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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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시 부문] 즐거운 생일파티
[2010년 공모마당 연간 최우수상 수상작] 즐거운 생일파티 황형선 오늘은 마을의 마지막 생일파티를 벌여요 설레는 마음에 옆집 순이가 훌쩍거리기 시작해요 집집마다 하얀 벽지 크림들이 더 누래지기 전에 어서 케이크를 차려야 해요 건너 건넛집 할배는 주름진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담아요 무언가를 그러쥐려는 손아귀처럼 옷들이 꽉 주름으로 뭉쳐 있어요 놓칠 수 없음은 저렇듯 쉽사리 주름을 풀지 않는가 봐요 언제 녹아 사라질지 모르는 초콜릿 지붕들이 퍼먹기 편하게 놓여 있네요 집집마다 꽂힌 나무들은 마을의 마지막 한 생의 초로 꽂혀 있어요 그 가닥 풀린 가지들의 심지에 저녁이 타오르기 시작해요 바람이 잘도 타오르라고 훨훨 부네요 순이가 폭죽 같은 울음을 펑펑 터뜨리기 시작해요 여기저기서 아이고 아이고 손뼉 부딪히는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해요 마을의 문들이 하나 둘 열려요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모였어요 이제 케이크를 먹을 시간인가 봐요 초를 하나 둘 뽑아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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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산문 부문] 바람
[2010년 공모마당 연간 최우수상 수상작] 바람 조현빈 바람이 분다. 나무 사이로, 가지 사이로, 이파리들 사이로, 꽃이 져버린 철쭉의 무성한 초록 무덤 사이로, 벚나무 아래 낡은 벤치에 앉아 칭얼대는 아기 달래고 있는 할머니들 사이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주차장의 차들 사이로, 계단을 청소하는 아주머니와 경비원 아저씨의 실랑이 사이로, 이따금 지나가는 구름 사이로, 101동과 104동 사이로, 102동과 103동 사이로, 아주 오래된 살림살이 민망하게 드러난 아파트 공터 옆 재활용센터와 세상 모든 종이의 무덤인 고물상 사이로, 지루한 대지와 더없이 허무한 허공이 만나 부서지는 사이, 그 사이로 오늘도 바람이 분다. 아홉 살 때였다. 바람은 어디에서 나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러니까 바람의 본적과 존재에 대해 꽤 오랫동안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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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소설 부문] 엘리펀트
[2010년 공모마당 연간 최우수상 수상작] 엘리펀트 김건태 빠이로 향하는 픽업 버스 안에서 기사는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도착이 조금 지연될 거라고 말했다. 기사의 말에 버스 안은 작은 소란이 일었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민은 몸을 웅크린 채 모포를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조금 늦을 거래.” 민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창 너머 남국의 변덕스러운 대기는 하루에도 수없이 흐렸다 개기를 반복했고, 종내에는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처럼 많은 비를 쏟아냈다. 버스는 구불구불한 산길 위에서 한참을 헤매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떠나야 하는 건 아닐까?” 우리가 가는 곳이 빠이라고 했을 때 민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민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민이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빠이로 가는 길엔 칠백 개가 넘는 고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