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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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등에 대한 예의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 나는 확신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내 등에 대한, 내 삶에 대해 부끄럽지 않을 확신. 상심한 자의 등은 슬픔의 언어를 품고 있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철제 대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았다. 검은 패딩 아래 파란색 병원 로고가 그려진 환자복 바지가 봄바람에 펄럭였다. 패딩에 가려진 아버지의 등이 유난히 왜소해 보였다. 젊은 날 아버지의 등은 단단하고 곧은 등, 확신에 찬 등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언가가 스멀스멀 빠져나가고 있었다. 며칠 뒤 앰뷸런스 소리와 함께 누운 채로 돌아오신 아버지, 병마에 시달린 고단함을 등에서 내려놓으셨기를 바랐다. 선산 양지바른 곳을 향하는 아버지의 등이 비로소 공기처럼 가벼워 보였다. 어쩌면 그의 등은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등 위의 짐을 하나씩 내려놓게 되지만 언젠가는 아무것도 없는 등도 스스로 뒤집을 수 없는 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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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옛사람
옛사람 이재훈 감각 없는 날들입니다 허망한 시간들로 울었습니다 또각또각 발소리만 선명한 시간입니다 뿌리가 옆으로만 자꾸 퍼져갑니다 빼앗지도 못하면서 빼앗으려 합니다 방탕의 날들입니다 당신이 벌레가 된다면 하시겠습니까 나 자신을 방임했습니다 숲은 오래된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맑은 공기 속에 지껄입니다 희롱하는 말들입니다 어떤 족속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나는 아직 옛사람입니다 확신 없는 시간들이 가득해요 술에 취한 날 때마침 비가 내려요 나는 나를 죽일 수 없어요 나는 옛사람 보고 들은 것을 말할 수가 없는 옛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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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새로운 생활
새로운 생활 박상수 카드를 찍고 체온을 재고 너는 안으로 들어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다시 카드를 찍고 방문을 열고 가방을 내려놓는다 믹스커피를 타서 옆에 두고 컴퓨터를 켠다 메일을 확인하고 몇 가지 중요한 서류를 작성하여 보낸다 그러는 동안 옆자리의 사람이 들어오고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이내 그 사람은 파티션 저쪽으로 사라진다 시간은 흐른다 중요한 많은 일을 한 것 같은데 시간은 조금 흐른다 너는 불쑥 생각한다 이게 정말 중요한 일일까, 나는 중요한 일을 한다고 믿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 생각에 빠진다 생각에 빠지면 그건 확신이 되고, 도망갈 수 없는 확신 속에서, 무슨 일이든 끝에서 조금 더, 있는 힘을 다하면 네가 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 될 거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지, 그러면 너는 중요한 일을 하는 중요한 사람이 되는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밤의 운동장을 달리다가 밤하늘에서 붉은 물감이 쏟아지는 것을 본다 검정색과 붉은색을 구별할 수 없구나 두 눈의 실핏줄이 터진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