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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4-06-01
  • 조회수 684

   공배


강지수


   한 다큐멘터리의 보조 취재원으로 일했을 때였다. 다큐멘터리 주제는 노인 고독사였다. 피디를 꿈꾸던 나는 버스 요금도 충당할 수 없는 활동비를 받고 그해 여름 동안 바쁘게 돌아다녔다. 쪽방이나 낡은 빌라촌을 기웃거리며 이야기를 주워 담는 게 나의 일이었다. 빈방에서는 식은 라면 냄새가 났고 비어 있지 않은 방에서는 뜨거운 라면 냄새가 났다. 메모를 하고 녹화 버튼을 누를 때마다 나는 이 고된 작업이 나의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해주리라고, 이야기들이 모이면 더 큰 이야기가 되는 법이라고, 연신 땀에 전 티셔츠를 펄럭이며 생각하곤 했다.


   그날은 며칠째 이어지던 무더위가 절정에 이른 날이었다. 나는 다음 취재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동네를 가로지르는 하천 옆의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우연히 다리 아래 그늘에서 바둑 두는 노인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낡은 가정용 식탁을 사이에 두고 옥색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몇 알 안 되는 바둑알들을 주먹 사이로 굴리며 아무 말 없이 바둑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멈춰 섰다. 몇 가지 행동만을 느릿느릿 반복하는 근대 자동인형 같은 그들의 모습은, 잿빛 다리마저 순백으로 만드는 여름 햇볕과 대비를 이루어 나의 눈길을 끌었다. 혹은 그늘이 시원해서, 아니면 그저 이 모든 게 지겨워서, 나는 그들이 기개라고는 전혀 없는 사뿐한 손짓으로 바둑알을 내려놓는 장면을 줄곧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해가 질 때까지 노인들은 내가 누구인지, 왜 자신들이 바둑 두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지 묻지 않았다. 다음날 취재 약속을 취소하고 그 다리 밑을 다시 찾았을 때, 역시나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조악한 나무 스툴 하나가 식탁 옆에 놓여 있었을 뿐이다. 도르륵 도르륵. 이미 몇 수 놓인 바둑판과 졸음을 참고 있는 듯한 노인들의 따분한 얼굴과 손바닥 안에서 부딪는 바둑알 소리. 바둑을 배운 적 없는 나는 누가 이기고 누가 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흰색 옆에 검은색 또는 흰색 옆에 흰색, 검은색 옆에 흰색 또는 검은색 옆에 검은색이 놓이는 일련의 결정과 단순한 조합이 마음에 들었다. 그건 내 내면에 뿌리 없는 안정감을 심어 주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노인들이 비닐봉지에 한가득 담아와 간간이 부숴 먹는 땅콩들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들은 나를 막거나 노려보지 않았다. 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고 가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아주 느리게 오고 가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나처럼 가까이 다가와 우둔하고 지독하게 흐르는 시간에 잠깐 발을 담가 보려는 사람을 전에도 겪어 본 적 있다는 듯 관대했다.


   나는 매일 다리 아래로 기어드는 행동을 멈출 수 없었다. 피디와 작가에게서 걸려 오는 전화들을 무시했다. 수첩과 카메라도 더는 들고 나오지 않았다. 가족이나 친구와 연을 끊고 방에서 홀로 죽은 이들의 흔적을 좇는 것보다는 항상 나보다 일찍 와서 바싹 마른 땅콩이나 까먹으며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바둑을 두는 이 노인들을 지켜보는 게 더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이 모든 게 나를 위한 함정 같다는 생각도 해본 적 있으나, 세상에는 나를 위한 것도 함정도 없으며 단지 인과나 실체 없는 우연만이 진실이라는 망상이 처음의 생각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그 일도 또 다른 우연에 불과할 것이다. 무릎 뒤 연한 피부에 어쩌다 한 번씩 선선한 바람이 스치던 늦여름. 아침 일찍 찾아간 다리 밑은 어제와 다른 풍경이었다. 노인은 혼자였다. 그는 식탁을 향해 있던 의자를 옆으로 돌려 바둑판 대신 하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따분해 보였다. 두 노인. 바둑판 위의 빈약한 바둑알. 땅콩 냄새. 물 흐르는 소리. 오랜 반복에 익숙해진 나는 갑작스런 변화에 당황했지만 늘 앉던 스툴 위에 똑같이 엉덩이를 붙이는 것 말고는 달리 할일이 없었다. 


   그처럼 하천을 바라보았다. 간혹 오리 떼가 머물렀지만 잠깐이었다. 물 표면에 맺혔던 빛이 소강하고 그늘의 일부가 되었다가 다시 환한 낮의 세계로 흘러가는 장면은 순리를 따르는 것에만 깃드는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도 그것을 보았을까? 그 우아한 광경에 정신이 아득해졌을까? 땅콩 껍데기도 저 물길을 따라 흐르기만 하면 그저 그런 껍데기에서 빛나는 껍데기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나는 궁금했다. 그러나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는 혼자였다. 그다음 날도. 나는 어느덧 하천보다 하천을 보는 그의 뒤통수를 더 오래 보게 되었다. 결코 졸지 않는 뒤통수. 비틀리거나 주저하는 법 없는 뒤통수.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바싹 마른…… 수를 읽는 건 언제나 요원할 것이다.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 뒤통수를 찍었다. 하얀 털이 듬성듬성 자란 키위 같아서 나는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다. 큰 보폭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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