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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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살인자, 여자들의 희망 2009
다시 조명 남자의 한 손에는 바람이 빠져 쭈글쭈글해진 인형1이 들려 있고, 다른 손에는 피가 뚝뚝 듣는 커다란 식칼. 남자 (침착한 목소리) 머저리라구? 제 주제도 모르는 년. 뒈져서도 한 번 말해 보지? 어서, 어서 말해 봐. 남자,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침대 맡의 작은 라디오의 알람이 울린다. 그리고 노이즈와 함께, 머저리 자식, 머저리 자식, 머저리 자식……. 남자 (짧은 신음과 함께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서) 뭐, 뭐야! 이게 뭐야! 라디오를 집어 들어 바닥에 세게 던져 깨뜨린다. 무대 천천히 암전. 여전히 스피커에서는 머저리 자식, 머저리 자식, 머저리 자식. 집어던지는 소리, 깨뜨리는 소리. 점점 커지는, 머저리 자식, 머저리 자식, 머저리 자식. 조명. 무대 중앙에 목이 매달린 채 흔들거리는 인형2. 바람이 불 때마다 팔다리가 제멋대로 흔들리는 마리오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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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아직은 가벼운 것 같아, 버틸 만해
조명, 서서히 가라앉는다. 돼지 부랄 우리 생각에는, 이 공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숭어 떼 닮지 않았으면 하는 공도…… 있겠지? 돼지 부랄 바깥사람들은 무얼 바랄까. 숭어 떼 그러게, 무얼 떨쳐내고 싶을까. 돼지 부랄 무얼 가지고 싶을까. 숭어 떼 어떤 공 때문에 행복해하고, 돼지 부랄 또 어떤 공 때문에 걱정하고, 숭어 떼 이기적이게 되는 걸까. 돼지 부랄 3일, 남은 시간은 67시간이야. 숭어 떼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시간. 돼지 부랄 짧다, 짧아. 숭어 떼 이러니…… 신은 가방을 열지 말라고 했나 봐. 잠시 사이 어두워지는 조명. 처음 그러했듯 어디선가 들려오는 가쁜 숨소리들. 그리고 진동. 암전. 2. 조명, 서서히 들어온다. 낮은 자세로 공을 보호하고 있는 돼지 부랄과 숭어 떼. 뒤에 서 있다가 몸을 수그려 머리를 땅에 맞대는 캥거루 근육. 돼지 부랄 어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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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너무 많은 날들
* 저는 요즘 세상에서 조명 감독님이 제일 부러워요. 조명 감독에게서 텀블러를 선물 받으며 내가 말했다. 눈송이가 그려진 텀블러는 조명 감독이 어제 돌잔치에서 답례품으로 받아온 것이었다. 역할 대행을 시작한 뒤로 조명 감독은 매일같이 뷔페를 먹고, 비싼 답례품들을 받아왔다. 아버지라는 게 저렇게 좋은 자리였다니. 오늘 아침에도 나는 조명 감독이 결혼식에 다녀와서 준 비누와 수건으로 세수했다. 생각하다 보니 열이 받았다. 그래서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감독에게 따져 물었다. 감독님, 저한테는 왜 이렇게 나쁜 역할만 주세요? 지난주에도 나는 면접 보러 가는 사람에게 커피를 쏟아야 했다. 조명 감독님이 뷔페 드실 때 저는 욕만 먹잖아요. 알았어, 다음 주에 하객 대행 잡아 줄게. 감독이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박수하는 것이 아니라 박수 받는 역할을 맡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더 말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인사한 다음 극장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