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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telling City - 서울편② 청계천의 귀신들

  • 작성일 2017-10-01
  • 조회수 1,435

[기획]

 

 

 

 

청계천의 귀신들

 

 

Zoe Gilbert
번역: 김선형

 

 

 

 

    민준은 광화문 광장을 천천히 가로질러 분필로X자가 표시된 장소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렇게 화창한 칠월의 여름날에 합성섬유로 지은 싸구려 한복을 입고 있자니 벌써부터 땀이 흘렀다. 한복은 상사가 근처 대여소에서 빌려왔다. 나풀나풀 나비처럼 화사한 한복 차림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셀카봉을 하늘로 치켜들고 선조들을 흉내 내며 깔깔거리는 젊은이들은 많이 보았다. 하지만 직접 입어본 건 처음이었다.
    “자네 목소리를 투사하도록 해.” 옷을 갈아입은 뒷방에서 민준을 데리고 나오면서 상사가 말했다. “자신 있게 하고. 고무적으로.” 그리고 민준이 문 앞에서 주저하자 말했다. “젊은 애들은 역사에 환장해. 아주 좋아들 할 거야. 뭐해, 어서 가지 않고!”
    민준은 분필로 표시된X자를 밟고 서서, 까끌까끌한 한복 바지자락에 손바닥을 비볐다. 제일 먼저 전해야 할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뇌까려 연습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갔다. 광장에 있는 사람들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직장인들은 핸드폰에 고개를 처박고 바삐 지나쳤다. 관광객들은 거대한 세종대왕 조각상과 광화문에 즐비한 위풍당당한 고층빌딩들을 쳐다보다 다시 안내 책자를 내려다보곤 했다. 민준의 한복에는 주머니가 없었다. 상사한테서 말고는 잘 오지도 않는 메시지라도 확인하면 마음이 좀 편하련만, 손을 뻗어 잡을 휴대폰도 없었다.
    햇빛이 따갑게 내리쬐었다. 장마가 올 때가 한참 지났건만 아직 비가 내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민준은 차라리 한바탕 비라도 쏟아지면 일정을 연기할 수 있을 텐데, 생각하기도 했었다. 민준은 침을 꿀꺽 삼키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냥 일일 뿐이야,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게다가 좋은 일이잖아, 한국 문화를 널리 알리는 거니까. 사람들은 이 도시의 이야기를 좀 들을 필요가 있어. 뒷목을 손으로 훔쳤다. 위장이 뒤틀리고 꼬이는 느낌이었다. 신경성일 테지만 예전에는 한 번도 받은 적 없는 느낌이었다. 뱃속에서 소용돌이가 꿈틀거리고 휘몰아치고 있었다. 어서 빨리 해치워 버리고 마는 게 좋겠다.
    민준은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 지나가는 낯선 사람들에게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오늘 저는 청계천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려 합니다. 쿨하고 반짝반짝한 서울의 청계천 말입니다. 그러나 청계천이 늘 이런 모습이었던 건 아닙니다.” 어떤 여자가 발길을 멈추고“FASHION CODE”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숄더백을 뒤적거리자 민준은 여자를 보며 미소를 지으려 했다. 하지만 여자는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뱃속의 소용돌이가 세차게 굽이쳤다. “그리 멀지 않은 옛날에는 청계천 천변에 비좁은 판잣집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아예 개천을 따라 마을 하나가 있었지요.”
    그리 옛날 얘기도 아니다. 오래 전 일이 결코 아니다. 민준의 할머니는 냇물에 콘크리트가 들이부어질 때도 그곳에 살고 계셨다. 개천이 복개되어 사차선 도로가 생긴 뒤에야 떠나셨다. 평생 거기 사셨던 분이다. 할머니가 어린 민준에게 당신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셨던 게 몇 번이나 되더라? 고약한 냄새가 나는 갈색 개천 옆에서 삶이 어떠했는지 얼마나 들려주고 싶어 하셨더라? 민준은 끝내 제대로 듣지 않았다. 자기 키보다 훨씬 빨리 자라는 빌딩들을 올려다보고 또 내다보느라 바빴던 탓이다. 서울에서는 사방에 허연 빌딩숲이 솟아났고 민준의 앞에는 수천 갈래의 희망찬 앞길이 놓여 있었다. 그 중 한 길을 밟아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민준은 이야기 원고의 다음 줄을 잊고 말았다. 광화문 광장 사람들 아무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제일 아끼던 파란 방석에 앉아 창밖의 스모그를 내다보며 실없는 소리를 주절주절 읊조리던 할머니의 모습을 눈앞에 떠올렸다. 민준에게 뭐라고 하셨더라?
    “영배야,”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영배야, 이건 너를 위한 교훈이란다.”
    그 때는 그게 민준의 이름이었다. 민준의 제일 친한 친구는 서른 살이 되던 생일날 소위 현대적인 이름으로 개명 신청을 하면서, 같이 하자고 꼬드겼다. 지금 완전 붐이야, 친구는 말했다. 진취적인 사람들은 이름부터 바꾸고 본다니까. 그래서 민준도 따라했다. 촌스러운 소리가 나는 이름을 버리고 깔끔한 새 이름으로 바꾸니 기분도 좋았다. 천에 먹인 풀이 아직 빳빳한 새 아메리칸 스타일 셔츠를 처음 걸치면서 작고 투명한 단추를 하나씩 채울 때처럼.
    “영배야!” 할머니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세종대왕 옆에 모여선 관광객들의 모습이 흐릿해지면서 하나로 뭉쳐진다. 직장인과 경찰들이 바삐 민준의 옆을 스쳐 지나간다, 분주한 냇물처럼 흘러간다. 민준은 입을 열어 숨을 들이쉰다. 그런 다음 눈을 감고 할머니의 말씀을 말하기 시작한다.

 

    “옛날, 아주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에, 청계천 강둑에 가난한 계집애가 하나 살았단다. 삯빨래로 하루하루 연명을 하던 그 애는 하루 종일 쓰러져 가는 작은 판잣집 밖에서 빨랫방망이로 빨래를 두드렸지. 손에는 쪼글쪼글 주름이 지고 어린 등이 굽었어. 하지만 거품이 보글보글 이는 물에 한 번도 비춰보지 못한 얼굴만은 아름다웠단다. 밤하늘 같은 검은 머리에 둥실 떠 있는 차분한 달님 같았지.
    장마철에는 지류에서 한꺼번에 흘러드는 물로 청계천이 불어 올랐고, 그럴 때면 계집애는 냇물을 헤치고 들어가서 양동이를 담그고 제일 더러운 빨래의 오물을 씻어냈어. 이 일을 할 때는 늘 조심하면서 재빨리 움직였지. 장마가 오면 청계천 사람들이 물귀신 얘기를 시작했거든. ‘물이 깊어지면 물귀신이 올라온다니까.’ 사람들은 말했어. ‘강둑에서 너무 멀리 들어가서 서 있으면 물귀신한테 잡혀 끌려들어간다. 물귀신 밥이 되면 물에 빠져 죽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거야.”

 

    늦은 아침 뜨거운 열기 속에서, 씽씽 지나치는 차량의 행렬과 발걸음을 늦추는 인파 한가운데, 광화문 광장에 분필로 표시한X자 위에 서서 민준은 흐느적거린다.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고운 진흙, 맨발 위로 흐르는 냇물이 느껴진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물에 실개천이 홍수로 바뀌는 소리가 들린다. 물풀과 진흙으로 공기는 퀴퀴하다.

 

    “비가 내리 삼 주일, 참 오래도 내리던 하루였는데, 계집애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애가 더러운 빨랫감 한 꾸러미를 판잣집으로 가지고 왔어. 반짝이는 큰 눈에다 하관이 뾰족한 남자애였는데, 말할 때 목소리가 하릴 없이 흐르는 시냇물처럼 감미로웠지. 여자애는 남자애에게서 도저히 눈길을 뗄 수가 없었어. 남자애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들리지 않았는데, 막 돌아서서 나가던 남자애가 이러는 거야. ‘특히 빨간 허리띠는 조심해서 빨아줘- 내 거니까.’
    물에 흠뻑 젖은 판잣집 사이 골목길을 따라 사라지는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는데 여자애 가슴이 벅차게 부풀어 올라서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어. 내일 그 애가 다시 오면, 생전 한 번도 본 적 없을 만큼 깨끗하고 예쁘게 빨아서 허리띠를 돌려줘야지. 그리고 말을 걸어 볼 테야. 그래서 여자애는 빨랫감을 당장 강가로 들고 가서 물에 푹푹 담그기 시작했지.”

 

    민준은 이 말들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비누거품처럼 목구멍에서 퐁퐁 솟아나와 따뜻한 공기를 타고 날아가며 높이높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민준의 말들은 남쪽을 향해 흘러갔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청계천 입구가 있었다. 또다시 첨벙거리는 물소리, 야트막한 급류에 저고리와 바지를 철썩철썩 치면서 부드럽게 노래 부르는 빨래하는 소녀의 소리가 귓전에 선했다.
    “계속 하렴, 영배야!” 민준의 할머니가 말했다. “이 이야기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생생한 현실이란다.” 민준은 할머니의 말씀이 옳다는 걸 안다. 그 이야기는 민준의 내면에 지금껏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직선과 네모난 방으로 이루어진 깔끔한 삶을 살아오면서 아파트와 사무실과 카페 탁자와 집을 오가는 동안에도, 면면히 흘러오면서 오래전의 강바닥 고운 진흙을 휘젓고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 민준의 인생에서 옛것의 흔적은 없다. 심지어 이름조차 새것이었다. 하다못해 청계천도 이제는 새것이 되었다. 반듯하게 조각된 강둑, 냇가 산책로에 그늘을 만들기 위해 심어둔 어린 나무들, 물은 맑다 못해 반짝반짝해서 빛나는 돌멩이 위로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할머니는 이런 청계천을 한 번도 보지 못하셨다. 민준은 이제 늙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화문 광장에 선 지금 그는 영배다. 그러니 이야기를 끝마쳐야만 한다.
    말하면서 민준은 광장을 쭉 따라 걸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어느새 하늘은 구름에 가리고, 산들바람이 불어와 솟구치는 분수 물에서 물안개가 날아와 민준의 얼굴에 훅 끼친다.

 

    “여자애는 남자애의 옷을 그 누구의 것보다 더 정성스럽게 사랑을 듬뿍 담아 빨았지. 흙이라도 묻을세라 옷가지를 하나하나 판잣집에 널어 말렸어. 이마의 땀을 훔치고 나서도 일손을 멈추지 않았단다. 바구니에 남아 있는 마지막 빨래는 남자애의 빨간 허리띠였거든. 찐득찐득 오물이 묻어 있었지만 여자애 눈에는 아름다워 보였어. 여자애는 허리띠를 조심스럽게 들고 다시 강물을 가르고 들어가면서, 남자애가 그 따스한 허리에 띠를 두른 모습을 상상했어. 그 허리를 자기 두 팔로 감고 그 어깨에 자기 어깨를 꼭 붙이는 상상을 했지. 그 감정에 복받친 나머지 그만 여자애는 세차게 흐르는 물에 허리띠를 넣다가 스르륵 놓쳐버리고 말았어.”

 

    민준은 광화문 광장 끝에 다다라 새문안로를 건너기 위해 신호에 대기했다. 교차로를 부릉거리며 지나치는 버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빌린 한복을 입고 아련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중년 남자를 흘끗흘끗 훔쳐보는 행인들의 눈길도 안중에 없었다. 민준은 초록색 사람 표시에 불이 들어오자 천천히 도로를 건너 세종대로를 따라 내려갔다.

 

    “삯빨래하는 여자애는 공포에 휩싸였어. 빨간 허리띠는 물뱀처럼 흐느적거리면서 청계천 한가운데로 흘러가서 하류로 떠내려가기 시작했어. 다른 도리가 없었지. 여자애는 허리띠를 따라서, 더 깊은 물로 들어갈 수밖에.
    금세 불어 오른 강물이 허리까지 차더니 가슴께까지 잠겨버렸어. 발이 진흙 속으로 푹푹 빠지고 급류가 팔다리를 끌어당겼지. 헤엄칠 줄도 몰랐지만 여자애는 허리띠를 잡으려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어. 하지만 허리띠는 환하게 반짝이며 순식간에 점점 더 멀리 떠내려갔지. 물을 꺽꺽 먹으며 힘겹게 허우적거리면서도 여자애는 허리띠에서 눈을 떼지 않았어. 물길에 제 몸이 딸려가도 그냥 그런 대로 두었지.
    이제 물속으로 가라앉아 다시는 그 허리띠를 못 보겠구나 싶던 순간, 여자애는 마지막으로 몸을 던졌고 손가락 끝에 걸리는 천의 감촉을 느꼈어. 정말로 허리띠인지 보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그 때 그 눈에 뭐가 보였는지 알겠니?”

 

    민준은 세종대로를 빠져나와 하천의 시작점을 표시하는 나선형의 보랏빛 조형물을 지나친다.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와 새로운 청계천 길로 접어든다. 얼굴에 몇 방울 비가 떨어지지만 계속 걸으며 이야기를 한다. 관광객 한 사람이 건너편에서 민준의 사진을 찍는다.

 

    “물에서 솟아오른 건, 물이 뚝뚝 뜯는 물귀신의 긴 팔이었어. 허공에서 물결치는가 싶더니 삯빨래하는 소녀를 향해 뻗어왔지. 여0자애는 너무 겁이 나서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어. 물귀신한테 더 바짝 끌려가면서도 허리띠는 꼭 붙들고 있었단다. 귀신 팔이 온몸을 감싸 안고 함께 강물 속으로 가라앉을 때, 여자애는 눈을 뜨고, 보았어. 물귀신은 그 아름다운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어.
    ‘그 허리띠는 특별히 조심해서 빨아줘.’ 소년의 말이 물거품이 되었지. ‘내 거니까.’”

 

    민준은 발길을 멈췄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발밑의 냇물을 바라보았다. 새 운하를 따라 행복하게 졸졸 흘러가고 있었다. 광장에 가 있어야 한다. 상사가 와서 확인할 것이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야 한다, 까맣게 잊어버린 다른 이야기를. 그러나 포효하는 찻길 아래 이곳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나무 밑 바윗돌이나 계단에 앉아 맨발을 물에 담그고 있었다. 아무래도 민준도 똑같이 해야 할 참이다. 이만하면 좀 쉴 만도 하다. 발은 뜨겁게 달아올라 지쳐 있지만 이토록 차분한 기분은 몇 년 내 처음이다.
    물가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걸어가는데, 강둑 저 멀리 소란한 기척이 들린다. 젊은 청년 하나가 청계천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내가 봤어요, 여자애! 빨리요, 누구든 좀 와 봐요! 못 봤어요? 저기 있었어요, 물속에 얼굴을 담그고 엎드려 있었단 말이에요.”
    근처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청년을 보고 고개를 흔든다.
    민준은 더 빨리 걸어가서 냇물을 내려다본다. “어디요?” 그가 묻는다.
    청년이 다시 가리킨다. “바로 저기요! 제가 물고기를 찍고 있었거든요.” 청년은 허공에 휴대폰을 들고 흔든다. “내가 봤어요.” 그러더니 휴대폰 액정화면을 쿡쿡 찔러대기 시작한다. “내 말 못 믿겠으면 보여드릴게요.” 그러더니 할머니를 무섭게 노려본다.
    젊은이는 폰을 민준에게 덜컥 내민다. “자요, 보세요.” 그리고 비디오 재생 버튼을 누른다. 하지만 거기에는 물밖에 없다. 반짝이는 돌멩이 위로 졸졸 흘러가는 물, 물풀을 야금야금 먹고 있는 물고기들.
    민준은 다시 실제의 냇물을 살피며 단서를 찾는다. 바윗돌 두 개 사이로, 하류로 내려가는 틈새 사이로, 언뜻 붉은빛이 비친다. 천 쪼가리 하나가 끼어서 냇물에 미친 듯이 꿈틀거리고 있다. “저게 그쪽 겁니까?” 청년에게 묻는다. 아무 답이 없다. 다시 물어보려 돌아보니 청년은 사라지고 없다.
    민준은 할머니 곁에 털썩 앉는다. 할머니는 얇은 파란 방석을 깔고 편안하게 앉아 있다. “젊은 사람들이란. 도대체 사람 말을 귀담아 듣지를 않는다니까요.” 민준은 할머니가 고개라도 한번 끄덕여줄 거라 기대하며 말한다.
    할머니의 흐릿한 눈길이 민준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래도 듣는 사람들도 있지.” 할머니가 말한다. “놀랄 만큼 별 걸 다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그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니, 영배야.” 할머니는 앙상한 팔꿈치로 민준을 쿡 찌른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은 함께 청계천 맑은 물에 발을 담근다.

 

 

 

 

 

 

 

 

 

 

 

 

- 조이 길버트(Zoe Gilbert)
  2014 Costa 단편소설상 수상. 첫 소설집 『Folk』 출간 예정(Bloomsbury, 2018)
 

 

 

《문장웹진 201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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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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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 ☞ Storytelling City – 서울편 ② 청계천의 귀신들 바로가기 […]

    • 2017-10-01 00:01:5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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