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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장 한가운데

  • 작성일 2018-01-01
  • 조회수 3,887

[단편소설]



거실장 한가운데



최정화




어머니는 아버지를 포함한 우리 가족 모두가 그 일을 잊어버리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일을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어머니일 뿐 애초에 아버지는 그 일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사자인 아버지는 누명을 쓴 일에 대해 억울해 하기보다는 귀찮아했다. 고세영 씨같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사귄 자기 잘못이라고 했지만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고 그 일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지 않는 것 같았다. 조사가 진행되는 기간 동안 조금씩 심신이 망가진 사람은 지켜보는 사람이었던 어머니였고, 내게는 어머니의 그 말이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들렸다.
마침 회사에서 반값에 할인하는 리조트 이용권이 나와서 신청했다. 회사에서 원도 북부지역 쪽에 만 평가량의 관광단지를 개발하는 바람에 임직원들은 거의 반값에 리조트를 이용할 수 있었다. 주말이나 공휴일을 피하면 이용시설들의 할인 폭을 높여 준다고 해서 평일로 날짜를 맞추었다.
휴가를 낸 것은 어머니를 위해서였는데 휴가 기간 동안 어머니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애써 기분을 망치려는 사람처럼 굴었다. 매표소에서는 입장료가 너무 비싸다고 번듯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데 얼씬도 못 하겠다고 비꼬았고, 사우나에서 가족 할인을 해주자 요즘 일인 가족 비율이 얼마나 높은데 개인 회원 가족 회원을 구분하느냐고 직원에게 따졌다. 마치 어머니는 우리 가족에게 방해가 되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그날 밥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고기집이 원래 그런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주 메뉴는 이인분 이상이라는 점에 화를 냈다.
“혼자 사는 사람은 냉면만 먹고살라는 거야? 왜 사람들이 그렇게 배려가 없을까?”
어머니는 초조한 듯 다리를 떨었다. 밥 먹으면서 다리 떠는 것은 특히 질색을 하는 아버지가 핀잔을 주자 잠시 멈추었다가 자기도 모르게 또 흔들었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가벼운 마찰음에 아버지는 조금씩 신경질이 나는 모양이었다.
“여기 어쩐지 음식 맛이 별로일 것 같아. 사람이 없잖아,”
어머니가 또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아버지가 어머니의 입을 막았다.
“여보, 지금은 평일이야. 다들 회사에 출근했고 학교엘 갔지. 한적한 것도 나쁘지 않은데 우리 가족만의 휴일을 즐기면 된다고. 제발 그만 해. 그리고 그 다리 떠는 것 좀 그만두지 못하겠어?”
나는 어머니의 말과 아버지의 말이 모두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 어딘가에 우리가 보지 못한 무엇이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 말대로 식당의 음식 맛에 별 기대가 되지 않았고 또 아버지 말대로 지금은 우리 가족만의 휴일인 것도 맞지만 휴가의 식당이 어딘가 불편했던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까.
직원이 음식을 내오고 어머니가 직원이 불친절하다고 짜증을 냈고 아버지가 또 한 번 발끈했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가 뭘 사는 게 대단한 지위인 줄 안다니까. 우린 돈을 냈고 여기선 음식을 내왔어. 왜 저 사람들이 우리에게 웃어야 하고 친절히 굴어야 한다고 생각해?”
첫날의 식사 시간부터 암담했다. 이 휴가가 우리 가족을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다시 수저를 집어 들자마자 테이블이 벽에 부딪는 마찰음이 다시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다리 좀 가만 두라고 몇 번 말해?”
어머니가 수저를 놓더니 화장실로 가버렸다. 어머니가 일어났는데도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그 딸각이는 소리는 우리 테이블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옆 테이블에 어떤 남자가 냉면을 앞에 둔 채 창밖에 멀거니 시선을 둔 채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마치 그 일이 자기 생의 유일한 의무라도 되는 양. 탁, 탁. 탁. 탁. 탁. 탁. 탁.
소리의 근원지가 다른 테이블이라는 걸 눈치 챈 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 몇 숟갈 더 뜨던 아버지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남자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수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고세영 씨가 아버지를 고소한 것은 지난겨울이었다. 경찰서에서 피의자 조사를 위해 출두해 달라는 전화가 걸려왔을 때 아버지는 낮잠을 자던 중이었다. 핸드폰은 거실의 티브이 위에 올려 있었는데 바닥에 깔아 놓은 러그의 보풀을 뜯어내던 어머니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
상대가 중부지구 경찰서 소속의 김주호 경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아버지를 바꾸어 달라고 하자 어머니는 손에 쥐고 있던 테이프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테이프는 거실 바닥을 일 미터 정도 굴러가다 멈췄다. 그게 멈추는 순간 어머니는 무릎이 너무 떨려서 주저앉으려고 하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하지만 경사가 당연히 전화기 건너편을 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고 계속 무슨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그 질문에 간혹 대답도 했지만 완전히 얼이 빠진 상태였기 때문에 경사가 자기를 소개한 부분까지만 기억할 뿐 그 뒤의 내용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기억나지 않는 그 부분을 상상으로 대체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범죄자라고 누군가를 해쳤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거실에 놓인 이제 아무도 건반을 누르지 않는 피아노에 몇 분간 기댔다가 가까스로 몸을 세웠다. 피아노 의자 위에 작은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하단에 작은 글씨로 상호명이 인쇄된 노란색 포스트잇이었다. 12월 18일 오후 2시 서울 경찰서 중부지소 21 출두 요망. 분명 어머니 자신의 글씨체였지만 그걸 언제 받아 적었는지 역시 기억해 낼 수 없었다. 포스트잇을 들고 있던 어머니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제비뽑기로 결정한 사람처럼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오십 년 동안 한 집에 산 남편이 구속될 거라는 상상과 두세 줄의 단어가 적힌 가벼운 포스트잇의 무게가 어머니를 이상한 혼란에 빠뜨렸다. 어머니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능력을 상실했다.
어머니는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흔들어 깨우고 그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볼 수도 있었다. 어떤 일을 저질렀기에 경찰서에 불려가게 되었는지 자초지종을 따져 묻는 방법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구속되는 (자신의 앞질러간 상상 속에서 일어난) 그 일을 받아들였다. 결국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거라고 순순히 납득했고, 범죄자와 단둘이 묵고 있는 그 집에서 도망쳤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한 시간쯤 뒤에 빈집에서 깨어났다. 아버지는 어슬렁거리며 거실에 나와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마신 뒤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렇게나 간단히 아버지는 피의자 조사에 불참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고소를 당한 사실은 알지도 못한 채 잠깐 슈퍼라도 나간 줄로만 알았던 아내가 해가 지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아버지는 열 시쯤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소리는 주방 식탁 테이블에서 들려왔다. 어머니가 아주 급하게 외출했거나 연락을 받지 않겠다는 뜻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아버지는 생각했다.
아버지는 한 시간 정도 티브이를 보았다. 나일 강 유역의 문명 발생에 관한 다큐였다. 모래사막에 수로가 건설되는 과정에 아버지는 관심을 기울였다. 다큐멘터리가 끝나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고 매일 열 시에 그랬듯이 일기를 쓰고 나서 잠에 들었다.
아버지는 내게 전화를 걸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어머니가 아들 집에 와 있다는 사실과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피의자 조사에 참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냥 일어난 일들을 양지 다이어리에 적었다.
‘아내가 집을 나갔다.’


숲길의 첫 번째 코스는 생태 습지 체험장이었다. 표지판을 분명히 확인했는데도 체험장을 찾느라고 꽤 오랜 시간 헤매었다. 이십여 분 만에 발견한 습지는 형편없었다. 어머니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했다는 듯 소리쳤다.
“이게 습지라고? 이 더러운 물구덩이가?”
아버지도 실망한 눈치였다. 나 역시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습지는 비가 많이 오는 날에 도시의 공사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물웅덩이 정도의 크기였다. 물이 너무 탁해서 정확한 깊이는 알 수 없었지만 겨우 무릎 깊이가 될까 말까였다. 표지판에는 물속에 사는 동물들을 관찰해 보라고 쓰여 있었으나 소금쟁이 몇 마리가 전부였다. 습지가 아니라 그냥 흙탕물이었다. 심지어는 썩은 냄새까지 났다.
어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습지 체험이라니 엄청나구나.”
어머니는 주변에 꺾인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서 물웅덩이를 휘휘 저었다. 물보라가 일며 진흙탕이 퍼져 나갔다. 아버지와 나는 머쓱해져서 할 말을 잃고 나란히 선 채로 어머니가 돌멩이를 물웅덩이에 던져 넣는 바람에 사방으로 흙탕이 튀어 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근데 아까 그 사람 요즘도 나타나요?”
괜한 화풀이를 그만두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어머니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릴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언덕 너머로 고개를 들고 또 가슴을 더 올려 하늘을 바라봤다.
“매일 아파트 단지 앞에 서 있어. 거기서 매일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단다. 그 사람이 왜 그러는 걸까. 얘, 그 사람이 대체 우리에게 뭘 원하는 거 같니?”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면서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직장도 없고요. 다른 누군가에게 연락할 방법은 없어요? 정 안 되면 경찰에 신고하죠.”
어머니가 손사래를 쳤다.
“뭐 딱히 우리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한 게 아니니까 그럴 것까진 없어. 그냥 그 사람은 단지 앞에 서 있는 거지. 거기서 네 아버지를 보는 거야. 아버지가 병원에 갔다 오는 걸, 슈퍼에서 뭘 사오거나 너희들 집에 갔다 오거나 하는 걸 말이다. 그냥 보고만 있고 이제는 인사도 하지 않더라.”
“제정신이 아니라면서요?”
“누가 그러디?”
“아버지가요.”
“정말 그럴까?”
어머니가 나에게 물었다. 내가 그 대답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듯이.
내게는 어머니의 그 말이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들렸다.
“그럼요, 어머니. 그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 거예요. 경찰이 아버지는 죄가 없다고 그랬잖아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이해하거나 말거나 나만 떳떳하면 그만이라는 아버지의 생각은 법 앞에서 곧장 무너졌다. 2017년 10월 10일에 고세영 씨는 아버지가 자기 돈을 갈취하고 협박하고 폭력을 휘둘렀으며 생명에 위협을 가했다고 신고했다. 아버지는 피의자였다.
아버지는 조사실 안을 둘러봤다. 싸구려 플라스틱 의자와 집성목으로 만든 직사각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철제 캐비닛의 색깔은 붉은색이었는데 그 집기들로 인해 아버지는 자기가 경찰서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을 깼다.
무엇을 신고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것이 아니라 범죄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서 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조사과장이 질문을 할 때 계속 다리를 떠는 것 때문에 자꾸 주의가 흐트러졌다. 아버지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자판기에서 율무차를 뽑아 천천히 한 잔 마시고 다시 조사실로 들어갔다. 단것이 들어가자 누명을 쓴 피의자 역할을 좀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이후로는 차분히 질문에 응했다.
아버지는 고세영에게 돈을 갈취한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고세영이 꿔준 돈이다. 돈은 분명 계좌로 이체되었는데 그럼 내가 고세영의 등에 총을 대고 현금인출기로 데려가 억지로 화면을 조정하게 해서 내 통장으로 돈을 입금 시킨 것이겠느냐고 물었다.
고세영이는 내가 협박을 했다고 하는데 그 점 역시 사실이 아니다. 고세영과 자기는 평등한 친구 사이로 누가 누구를 협박할 수 있는 위계 관계가 아니다. 우리는 덩치도 같고 나이도 같고 성별도 같다. 아버지는 거기까지 말하고 조사과장에게 부탁인데 다리를 떨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조사과장은 아버지에게 “뭐라고요?”라고 되물었다.
“지금 다리를 떨고 계시잖아요. 그게 너무 거슬립니다. 대답을 하는데 집중할 수가 없어요. 아까부터 내가 말을 자꾸만 더듬은 건 당신 때문이오. 원래 그렇게 다리를 떱니까? 신경이 쓰여서 생각에 집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조사과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가만있을 테니 계속 진술하세요.”
아버지는 계속했다. 물론 내가 고세영이에게 소리를 지른 적은 있다. 하지만 고세영이도 그에 못지않았다. 만약에 내가 고세영이에게 소리를 지른 것이 협박죄에 걸린다면 고세영이 역시 그 죄에 해당할 것이다. 내가 고세영이를 죽여 버리겠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고세영 역시 나에게 똑같은 소리를 했다. 또 내가 고세영이의 대가리를 후려치고 목을 조른 일 또한 사실이지만, 그놈 역시 내 목을 할퀴고 귀를 물어뜯었소, 하며 아버지는 눌러쓰고 있던 털모자를 벗었다.
“이게 다 고세영이 짓이요. 하지만 난 그 작자를 신고하지 않았고 치료비를 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나를 고소해? 대체 뭘 잘했다고! 이보쇼, 조사과장 양반, 당신은 고세영이를 모르잖아. 난 그놈을 오십 년 가까이 봐왔어. 내 마누라보다 고세영이를 더 오래 봤다고. 당신이 고세영이를 알기나 합니까?”
아버지는 피딱지가 말라붙은 오른쪽 귓바퀴를 문질렀다.
“고세영이는 어디가 모자란 놈입니다. 제대로 된 놈이 아니라는 거요.”
조사관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떨구고 오랫동안 아버지를 쳐다봤다. 아버지도 조사관을 마주 보았다.
“저기, 근데 아까도 말했지만 조사관 선생님, 다리를 또 흔드시는데 그것 때문에 내가 집중이 안 돼요. 생각이 잘 안 납니다.”


점심식사를 마친 뒤에는 숲길을 올랐다. 숲의 입구까지는 곤돌라를 탔는데 앉는 순서를 두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잠시 다투었다. 숲의 입구에 매표소가 있었고 직원은 할인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역시 반값에 이용권을 샀다.
“직원이 아닌 사람은?”
어머니가 물었다.
“여긴 보통 너희 회사 직원들만 오는 데냐?”
어머니가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오죠. 왜요? 누가 여기 오겠다는 사람이 있어요?”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라고 대답했다. 종이에 인쇄된 산의 지형도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입구를 통과할 때 나는 숲의 입구에 간판이 달려 있는 것을 보고 회장님의 호를 딴 것이라고 설명해드렸다.
“산에 사람 이름을 붙였어? 그게 누구 아이디어라니.”
어머니의 불만은 계속되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자기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것이 이상하고 기괴한 일이라고 하더니 산을 깍아 다시 산을 만든다니 웃음도 안 나온다고 비꼬았다.
어머니와 나는 나란히 걷고 아버지는 맨 뒤에서 천천히 올라왔다. 아버지는 발목이 불편한 모양이어서 자꾸 뒤처졌다. 부축을 해드리겠다는 것도 마다하고 어서 앞서 가라고만 했다. 간격이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갈대숲에 들어섰을 때 나타나자 아버지의 모습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발목은 어쩌다 다치셨대요?”
어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에 조사를 받으러 다니면서 어찌나 신경을 썼던지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단다.”
어머니는 자기 몸이 다 아프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작은 정자에서 잠시 쉬며 목이나 축이고 가기로 했다. 아버지를 기다렸다가 함께 올라갈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입구에서 산 생수병을 꺼냈다. 나는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꺼냈다. 정자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향해 몇 차례 셔터를 누르고 꽃 사진을 더 찍고 싶어서 수풀로 들어갔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불안했는지 어머니가 자꾸 말을 시켰다.
“그래서 아까 식당에서 그이랑 아버지가 다퉜니?”
“다투긴요. 아버진 본 척도 안 하고 고갤 홱 돌려버리던데요.”
“그 사람은 어딜 갔을까?”
“여기저기 구경하고 다니겠죠. 그런데 어떻게 여기서 만날 수가 있죠?”
“우연이 아니겠니. 그 사람이 우리가 여기 온 걸 알았을 리도 없고.”
식당에서 만난 남자가 고세영 씨였다. 그는 내가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덩치도 좀 크고 다혈질에, 차근히 생각하기보다는 몸을 먼저 움직이는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겠거니 예상했는데 초등학생으로 보일 만큼 작은 키에 꽤나 소심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 사람이 왜 자꾸 거짓말을 지어낼까요?”
어머니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너무 멀리 들어온 모양이었다. 정자 뒤편으로는 풀숲이 우거져 있었고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과 꽃들 천지였다. 나는 빠르게 셔터를 눌렀다. 수풀 안쪽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는데 프레임에 자꾸 잡혀서 몇 번이나 다시 찍어야 했다. 제대로 찍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확인하면 화면의 어느 구석에 주황색 파카를 입은 그 남자가 찍혀 있었다.
사진을 지우다가 나는 갑작스럽게 아까 식당에서 본 그 남자가 떠올랐다. 창 너머 먼 곳을 응시하면서 다리를 떨고 있던 작은 덩치의 남자. 남자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냉면 그릇과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던 주황색 점퍼.
나는 필름을 돌려 이전에 찍은 사진들을 확인했다. 좀 전에 정자에 앉아 있는 어머니의 옆모습 뒤편으로 고세영 씨가 서 있었다. 식당 앞에서 부모님이 손을 잡고 찍은 사진에서도 화면의 오른쪽 끝에 서 있었고, 리조트의 입구에서 찍은 아버지 사진의 끄트머리에도 있었다.
실수나 우연이 아니라 일부러 함께 찍은 게 분명했다. 고세영 씨는 우리와 완전히 동일한 방향으로 서서 당당하게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우리 식구 일원이라는 듯이, 다만 어떤 사정이 있어서 좀 멀리 비켜나 있을 뿐이라는 듯.


조사가 진행되고 판결이 나기까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는 급격히 멀어졌다. 오십 년이나 한 집에 살았던 이들이 그렇게 한순간에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건 놀라웠다. 어머니는 반년간 우리 집을 거처로 삼아 집에는 아버지가 없을 때만 잠깐씩 들러 자기가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나왔다.
아내가 없는 집에서 어머니의 물건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걸 보며 아버지는 그 없어진 물건들이 뭐였는지를 기억해 내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거의 다 맞출 수 있었는데 거실장 한가운데가 비었을 때 아버지는 거기 있던 게 뭔지를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게 못 견디겠더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갔을 때,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을 때도 고통스러웠지만 그것보다 거실장 한가운데 물건이 뭐였는지 생각이 안 날 때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딱 한 번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집에 들어갔다가 아버지와 마주쳤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자기가 도와줄 게 있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혼자서 할 수 있다고 대답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머니는 아버지의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어머니는 항상 책상 서랍 속에 들어 있던 일기장이 바닥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고 거기에 어떤 대단한 것이, 아버지가 그동안 저질러 온 범죄의 기록이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기장을 가리기 위해, 그보다 떨리는 심장을 숨기기 위해 어머니는 옷장을 열었다. 결혼기념일에 선물 받은 모직코트를 빼들었다가 어머니는 그게 너무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수건을 꺼내 일기장을 감쌌고 아버지는 어머니가 수건을 가지고 나가는 모습을 쓸쓸히 바라보았다. 목욕탕에 갈 거냐고 아버지가 물었을 때 어머니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내가 아끼던 거라서, 라고 얼버무리던 어머니는 수건을 내려다보면서 자기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손에 힘이 스르르 풀리면서 수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수건이 흐트러지면서 그 안에 2017 양지라고 금박 명조체로 인쇄된 갈색 인조가죽 다이어리가 드러났다.
어머니는 그 일기장을 가지고 나와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시에 어머니는 너무 혼란스러웠고 뭐가 진실인지를 알아내야 했으니까, 그래야 한다고, 그래도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게 자기 의무라고. 진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밝혀져야 앞으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자신에게 그 일기를 볼 자격이 있다고도 생각했다.
어머니는 당시에 자기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건 정말 두려운 일이었다고.
“네 아버지가 고세영이의 목을 졸랐다는 걸 알았을 때보다 나는 그게 더 무서웠어.”


고세영 씨가 여기까지 따라온 걸 보면 앙심을 단단히 품고 있는 모양이라고,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린 것 같다고, 아버지는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더니 어머니는 생각에 잠겼다.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야 알 수 있는 일이라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랑 통 어울리려고 들질 않아.”
“아버진 쾌활한 사람이었는데. 그죠?”
“그렇지 않은 지도 오래야. 사업을 시작하고 난 뒤에는 혼자 있으려고만 했는걸.”
어머니가 말했다.
“하영인 학교생활 잘 적응하니?”
“선생님이랑 좀 트러블이 있나 봐요. 딱히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고요, 과목별로 편차가 심하기도 하고요. 좋아하는 것만 하려고 해요.”
“아이들이 뭐 그렇지.”
“신고를 할까요? 아버지가 위험할 수 있어요. 어머니도 그렇고.”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할 거 있니? 그 사람도 여기 놀러온 걸지 모르는데.”
“그렇지 않다는 거 아시잖아요, 어머니. 아까 그 사진들 보셨잖아요. 그 사람 여기 놀러온 거 아니에요. 우릴 찾아온 거라고요. 자기를 우리한테 보여주려고요.”
어머니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발걸음이 빨라졌다. 나는 일부러 걸음을 늦춰 아버지와 보폭을 맞추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아버지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누군가 그놈한테 시킨 거야.”
“네?”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할 위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누가 고세영이한테 가르치고 있어. 나를 고소하고 괴롭히라고.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코치하고 있는 거다.”
“누가 그런 짓을 할까요?”
“그야 모르지. 머리가 아주 나쁜 놈이니까 나한테서 돈을 받으면 결국 그놈에게 죄 뜯기겠지.”
“어머니 저기 계시네요.”
어머니는 개미굴 전시장 앞에 서 있었는데 표정이 좋질 않았다. 가까이 갔을 때 어머니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육되고 있는 개미들이 모두 죽어 있었던 것이다.
복잡하게 구부러진 개미굴의 단면도를 보여주는 사육장의 아랫부분부터 개미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개미들이 얼어 죽었나 봐요.”
“이 안에 가둬 놓았으니 죽은 거 아니니?”
어머니가 내 팔을 붙들었다.
“얼었어요.”
나는 개미굴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면서 물이 얼었고 빠져나오지 못한 개미들도 함께 얼어붙어 있었다.
“누가 여기에 물을 집어넣었어요.”
“일부러 그랬다는 거야?”
끔찍하다는 듯이 어머니가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빨리 나가고 싶구나.”
아버지가 마치 그게 오 년이나 십 년 뒤의 희망인 것처럼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고세영 씨를 대하는 태도에는 이상한 면이 있었다. 아버지가 싫다는데 그가 억지로 찾아온 것도 아니고 고세영 씨가 도움을 주러 올 때에도 아버지가 그를 반겼던 적은 없다. 아버지는 고세영 씨를 마치 하인 부리듯 했다. 실제로 아버지가 고세영 씨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고, 고세영 씨가 아버지에게 딱히 호감 가는 인물이 아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감각적인 사람이었고 고세영 씨는 충직했다. 아버지에게 고세영 씨는 믿을 만하지만 의지하거나 마음이 잘 통하는 지기는 아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고세영 씨는 어딘가 모자란 데가 있었다. 날카로운 데가 하나 없이 무딘 고철 같아서 같이 있으면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지만 재치가 없었다. 아마 비슷한 이유로, 아버지에게 탐탁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독신이었고 어머니 말로는 가족이랄 만한 사람이 딱히 없는 외로운 처지였다.
“젊어서 결혼한 적은 있었나 봐. 금방 헤어졌다더라고. 아이는 제 엄마가 데려가고. 지금은 소식도 모른다더라.”
외로운 처지에 아버지를 형처럼 따랐다. 하지만 형은 동생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자기가 필요할 때는 불렀지만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런데도 동생은 형밖에 없다며 끔찍이 여겼다.
그래도 두 사람 관계에는 크게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고세영 씨가 아버지의 태도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처럼 고세영 씨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지도 않았고, 놀리지도 않았고, 괜히 어깨를 치지도 않았으니까 아버지는 고세형씨에게 좋은 형이었다.
아버지는 고세영 씨가 왜 갑자기 자기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었는지 알 수 없었다. 고세영 씨는 어느 날부터 갑자기 말대꾸를 시작하더니 전에는 그냥 넘어가던 일을 따지고 들었고 고집을 부리는 날도 있었다.
고세영 씨가 아파트 입구에서 시위를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났을 즈음 아버지가 고세영 씨를 데리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땡볕에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얼굴이 시커메진 고세영 씨가 어머니가 내민 물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키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 돈 돌려주세요. 이자 쳐서 돌려주세요.”
고세영 씨는 돈을 빌려 줄 때 이자고 뭐고 필요 없다, 형 아우 사이에 이자는 무슨, 이라면서 반납 기한도 정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어쩐 일로 마음을 바꿨는지 모르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것 같았다.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누가 이러라고 시켰나?”
아버지가 물었다. 고세영 씨는 아니라고 했다.
“돈도 돌려주시고 이자도 주세요.”
“나도 돈을 만드는 데 시간이 필요한데 갑자기 그러면 안 되지, 이 사람아. 좀 기다려 주면 얼른 갚을 테니 더 이상 얼씬거리지 말고 자네 집으로 돌아가.”
“이자도 꼭 주세요.”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어머니가 고세영 씨를 달래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거야 그 사람 자유 아니겠니?”
어머니가 내 생각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여기 와서 자연을 즐기는 걸 뭐라고 하는 건 아니죠. 하지만 고의적으로 우리 뒤를 따라다니고 있고, 그 모습을 일부러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잖아요.”
“일부러 그러는지를 어떻게 안다니.”
“그럼 그 사람이 우연히 여길 놀러와서 우연히 우리 옆 테이블에 앉고 우연히 사진에 계속 찍힌다고 생각하세요?”
“네 엄마는 고세영이한테는 늘 저렇게 너그럽단다. 고세영이한테 쓰는 마음을 나한테 반만 써줘 보구려.”
아버지가 마땅치 않다는 듯 말을 보탰다.
“이건 협박이에요, 어머니, 위협이라고요. 꼭 물리적인 폭력이 있어야 피해를 입는 건 아니죠.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엄연한 폭력이고요.”
“우릴 따라 여길 온 게 죄가 된다는 얘기냐?”
어머니의 표정이 지난밤 창밖을 통해 본 먼 산처럼 컴컴했다.
아버지는 기념품 숍에서 좀 쉬겠다면서 먼저 내려가고 어머니와 나는 숲길을 좀 더 걸었다. 나란히 걷던 어머니가 멈춰 섰다. 나는 어머니가 청설모를 보고 놀라기라도 한 줄 알았는데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매표소가 나오고 그 옆에 공중화장실이 있었던 게 기억났다.
“얼마나 더 내려가야 한다고?”
“빨리 걸으면 십 분 정도 걸릴 거예요.”
“그럼 좀 빨리 걷자꾸나.”
하지만 어머니의 걸음은 점점 더 늦어졌다.
“얘, 난 더 내려갈 수가 없다.”
어머니가 걸음을 멈췄다. 나는 좌우를 살폈다. 숲길이라지만 관광 목적으로 길을 트고 다시 나무를 심은 식이어서 소변을 눌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글귀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 하나가 수풀 안쪽에 있었다. 두드려 보니 진짜 바위는 아니었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저 뒤로 돌아가요.”
어머니가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먼저 내려가라. 곧 뒤따라갈게.”
바위가 어머니를 완전히 가렸다.
“갔니?”
“갈게요.”
“가라.”
“네, 가요.”
어머니가 원치 않는 것 같아서 발걸음을 빨리 놀렸다. 잠시 뒤에 어떤 남자 둘이서 킬킬대면서 나를 앞질러 뛰어갔다. 나는 그들이 어머니를 보았을까 궁금했다. 그들 뒤를 쫓아가서 왜 킬킬대는지를 따져 묻고 싶었다. 나는 내 생각을 고쳐먹는 데, 그들이 킬킬대는 게 어머니가 오줌을 눈 것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데 거의 모든 신경을 기울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오줌을 누는 데 이십 분 이상이 걸릴 리는 없었고 나는 아버지와 약속한 기념품 숍이 아니라 다시 숲길 방향으로 어머니를 찾으러 뛰어 올라갔다.
주먹을 쥔 손을 앞뒤로 흔들며 멀리서 어머니가 내려오고 있었다.
“먼저 내려가라니까 왜.”
립스틱을 새로 칠한 듯 어머니의 입술은 붉은 진홍빛이었다.
“빨리 가요. 아버지가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나는 어머니의 운동화 안쪽이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가 산에 숨어서 눈 오줌이, 보지도 않은 오줌줄기가 곧 우리를 따라 흘러 내려올 것 같았다.


두 분이 화해하고 어머니가 가지고 나온 물건들을 도로 가져다 놨을 때도 거실장 한가운데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걸 가져간 어머니조차 원래 거기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비워 둔 채로 그냥 둘 수 없어서 아버지는 거기에 책이라도 꽂아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헌책방에 팔겠다고 정리해 뒀던 헌책 몇 권을 베란다에 쌓아 뒀던 것을 기억해 내고 아버지는 몇 권을 꺼내왔다. 건강서와 소설, 왜 구입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과학책도 있었다.
읽지도 않는 책을 왜 갖다 놨냐고 어머니가 물었을 때 아버지가 거실장 한가운데가 비어 있는 게 어쩐지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게 뭐였냐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당신이 가지고 나간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원래 거기에 뭐가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
어머니가 다시 물었다. 그러고 보니 가져간 사람은 어머니였어도 그걸 기억해 내는 건 다른 문제니까, 아버지는 원래 그 자리에 뭐가 있었는지 다시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래도 기억해 낼 수 없었다. 기억이 안 나는 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 주에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끄는 연보라색 자기 주전자와 찻잔 세트를 구입했다.
“거실장에 갖다 놓으면 어울리겠는데?”
아버지가 말했고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주전자 세트를 거실장에 올려놓았을 때는 주전자만 지나치게 눈에 띄어 오히려 거실장이 우중충해 보인다고 느꼈다. 그래서 다시 책을 꽂아 놓았다가 그다음에는 선물로 들어온 아로마 램프를 놓았다. 램프 위에 물을 담아 오일을 몇 방울 떨어뜨리고 양초를 켜면 거실에 은은한 향이 배어들었다. 램프의 한가운데에는 파란 새가 그려져 있었다. 두 사람은 종종 같이 기화법을 이용한 아로마테라피를 즐겼다. 하지만 새가 그려진 그 램프는 어딘가 거실장과는 어울리지는 않았다. 언제라도 더 어울리는 게 있다면 바꾸어 놓자고 했다.
어머니는 거실장 한가운데 놓인 향초를 보면 자꾸 고세영 씨 생각이 났다. 사실은 주전자 세트를 갖다 놨을 때도 그랬다. 어머니는 향초를 빼고 다른 걸 거기 놔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뭘 갖다 놔도 고세영 씨가 생각날 거였다.
어머니는 사건 이후에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가에 대해서 아버지보다 더 오래 생각했다. 아버지야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을 방어할 줄 알았고 적당히 남 탓을 하면서 중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어머니는 어떤 생각이 때로 자기를 무너뜨리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고민한 것은 물론 자신에 대해서였다. 아버지가 진짜 고세영 씨를 죽이려고까지 했을까, 하는 문제 역시 어머니를 괴롭힌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보다 아버지를 제 아버지처럼 여겼던 고세영 씨가 이제 홀로 제 삶을 잘 꾸려 갈 수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무엇보다 어머니 마음에 가장 걸렸던 것은 자신이 고세영 씨에게 했던 말들이었다.
어머니는 고세영 씨에게 아버지처럼 냉정하게 굴 수가 없었다. 눈길이라도 따뜻하게 보내려고 애를 썼고, 아버지가 퉁명스레 대할 때는 자기가 보상해야 한다는 듯이 더한 친절을 베풀었다. 가끔 반찬을 싸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조언을 하는 일도 생겼다. 어쩌면 그 두 사람이 계속 잘 지낸 것도 자기 탓이 아니었는가 싶어서 그 사람 생각을 하면 영 마음이 좋질 않았다.
어머니는 고세영 씨에게 인연을 맺는 것은 중요한 일이니 해가 되는 관계가 있다면 그만두는 것이 좋다고 했다. 나쁜 일을 당했을 때는 그 마음을 표현하고 수정해 나가라고 했다. 사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고세영 씨를 대하는 태도를 탐탁지 않아 했으며, 더 이상 집에 오지 않는 게 더 좋겠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어머니가 경찰에게 전화를 받았을 때 진짜 놀란 것은, 자기가 한 말을 고세영 씨가 진짜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자기가 고세영 씨의 공범이라고 느꼈다. 자기가 생각한 것을 실천에 옮기고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고 강조하여 말했으니까. 용기를 낸다면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고세영 씨를 부추긴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지나가다가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에게서 자꾸만 고세영 씨의 얼굴을 봤다. 때로 표지물 같은 사물이 고세영 씨로 보였다가 다시 제 모습을 찾을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단지 입구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고세영 씨에게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옷을 너무 얇게 입었다고 핀잔을 주고 털 부츠와 주황색 파카를 사다 주었다. 아버지를 괴롭히는 일은 이제 그만두고 본인의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 삶을 되찾으라고, 준비해 간 말 대신에 다음 주에는 아버지가 집에 없고 아들과 함께 충청북도 쪽에 개장한 ○○리조트로 여행을 가게 될 거라고 행선지를 자세히 일러주었다.
“돈을 다 받을 때까지는 계속 용기를 내야 해요.”


기념품 숍은 산의 입구 쪽에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주변은 어두웠고 산 밑의 바람은 세찼다. 몸을 웅크리고 팔짱을 끼고 걷다가 숍의 입구에서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와 고세영 씨였다. 아버지는 호통을 치면서 고세영 씨의 어깨를 자꾸 손으로 밀쳤다. 고세영 씨는 조금씩 뒤로 물러서면서 고개를 숙였는데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이 이번에는 고세영 씨의 멱살을 쥐었고 세차게 흔들었다. 아버지가 주먹을 흔들 때마다 고세영 씨의 몸이 따라 흔들렸다.
“도망쳐야지. 왜 그렇게 맞고 있지? 어서 도망쳐. 아니면 한 댈 치든가.”
어머니가 분통을 터뜨렸다.
우리 두 사람은 아버지를 향해 달려갔다.
“아버지, 대체 왜 이러세요. 이분이 아버지한테 뭘 어떻게 했어요?”
“이런 녀석들은 혼이 나야 돼. 아주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린다고.”
아버지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이 사람이 아버지한테 어떻게 했냐고요?”
아버지가 나를 쏘아보았다.
“네가 뭘 안다고 참견이냐? 뭘 봤다고 이래?”
아버지가 나를 향해 돌아서는 순간 고세영 씨가 잽싸게 도망쳤다. 고세영 씨가 몸을 돌릴 때 그의 얼굴이 일시에 밝아지는 것, 그리고 입가에 순식간에 번지는 미소를 보았다. 나는 내가 잘못 걸려들었다고 생각했다. 고세영 씨의 표정은 내가 예상한 것과 전혀 달랐다. 그의 입에서 전에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새소리를 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세영 씨의 양팔이 앞뒤로 세차게 흔들렸다. 그는 사람들이 붐비는 매점 쪽으로 냅다 달렸고 아버지는 그를 쫓아갈 생각도 못 한 채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일단 식당으로 가요.”
나는 아버지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버지의 몸이 휘청, 중심을 잃었다가 자리를 잡았다. 나는 아버지의 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해가 진 뒤여서 형태만을 확인할 수 있었고 물에 젖어 진해진 색깔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몸을 떨고 있던 게 아니라 너무 추웠기 때문에 떨고 있었다. 머리카락까지 완전히 젖어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저 사람이 왜 아버지한테 이런 짓을 한 거예요?”
나는 아버지의 팔을 끌어다 부축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꼴을 당한 걸 내게 보인 것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조용히 팔을 뿌리쳤다.
“숙소로 가요. 얼른 옷을 갈아입으셔야겠어요.”
아버지와 나는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놓겠다며 먼저 뛰어갔다.
“분명 어떤 놈이 시키고 있는 게야. 저 혼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놈이 못 된다.”
아버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젖은 옷은 더 확실히 눈에 띄었다.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 남자가 아버지를 힐끗 쳐다보더니 벽에 어깨를 기댔다. 그리고 그게 자기 생의 유일한 의무라는 듯 천천히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작가소개 / 최정화

1979년 인천 출생. 2012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 제7회 젊은 작가상 수상. 첫 소설집 『지극히 내성적인』, 장편소설 『없는 사람』을 출간하였다.


《문장웹진 2018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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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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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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