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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셋과 물고기

  • 작성일 2021-12-01
  • 조회수 3,733

[단편소설]



핀셋과 물고기



문서정





“핀셋 훔치는 거 다 봤어요.”
2층 계단 벽에 어떤 여자가 비스듬히 기대고 서 있다가 내가 지나가자 툭, 말을 던졌다. 나는 4층에 있는 이비인후과에서 진료를 마치고 계단으로 내려오던 참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그 여자를 째려봤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눈빛으로. 이어 턱을 높이 쳐들었다. 한 번만 더 무슨 말인가를 내뱉었다가는 계단 밑으로 처박히게 해주겠다는 표정으로. 나는 항공 점퍼 주머니에 손을 급히 넣었다. 끝이 뾰족한 핀셋이 손끝에 만져졌다. 내 주머니 속에 휴대폰 대신, 지갑 대신 지녀야 할 것이 있다면 단 하나, 바로 핀셋이었다. 핀셋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여자는 20대 후반쯤 됐을까. 도수가 높은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여자가 이비인후과로 달려가 이르겠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핀셋으로 저 여자의 손등을 찍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린 채 발로 바닥을 문지르고 있었다. 여자는 조금 통통한 체격이었는데 온몸으로 바닥을 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의 발길질에 시멘트 바닥이 균열이 나서 언젠가는 남극의 빙하처럼 둥둥 떠내려갈 것 같았다. 나는 여자를 뒤로하고 1층으로 계단을 뛰다시피 걸어 내려왔다.


이비인후과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 의료용 시술 기구인 핀셋 종류 몇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옆에 오늘 훔친 핀셋을 가지런하게 줄을 맞춰 놓았다. 이비인후과에서 귀 치료를 받고 난 뒤 진료실을 빠져나갈 때마다 어떤 날은 드레싱 티슈 포셉을, 또 어느 날은 트위저나 락킹 플레이어를 슬쩍 가방 안에 넣어왔다. 오늘은 드레싱 티슈 포셉 중에도 날이 있는 드레싱 티슈 포셉을 가지고 왔다. 이제 집에는 드레싱 티슈 포셉이 일자형과 커브형, 날이 있는 것으로 다 갖춰졌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핀셋을 바라봤다. 훔친 핀셋으로 귓속의 거즈를 더 깊숙이 밀어 넣거나 뺄 때면 어쩐지 더 시원했다.
커피를 내려서 소파에 앉자 귓속에서 곤충 날개가 파르르 떠는 듯한 소리가 났다.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솨솨, 솨솨솨, 솨솨솨. 귀에서 대나무 숲을 헤집는 듯한 바람소리가 났다. 다르게 표현하면 수천 마리의 곤충이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오르는 듯한 소리 같았다. 들릴 듯 말 듯한 사람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몇 달 전부터 마치 주문에 불려 나온 듯 이런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이어폰을 오래 껴서 생긴 이명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오랜 불면 때문에 잘못 들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바람에 커튼 자락이 쓸리는 소리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바람소리도, 곤충소리도, 커튼 소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조그맣게 속삭이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며칠 뒤에 다시 이비인후과에 갔다.
“귀가 이 지경이 되도록…… 상당히 아팠을 텐데요.”
의사가 내 귓속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는 귓속에서 소리가 나서 자주 후볐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절대 귀에 손대지 마세요. 가렵다고 자꾸 손대면 고막이 찢어집니다.”
이비인후과용 헤드 렌즈를 쓴 의사가 좁은 동굴 속 같은 귀에 석션을 넣어 귓속 분비물을 제거하고 항생제를 바른 긴 면봉으로 드레싱을 했다. 이어 의사가 귓속 깊숙이 거즈를 넣었다. 간호사가 의료 기구를 정리하고 의사가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는 사이에 나는 진료실의 보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의료용 핀셋을 재킷 주머니에 재빠르게 집어넣었다. 처치실로 가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적외선 치료기를 두 귀에 갖다 댔다.
병원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약 처방전을 들고 계단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며칠 전 그 여자가 또 계단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기분이 섬뜩했다. 여자는 길을 비켜 주지 않았다. 내가 오른쪽으로 걸음을 떼면 여자도 오른쪽으로 걸음을 떼고, 내가 왼쪽으로 계단을 디디려 하면 여자도 왼쪽 계단을 오르려 발을 내디뎠다.
“진료실에 CCTV 있는 거 몰라요?”
여자가 취조하듯 묻는 바람에 나는 당황해서 처방전을 계단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처방전을 주우며 당신이 뭔데 내게 그걸 따져요? 하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여자를 쳐다보았다.
“요즘 병원에는 진료실, 대기실에도 다 CCTV가 설치되어 있어요. 정말 몰랐어요?”
여자가 정말 몰랐느냐는 듯이, 진짜로 몰랐다면 한심한 일이라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근데 누구세요? 왜 나를 자꾸 따라다니는 거예요?”
나는 호주머니 속의 핀셋을 잡으며 말했다. 오늘은 여차하면 찌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이 핀셋의 날이 단 한 번도 타인을 향한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훔친 핀셋으로 귓속의 거즈를 빼내거나 귓속에 거즈를 밀어 넣거나 했다. 언제부턴가 핀셋을 잡고 있으면 호신용 기구를 잡고 있는 듯, 근육질의 사람 둘을 양쪽에 보디가드로 거느린 양 든든했다. 누군가 당신은 왜 핀셋을 훔칩니까? 하고 묻는다면 사실 나는 잘 설명할 수가 없다.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핀셋의 가격이 커피 한 잔 값이 되지 않기 때문에, 라고 답할 수도 있겠다. ‘아프다’ ‘무섭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고통이, 두려움이 줄어들지 않으니까 훔치는 거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박소정이에요. 그쪽은요?”
소정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가 내 이름을 물었다. 대체 이 여자는 누구지? 내게 왜 이러는 거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조금 머뭇대다 대답을 했다. “나유주요.”


이비인후과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책상 서랍에 핀셋을 넣었다. 귓속에서 곤충 떼가 위이잉 날아오르는 소리가 났다. 이어 귓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해. 정말이야. 다신 안 그럴게. 준모의 목소리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손으로 두 귀를 막았다. 그땐 술이 좀 많이 취했잖아. 내 마음은 늘 같아. 너도 알잖아. 귀를 막아도 그는 계속 속살거렸다. 나는 서랍 속에서 드레싱 약솜이나 거즈를 집는 데 사용하는 티슈 포셉을 꺼내 귓속 거즈를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샤워 후에 핀셋으로 귓속 거즈를 꺼냈다. 잠자리에 들 때만이라도 거즈를 빼고 싶었다. 침대에 누워서 책을 펼쳤다. 쉽게 잠이 오지 않기 때문에 잠이 올 때까지 책을 읽는 게 습관이 됐다. 두 페이지 정도 읽었을 때였다. 꺼져! 어둠 저쪽에서 쨍쨍한 소리가 날아들었다. 벌떡 일어났다. 침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실 겸 부엌으로 나가 불을 켰다. 거실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꺼지란 말이야. 싸구려같이 굴지 말고 꺼져! 준모의 목소리였다. 쥐가 베란다 배수구 밑으로 숨어드는 것을 봤을 때처럼 온몸이 떨렸다. 이번엔 그가 애원하듯 말했다. 유주야,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말해 줘. 그땐 술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말이지. 나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거즈를 귓속에 다시 넣었다. 그러고 이어폰을 꼈다. 침대 위에 몸을 옹송그린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준모를 만난 뒤부터는 시간은 리모컨 버튼을 2배 속도로 누른 것처럼 빠르게 흘렀다. 준모는 섬세하고 친절했다. 함께 걸을 때는 언제나 내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걸음을 뗐다.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 함께 감상 할 영화나 음악을 고를 때는 무조건 내 취향대로 하라고 부드럽게 말했다. 무엇보다 사회, 정치, 이슈에 대해 분노하거나 비난할 때의 지점이 똑같았다. 그럴 때면 우리는 잘 맞는 연인이라고, 평생 함께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커피숍 창가에 앉아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하는 그의 굵은 컬이 들어간 머리카락과 약간 올라간 입 꼬리, 쌍꺼풀이 없는 길고 서늘한 눈매를 바라보는 일은 행복했다. 그와 하는 모든 순간들이 반짝반짝 눈부셨다. 여름 날 강가에서 주워 온 하얀 돌멩이처럼.
준모의 시선은 나침반처럼 늘 나를 향해 있었다. 나에게 문자를 보내 즉시 답을 받지 못하면 어디야, 대체 어디야, 하는 문자를 여러 차례 보냈다. 준모는 자주 내 표정을 단속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참견했다. 처음에 나는 그의 행동이 연인들 간의 자연스러운 애정 행위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 단속이 달콤했을 정도였으니까. 둘이 손잡고 걷다가 내가 다른 곳을 보거나 건성으로 답하면 준모는 잡았던 손을 홱, 놓아버리고 성큼 앞서 걸어갔다. 그러곤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럴 때는 사랑의 건기라고 생각했다. 나무도, 물도, 새의 깃털도 다 말려버린다는 아프리카의 건기(乾期). 그래서 그가 저런 갈라진 행동을 보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세렝게티 공원을 걷는 것처럼 입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회사 동료들과 늦게 회식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누가 뒤에서 내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았다.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고서는 복도 계단으로 끌고 갔다. 준모였다.
“휴, 깜짝이야. 갑자기 웬일이야?”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준모가 무섭게 쏘아봤다.
“전화는 왜 안 받아?”
“휴대폰을 진동음으로 해놔서 못 들었어.”
“사람들한테 내가 편집증이 있다고 말하고 다닌다며?”
나는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 그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감히 네 주제도 모르고. 나를 편집증 환자로 만들어? 남자들과 낄낄대느라 매번 내 전화를 놓친 건 너라고!”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준모의 모습이었다. 그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그는 화가 나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노려봤다. 준모는 중견 기업인 IT 계열 회사의 관리직 직원이라는 내 직업과 너무 평범해서 눈에 띄지도 않는 우리 가족이 마땅찮았던 모양이었다. 자기 아버지의 재력과 사회적 지위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던 그가 할 수도 있을 생각들이었다. 내가 가까운 친구에게 준모의 성격에 대해 의논을 한 게 편집증 운운하며 부풀려져 준모에게 들어간 것 같았다. 준모는 눈을 희번덕이더니 갑자기 내 뺨을 때렸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나를 계단 벽으로 몰아세운 뒤 주먹으로 벽을 세게 쳤다.


내가 매주 목요일에 이비인후과에 갈 때마다 소정도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주로 대기실 한쪽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잡지를 보고 있었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을 때 외에는 소정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소정이 어떻게 내가 핀셋을 훔치는 것을 봤는지 궁금했다. 진료를 마치고 소정의 진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이번에는 내가 4층에서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소정을 기다렸다. 소정이 계단으로 내려오자 길을 막았다.
“핀셋, 그거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음…… 우주 님, 알고 싶어요? 그럼 따라와요.”
소정은 나를 ‘우주’라고 불렀다. 나를 우주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두 부류였다. 혀가 짧은 사람이거나, 의치를 한 사람이거나. 그녀는 아마 첫 번째 부류일 것이다. 아직은 대화를 제대로 나눠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큰 창문이 많은 브런치 카페에서 제일 안쪽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각자 빵과 샐러드와 음료를 카운터로 가서 주문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자 서먹했다. 소정은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여다봤고, 나는 창으로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에 차려지자 그녀는 빵에다 딸기 잼을 듬뿍 발라 한 입 베어 먹으며 말했다.
“나는 내 고막이 정말 다 나았는지, 진짜로 멀쩡한지 확인하러 이비인후과에 가요. 그거 확인하고 귀 드레싱을 받아요.”
소정의 느닷없는 고백에 나는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단지 속으로 조금 웃었다. 그녀가 말할 때 혀 짧은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말할 때마다 이 사이로 바람소리가 났다. 혀 짧은 소리가 그녀를 좀 귀엽게 보이게 했다. 나는 빵에는 손도 대지 않고 샐러드만 조금 집어 먹었다. 지금 내가 소정과 함께 브런치 카페에 있는 모습이 꽤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그랬다. 그렇지만 나는 핀셋 사건을 알고 있는 소정이 내게 유해한 사람인지 무해한 사람인지 확인해야 했다. 잠시 봄볕이 테이블 위에 비처럼 내려앉는 것을 지켜보다가 소정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녀는 나보다 두어 살 어려 보이기도, 두어 살 많아 보이기도 했다. 보통 키에 약간 통통한 편이었는데 마주 앉아 보니 선하게 생겼다. 갈색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소정의 크고 동그란 눈과 도톰한 입술을 둥글게 내밀어 샐러드를 먹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그녀가 붕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매주 한 번씩 진료받으러 와서 고막이 정말 괜찮으냐고 물으니 의사가 다 나았다며 다른 병원을 추천하더라고요. 신경정신과요. 나를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나 봐요.”
“그건 궁금하지 않아요. 나는 단지 핀셋,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다고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꺼끌꺼끌하게 나왔다. 소정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포크로 샐러드를 찍어 먹었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병원은 참 좋아. 뭐랄까, 거기 가면 안심이 되거든. 편안해.”
어느새 소정은 내게 말을 놓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과 행동이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병원 따위가 뭐가 좋아. 아프니까 할 수 없이 가는 곳이 병원이야. 그건 그렇고, 핀셋 훔치는 거 어떻게 알았어?”
내가 톡, 쏘아붙였다. 나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처치실에서 귀에 원적외선 쬐고 있을 때, 네가 진료실 나오면서 핀셋 슬쩍 하는 걸 봤지. 그것도 두 번씩이나. 진료실 옆에 처치실이 있잖아. 유리벽으로 되어 있어서 진료실 안이 다 보여. 핀셋 훔치는 거 들키면 바로 절도범으로 잡혀간다고. 바로 현행범이 되는 거야. 내가 말해 주지 않으면 네가 계속 위험한 일을 할 것 같아서 얘기하는 거야. 찻집에서 티스푼을 슬쩍 훔치는 순간, 차 문이 잠겨 있는 남의 차를 열어 보려고 손잡이를 당기는 순간, 바로 범죄 행위가 성립되거든. 형법 수업을 들은 적 있어 조금 알아.”
소정은 비음을 섞어 가며 반말로 대답했다.
“그런데 왜 자꾸 병원에서 마주치는 거야? 나를 스토킹하니?”
나는 소정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뒤로 젖혀 웃었다.
“너, 트웨니퍼스트 빌라 306동에 살지 않아?”
나는 화들짝 놀라 나도 모르게 가방 안에 있는 핀셋을 잡았다.
“잘 좀 생각해 봐. 내가 이 동네에 있는 이비인후과에서 진료를 받는다는 것은 이 동네 주민일 확률이 높은 거잖아. 그리고 네가 306동에 사는 걸 안다는 것은 내가 이 빌라 입주민이거나 인근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많은 거잖아.”
소정이 별 표정 없이 또박또박 설명했다.
“그럼, 너도 트웨니퍼스트에 살아?”
“당연하지. 201동에 살아.”
201동이라면 내 집 부엌 창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동이었다. 소정과 내가 사는 동네는 오래된 주택과 빌라가 많은 곳이었다. 내가 사는 빌라 이름은 트웨니퍼스트지만 지어진 지 20년이 넘어서 외관이든 실내든 전혀 21세기 건축물 같지 않았다. 동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빌라였다. 밤이면 좁은 골목을 돌아다니며 고양이들이 울었다. 교통이 불편하고 제법 경사가 진 언덕배기에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던 동네와 환경이 비슷해서 좋았다. 예전에 살았던 동네도 야산과 하천이 가까이 있었다. 아침에는 새소리를 들으며 잠을 깼다.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드는 빛을 늦은 오후까지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이 집의 장점이었다.


소정과 내가 같은 빌라에서 산다는 걸 안 이후로 우리는 종종 만났다. 이비인후과에서 마주쳐 진료를 마치고 나란히 함께 집으로 돌아온 게 시작이었다.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연락해서 만났다. 우리 거기서 만날래? 아니, 거기 말고 불타는 떡볶이집으로. 우리는 수시로 카톡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아침이든 늦은 밤이든 운동복 차림에 야구 모자를 눌러 쓰고서 만났다.
소정이 한밤중에 전화를 했다. 야, 비가 너무 많이 와. 이러다 쓰나미 오는 거 아니야. 무서워서 잠이 안 와. 창밖을 보니 비바람이 창을 미친 듯이 할퀴고 지나가고 있었다. 내일 면접이 한 군데 있는데 볼 수 있을까? 그나저나 면접관이 또 내 발음 가지고 뭐라고 안 할까. 그녀가 휴대폰 너머로 징징댔다. 나는 가볍게 응답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부엌 창에 눈을 붙이고서 그녀의 거실을 쳐다봤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13평 빌라의 모든 공간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녀가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오도카니 앉아 있을 생각을 하니 풋, 웃음이 났다.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쏟아지다가 자정을 넘기고부터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가 소정에게 전화를 했다. 귓속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 때문이었다. 이 빗속에 밖으로 나가서 뛰기라도 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주야, 우리 집에 올래? 같이 자면 잠이 올 거야. 소정은 내가 불면증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 귓속에 수천 마리의 곤충과 남자가 한 명 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소정의 음성에는 정말로 나를 염려해 주는 따뜻한 온기가 묻어 있었다.


빌라 근처 식당에서 소정과 함께 밥을 먹고, 동네 치킨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서로에 대해 알아 가다 둘 다 무직 상태라는 사실을 알았다. 소정은 대학원을 다니면서 조교로 일하다 그만둔 상태였다. 본가는 대구에 있다고 했다. 나는 중견 기업인 IT 회사에서 관리직으로 일하다가 사표를 쓰고 나온 지 1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회사에 취업이 되면서 자연스레 집에서 독립을 했다고 말했다. 둘 다 어떻게 생계를 꾸려 나가는지는 묻지 않았다. 서로 사소한 일로 틀어져 관계가 소원해지지 않도록 소정과 가까운 듯 먼 듯 지내고 싶었다.
오늘 처음으로 소정의 집을 방문했다. 침실 맞은편에 있는 작은 방의 문을 열자마자 한쪽 벽면에 큰 수족관이 놓여 있었다. 55인치 대형 티브이만 한 크기였다. 마치 물의 정원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족관에는 파란 바닷물이 들어 있었다. 산소발생기에서 기포가 퐁퐁 올라오고 있었다. 바닥에는 크기가 각기 다른 작은 바위들과 돌들이 있었고 물결에 해조류가 잔잔히 흔들렸다. 그 속에서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취미네.” 나는 ‘희한한 취미네’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놀라운’이라는 말로 바꿔 말했다.
“물고기들은 증오할 일이 없어서 좋아. 그냥 바라만 봐도 좋아.”
소정이 소중한 사람을 내게 소개하듯 진심 가득한 얼굴로 수족관의 물고기들에 대해 말했다.
“너, 증오하는 사람 많아?”
“증오하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들 얼굴 생각날 때면 물고기들 유영하는 모습을 들여다봐. 얼마나 부드럽고 아름다운지 몰라. 봐, 봐. 저 애들을 보라고.”
소정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적이 있었어. 고막이 찢어져 치료를 받아 완치된 직후였어. 의사가 심리적인 문제라고 하더라고. 맞은 것보다는 내상이 더 컸던 모양이야. 그래서 조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 다른 사람들 입을 쳐다봤지만 모두들 물고기처럼 입만 뻐끔거리는 것 같았거든. 미치겠더라고. 그때부터 물고기를 기르기 시작했어.”
소정의 얼굴 표정이 굳는 듯하더니 금세 물고기들을 바라보며 수다스럽게 말했다.
“얘들은 움직이는 생물체인데도 소리가 크게 없어서 좋아. 이 아이들은 큰 파도에 쓸려나갈 일은 없어. 수족관은 안전해.”
나는 소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튀어나오려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래, 수족관에서는 고막이 터질 일도 없겠지.’ 큰 파도에 휩쓸려 나와 강기슭에서 배를 까뒤집은 채 죽어 있는 고기들이 떠올랐다. 그래, 수족관은 폭력적이지 않지. 안전한 곳이지. 코발트색 줄무늬 물고기, 은빛 물고기, 금빛 물고기, 빨강 물고기들이 아주 천천히 수족관 속을 헤엄쳤다. 지느러미의 움직임이 봄바람에 커튼 자락이 일렁이듯 부드러웠다. 소정이 비닐봉지에 열대어 다섯 마리를 넣어 내게 주었다. 전부 내 손바닥의 절반 정도 되는 크기였다.


작은 어항을 사서 소정이 준 물고기를 넣었다. 거실 테이블 위에 어항을 올려 두고 소정이 일러준 대로 하루에 두 번 물고기 먹이를 주고, 일주일에 한 번 물을 갈아 주었다. 청소를 하다가 밥을 먹다가 커피를 마시다가 물고기를 쳐다보았다.
나는 더 이상 핀셋을 훔치지 않았다. 이비인후과에 갈 때마다 핀셋을 훔치고 싶은 욕망을 누르느라 손아귀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그럴 때면 화장실로 뛰어가 차가운 물로 손을 오랫동안 씻었다. 나쁜 습관을 아주 어렵게 버렸다. 대신 수시로 물고기를 쳐다보는 새로운 습관을 만들었다.
침대 위에서 오래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 그때, 귀에서 준모의 음성이 튀어나왔다. 죽어. 죽어버려.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다 망가져 버렸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나는 제발, 제발, 중얼거리듯 말하며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귀를 막자 준모의 목소리는 멀리서 새들이 무리를 지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소리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나는 고개를 심하게 내저었다. 저리 가, 나쁜 새끼, 저리 가라고! 아파트의 음식물 쓰레기통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를 소리를 질러 내쫓듯 악을 썼다. 다시 준모가 귓속에서 소리쳤다. 꺼져, 꺼지라고. 준모의 음성은 지치지도 않고 생생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두 손으로 귀를 막고 거실 바닥에 뒹굴었다. 귓속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뒹굴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때까지 반복하다 멈추었다. 깊은숨을 몰아쉬며 반듯하게 누웠다. 눈을 슴벅거렸다. 또다시 귓속에서 곤충 떼가 날아오르는 소리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나는 옆으로 몸을 비틀며 신음을 토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등 뒤에서 바람이 부는 듯 등이 선득했다. 땀에 젖은 긴 머리카락이 곤충의 날개처럼 얼굴에 달라붙었다. 나는 서랍에서 핀셋을 꺼냈다. 메탈색 핀셋은 형광등 불빛 아래 새하얗게 빛났다. 핀셋으로 귓속 거즈를 빼냈다. 귓속에서 수천 마리의 곤충이 형광등 불빛 속으로 빠르게 날아올랐다. 이어 준모가 다시 소리쳤다. 나도 꺼내 줘. 어서. 나는 그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최대한 몸을 웅크려 손으로 귀를 막았다. 나는 준모를 사귄 죄밖에 없는데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내 귓속에 왜 준모가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항 속 물고기 한 마리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물고기가 테이블 위에서 바동거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물고기는 파르르 떨더니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물고기의 아가미 위, 정확하게 귀를 향해 핀셋을 높이 들었다. 선홍색의 피가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파닥거리며 테이블 위로, 바닥으로 튀어 올랐다.


*



2년 전, 준모와 헤어지기 전 일이었다. 준모와 저녁을 먹으며 가볍게 와인 한 잔을 마시는 중이었다. 나는 아주 어렵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다. 그가 좋은 가정환경에, 자랑할 만한 복근을 가진 탄탄한 몸에, 무엇보다 연봉이 센 공기업(公企業) 신입사원이라는 멋진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디에 숨어 있다 불쑥 튀어나오는 그의 이상한 집착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한 번씩 짐승처럼 돌변하는 그를 계속 만날 수는 없었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말 내 마음을 몰라? 네가 나만 바라봐 줬으면 하는 마음 말이야.”
나는 그래도 안 되겠다고, 이쯤에서 정리하자고 했다. 그는 화난 표정으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 레스토랑 문을 소리 나게 열고 나갔다.


준모에게 헤어지자고 말한 몇 주 뒤, 퇴근해서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며 가벼운 이야기들을 나누다 기분 좋게 헤어졌다. 지하철에서 내려 동네 편의점에 들러 음료수 몇 병을 사서 나오는 길이었다. 그때, 누가 내 어깨를 낚아챘다. 음료수 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준모였다. 준모가 나를 놀이터로 끌고 갔다.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유를 말해! 왜 이렇게 일방적으로 이별 통보를 하는 거야?”
준모가 목청을 돋워 말하고는 거칠게 숨을 쉬었다. 그의 입에서 술 냄새가 조금 났다. 나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왜 말 못 해. 다른 사람이 생긴 거야?”
“숨이 막혀서 그랬어. 종일 문자로, 전화로, 폭력적인 말과 행동으로 나를 가뒀잖아!”
겁이 났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순간, 내 눈 위로 준모의 주먹이 지나갔다. 내가 픽, 옆으로 쓰러지자 그는 내 목덜미를 잡고 놀이터 뒤쪽으로 끌고 갔다. 원피스 자락이 배 위로 말려 올라가는 걸 느꼈다. 팬티가 드러난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원피스 자락을 끌어내리려 손을 배 위에 갖다 댔다. 맨 살갗만 만져졌다. 허벅지와 엉덩이도 달빛 아래 허옇게 드러났을 것이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소리를 질렀지만, 소리가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 네가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하다니! 네가 모임 내내 다른 남자와 헤실거리는 걸 봤어. 나를 편집성 인격 장애라고 지인들한테 떠들고 다닌 것도 알아. 대체 왜 나를 나쁜 놈으로 모는 거야? 꺼져! 꺼지란 말이야. 준모는 놀이터가 쩡 울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이내 내 얼굴을 손바닥으로 연거푸 쳤다. 입술에서 피 냄새가 났다. 입술이 터진 모양이었다. 그가 나를 일으켜 세워 미끄럼틀로 질질 끌고 갔다. 이어 미끄럼틀에다 내 몸을 탕, 탕, 탕 쳤다.
그날 밤, 나는 정신을 잃었고 구급차에 실려 갔다. 외상 치료와 함께 심리 치료도 병행했다. 퇴원 후에 바로 변호사를 선임해서 준모를 고소했다. 준모가 선임한 변호사로부터 몇 차례 고소 취하와 합의 요청이 들어왔지만 거절했다. 선고 공판이 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준모는 법원으로부터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 후,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침 7시에 일어나 9시까지 사무실에 도착했고 오후 5시 30분에는 퇴근을 했다. 혼자서 간단히 저녁을 먹은 뒤에는 바로 집 근처 외국어 학원에서 중국어 수업을 들었고 헬스장에서 운동을 한 뒤 집으로 돌아와 잤다. 모든 게 회복되어 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즈음부터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바람소리 같은, 수천 마리의 곤충이 날아오르는 듯한 소리 같은. 그 뒤에는 어김없이 준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



늦은 점심을 먹고 IT업체 인턴사원 채용서를 써서 보낸 후에 데이터 자격검정 응시원서를 작성하고 있을 때였다. 벌써 1년 이상 무직 상태였다. 통장 잔고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소정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랜만? 지금 빌라 뒤편 강둑이야. 같이 좀 걸을래?’ 나는 망설일 것도 없이 ‘바로 갈게.’ 하고 답을 보내고는 엉덩이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후드 티에 레깅스를 입고 나갔다. 소정은 체중 감량 목적으로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며 나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소정도 회색 셔츠 아래 검정색 레깅스 차림이었는데 배와 엉덩이는 큰 카디건을 묶어 가린 상태였다. 어둠이 내리는 강물 위로 새들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붉은 노을 몇 점이 소정과 내 어깨에 사이좋게 내려와 앉았다. 소정은 매일 강둑을 걷자고 했다. 각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걷다가 이어폰을 빼고서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때였다. 이제는 소정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고막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야?”
소정은 대답하지 않고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걷기만 했다. 나는 어설프게 질문한 것에 대해서 금세 후회했다. 우리의 대화는 내가 꺼낸 말 한마디 때문에 끊어졌다. 소정은 네 호기심 따위는 절대 충족시켜 주지 않겠다는 딱딱한 표정으로 걸었다. 그게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이해시킬까? 내 귓속에 수천 마리의 곤충과 남자가 한 명 살고 있다고, 그것들이 수시로 귓속에서 속살거리거나 소리친다는 사실을 소정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원인 미상의 감각신경성 난청 증상 중 하나라고,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으로는 증상이 완화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새들은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소정은 입을 굳게 닫은 채 걷기만 했다. 나는 오래전, 저렇게 소정처럼 아무 말 없이 강둑을 걷던 사람을 알고 있다. 그저 입술을 앙다물고서는 강둑을 걷기만 하던 사람.
내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은 이층 주택이었다. 하얀색 나무 펜스를 목도리처럼 두르고 있던 빨간색 벽돌집이었다. 나무 펜스가 아담한 이층집을 더 풍경처럼 보이게 했다. 조그마한 정원이 있었고 작은 연못이 있던, 내 기억으로는 꽤 근사한 집이었다. 일층에 방이 세 개 있어 줄곧 기숙사 생활을 하던 의대 본과생인 외삼촌도 함께 살았다. 이층은 전세를 주었는데 우리가 그 집을 떠날 때까지 세입자가 네 번이나 바뀌었다.
내가 막 중학생이 되었을 때, 이층에 새로 세 들어 올 사람이 신혼부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는 이제야 집이 주인을 제대로 만났다고 말했다. 아빠도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세입자는 초등학생인 아들 둘이 있는 부부였는데 남자 아이들이 밤낮없이 뛰노는 바람에 우리 집 천장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이층 신혼부부는 식구들의 기대와는 달리 종종 시끄럽게 싸웠다. 한밤중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쿵 내려앉는 소리, 바닥에 유리잔 같은 것이 부딪혀 날카롭게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 남자의 거친 말들이 바람이 창을 뒤흔드는 소리만큼 크게 들렸다. 한참 뒤, 덜컹거리는 창문 틈으로 흐응 흐응 흐응 여자의 울음소리가 바람 소리처럼, 긴 휘파람처럼 파고들었다. 그럴 때마다 외삼촌은 저런 부부 유형을 간헐적 파행 부부라고 하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수시로 다리를 절뚝거리는 부부라고. 무언가가 신경을 압박해서 생기는 증상이라고. 그 신경을 제거해 주면 되는데, 저 부부는 그걸 모르는 것 같아, 하고 말했다.
이층 아줌마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핼쑥한 얼굴로 장을 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모습 외에는 거의 볼 수 없었다. 어느 토요일,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아줌마와 대문에서 마주쳤다.
“같이 산책할래?”
아줌마가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책가방을 현관문 앞에 던져두고서 바로 따라 나갔다. 아줌마는 강을 따라 길게 이어진 강둑으로 걸어갔다. 강둑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강물이, 다른 쪽은 과수원과 주물 공장, 솥 공장과 오래된 주택들이 있었다. 아줌마는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아줌마의 왼쪽 뺨과 팔목에 달걀 크기만 한, 물빛을 담은 푸르스름한 멍이 있었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아줌마의 표정이 너무 적막하고 쓸쓸해 보였다. 강섶에 난 이름 모를 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아줌마는 창백해진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아줌마는 핏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얼굴로 걸었다.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할 만큼 허약해 보였지만 의외로 잘 걸었다. 난, 걷는 재능은 있어. 비 오는 날도 우산 쓰고 잘 걸어. 아줌마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세상에 아줌마와 나만 오롯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오후의 햇빛이 강물 위로 비스듬히 쏟아져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거렸다. 강에서 불어오는 물 냄새가 제법 비릿했다. 아줌마는 입술을 꽉 다문 채 긴 강둑을 따라 걸었다.


*



소정은 그날 강둑에서 내가 고막을 찢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은 뒤로는 소식이 없었다.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고 있었다. 아침에 주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한낮의 동네는 고적했다. 창가를 바라보니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소정에게서 문자가 왔다. ‘밥 먹었어? 떡볶이 먹고 싶다~~ 떡볶이 먹고 같이 러닝할래?’ 나는 그 문자를 읽으니 마음이 왠지 아득했다. 소정이도 마음이 허했던 모양이었다. 소정이가 보고 싶었다. 요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준모가 이따금 귓속에서 소리를 쳐댔기 때문이었다. 신경외과 전공의인 외삼촌이 한국에 있었다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몇 년 전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한국에 없었다. 외삼촌이라면 ‘무엇인가 신경을 압박해서 귀에 소리가 나는 강박증이 생기는 거지. 강박증의 원인을 찾아 제거만 하면 되는데 말이야.’ 하고 말했을 것이다. 나는 옷을 꿰어 입고 빌라 앞 분식집으로 갔다. 소정이 나를 ‘우주야’라고 부르는 말을 빨리 듣고 싶었다.
분식집의 대여섯 테이블 어디에도 소정은 없었다. 나는 냄비 우동을 시켜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고 있었다. 누군가 분식집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불타는 떡볶이를 주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정이었다. 소정도 나도 레깅스 차림에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티셔츠 차림이었다.
짙은 노을보다 더 붉은 떡볶이를 앞에 놓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허겁지겁 떡볶이를 먹었다. 소정은 맵다, 매워. 그래도 매운 걸 먹으면 삶의 의욕이 막 솟아, 하면서 입바람을 후후 불어 가며 먹었다. 떡볶이와 어묵 그릇이 다 비워 갈 때쯤, 소정이가 뜬금없이 말했다.
“물고기는 귀가 아가미 바로 위쪽에 입구가 막힌 상태로 있어. 그래서 고막 같은 거 잘 터지지 않아. 참, 내가 준 물고기 잘 있지?”
“너희 집 물고기 이름은 다 알고 있어? 손바닥 두 배 크기부터 새끼손가락 크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던데.”
나는 화제를 얼른 다른 곳으로 돌렸다. 네가 준 물고기가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당연하지. 그중에 버들붕어가 제일 귀여워.”
소정은 버들붕어를 생각하는지 푸훗, 웃으며 말했다. 내 손가락만 해. 이제 좀 걸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탁소를 지나고, 네일숍을 지나고, 보세 옷가게를 지나 강둑에 접어들 때 소정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뭔가 충격적인 일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는 어떤 무언가가 상처 자국처럼 남게 되지. 내게는 물고기가. 우주, 아니 유주에게는 핀셋이…….”
소정은 ‘유주’의 ‘유’ 자를 발음할 때 엄청 조심성 있게 천천히 말했다. 그 말 이후로 소정도 나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음악을 들으며 걸었다. 목적지 없이 걷고 있지만 목적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강둑이 구부러지는 곳이 목적지였다. 그곳이 바로 반환점이기도 했다. 가로등이 있어도 조금 어두웠고 그 뒤편에는 덤불숲이었기 때문에 사람들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



그 뒤로도 이층 아줌마와 종종 강둑을 걸었다. 가을이었고 꽃과 잎이 떨어져 천지에 낙엽들이 뒹구는 오후였다. 아줌마는 강둑을 걸으며 처음으로 자신의 얘기를 했다. 결혼 전까지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고. 그러면서 영어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내 팔과 어깨에 잠자리가 내려앉자 아줌마가 손으로 잠자리를 휘이, 훠이, 하는 소리를 내며 쫓았다. 마치 새를 쫓듯이. 잠시 대화가 중단됐다. 그때, 아줌마가 나직하게 말했다.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어? 내가 무슨 부탁이요? 하고 물었다. 혹시 남편이 강둑 산책길에 항상 나와 함께 있었느냐고 물으면, 둘이서만 산책했느냐고 물으면 사실대로 그렇다고 말해 줄래? 그냥 있는 그대로만 말하면 돼.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거니까 어려울 것도 없었다. 아줌마는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나도 아줌마의 손을 꼭 잡았다. 아줌마는 조용히 웃었다. 아줌마의 미소가 가을 햇살처럼 빛이 났다.
산책을 다녀와서 엄마한테 아줌마가 부탁한 얘기를 했다. 그런데 저녁 식사 때, 외삼촌이 그 이야기를 화제로 꺼냈다. 이층의 간헐적 파행 부부 말이에요. 그 아줌마, 여태 유주를 알리바이용으로 데리고 산책했던 거잖아요. 남편한테 보이기 위해서 말이야. 진짜 기분이 별로야. 엄마가 외삼촌에게 그만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외삼촌은 간헐적이니 파행이니 폭력이니 하며 이층 부부에 대해서 좀 더 말했을 것이다. 엄마는 이층 아저씨가 새댁이 외출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 같아. 맞선을 본 지 얼마 안 돼서 급하게 결혼을 했대. 그래서인지 남편이 새댁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의심하나 봐. 그래서야 새댁이 어떻게 숨이나 쉴 수 있겠어? 저러다 새댁이 말라 죽고 말지, 하며 이층집의 바닥일 천장을 쏘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어 엄마는 괜히 부부 싸움을 부추길 수 있으니 내게 더 이상 아줌마와 산책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내 방에 누워 아줌마와 강둑을 함께 걸었던 때를 떠올렸다. 아줌마가 내 손을 잡던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부탁하던 모습, 미소를 지으며 빛나게 웃던 모습, 팔에 옅은 잉크빛처럼 물들어 있던 멍 자국이 생각났다.


*



“물고기 밥값도 벌어야 하고 취업을 해야 하는데 만만치가 않아. 다음달엔 집도 비워 줘야 해.”
소정이 강둑에 있는 돌을 주워 물수제비를 뜨며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계속 데이터 자격시험 준비를 하고 있긴 해.”
이제 강둑에는 어둠이 제법 내려앉았다. 분식집에서 조금 시간을 지체해서 평소보다 늦게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반환점까지 가서 돌아와야지, 하며 소정이 제안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누구한테 맞아 고막이 터졌다는 소문이 여기저기 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
소정이 그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나는 소정의 걸음걸이에 맞춰 천천히 걸으며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소정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이야기의 흐름을 깨고 싶지 않았다.
“다들 그 사실밖에는 몰라. 내가 입을 열지 않았으니. 내가 반 고흐처럼 내 귀를 스스로 다치게 하진 않았으니 그 상대가 누군지 궁금했겠지.”
소정이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1년 전, 기말시험을 마치고 같은 과 대학원생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자리였어. 그중에는 막 연인으로 발전한 남자친구도 있었어. 자기들이 아는 이야기만 하기에 나는 지루해서 가게 밖 풍경을 보다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어. 그때, 갑자기 한 명이 내게 건방지다며 소리를 지르더라고. 나는 왜 그러느냐고 큰 소리로 물었지. 그랬더니 바로 뺨을 연달아 치더라고. 그런 혀 짧은 소리로 조교 자리를 꿰어 찼느냐며, 그런 식으로 석사학위도 딸 거냐며 바로 내 의자를 발로 차더라고. 나는 테이블 아래로 나뒹굴었지. 그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넘어져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욕설을 하며 다시 얼굴을 때렸어. 술이 취했다고 하더라도 평소 내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어. 그때 남자친구와 다른 일행은 처음엔 폭행한 친구를 말리더니 이내 자리를 뜨고 없었어. 그건 그렇고, 우주야, 나는 다음달이면 정말 가난해져. 물고기 밥값뿐만 아니라 내 밥값도 한 푼도 없게 돼. 가지고 있는 돈으론 집을 구할 수가 없어. 나는 이 공포도 무서워.”
소정은 그 사건을 담담히 말하고는 얼른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애써 태연한 척하는 것일 거다. 말해 놓고는 어서 잊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남자친구가 보는 앞에서 무참하게 맞았다는 것, 남자친구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떴다는 사실을 복기하고 싶지 않은 거였다. 나는 소정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애써 그러지 않아도 돼, 라는 의미였다. 강둑이 구부러진 곳까지 와서 막 되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우리 뒤에서 걷던 사람이 소정과 나를 미끄러지듯 빠르게 지나쳤다. 덤불숲 쪽에서 나온 것 같기도 했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키가 큰 남자였다. 그 사람이 막 우리를 지나치자마자 소정이 윽, 하고 넘어졌다. 남자는 뒤돌아보지 않고 급한 걸음으로 뛰어갔다. 소정을 일으켜 세우며 “누구세요? 왜 이래요?” 하고 소리쳤다. 돌아서던 남자가 소리쳤다. “씨발, 레깅스 년들! 비켜! 꺼지라고!” 그러곤 남자는 다시 쏜살같이 뛰어갔다.
“저 사람이 밀쳤어. 모르는 사람이야.”
소정이 울먹이며 말했다. 나는 소정을 일으켜 세우고는 남자를 뒤따라갔다. 분노가 치밀었다. 손을 호주머니에 넣어 핀셋이 들어 있나 확인했다. 핀셋 두 개가 만져졌다. 직선형 드레싱 포셉과 커브형 드레싱 포셉이었다. 나는 커브형 핀셋을 꽉 쥐었다. 힘껏 찌르면 살갗 깊숙이 박힐 수 있는.
“안 돼! 우주야, 그냥 돌아가자.”
내가 남자를 따라가는 게 불안했던지 소정이 소리쳤다.
“넌 그렇게 울고만 있을 거니? 언제까지 물고기처럼 소리도 안 낼 거냐고!”
남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어느 길로 빠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소정은 침대를 두고서 굳이 거실의 좁은 소파에 몸을 웅크려 누웠다. 누워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불안한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장만 멀뚱히 쳐다보았다. 소정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야 할 것 같았다.
“소정아, 우리 내일 물고기 사러 갈까?”
“그럴까? 그리고 우리 내일부터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핀셋을 훔치자. 어때?”
소정이 웃는 눈빛으로 말했다.
“이젠 핀셋 훔치지 않아. 네가 말했을 때부터 그러지 않았어.”
소정이 오, 정말? 대단한데? 라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시 말했다.
“그럼, 인터넷으로 의료용 핀셋을 구매하자. 몇 십 개를 아니, 박스째 왕창 사자.”
“그럴까? 우리 그렇게 해도 주머니가 거덜나진 않겠지.”
우리는 농담을 진담처럼 하며 열없이 웃었다. 농담이, 웃음이 좁은 거실에 웅 웅 웅 불안하게 울렸다.피곤이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소정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소정은 자면서 흠칫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소정이 깊이 잠든 것을 본 뒤에 휴대전화를 열어 소정아, 방 구할 때까지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 물고기는 모두 분양하고 오는 거 알지? 라고 문자를 보냈다. 나는 탁자 위에 커브형 드레싱 포셉을 올려놓았다.
소정의 집을 나오니 날이 희뿌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빌라 골목 사이에서 무언가 검은 물체가 휙, 튀어나왔다. 나는 주머니 속 핀셋을 꼭 쥐었다. 작은 물체들은 골목 끝으로 잽싸게 사라졌다. 빌라와 빌라 사이, 오래된 주택의 벽 틈새, 주차장 후미진 곳을 돌아다니는 것들이었다. 나는 핀셋을 꽉 잡은 채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문서정
작가소개 / 문서정

2015년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당선, 2016년 천강문학상 소설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5년 에스콰이어몽블랑문학상 소설 대상, 2020년 스마트소설박인성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8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소설집 『눈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와 공동 소설집 『나, 거기 살아』, 『여행시절』, 『당신의 가장 중심』이 있다.


《문장웹진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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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이 있는 식탁보 강태식 존슨 카운티 외곽에는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거의 모든 면에서 깨끗한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집들이 - 지붕과 창문과 현관 손잡이와 마당을 두른 나무울타리의 모양까지 똑같은 집들이 - 거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진입로에는 작고 예쁜 우체통이 서 있고 - 어느 집이나 다 - 우유 배달 업체의 상표가 찍힌 낡은 주머니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팻말이 울타리 한쪽에 걸려 있으며 마당 잔디가 빗질 자국이 남아 있는 머리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화단에 심은 꽃들도 거의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아 보였다. 차를 몰고 천천히 지나면서 보면 그랬다. 어디선가 가끔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모든 음이 기계가 치는 것처럼 정확했지만 음이 정확하다는 것말고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연주였다. 얼마 전에 하나뿐인 아들 톰을 다른 주에 있는 대학에 보낸 벤 하우저와 로지 하우저도 그 거리에 있는 많은 집들 중 한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아들의 방문 앞에 멍하니 서서 그 안에 아들이 쓰던 물건들만 - 사인볼과 다 버리고 딱 두 개 남은 레고 모듈러 시리즈와 절대로 버리지 말라고 고집을 부려서 버리지 못한 낡은 청바지와 픽업트럭을 끌고 이케아 매장에 가서 사온, 벤이 꼬박 이틀 동안 조립해서 겨우 완성한 오래된 이층 침대와 디딤판에 노란색 번개 마크가 크게 프린팅된 스케이트보드 같은 것들만 – 남아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그런 물건들과 함께 - 한때 아들이 필요로 했던 물건들과 함께 - 그 집에 남겨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벤과 로지는 아들이 자기들 품을 영영 떠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 날마다 그런 짐작이 확고한 사실로 굳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 자기들이 톰의 방문을 바라보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벤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 창 너머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벤은 희미한 빛이 감도는 그맘때의 거실을 둘러보며 오래 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 로지가 외출 준비를 완전히 마치고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립스틱만 바르면 된다거나 스카프만 고르고 금방 나가겠다는 말말고 진짜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기다리고 있었다. 벤은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리모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손을 뻗어 TV를 켰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 뒤에 다시 TV를 껐다. “뭐 해, 벤?” 로지의 목소리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안방 문 너머로 들려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눈썹을 그리거나 파운데이션을 더 꼼꼼하게 바르면서 몸을 뒤로 틀어 소리 지르는 로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떼어내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보를 잡아 펴는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숱하게 보아 온 모습들. “아

  • 관리자
  •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 관리자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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