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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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POV
POV 이세인 비 내리는 가을밤이면 나는 이불 밖으로 발을 내놓고 눕는다 잠든 사이에도 발은 어디든 가길 원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풀테니 다리 위를 뛰어가고 있다 비가 쏟아지고 바닥은 축축하게 젖어 있고 다리 밑에서 흙탕물이 휘몰아친다 오늘은 나를 태운 비행기가 떠나기 이틀 전이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토끼 모양 섬을 온몸으로 껴안기 위해 맨발로 빗속을 달리기로 한다 누군가의 로만 바스 누군가의 코니쉬 파이 누군가의 런드리 그것들이 시야를 빠르게 지나가고 나는 이토록 빨리 뛰어 본 적 없이 언덕을 오른다 35도 각도로 기울어진 지붕 위를 내달리면 내 세상도 딱 이만큼 기울어진 것 같아 아늑하고 평온해진다 멀리서부터 감색으로 물드는 하늘 골목에는 민둥한 승용차 껍데기들 그리고 오래된 지붕들보다 조금 더 기울어진 녹색 언덕 아래 구름 조각을 던지고 있는 사람과 원반을 찾아 뛰어가는 커다란 개가 있다 나는 빗속으로 비와 함께 추락한다 구겨진 보닛을 퉁 퉁 두드리면 언제 찌그러졌냐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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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명작에서 괴작까지6] 처음엔 블루베리였다
그 후 모 과자 회사에서 블루베리 케이크나 블루베리 파이 같은 제품이 나왔을 때 두근거리며 사 먹어봤지만 그저 잼 맛에 설탕 맛이어서 더 갸우뚱했을 뿐이다. 지금은 항산화 열풍 때문에 거의 모든 음식에 블루베리를 넣어 먹을 만큼 인기인데 말이다. 밥에도 뿌려 먹고 김치도 담글 기세가 되리라곤 정말 생각지 못했다. 영화 속 음식에 대한 환상은 역시 가보지 못한 곳, 접해보지 못한 문화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셜록 홈즈가 기절한 사람에게 매번 브랜디를 먹일 때, 대체 어떤 술이길래 약처럼 쓰이나 하는 궁금증이 들었고, 「스위니 토드」에서 미트 파이가 나왔을 때는 파이에는 과일만 넣는 게 아니었구나, 대체 저건 어떤 맛일까 마음에 물음표가 오래 남았다.(물론 맛을 궁금해하기엔 별로 적합한 영화가 아니지만 동네에 유명한 미트 파이집이 생겨서 물음표를 지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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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사순절의 나날
요들링, 영혼의 각질은 서늘해 건조한 음악들 새벽을 건너는 로-파이 엷은 공기의 밀도를 헤아리다 보면 만취한 손마다 저도 모르게 쥐어진 반짝이는 칼날 어느 먼 곳을 꿈꾸었을까? 언제고 멀리 떠나기 전 이 집은 내 삶에 놓은 맨 처음의 공리 내가 부르면 내가 대답하는 돌림 노래들 천장의 모빌은 허공을 빙빙 돌며 홀로 요들링, 또 요들링 하늘 멀리서 바람에 불려온 머리칼은 금세 자라 모빌을 친친 동여매고 요들링을 더욱 높이 들어 올려 그 많은 노래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모두 하늘로 올라가 버리면 무엇이 남을까? 처음 앵두를 씹었을 때의 씨와 과육처럼 툭 툭 틱 톡 그리고 요들링, 요들링뿐. 시?낭송 : 신동옥 출전 : 신동옥 시집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랜덤하우스,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