깜빡하고 핸드폰을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짜 깜빡한 게 맞는지는 알 수 없었고 사고 이후에도 아빠는 절대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닫혀 있던 방문이 휙 열렸다.
“얘가,” 엄마가 박정상을 쳐다보며 아빠에게 말했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박정상은 피범벅이 된 티니핑 손수건을 구겼다 폈다 하며 괜스레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지혈은 되었지만 콧구멍 부근이 핏자국으로 빨갰다. 그래서 진짜 맞은 것처럼 보였다. 박정상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다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좋아.” 아빠가 말했다. “좋아.”
이 기회를 틈타 장하나가 열린 문으로 빠져나왔다. 항의하듯 짧게 울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목이 다 쉬어서 미요, 가 아니라 히효, 하고 우는 것처럼 들렸다. 밖에 갇힌 것보다 안에 갇힌 게 아마 더 힘들었을 것이다. 꼭 길고양이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박정상 군.” 아빠가 박정상을 불렀다. 그러고는 화장실 가는 장하나를 검지로 천천히 가리켰다. “얘 이름은 장하나, 그리고······.”
“그만.” 엄마가 아빠를 멈춰 세웠다. “장난해?”
“장난 아니야, 여보. 나 장난하는 거 아니야.” 아빠가 말했다. “지금 이게 장난하는 걸로 보여?”
아빠는 박정상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보다, 운에 맡기려는 것 같았다. 원래도 아빠는 중요한 일을 운에 맡기곤 했다. 답이 나오지 않을 바에야 그게 깔끔했다. 일종의 동전 던지기였다. 한쪽 확률이 유난히 높은 동전 던지기. 아빠는 박정상이 답을 맞히면 용서할 것이고, 맞히지 못하면 용서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가.” 엄마가 박정상을 현관으로 밀어 댔다. 아빠로부터 박정상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대답이 되었건, 박정상이라는 골칫거리가 사라지는 것이 엄마는 두려운지도 몰랐다. “아냐, 됐어. 손수건은 가져가. 다음에도 코피 나면 고개 젖히지 말고.”
“박정상 군.”
엄마의 성화에 서둘러 집을 나서던 박정상이 아빠의 부름에 몸을 돌렸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어긴 오르페우스처럼. “박정상 군.” 아빠가 비장하게 박정상을 불렀다. 돌아선 박정상이 대답 대신 침을 삼켰고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장하나가 모래로 소변을 파묻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모래까지 같이 딸려 나오는 소리도.
“얘 이름은 장하나, 그리고, 쟤 이름은······.” 아빠가 에어컨 위에 식빵 자세로 앉은 둘째를 가리켰다. “장하다다.”
그날 밤 엄마 아빠는 장하나의 목이 더 쉴까 봐 안방 문을 닫지 않고 사랑을 나누었다. 사고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빠가 오랜만에 엄마에게 팔베개를 해 주었고 그 상태로 두 사람은 이야기했다. 부모님은 박정상을 용서하기로 했다. 박태섭의 아들이라는 것 말고 박정상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결코 확신은 없지만, 박태섭까지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박태섭이나 박정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들을 위해서. 왜냐하면 엄마랑 아빠도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잠들었다. 꿈은 꾸었지만 꿈에서도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가 몸을 뒤척이자 아빠가 아까까지 베개였던 팔을 치우고 이불을 끌어올리며 돌아누웠다. 창밖이 검다가 점점 파랬고 공기청정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안방 문 경첩에서 끼익 소리가 났다. 어떤 그림자가 침대로 올라오더니 엄마의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오래 들고 있었던 짐인 양 엉덩이를 툭 내려놓고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따끈한 회색 털북숭이 몸통이 부풀었다 꺼졌다 부풀었다 꺼졌다.
엄마가 천천히 눈을 떴고 잠시 우리의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다행히 엄마는 다시 눈을 감았다. ‘미안해, 아가. 엄마가 용서해서 미안해.’ 엄마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나는 엄마를 용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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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하는 말 권희진 1 “무슨 생각해?” 승언의 질문에 나는 원숭이 우리에 갇혔던 남자를 떠올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여자가 갇힌 게 아니고?”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니,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어,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눈을 보면서 그 안에 갇혔던 건 남자가 아니고 여자였던가, 라고 생각했어요. 이번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는 그게 이상했습니다. 내 생각을 읽었나? 아니, 그것보다 승언도 그 영화를 아는구나, 그런데 어떤 영화였지? 또 그런 걸 생각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강변에 앉아 휴대전화로 음악을 듣는 중이었습니다. 밤에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갑자기 승언이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을 가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런 데는 없어, 라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실망하기에 나는 택시를 불러 그녀와 함께 뚝섬으로 갔습니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 시간이라면 아무도 없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택시에서 내리자 승은 다시 기분이 풀어진 것 같았습니다. 새벽 2시에 거기에 갈 생각을 한 걸 보면 아마도 주말이었을 겁니다. 그곳엔 음악을 듣고 있는 우리 말고도 산책하는 커플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있지 않았는데도 커플처럼 보였습니다. “새벽은 좀 이상한 시간인 거 같아.” 승언은 그들을 보면서 말했고 나는 이건 누구 노래야? 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가수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영국 그룹이고 두 사람은 커플이라고도 했었는데, 지금은 그 가수도 노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누군가 그 노래를 다시 들려준다면 난 아마도 이건 누구 노래죠? 라고 물어볼지도 모릅니다. 그게 누구 노래건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들의 노래를 계속해서 들었습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드문드문 대화도 나눴습니다. 원숭이 우리에 갇힌 게 누구였을까 하는 것 같은 엉뚱한 주제들이었죠. 손을 잡은 채로 말입니다. 손을 잡지 않아도 우리는 커플이었지만 새벽은 좀 이상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손을 잡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문득 승언은 한강에서 잡은 물고기는 먹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글쎄, 먹으려고 잡는 거 아닐까? 라고 하자 그녀는 “난 못 먹을 거 같아.”라고 했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물고기는 물고기였다가 잡히는 순간 생선이 된다는 거야. 그녀는 내 말을 듣고 가만히 있다가 물고기를 키우지 않는 남자에 관한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그 남자는 집에 어항을 화려하게 꾸며놓고도 물고기를 키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항에는 수초와 모래가 있고 조명과 여과기도 설치돼있지만, 물고기만 없다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없어도 완벽하다고 믿는 남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물고기가 없어? 라고 물었더니 물고기가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럼 중요한 건 뭔데? 라는 질문에 그녀는 “물고기가 그 안에 있다고 믿는 거.&rd
- 관리자
- 2024-11-01
구하고 원하는 자에게 윤치규 조사실 안에서 윤구민은 호주에 관해 생각했다. 호주에 있는 아버지를 떠올린 것은 아니었고 정확히 말하면 호주가 섬인지 대륙인지 고민했다. 만약 아버지였다면 이런 질문을 들었을 때 너무나도 간단히 호주는 섬이면서 동시에 대륙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윤구민은 그것이 이치에 맞는 말일지라도 정답이 될 수 없다고 여겼다. 마찬가지로 호주가 자체적인 지각판 위에 있다거나 독자적인 생태계를 갖고 있기에 대륙이라는 주장도 마땅히 받아들일 수는 있으나 정답이 될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아시아와 유럽은 하나의 대륙이었고 마다가스카르도 섬이 아니라 얼마든지 대륙이 될 수 있었다. 18세기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호주 동쪽 해안에 처음 도착했을 때 호주는 섬이 아니라 대륙이어야만 했다. 스페인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영국의 왕립학회도 미지의 남방대륙 테라 아우스트랄리스를 찾아내야만 했다. 영국이 호주를 신대륙이라고 선언했을 때 다른 나라는 인정하지 않았다. 영국은 호주가 섬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대륙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했다. 그중 윤구민이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그린란드보다 큰 섬은 앞으로 대륙이라는 것이었다. 그건 정답을 찾은 것이라기보다는 만들어낸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방식이야말로 정답이라는 것의 본질과 가장 가까운 형태인지도 몰랐다. 호주의 원주민이었던 애보리진에게 호주는 섬도 아니고 대륙도 아니었으며 그저 완벽하고 절대적인 단 하나의 세계일 뿐이었다. 영국이 호주를 침략하고 호주는 대륙이 되었고 애보리진은 현생 인류 중 가장 진화하지 못한 열등한 종족이 되었다. 생김새가 오랑우탄과 흡사하고 뇌 용량이 다른 호모 사피엔스보다 작다는 게 이유였는데 윤구민은 궁금했다. 호주에 정착한 영국인이 그토록 수많은 애보리진을 죽인 이유는 그들이 도저히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죽여 놓고 보니 너무할 정도로 많이 죽여 버려서 애보리진을 인류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스스로 속이게 된 것일까? 1996년 전두환에게 사형이 구형된 뒤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다음 해 사면되는 과정을 뉴스로 지켜보면서 윤구민은 거짓말이라는 것도 뻔뻔하게 반복하다 보면 정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구민에게도 너무 오랫동안 반복한 거짓말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호주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하거나 친구 부모님이 아버지 직업을 물어 볼 때마다 윤구민은 그렇게 대답했다. 왜 하필 호주였을까? 아마도 미국이나 중국처럼 너무 뻔한 나라보다는 다소 생소한 지명이 더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 무렵 캥거루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유년 시절 윤구민이 나쁜 길로 어긋나지 않게 보살펴 준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이 들통 나지 않도록 유복한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듯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예의 바르게 굴었으며 옷차림에도 신경 썼다. 윤구민은 비싼 브랜드 옷을 입을 수 없어도 가난을
- 관리자
- 2024-11-01
숲 바깥쪽으로 김선재 1. 선을리가 서쪽 산의 중턱 어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출발한 지 40분 남짓 되었을 무렵이다. 섬 서쪽은 산세가 험해 동쪽보다 개발이 덜 된 지역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덕분에 우리가 지금 거길 가는 거라고 소영은 말한다. 나는 그 말을 흘려들으며 스마트폰 화면을 확대해 선을리 근방을 훑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낯선 동리나 동산의 지명뿐이다. 선을은 식당이나 카페는커녕 편의점조차 없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에 위치한 모양이다. 도착하면 투어가 시작되기 전까지 고작 30여 분의 시간이 남는다는 걸 확인한 나는 맥이 빠진다. 30여 분 동안 먹을 수 있는 게 뭘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검색했던 여러 메뉴를 떠올린다. 블로그에서 본 해물찜은 재료가 실해서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고 한치도 한창이라고 했다. 또 해풍에 말린 해초를 주재료로 한 수타 우동은 너도나도 후기를 남길 만큼 유행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이지만 30분은 그런 걸 먹기에는 어림도 없는 시간일 거다. 홀쭉해진 배를 문지르며 생각한다. 메뉴를 고르는 건 고사하고 뭘 먹을 수 있기는 할까. 늦은 아침을 먹은 후로 뭘 먹은 기억이 없다. 몇 달 만에 만난 소영과 회포를 푸느라 평상시보다 늦게 잠들었다가 느지막한 시간에야 일어났다. 산책 시간도 여느 때보다 길었다. 날씨 때문이었다. 오늘은 정말 온종일 보기 드물게 시야가 좋고 바람도 잔잔한 날이다. 큰 귀를 펄럭거리며 공을 물고 해변을 뛰어다니는 마이가 너무 즐거워 보여 좀처럼 돌아오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배를 좀 채워야 할 텐데. 나는 운전 중인 소영이 들을 수 있도록 전방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린다. 늦어도 30분 전까지는 입장해야 한다고 했던 거, 잊어버린 거 아니지? 소영이 상기시킨 건 리플릿에 적혀 있던 세 가지 주의사항 중 첫 번째다. 아. 나는 짧은 탄식을 터트린다. 뭘 물으면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게 그 애의 말버릇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소영의 질문은 자주 비난이나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려서 크고 작은 말다툼으로 이어지곤 했다. 네가 삐뚤어져서 그런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소영은 종종 그렇게 물었다. 기우는 햇빛이 차 안으로 쏟아진다. 상반신과 무릎 언저리가 뜨겁다. 나는 달려오는 일몰을 선바이저로 가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해안선에 늘어선 나지막한 건물들 사이로 수평선이 빠르게 흘러간다. 과감한 디자인의 알록달록한 옷을 걸친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거주민과 관광객은 대개 옷차림으로 구별된다는 걸 이제 안다. 당분간 저 풍경 속에 내가 낄 일은 없을 거다. 오늘의 끼니를 고민하고 마켓에 올라오는 구인 목록을 살펴보다가 해가 질 무렵에는 마이와 함께 동쪽 해안가를 쏘다니는 게 요즘 내 일과의 대부분이다. 생존과 생활. 요즘 나는 밥그릇 앞의 마이가 그런 것처럼 무섭도록 그 단어들에 집중하며 지낸다. 투어가 끝날 즈음에는 문을 연 식당이 없을 텐데. 불안을 삼키며 소영을 흘깃거린다. 흰색 테두리의 검정 선글
- 관리자
- 2024-11-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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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초반부터 화자가 예상되었음에도 담담히 표현되는 사건과 거기 얽힌 사람들의 심정이 잘 드러나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다만 마지막에 '그날 밤 엄마 아빠는 장하나의 목이 쉴까 봐 안방문을 닫지 않고 사랑을 나누었다'부분은 독자로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쏙 마음에 드는 작품을 읽다가 막판에 아, 이것만 없었으면! 하게 되는 부분이었어요. 좋은 소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