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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aside

  • 작성일 2022-07-01
  • 조회수 1,753

[단편소설]



the seaside



유주현





이른 더위와 열대야가 이어지던 칠월의 둘째 주 화요일, 이모가 나를 찾아왔다. 자기를 데리고 살아 달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오전부터 시끄러운 화요일이었다. 거리가 뜨겁게 들끓을수록 극장의 매표율은 높아졌지만 늘어난 사람 수만큼 문젯거리도 따라왔다. 첫 번째 상영이 끝난 직후부터 곧바로 클레임이 시작됐다. 분실물 관련이었고, 고객은 극장 측 잘못으로 재산상의 피해를 봤으니 보상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고객은 영화가 끝나고 좌석에 소지품을 놔둔 채로 상영관을 떠났다. 다시 찾으러 왔지만, 물건은 청소 중에 폐기되어버린 후였다. 좌석 팔걸이의 음료 거치대에 구겨져 있었으며, 반쯤 사용하다 남은 이십 매짜리 휴대용 물티슈를 누군가의 소중한 분실물이라 차마 생각지 못했기에 벌어진 사고였다. 다음엔 매점 클레임이었다. 고객은 자신이 가져온 유기농 팝콘과 저염버터와 소금을 내밀며 저기에 있는 팝콘 기계로 튀겨 달라는 주문을 했다가 거절당하자 매점 직원의 멱살을 잡았다. 부상 문제도 있었다. 영화 상영 중에 화장실 가려고 움직이던 고객이 어두운 계단에서 발을 헛디딘 것이다. 고객은 발목이 부러졌다며 악을 썼다. 골절 소란은 관람에 방해를 일으켰고, 화가 난 관객 중 일부는 직원 사무실로 몰려와 책임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상한 사람들, 진짜 너무 많다.”
화요일의 근무자들은 눈만 마주치면 이상해, 다들 이상해, 응, 다들 미쳤나 봐,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상한 사람, 정말 너무 무섭다고. 매표소 담당 매니저도 이상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날 불렀다.
“관장님. 나와 보셔야겠는데요. 손님이 오셨는데…… 좀 이상한…… 아무튼 관장님을 찾고 계셔서…….”
또 뭘까 싶었다. 매표소 담당 매니저는 내 뒤를 따라오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행색이 좀 이상하던데…… 관장님 이름을 너무 확실하게 대서…… 나는 오늘 정말 이상하다, 매니저와 함께 운을 맞추며 로비로 나갔다. 며칠만 지나면 휴가가 시작되니 조금만 참자고 되뇌면서. 휴가 계획은 딱히 없었다. 어디론가 놀러 가고 싶은 마음도 여유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풍경 좋고 음식이 새로운 장소에서 며칠 쉬어 봤자 그게 뭐라고 싶은 생각밖에는 안 들었다. 그럴 돈이 있으면 통장에 넣어 두고 바라보는 편이 더 좋았다. 기업 소속의 시네마 사업본부에서 십육 년을 근무했는데 내가 가진 것이라곤 중고차 한 대와 열 평 반전세 오피스텔과 일 년 남짓 부은 소액 적금 통장이 전부였다. 입사 동기들은 첫 월급을 받자마자 명품 가방부터 하나씩 샀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 흔한 비싼 가방도 하나 없었다. 주식이나 카지노에 손을 댄 것도 아니다. 결혼한 적도 없고, 희귀하며 비싼 반려동물을 키운 적도 없었는데, 매달 입금되는 적지 않은 월급을 모으지도 못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줄지은 무인 티켓 발매기 옆에 서 있던 어떤 할머니는 나의 이상한 자산 상태나 대응하기 어려웠던 이상한 고객들보다 더더욱 이상하게 보였다. 생명력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비쩍 마른 팔다리. 손에 잡히는 대로 동여맨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낡아서 구멍이 난 꽃무늬 냉장고 바지. 빼앗기면 안 된다는 듯 품에 꼭 껴안고 있는 천 가방. 주름진 눈두덩 사이로 보이는, 지나칠 정도로 맑아서 오히려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눈동자.
내가 이모, 놀라서 외치자 이모는 약간 다리를 절면서 내게 다가왔다. 이모에게선 오랫동안 씻지 않아 코를 찌르는 몸 냄새와 향수처럼 그 몸 냄새를 뒤덮은 파스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처음 겪는 사람들은 하수구 썩는 냄새라 생각해 버릴, 아주 익숙한 냄새였다.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이모는 감탄을 쏟아냈다. 이렇게 높고 멋있는 건물에서 살고 있었네. 우리 애기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도 잘했고 회사도 좋은 데 다니고 집도 좋은 데 사네. 대문을 열고 나면 입을 다물겠지 했는데, 엉망진창인 집안 꼬라지를 보면서도 여전히 날 칭찬해 줬다. 얼마나 바쁘면 그래. 힘들지. 바깥일 하면서 집안일 신경 쓰는 게 정말 힘들지.
소파 주변엔 구겨진 맥주 캔 몇 개가 널려 있었다. 새우와 아스파라거스 찌꺼기가 눌은 주물팬,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상자 속 치킨 조각들, 여기저기에 점점이 떨어져 있는 오렌지 껍질, 과자 부스러기 같은 것들도 함께였다. 창가 옆에는 건조대가 두 대 자리 잡고 있었다. 빨래를 끝낸 옷가지는 언제나 건조대에 널어 둔 상태로 사용됐다. 세탁이 끝난 후에 그걸 널고, 다시 개켜서 서랍에 넣고, 또 꺼내 입을 기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모는 바쁘니까 어쩔 수 없지, 말하더니 청소를 시작하려는 듯 바닥의 휴지 뭉치를 집어 들었다. 속도가 느렸다. 휴지 뭉치를 들고 허리를 세울 땐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기도 했다. 하기 싫어서 느리적거리는 게 아니었다. 극장에서부터 집까지 오는 동안 이모의 몸은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밥을 한 끼도 안 먹었다기에 뭘 먹고 싶으냐고 물으니 빙수라고 해서 날 열받게 할 때만 살짝 웃었을 뿐, 눈을 감고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을 땐 꼭 시체처럼 보였다. 뭐야, 진짜 죽은 거 아닌가 싶어서 이모, 낮게 불러 보면 눈꺼풀을 바르르 떨면서 그 맑은 눈으로 날 쳐다봤다. 어쩌면 날 보는 게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퇴근길. 상점거리의 전광판과 네온사인으로 차량 내부는 밝았다. 불빛에 얼룩진 이모의 얼굴엔 어떤 절박함이 분명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그 천 가방을 여전히, 꼭 껴안은 채였다.
“아니, 이모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어? 하루 종일? 그게 말이 돼?”
이모에게 티브이를 틀어 주고는 욕실로 들어가 엄마에게 전화했는데, 놀랍게도 엄마는 이모가 가출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걔가 아프다고 잠만 자고 있으니까. 그래도 밥은 갖다줬어. 침대 이불 뭉쳐 있는 거 보고, 또 자고 있구나, 그냥 그런 거지.” 엄마의 목소리는 불쾌할 정도로 진지했다.
“그러니까 아프다고 누워 있는 사람을 그냥 방치한 거냐고.”
“아니, 아무래도 있잖아, 너희 이모 말이야, 노망난 것 같아.”
평생을 노망난 듯 산 사람은 엄마라고, 내뱉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눌렀다.
“이제 자기한테는 사랑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살고 싶지 않고 살 이유도 없고. 그냥 이대로 죽게 내버려두래.”
“이모, 뭐 연애라도 했어? 남자한테 차였나?” 묻는 순간 왠지 극장 로비에 서 있던 이모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랑 타령보다는 각설이 타령이 더 어울릴 행색이긴 했다.
“그런 게 아니라.”
잠시 엄마도 나도 말이 없었다. 침묵 속에서, 엄마의 숨소리 뒤에서, 왁자지껄한 웃음과 파도가 첨벙거리는 듯한 웅성거림이 들려오고 있었다.
“……죽었어.”
엄마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아니다. 사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개가 죽었다고. 화수가 저러는 게, 개가 죽어서 울고불고 난리 치는 거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이모는 엄마와 나의 혈육이 아니다. 이모는 엄마의 중학교 후배이며, 둘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함께 살고 있었다. 일하느라 바쁜 엄마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나를 키워 준 것도 이모였다. 유난히 키가 크고 표정도 거의 없어서 귀염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나를, 우리 애기라 부르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모를 바보라고 불렀다. 시골 동네에 하나씩 꼭 있다는 동네의 바보를, 우리 동네에서는 이모가 담당하고 있었다. 이모의 몸 여기저기에는 언제나 파스가 붙어 있었다. 붙이기 힘든 부분은 바르는 파스를 발라댔기에, 아이를 낳아 본 적 없고 직장도 다녀 본 적 없는 화수라는 이름의 여자가 지나간 자리엔 언제나 희미한 파스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개를 데리고 매일매일 병원에 가서 수액을 맞혔더라고. 그러다 상태 나빠지면 입원시키고, 퇴원하면 또 맨날 데리고 가서 비싼 수액을 맞히고. 개 병원 간다 그래서 카드 줬더니 나중에 확인해 보니까 수백만 원인 거야. 화수가 원래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척, 착한 척, 얼마나 돈을 많이 뜯어 가는데. 그걸 다 누가 갚으라는 건지. 쟤, 바보 아니야. 혼자 서울까지도 가잖아. 세상에. 버스랑 지하철은 또 어떻게 탔대.”
욕실 문을 살짝 열어 보자 이모는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로 잠들어 있었다. 그놈의 천 가방을 또다시 여전히 꼬옥 껴안고서. 엄마는 말을 멈추지 않았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이모를 바라봤다. 이모의 종아리에 찰싹 붙어서 온몸을 부비적거리던 그 개를 생각하기도 했다. 굉장하게 못생긴 개였다. 이모는 항상 내게 그 개가 어떤 귀여운 짓을 했는지 이야기했다. 다정한 목소리로 개의 이름을 수도 없이 불러댔다. 그런데 그 개의 이름이 생각나질 않았다. 개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열 평 오피스텔에서 자기를 좀 데리고 살아 달라 애원하는 이모를, 우선 집으로 돌아간 후에 천천히 동거를 준비해 보자며 설득한다는 것은 내게도 힘든 일이었다. 며칠 뒤부턴 휴가가 시작되니 그때까지만 여기 있다가 우선은 집으로 돌아가서.
이모는 무조건 싫다고 했다. 왜 싫어? 왜 집으로 가는 게 싫은데?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았다.
“새로 살게 된 집, 좋다고 했잖아.”
엄마는 엄마의 네 번째 남편과 바닷가에서 살고 있었다. 호적상으로 나의 네 번째 아버지가 된 그 아저씨를 나는 남자 4호라 부르곤 했는데, 그는 야자수가 있는 해변에서 리조트를 운영하고 있었다. 삼십여 년 전에 지어진 역사와 더불어, 한 층에 객실이 고작 열 개 남짓한 모텔에 가까운 삼 층짜리 건물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으면 안 되지만, 어쨌든 그곳의 상호는 씨사이드 리조트이니, 리조트라 칭하는 게 딱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남자 4호는 언제나 형광색 트로피컬 셔츠를 입고 있었다. 옷이 저것밖에 없나 싶게 색색의 괴상한 셔츠를 잘도 입고 돌아다녔다. 목소리가 컸다. 악수도 팔을 막 흔들어 가면서 했다. 이모를 향해 껄껄거리고 너무 크게 웃어서 이모가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남자 4호는 내게 어디에 사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동 이름을 알려주자 그게 아니라, 비웃듯이 혼자 중얼거리며 날 아래위로 훑었다. 아파트인지 빌라인지 자가인지 전세인지 그걸 물어봤던 건데, 동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계속해서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한심하다는 듯 날 쳐다봤다.
“아저씨가 이모한테 잘해 주던데, 바다 옆에 사니까 좋다고도 했잖아, 그런데 왜 집에 안 가겠다는 건데?”
남자 4호를 언급하자 이모의 표정에 두려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보통 사람들보다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었는데, 아무래도 영화를 너무 많이 봤던 것 같았다. 순식간에 아주 더러운 상상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차갑게 굳어 가는 이모의 손은 나의 더러운 상상에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이모, 혹시 말이야, 아저씨가, 아니 그 새끼가 이모한테 뭐, 했어?”
결국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이모를 보자 난 그대로 길 밖으로 뛰쳐나가 아무나 패버리고 싶었다. 씨사이드 리조트에 불을 질러버리거나.
“……죽였어.”
이모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아니다. 사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나 이모나 자꾸만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내 앞에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뭐라고?”
“형부가, 춘식이를 병원에 데려가서…… 주사를 맞혔어…… 그래서 춘식이가 죽었어…….”
춘식이었다. 드디어 개의 이름을 알아냈다는 생각에 왠지 마음이 놓였다. 이모는 여전히 흐느끼고 있었다.
결혼은 왜 안 했어? 차는 뭔 돈으로 산 거야? 중고라도 비쌀 것 같은데? 무슨 원룸이 그렇게 비싸, 그 돈이면 우리 동네에서 이백 평 넘는 집도 사겠다, 딸, 몰랐는데 허세가 심하네. 매번 몰상식한 소리를 내게 퍼부어대던 남자 4호에게 내가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와 네 번째로 결혼한 후로, 엄마는 내게서 돈을 안 뜯어갔다. 엄마가 돈을 안 뜯어가자 일상이 평온했다. 적금이라는 걸 들기 시작했으며 지나가는 어린애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귀엽다며 손을 들어 인사할 만큼 마음이 편했다. 자잘한 꽃무늬와 금박이 새겨진 찻잔 세트를 덜컥 사기도 했다. 티포트에 찻잔 두 개가 세트인 상품이었는데, 영국 왕실에서 사용하는 브랜드니 어쩌니 하면서 삼십만 원이요, 굉장히 저렴하게 나왔어요, 하며 점원이 떠들어대자 그렇구나, 꼭 사야겠네요, 당장 주세요, 말해버렸다. 매일같이 출몰하는 극장의 진상들을 향해 진심으로 정중한 미소를 지을 수도 있었다.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것이 재밌고 귀엽고 예뻤고, 또 모두에게 다정하게 굴고 싶었다. 전부 남자 4호 덕분이었다.
“우선 엄마한테 가서 짐도 챙겨오고.” 내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도 더욱 다정했다.
“짐 없어.” 이모는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래도 우선 엄마한테 가야지. 이렇게 다짜고짜 집을 나와서 어떻게 살겠다고.” 난 애써 이모의 말을 무시했다. 왠지 이모를 데리고 우선은 엄마에게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모가 껴안고 있던, 천 가방 속의 정체를 알아챈 후부터 마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건 춘식이의 유골함이었다. 개의 유골함이 며칠이나 내 집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이모, 재수 없게 왜 그런 걸 들고 다니느냐고. 우리가 같이 살게 되더라도 그건 같이 못 살아. 그러니까 제발, 우선 엄마한테 좀 갔다 오자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모가 고개를 끄덕인 건 휴가가 시작된 지 나흘째였다. 이모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나는 립스틱 하나 챙기지도 않은 채로 이모를 차에 밀어 넣었다.


씨사이드 리조트는 언제나 나를 웃겼다. 아치형 정문에는 굉장한 크기의 엘이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싸다 싸, 이보다 싼 방은 없다. 요란하게 번쩍거리는 글자가 좌우로 흐르다가 불꽃놀이처럼 터지며 사라지고는, 또다시 생겨났다. 싸다 싸…… 눅눅하고 뜨거운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조잡한 색감의 현수막이 펄럭거리기 시작했다. 싼 달방 필요하신 분, 천에 새겨진 문구가 기이한 형태로 일그러지고 펴지기를 반복했다. 씨사이드 리조트만의 특별한 저렴함을 있는 힘껏 펄럭거리며 광고하고 있었다.
리셉션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건 엄마였다. 남자 4호는 보이지 않았다. 이모는 춘식이 유골함이 든 천 가방을 껴안고서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거긴 김 씨가 트럭을 대는 자린데.”
엄마는 cctv 모니터만 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육 개월 전쯤이었는데, 그때보다 더 뺨이 보기 좋게 통통해져 있었다. 반면 허리는 더욱더 날씬해졌고 숱 많은 머리카락의 윤기는 젊은 사람들만큼이나 좋았다. 며칠간 함께 지내는 동안, 이모는 밥도 거의 제대로 먹지 못했다. 헛구역질. 앓는 소리. 힘이라곤 하나도 없는 팔목으로 자꾸만 수저나 리모컨을 툭툭 떨어뜨렸다.
“조금 있으면 김 씨가 배달 갔다가 올 시간이라고.”
엄마는 인상을 구기기 시작했다. 김 씨든 얼어 죽을 트럭이든 뭔지 알 바 아니지만, 다시 주차장으로 나갔다. 차를 옮기고 돌아오자 엄마는 그제야 냉장고에서 주스 병 하나를 꺼내 건넸다. 차가운 유리병과 함께 엄마의 손바닥이 내 손등을 스쳤다. 육십이 넘은 피부라 믿기 힘들 정도로 촉촉한 살결이었다. 투명한 광택의 살구색 매니큐어가 말랑말랑하고 하얀 손에 정말로 잘 어울렸다. 설거지나 걸레를 비틀어 짜본 일이 단 한 번도 없는 손이었다.
창가 옆에는 투숙객 주의사항이라 적힌 A4용지가 걸려 있었다. 밤 11시 이후에는 소음 금지. 수영장에서 음주 금지. 청소 당번 잘 지키기. 방에서 취사 금지. 취사장에 설거지를 쌓아 두는 것 금지. 속옷은 방 화장실에서 손세탁하기. 따위의 좀스러운 목록을 알차게도 적어 둔 다음, 코팅까지 해서 걸어 둔 안내 사항이었다. 남자 4호는 씨사이드 리조트를 오랫동안 운영한 건 아니었다. 얘기를 들어 보니 다단계 냄새가 나는 화장품 사업, 프랜차이즈 카페, 세차장과 주차장, 심지어는 시의원 출마 같은 일에 손을 대기도 했지만 뭐 하나 이렇다 할 성과를 보지 못한 채 거의 평생을 살아왔다. 헐값에 나온 열악한 숙박업소를 인수할 때도 특별한 기대가 없었는데, 싼 방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씨사이드 리조트에서 그는 긴 세월 동안 말아먹은 거의 모든 것을 만회할 수 있었다. 그리고 투숙객 주의사항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음이 분명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수영장에서 숙박객들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수영장 사람들은 경박한 웃음소리를 쏟아냈다. 여자들은 싸구려 귀걸이를 걸쳤고 남자들은 생기라곤 없이 뱃살이 축축 늘어져 있었다. 노동을 위해 체류 중인가 싶은 외국인들도 몇 보였다. 비자 같은 건 당연히 없으리라. 나는 자연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투숙객 주의사항 중, 수영장에서 음주 금지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음이 분명했다. 볼장 다 본 것처럼 생긴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틈새에서 구겨진 맥주 캔이나 소주병, 반쯤 먹다 남은 음료수 컵, 찌꺼기만 남긴 채로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는 피자 박스 같은 것들이 널려 있었다. 정말 유쾌하지 못한 풍경이었다. 누군가 안주로 먹다 던져 준 것인지 오징어 다리 하나에 모여 있는 고양이 몇 마리가 보였다. 그중의 하나는 임신했는지 배가 불룩했으며, 다리를 절룩거리며 돌아다니다가 힘없이 멈춰 서기도 했다. 아주 많이 아파 보였다. 임신한 고양이는 죽음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 죽음의 냄새가 마치 이모의 파스 냄새처럼 솔솔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여섯 살쯤의 어린애도 하나 보였다. 공을 사방팔방에 던져대며 산만하고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댔다. 어느 집단에 속하든 가장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며 성적도 나쁠 것이란 편견이 저절로 생겨나는 어린이였다. 저런 애가 크면 꼭. 끌끌. 혀 차는 소리를 오만 군데서 듣고 다니는, 그런 애들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수영장에 모여 있는, 싸고 싼 달방을 찾아온 씨사이드 리조트의 숙박객들 모두가, 눈 말갛게 뜨고 저의 소중한 일회용 물티슈를 극장 측이 폐기해 버렸으니 보상을 해줘야겠다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댈 것처럼 생겼다는 게 내 결론이었다. 난 이상한 사람들을 엄마의 빽빽한 머리카락만큼이나 많이 봐왔다. 눈빛만 봐도 이상한 사람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있다. 평일 대낮에 팔자 좋네, 내가 중얼거리자 엄마는 손을 내저었다.
“다들 열심히 돈 벌고 있어. 열심히들 산다고. 어쨌든 자기 힘으로 산다는 게 중요하지.”
엄마가 알려준 그들의 직장은 해변 먹자거리의 식당, 카페, 기념품 가게, 혹은 인근 공장의 생산직이었다. 어쩌면 저들 중엔 전과자도 있을 수 있다. 누가 알겠는가. 중년의 나이에 제대로 된 직장도 없이 사는 인생을 과연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수영장에선 음주 금지랬는데. 글씨 못 읽나 봐, 저 사람들.” 난 이죽거렸고, 엄마는 윽박지르듯 눈을 치켜떴다.
“좋은 사람들이야. 다들 월세 꼬박꼬박 잘 내고, 내 말도 잘 들어.”
타인의 말을 잘 듣는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일까.
“너도 어렸을 땐 내 말 잘 들었는데. 화수도. 화수도 진짜 착하고 말 잘 들었다고. 하여간 늙는 게 문제야. 다들 늙으니까 저만 잘났다고, 저만 억울하다고 그러잖아. 내가 너랑 화수 먹여 살리느라 얼마나 개고생했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어디서 꼬박꼬박 대드는 건지. 참나.”
엄마는 어느새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이상해, 이상해, 예전엔 다들 착했다고, 혼잣말하며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거울을 바라봤다. 리셉션 사무실의 내부는 극장 로비만큼이나 에어컨을 세게 틀어 놓은 상태였다. 팔뚝엔 자꾸만 닭살이 돋아났다. 춥다. 나도 엄마처럼 중얼거렸다. 결코 추운 게 다는 아니었다. 그건 확실했는데, 춥다는 것 외에 다른 말을 꺼냈다가는 나만 힘들어질 것 같았다. 남자 4호와 엄마가 결혼한 후부터 나는 정말 사는 게 편하고 좋았다. 아주 조금이라도 상관없으니 이 여유로운 생활이 아주 조금만 더 유지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더럽혀진 수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씨사이드 리조트의 이틀째 오전,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애가 사고를 쳐버린 것이다. 음식물 찌꺼기로 빵빵하게 부푼 1리터짜리 음식물 쓰레기봉투 세 개를 신속하게 가위로 갈라 물속으로 내던졌다. 음식물 쓰레기가 물 위에 뜰지, 물속에 가라앉을지 궁금했다는 것이다. 궁금해서. 그냥 해보고 싶어서. 엄마는 물을 새로 간 게 한 달도 안 됐다고 했다.
“수영장 비우고, 청소하고, 다시 물 채우고, 그거 다 돈인데. 어떡할 거야? 어떻게 보상할 건데?”
아이 아빠는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잘못했다고만 했다. 대체 뭐라 용서를 빌어야 할지 할 말이 없다며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돈 내면 돼.”
“아니, 그러니까 죄송하다고요, 죄송하다니까요, 진짜 시발!”
아이 아빠의 눈에 갑자기 살기가 돋더니 순식간에, 자기 손바닥보다도 작아 보이는 아이의 등짝을 두툼한 손바닥으로 철썩 내리쳤다. 뭔 새끼 멍청한 새끼 나가 죽을 새끼. 아이가 악을 쓰기 시작함과 동시에 그때까지 조용히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아이 엄마가 튀어나왔다. 왜 애를 때리느냐며 악쓰며 우는 아이보다 더 시끄럽게 악을 질렀다. 네까짓 게 뭔데 우리 애기한테 손을 대냐고 개 같은 새끼야. 그깟 푼돈도 없어서 지 자식한테 화풀이하는 주제에. 나가 죽어 이 무식한 새끼야. 죽어. 죽으라고.
엄마와 아이 아빠의 싸움은 어느새 부부 싸움으로 바뀌어 버렸다. 수영장 청소비와 물값을 앞에서, 연애부터 결혼까지의 온갖 홧병나는 역사를 들먹이는 아이 엄마와 금방이라도 아이 엄마를 후려쳐 버릴 것처럼 손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아이 아빠를 보고 있자니 왜인지 엄마는 제대로 된 보상을 받을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고, 그 소란의 뒤에서 나는 키득거렸다. 웃음이 혼자 새어 나와 버렸다. 극장 스태프들과 대응하기 힘든 고객들을 욕할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극장 스태프들과 나는 항상 비슷한 내용의 수다를 떨곤 했다. 이상한 사람, 진짜 너무 많지 않아? 정상이 아니라니까. 걔네들도 알고 있어. 지랄해 봤자 공짜 영화예매권밖에 얻을 게 없다는 거. 그런데도 그거 하나 받겠다고 그 미친 짓거리를 해대는 거야. 추악해, 너무 싫다고, 수치심 없는 인간들, 다 뒈져버려야 하는데.
나는 수치심 없는 인간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뜰채를 들고 수영장 청소를 시작하려는 남자 4호에게 다가갔다.
“도와드릴까요?”
그는 한 번의 거절도 없이 내게 뜰채를 불쑥 내밀었다. 수영장 청소라니. 해본 적 없었지만 하라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저 남자 4호가 기다렸다는 듯 뜰채를 들이밀기에 움찔했을 뿐이다. 그는 내가 빈말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수영장 물살이 흔들릴 정도로 껄껄거리며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독이나 환경오염으로 징그러운 형광색 몸을 가진 두꺼비가 겔겔겔 시끄럽게 우는 듯한 모습과 비슷하게 보였다.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같이하시죠.”
나는 남자 4호를 도와 음식물 쓰레기로 더럽혀진 풀장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월세 받고 사는 게 쉬워 보여도 상상 못 할 일들이 이렇게 벌어진다니까. 회사에서 펜대 굴리고, 극장에서 표 팔고, 이렇게 순하게 사는 사람들하곤 비교가 안 되지. 나니까 버티는 거야.”
“극장 일도 되게 힘들어요. 상상도 못 하실 일들이 매일매일 벌어지거든요.”
“그까짓 거가 뭐 힘들어. 팝콘 냄새 솔솔 나는 데서 표 파는 일이.”
“개는 왜 죽였어요?”
수면을 가르던 뜰채 중 하나가 멈췄다가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계속해서 쓰레기를 건져내고 있었다.
“어차피 죽을 거잖아. 어차피 죽을 개한테 그게 무슨 돈 낭비야. 그리고 개 병원 보내라고 돈 준 거, 그거 내 카드라고. 개 병원비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알아?”
수면을 가르던 뜰채 중 하나가 멈췄다. 남자 4호는 계속해서 쓰레기를 건져내며 돈 타령을 했다.
“그 개가 무지하게 늙은 거라. 어차피 가망이 없어. 그냥 돈지랄이라고. 어이구, 그걸 다 언제 갚는대. 처제도 그렇지. 아무리 뭘 몰라도 그렇지. 세상에 남의 돈을 뭐 그렇게 싸질러 써댔는지.”
거지야 뭐야, 진짜, 왜 이렇게 돈돈 거려, 미친 두꺼비 새끼가.
맹세코 속으로만 생각했다. 상대의 함량이 미달이라고 나까지 수준 맞출 필요는 없었다. 시네마 사업본부의 서비스 담당자로서 훈련된 미소 또한 어디에서도 잃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남자 4호의 표정은 돌연 변해버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것 같았다. 순간 먼 곳에서 공중을 찢어발기는 듯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다가오는 남자 4호를 바라보는 내 얼굴엔 아마도 공포가 스미고 있었을 것이다. 고양이 울음소리는 계속됐다. 숨이 넘어갈 듯 울부짖고 있었다. 누군가 채찍으로 후려친 듯, 강렬하고 음울한 울음이었다. 춘식이가 있을 때는 고양이가 거의 없었거든. 춘식이가 그렇게 되니까 몇 달 만에 고양이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대. 쓰레기통을 뒤지고 더럽혔대. 시끄럽게 군대. 언니랑 형부가 화가 많이 났어.
씨사이드 리조트로 오기 전까지, 휴가가 시작되기 전 며칠 동안 이모는 나와 함께 지내면서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이불에 얼굴을 반쯤 파묻은 채로 춘식이 얘기를 귀신 들린 사람처럼 혼자 속삭였다. 항상 커튼을 쳐두고 있었다. 에어컨도 켜지 않아 후덥지근하고 습한, 아주 이상한 공기의 감각에 나는 몸서리를 치며 이모를 향해 소리쳤다. 이러지 좀 말라고 진짜.
커튼을 열어젖히자 자락에 켜켜이 쌓여 있던 먼지가 공중에서 흩날렸다.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부유했다. 이모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속삭였다. 추워. 추워.
난 처음엔 위로하려 애썼다. “죽은 애는 잊어야지. 어차피 개는 사람보다 먼저 죽게 되어 있잖아.”
조금 무섭게 눈을 부라리기도 했다. “아니 무슨 개새끼 때문에 인생 포기했냐고.”
휴가의 나흘째. 씨사이드 리조트에 우선 돌아가기로 결정되자, 이모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산등성이 사방에서 발악과도 같은 고양이 울음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남자 4호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손은 긴장으로 차가워진 지 오래였다. 남자 4호는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내게로 다가왔다. 뭐, 뭐야. 나는 순간 움찔거리며 말까지 더듬었다. 남자 4호는 아래위로 눈동자를 굴려 나를 훑다가 천천히,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 그는 팔을 뻗으면 내 멱살을 낚을 수 있는 거리까지 도달했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뜰채의 그림자가 바닥에서 요동쳤다. 남자 4호는 팔을 뻗어 뜰채를 잡았다. 진동이 멈추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고양이 울음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지금이라는 듯이,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소리 내지 못한다는 듯이 울부짖고 있었다. 거북한 침묵을 먼저 깨뜨린 건 남자 4호였다. 두꺼비처럼 처진 눈과 두꺼운 입술을 한껏 우그러뜨렸다. 소름 끼치게도 그것은 미소였다.
“미안해. 개도 힘들어 보여서 그랬어. 차라리 죽여주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 그랬지. 누가 설마 돈 아까워서 그랬겠어. 우리 딸은 내 마음을 너무 모르는 것 같네. 나 정말 속상하다.”


이것은 그간 들어왔던 이야기들을 내 나름대로 조합한 것이다. 엄마와 이모의 역사에 대해서. 시작은 일천구백칠십일 년도, 몹시 더운 팔월의 끝 무렵이다.
어느 여자아이가 달려가고 있다. 더러운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땀범벅이 된 채로 허우적거리며 달려간다. 교복의 가슴께에는 작은 명찰이 보인다. 윤화수. 수업 시간이 분명한데 화수는 학교 밖에서, 어딘가를 향해 필사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를 그저 달린다. 끔찍한 갈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온몸의 수분이 바싹 마른 것 같지만, 화수는 움직여야 한다. 학급 누군가의 심부름을 끝마쳐야 했다.
그 애는 숙제 노트를 집에 두고 왔으니 가져오라 시켰다. 예민한 악의로 가득 찬 교실. 이제 갓 사춘기에 돌입한 소녀들 틈바구니에서, 작고 덜떨어진 화수가 학교 담장의 개구멍을 드나들고 교실을 비우는 동안, 그걸 알아차린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알아차리려 하지도 않았다. 동네의 모든 남자가 손을 댔다고 명성이 자자한 미친년의 딸. 그런 애가 교회의 장학금을 받아 교실에 앉아 있는 것을 받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화수는 빵 셔틀의 시조새였던 것이다.
화수는 차가운 물을 들이켜고 서늘한 곳에 앉아 두려움 없이 휴식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작은 몸이 누울 곳은 대체 어디에? 화수의 상상력은 형편없었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화수는 머리가 나빴다. 막연히 슬프기만 했다. 저를 제발 좋아해 주세요, 노력할 수 있으니, 시키는 대로 다 잘할 수 있으니, 무조건 말 잘 들을 테니, 제발 저를 사랑해 주세요.
간신히 개구멍에 다다를 무렵. 누군가 그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화수에게 후원해 준 교회 목사의 딸인 양정이라는 이름의 선배였다. 양정은 화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땀 젖은 블라우스엔 불쾌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머리칼도 아주 지저분했으며 뺨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개구멍이 있는 담장 앞에서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수는 양정을 향해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다짜고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학교 다닐 수 있게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양정의 입가가 미묘하게 움직였다. 더러운 여자애에게 이상하게 흥미가 돋았다. 같은 반 애의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이라는데, 그것도 이해할 수 없어서 궁금하고 또 재밌었다. 왜? 왜 심부름해 주는 건데?
화수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고 싶어요…….
양정은 깔깔대고 웃었다.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화수에게 내밀기도 했다. 땀이나 닦으라는 뜻이었는데, 화수는 그걸 덥석 받더니 무릎을 꿇고, 개구멍을 기어 나오느라 흙 묻은 양정의 치맛단을 털어냈다. 털어내고는 고개를 들어 양정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수도 없이 다닌 봉사활동들, 그 어디에서도 겪은 적 없는 간절하면서도 비굴한 미소였다. 양정은 알아볼 수 있었다. 화수의 몸에 깃든 허기를. 병들어 죽어가던 영혼을. 그게 둘의 첫 만남이었다.
화수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아예 양정의 집에 가서 살았다. 작은 중정에 작은 연못이 딸린 한옥이었다. 화수는 양정의 교복 스커트를 다리고 신을 양말에 아침상까지 준비해 둔 다음, 양정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따듯한 물부터 대령했다. 그 집의 가족들이 학교나 교회로 떠난 후에는 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빨래했다. 바로 파스 냄새의 시작점이었다. 화수는 연못의 잉어들에게 밥을 주기도 했다. 양정의 가족 또한 화수에게 밥은 줬다고 했다. 계절마다 옷을 사주고 가끔은 용돈도 줬다고 했다. 양정은 화수에게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했다. 양정은 화수에게 모든 처음을 베풀어 준 유일한 존재였다. 처음으로 안락한 공간을 제공해 줬고, 처음으로 몸을 어떻게 씻어야 하는지 알려줬고, 무엇보다 첫 친구가 되어 주었다. 불우한 이웃을 도울 줄 아는 양정. 싸가지 없는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속이 깊었던 양정. 목사님의 유일한 오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던 양정.
양정은 연못을 향해 빵조각을 내던졌다. 화수는 재빠르게 달려가 빵조각을 집어 왔다. 모두가 그걸 보고 즐거워했다. 화수는 남의 말을 잘 들으니 착하며, 양정은 불쌍한 아이를 돌보니 착하다며, 정말로 아름다운 세상이 아닐 수 없으니, 모두가 즐거워했다.


수영장 청소를 끝내자 해 질 무렵이었고, 나는 붉게 물든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물속을 걷는 듯 높은 습도에 온몸이 끈적거렸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몸도 무거웠다. 그대로 모래사장에 누워버렸다. 목덜미와 머리칼에 모래 알갱이가 파고드는 느낌이 따듯하고도 숨이 막혔다. 휴가 이틀째의 새벽. 이모가 꾸물거리며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잠결에 느꼈다. 내가 아침에 마주한 건 벌건 물이 가득한 변기였다. 각혈이든 혈뇨든 심각한 문제가 곧 시작되리란 예고편이었기에 두통이 시작되었고, 나는 조용히 레버를 눌렀다. 이모에게 우리 애기라 불렸던 어린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말했다. 그러지 마. 이모를 돌봐줘. 아픈 걸 치료해 주고 사랑한다며 안아 주라고.
각혈 혹은 혈뇨는 쓸려 내려가고 깨끗하고 투명한 물이 변기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나는 화장실을 나가 춘식이 유골함을 가리키며 내 집에 저런 게 있는 거 싫다고 소리쳤다. 그러니까 우선 집에 가서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서 회의라는 걸 좀 해보자고, 이모를 설득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에 모래가 들러붙어 있었다. 이마에 고여 있던 땀이 천천히 뺨으로,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리셉션 사무실 캐비닛에 랜턴과 폴딩박스 같은 잡동사니가 들어 있는 걸 본 적 있었다. 수건도 필요할 것 같았다. 남자 4호는 내가 뭘 찾기 위해 사무실을 뒤지는지 궁금해 하다가, 자기도 도와주겠다고 했다. 고양이 구출을 돕겠다고 했다. 나도 좋아해. 그가 말했다.
“나도 고양이 좋아하거든.”
고양이 먹는 걸 좋아한다는 줄 알았다. 어쨌든 그렇게 우리는, 아, 남자 4호와 나를 우리라 표현하는 게 정말 끔찍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던 언덕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는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랜턴 없이도 어둡고 가파른 숲길을 빠르게 나아갔다. 짙은 흙냄새 속에서 나뭇가지가 휘청거리거나 풀벌레들이 갑작스럽게 울어댈 때마다 난 자꾸만 놀랐다. 아주 오랫동안 언덕을 헤맨 후에야 우리는 새끼고양이들과 함께 있는 어미 고양이의 사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애였다. 죽음의 냄새를 파스 냄새처럼 풍기던 바로 그 임신한 고양이였다. 새끼는 네 마리였다. 죽은 어미 옆에서 꼬물거리며 병아리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넷 중에 셋은 흰색이거나 흰색에 가까운 점박이였는데, 딱 하나만 죽은 엄마와 똑같이 생긴 갈색이었다. 나는 갈색이를 집어 들었다. 갈색이 옹앵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구니에 담겼다
“가요.”
나는 바구니를 들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남자 4호는 약간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머지는 왜?”
슬쩍 뒤를 돌아보자 남자 4호가 나머지 새끼들을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씨사이드 리조트를 향해 달리듯이 걸었다. 도착한 곳은 이모의 방이었다. 이모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여전히 춘식이의 유골함을 품에 껴안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는 이모 옆에 갈색이가 든 바구니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놨다.
“이모. 이거 춘식이랑 비슷하게 생겼어.”
춘식이는 짧은 황토색 털로 뒤덮여 있던 개였다. 이모는 한참 후에야 나의 의도를 알아챘다.
“고양이도 예쁠 거야. 고양이도 이모를 사랑할 거야. 춘식이처럼. 춘식이처럼 변하지 않고 이모를 좋아해 줄 거야. 그럼 됐지? 그럼 또 괜찮아지는 거지? 여기에서도 잘 지낼 수 있는 거지?”
이모의 두 뺨이 절망으로 일그러지던 순간을 나는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휴가의 마지막 날. 이제 집에 가봐야 한다고 엄마와 이모에게 말했다. 엄마는 고데기로 머리카락을 둥글게 부풀리느라 바빠서 대답도 건성이었다. 가든지 말든지.
이모는 갈색이에게 주사기로 우유를 먹이고 있었다. 나 이제 가야 해. 응. 잘 있어. 응. 나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결국 이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 고양이. 춘식이랑 색깔이 진짜 비슷하다.”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어 죽어버리고 싶었다. 이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트렁크에 짐을 실을 때였다. 뒤에서 작게 팔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 4호였다. 만 원권과 오만 원권이 섞인 지폐 다발을 부채처럼 흔들어대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싶었다.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이거. 그 고양이들 판 돈이야.”
대체 뭘 어떻게 팔았다는 말인가.
“역시 세상엔 착한 사람들이 많아. 진짜 아름다운 세상이야. 인터넷에 책임질 사람한테 보내겠다고. 입양비 이십만 원이라 했는데 다들 막 돈 주면서 고양이를 사갔다니까.”
그러곤 턱을 치켜들어 내 차를 찍듯이 가리켰다.
“우리 딸, 거의 거지인 거 내가 잘 알고 있는데 누구 앞에서 뭔 놈의 허세를 그렇게 떨고 있어. 중고라도 꼭 외제 차. 반전세라도 비싼 동네 살고. 그게 뭐냐. 추하다. 착하게 좀 살라고. 착하게.”
이 두꺼비가 대체 뭐라는 걸까. 엄마와 어떻게 되든 말든, 나는 남자 4호의 무식하고도 하찮아 보이는 인생을 조목조목 몇 마디 말로 아작내 버릴 수 있었다. 남자 4호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흔들면서 싸울 수도 있었다. 결국엔 내 쪽이 더 많이 맞겠지만 그래도 몇 대는 후려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저 우는 방법도 있었다. 사실 가장 선택하고 싶은 일은 우는 쪽이었지만 대꾸 없이 운전석에 앉았다. 그는 계속해서 돈다발로 부채질해 댔다.
변기의 붉은 물을 조용히 흘려보낸 직후 이불 속에 휘감겨 있는 이모를 끌어안았다. 이제야 사는 게 조금 편해졌는데. 난 그저 내 인생을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모, 개가 죽었다고 이러면 어떡해. 죽은 애는 잊어야지. 춘식이가 하늘나라에서 이모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 이모는 잠시 침묵하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안 기다렸으면 좋겠어. 자기 가고 싶은 데로 갈 수 있는 데로 마음대로 떠나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러고는 춥다고 했다. 힘없이 고개를 흔들더니 눈을 감았고, 그대로 얼어붙어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것처럼 고요해졌다.
나는 길게 악셀을 밟았다. 남자 4호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차창 밖으로 햇빛이 노랗게 들끓고 있었다. 한여름, 해변, 휴가지, 모두를 위해 모든 것이 통속적으로 유지되는, 소란스럽고 뜨거우며 거대한 풍경을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아주 잠깐이라도 자유로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욱더 속도를 높였다. 그 모든 것에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어딘가 숨어 있을 외로운 영혼 하나쯤을 외면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빠르게 도망치는 것밖엔 없었다.











유주현
작가소개 / 유주현

1983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문장웹진 202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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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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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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