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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향한 자기서사의 가능성-2015 여름 한국시에 나타난 발화의 한 경향에 대하여
자기서사는 자신의 파편적 경험들을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최근에는 자서전이나 회고록, 고백록 등의 자기서사 장르가 치유를 위한 프로그램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물론 그 활용방식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며 경험을 재구성함으로써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작업이라는 가정은 자기서사가 각광받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같은 자기서사가 치유의 힘을 갖기 위해서는 불안한 존재로서의 자아가 이른바 ‘확실성의 자아’라는 기반 위에 먼저 서 있어야 한다는 역설이 전제 되어야 한다. 자신의 지난 경험들을 일관성 아래 배치하고 의미의 간극들을 인과적으로 설명해 주는 자아가 있다는 가정 위에서 자기서사는 출발한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이야기가 일관성을 가진 맥락(context)으로 수렴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아로 통합되지 않는 무수한 잉여물들을 목격하게 된다. 서사의 주체는 그 잉여물들을 맥락 속에 끌어들이기 위해 다시 말하기를 시도하겠지만, 내가 아닌 것들은 공허한 논리 아래서 오히려 감춰지거나 변형된 모습으로 ‘나’와 함께 영원히 머물게 된다. 내가 살아가는 공간 곳곳에 머물고 있는 오드라덱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 자기서사의 주체는 언제나 헝겊처럼 기워진 자아의 모습만을 엿보는 치유 불가능의 지점에 도달하게 될 수밖에 없다.
2015년 여름의 우리 시에서 주목해 보고 싶었던 것은 치유불가능성을 드러내는 자기서사적 발화였다. 시적주체의 말하기는 자아로 통합되지 않는 이질성과 만나며 자기서사에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스스로 확실성이 결여된 자아로서의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 불확실한 자아가 치유와 교정이 필요한 대상이 아니라 사회와 타인이라는 범주 속에서 변형(metamorphosis)을 맞이하는 충만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자기서사의 실패를 필연적이라고 보는 버틀러(Judith Butler)가 주목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와 동일한 지점이다. 그녀에 따르면 자신을 설명하는 ‘나’는 이미 자신의 서술능력을 초과하는 이른바 ‘사회적 시간성’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타인과의 관계들 모두를 필연적으로 포함하는 ‘나’의 이야기가 서사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령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경험과 관계들이 자기서사에 기입되지 못한 채 흔적이나 잉여물로 남게 되는 것처럼 ‘나’에 대한 말하기는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버틀러의 핵심은 자기서사가 오히려 자아의 확실성이라는 환상을 깨 버리고 우리가 처음부터 윤리적으로 다른 이들의 삶에 연루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데 있다.
지금의 우리 시들은 대답하지 않는 낯선 ‘나’를 향해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회와 타인의 관계 속에서만 쓰일 수 있는 자기서사를 진행 중이다. 이런 시적 주체의 자기서사는 ‘나’를 사회적 관계 속에 위치시키고 이질적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로 나아가고 있다. 자기에 대한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타자성 앞에서 수동적 태도를 드러내는 실패의 서사는 미약하지만 완고한 음색을 드러낸다.
불확실성
미래파 이후의 세대들이 제각기 “탈중심적인 개별성들”을 드러내고 있다는 한 평론가의 견해(고봉준)는 전 세대와의 단절이 아니라 차이를 지적하기 위한 말이다. 그가 말한 탈중심적 개별성의 근거 중 하나는 주어인 ‘나’의 약화에 있다. 시대적인 맥락을 고려해 보면 최근 시에서 등장하는 시적 주체는 해체와 균열 속에서 죽음의 선고를 받았던 미래파 이후 가까스로 깨어난 자이다. 탈중심적 개별성을 드러내는 ‘나’는 전통적 서정의 유령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시적 주체는 혼성적이고 다성적인 발화양상을 보인 과거와는 달리 불확실한 자기에 대한 탐구와 서사를 재구축하며 서정의 결을 다듬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발화의 태도가 새롭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것을 이르는 말이므로 이들의 수동적인 태도에 붙여지기는 적절하지 않다. 미학적 새로움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합리적 주체가 도착하게 될 지점과는 다른 곳에 우리를 데려다 준다는 점이다.
「슈레버 일기」연작을 발표하고 있는 임경섭의 시에서 ‘나’는 여러모로 의문스러운 존재이다. 일기를 쓰는 ‘나’는 시인의 페르소나이면서 동시에 슈레버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이중성과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알려진 바대로 슈레버는 프로이트의 임상 사례에 등장했던 인물이다. 금치산자 선고를 받고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던 그는 그곳에서 회고록을 썼는데, 프로이트는 슈레버의 회고록을 읽고 그가 동성애가 발병 원인인 편집증 환자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중에서야 슈레버가 아버지로부터 고문이라할 만한 엄격한 교육을 받았던 사실이 밝혀졌고, 그의 회고록은 다른 맥락에서 평가될 수 있었다. 비록 자신이 세계의 구원자가 되리라는 망상에 대한 서사였지만 그것은 억압적 현실로부터 훼손된 자신을 구하기 위한 불확실한 주체의 실천 행위였다. 임경섭은 시적 주체인 ‘나’를 슈레버와 겹쳐 놓음으로써 자신의 시가 훼손된 자신을 극복하기 위한 한 과정이길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슈레버의 자기서사가 합리적 주체의 통제 아래 쓰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나’의 자기서사는 실패할 운명을 안고 시작된다. ‘라이프치히 동물원’이란 부제가 붙은 이 시에서 시적 주체가 합리적 자기인식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이미 예정된 결과이다.
내가 알기로 동물원은
움직이는 사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동물원 안에선 그 어떤 사물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동물도 스스로 그곳을 선택한 적 없었으니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동물원은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아 놓은 주체가 빠졌으니
나는 그대로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인간이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인간도 동물이었으니
나는 그대로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모아 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가둔 테두리는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으니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세 살 된 아이가
아무 말 하지 않는 나를 데려간 곳은
동물원이었다
그곳은 경계와 경계들이 놓여 있는
경계의 안쪽이었다
- 임경섭, 「슈레버일기- 라이프치히동물원」부분 ( 『문학동네』, 2015년여름호)
우리의 대부분은 합리적 자기인식이 논리적 사고를 통해 추론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주어와 서술어 사이의 관계를 배제한 채 형식(form)과 내용(content)을 분리하는 데서 시작하는 논리학적 논증은 전제가 참이라면 결론도 참이라는 내용 없는 형식에 근거한다. 문제는 이런 논증은 현실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위 시에서 ‘나’는 처음 보는 동물을 가지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동물원에 대해 설명하기로한다. ‘나’는 동물원의 보편 타당한 정의에 도달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물들”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의지하여 동물원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추상적 개념과 실제 대상의 간극은 “그렇게 말할 수 없”을 만큼 커져 가고, 결국 개념의 빈틈을 보완하기 위해 거듭된 설명은 “동물원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모아 놓은 곳”이라는 이상한 진술에서 멈추게 된다. 동물원이 무엇인지 말하는 데 실패한 이 진술은 언어의 주체인 ‘나’의 언어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력해지는 과정을 보여 준다.
말에는 언제나 언어의 질서가 개입되어 있다. 우리가 사회 안에서 언어적 주체로 살아가는 한, 말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언어에 내재한 규범에 속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버틀러는 이런 경우를 ‘탈취당한다(dispossessed)’고 표현하는데, ‘나’ 자신의 출현은사회적 조건들에 항상 귀속되어 있다는 뜻이다. 아이에게 대상의 개념을 말해 주려는 이 시의 주체 역시 언어에 탈취된 주체이다. 그러나 동물원을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는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더이상 언어의 주체가 아니다.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다시 말하기를 시작하는 대신 침묵한다. 그런 나를 데리고 아이가 간 곳은 다시, 동물원이었다. 언어의 주체이자 합리적 사고의 주체이기를 단념했을 때 ‘나’는 “경계와 경계들이 놓여 있는/경계의 안쪽”에 도착한다. 아마도 그가 서 있게 된 지점은 사물의 경계와 마주해 있는 언어의 경계 안쪽이었을 것이다.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한” 아이의 언어는 언어 밖의 세계와 가까이 있는 불완전한 언어이다. 불완전한 언어의 경계 안에서 ‘나’는 침묵이라는 수동성을 취함으로써 합리적 언어에 대한 거부를 표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동물원 개념의 실패는 자기 모순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나’를 탈취한 합리적 언어(규범)의 모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임경섭의 시가 보여 주듯이 침묵하는 ‘나’는 자신이 이중적 토대 위에서 구성된 존재임을 드러낸다. 즉 말하는 주체인 ‘나’는 언어가 내포한 사회의 규범 질서 위에서 출현했지만 동시에 그것을 거부하는 ‘나’이다. 이에 비해 안태운의 시는 ‘나’의 이중성이 더 극단적으로 강조된 경우이다. 안태운은 자기 확인에 실패하는 사건을 보여 주기 위해 공항이라는 배경을 선택한다. 경계의 안과 밖이 갈라지는 공항에서 자기를 잃고 또 다른 자기를 만나는 과정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시인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자기확인의 실패를 재구성해서 보여 준다.
나는 가 버렸구나. 가 버린다. 그리고 이곳으로 입국한다.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낯선 인파가 보인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듯하다. 나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것엔 어떤 문구가 쓰여 있었고나는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로 낯익은 인상을 대조해 보게 된다. 실패하게 된다. (중략) 그러나 뒤쫓아가게 되고 나는 공항의 통로로 들어선다. 통로의 끝으로. 끝이 다시 시작되는 지점으로. 그림자에 빛이 밴다. 그는 나가고 있다. 나도 따라나선다. 밖으로 들어찬 도시는 정교하다. 민족의 풍물이 보이지 않는다. 예보가 끝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쫓아가고 있다. 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고 없구나. 얼굴로부터. 거리로부터. 건너편에서 그림자가 무너진다. 나는 그를 붙잡게 된다. 그가 뒤를 돌아본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 앞에서 말을 하고 있었다. 계속 묻고 있었다. 그의 전면에 입김이 서려 있었다.
-안태운, 「입국」부분 ( 『문학동네』, 2015년 여름호)
안태운의 시에서는 시적 주체인 내가 입국하면서 사건이 발생한다. 자신이 공항에 입국해서 공항 밖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인데, 이 서사가 매끄럽지 못한 이유는 말하는 ‘나’가 복수적이기 때문이다. 파편화된 자기 자신을 통합하는 합리적인 주체의 시점은 유일한 것이어야 하는데, 이 시에서 말하는 주체의 시점은 단일하지 않고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안태운은 복수적인 ‘나’의 시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나는 가 버렸구나. 가 버린다. 그리고 이곳으로 입국한다.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와 같은 비문을 배치한다. 서술어가 호응하지 않자 주어의 위치는 흔들리고, 시제의 불일치는 사건의 선후를 혼란시킨다. 이렇게 발생하는 서사의 분절은 ‘나’의 복수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건의 초반부에서는 입국하는 ‘나’와 ‘나’를 보는 또 다른 ‘나’두 주어 사이를 오가며 사건이 진행된다. 그러다가 두 개의 ‘나’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그’가 거울을 깨뜨려 버린 중반 이후부터이다. 여기서 “거울”의 상징적 의미를 먼저 살펴보자. 사람들이 들고 있는 “어떤 문구가 쓰”인 푯말은 얼굴을 모르는 누군가를 찾기 위한 도구이다. 그에 비해 거울은 그것에 얼굴을 비추게 된 사람이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도구이다. 그런데 이름이라는 언어적 기표를 통해 자신을 인식하는 것과 얼굴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다른 맥락을 갖고 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이름과 달리 언어화될 수 없는 물질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얼굴과 다른 신체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신체의 물질성은 언어로 대체 불가능한 ‘나’의 단수성(singularity)을 증명한다. 버틀러는 내가 전혀 회상할 수 없는 그런 나의 몸에 정향된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서사적 설명의 신체적 조건을 이루는 신체적 경험은 서술될 수 없는 노출이며 나의 단수성을 확립하는 노출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거울에 비친 얼굴은 서술될 수 없는 자기의 노출이자 인식되지 못한 역사이다. 그러나 모두들 거울을 든 그를 지나쳐 가 버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시적 주체인 ‘나’만이 그를 뒤쫓아간다.
이 시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시적 주체가 그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다. 낯선 이를 따라갔는데 그가 바로 나였다는 설정은 다소 클리셰처럼 보이기도한다. 하지만 ‘나’라고말할수없는흔적 “( 입김”) 앞에서 ‘나’는 “계속 말을 하고”, “계속 묻”는다. 물론 ‘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말걸기의 시도가 중요한 이유는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나’의
대체불가능성을 붙들어 두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름으로 대신할 수 없는 나의 얼굴은 언어로 환원되지 않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내가 고유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알려 준다. 그 고유성은 3인칭의 ‘그’처럼 이질적이지만 언어적 주체인 우리가 언어에 완전히 속박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임경섭과 안태운의 시는 ‘나는 ~했다’는 구문을 반복함으로써 자기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으나 두 시 모두에서 시적 주체는 자기확인에 실패한다. 도리어 그들은 자기인식의 불확실성과 불가능성을 경험하는데, 이 경험의 성과라면 하나는 언어와 실제의 간극과 불일치를 확인한 것이고 또 하나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낯설고 이질적인 자기를 감각적으로 포착해 낸 것이다. 이들의 경험이 새롭고 파격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그들이 언어의 한계에 맞닥뜨렸을 때 취하는 수동적 태도에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수동성(passivity)은 그들이 이질성과 타자성을 맞아들이는 태도이며, 자신들의 말을 탈취해 가는 합리적 언어(규범)에 동의하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박찬세의「불타는 세계」 ( 『딩아돌하』, 2015년 여름호)에서도 시적 주체는 내가 “나에게 이르지 못 할 것이”란 예감 앞에서 오히려 자신을 감춘다. 이 장면은 자아의 불확실성에 수긍하는 수동적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황유원의 「변신자라」 ( 『포지션』, 2015년여름호)에서는 세계의 사물들이 모두 변신하고 있는 장면을 꿈에서 본 시적 주체가 “내가 시선을 거두지 않으면 자라는 계속 사물로 남을 것이”(「변신 자라」)라며 지식을 믿지 않기로 하는데, 여기서 시적 주체는 자신에게 내재된 합리적 인식과 언어에 대한 불신을 표출한다.
언어의 주체인 자기를 의심하고 이질성과의 대면을 시도하는 시인들의 목소리는 세련된 재현 방식이나 새로운 미학적 방법론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대신 이 시인들에게는 자기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자기 불확실성을 노출시키는 과감성이 있다. 낯선 계기들 때문에 자기서사가 어떤 파국을 맞게 될지 근심하지 않는 태도가 자기서사를 지연시키고 결절을 만들면서 불확실성들을 옹호하는 방법인 것은 아닐까. 합리적 언어가 도달하는 세계를 불신하는 자아만이 자기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서사의 방향을 잃을 수 있다.
죄책감
버틀러가 자기 삶에 대한 서사에서 나타날 방향 상실을 예고했던 것처럼, 시적 주체들의 서사는 ‘나’의 것이 아닌 것에 의해 방향을 잃는다. 1인칭 주체인 ‘나’에 비해 타자적 위치에 있는 “아이”나 “그”와의 만남이 시적 주체를 침묵에 빠뜨리거나 말걸기를 시도하게 하였듯이, 이질적인 타자의 출현은 서사를 중단시키고 ‘나’를 합리적 언어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원인이다.
2000년대 이후의 한국 현대시에서 시도되었던 합리적 언어와의 결별은 욕망의 주체인 나를 억압해 왔던 규범과 질서를 부정하고 해체해 버리는 양상으로 나타났었다. 그런데 ‘나’를 통해 자기서사의 주체가 된 시인들은 좀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나’를 조건짓는 도덕적 규범들에 연루되지 않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Adorno)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규범들로부터 출현했다는 사실에 수긍하지만, 시인들은 규범에 탈취당하는 동시에 그것에 항의하고 비판하면서 서정을 구축해 나간다. 그들은 규범적 언어 속에서 자기역사화를 시도하는 시적 주체인 ‘나’를 빌어 사회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질문해 나가고자 한다. 나는 이런 시도들이 “스스로에 대해 절대적이며, 낯설고 매몰차고, 압제적인 것으로 느끼는 사회적 상황에 대한 항의”(아도르노, 「시와 사회에 대한 강연」)를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정시가 본래적으로 사회적인 것을 함의하고 있다면, 사회적 조건 속에서 경험된 삶의 자기서 사는 서정시를 구현하는 하나의 재현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미 두 권의 시집에서 나타난 바처럼 서효인의 시적 감각은 문화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에서 발생한다. 자기자신과 친구들로 표현되는 동시대 사람들이 공유하는 사회적인 질서와 문화적 기억들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서사화하면서 시인은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 힘들을 발견해낸다.
길에 침을 뱉었다. 네 혀에서 나는 냄새가 궁금했다. 길은 죽은 사람의 혀처럼 뻗어 있었다. 친구에게 통사정을 했다. 백화점 뒤편 후미진 곳에서 흥정했다. 개처럼 핥았다. 화장이 지워질세라 질겁하는 모습을 보고 사정했다.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다시 걸었다. 우리가 첫 손님이었을까. (중략) 왜 개처럼 살고 있니. 우리는 괴로워 참고서를 뒤졌다. 우리가 지나온 길의 삽화가 구내염처럼 번져 있었다. 상처를 피해 걸음을 내딛었다. 상처가 뒤따라왔다. 아까 침을 발랐던 여자였다. 아니다, 또 어딜 가느냐 붙잡던 엄마였다. 아니다, 슬쩍 어깨동무를 푼 친구였다. 금남로4가 신호등 앞이다. 발바닥에 물큰한 게 닿는다. 네가 뱉어 놓은 침이었을까. 방향은 분수대 뒤 관공서였다. 나는 지역 언론사 사옥 옥상에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가 관공서를 노려본다. 해가 진다. 혀를 비쭉 내밀고 골린다. 너는 내가 결국 개라는 걸 몰랐지. 멍멍 몰랐지. 할짝할짝 몰랐지. 혀를 깨물었다. 사람 몇이 개처럼 죽고도, 아픈 건 잠깐이었다.
- 서효인, 「금남로」부분 ( 『문학들』, 2015년 여름호)
우리는 징병되기 3주 전 압구정을 찾았습니다. 스물이었습니다. 전철은 잘 탔는데 아파트 단지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고수부지에서 바람결에 소리라도 지르면 좀 나아질까 싶어 벽의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소음차단 벽이었습니다. 올림픽대로의 굉음이 강을 가로막았습니다. 당신은 파병되었습니다. 베트남에서 강간하고 살인했습니다. 누구도 듣지 못했죠. (중략) 소년들이 불콰한 얼굴로 밀림을 떠돌았습니다. 광장과 밀림에 우수수 떨어지는 쌀눈. 명령은 간단했습니다. 합리적 의심 없이 행해도 좋다. 징병되고 며칠 후 총검술을 배웠습니다. 총 끝에 뭉툭한 단검을 장착하고 허공을 찔렀습니다. 흉부에 꽂힌 칼을 살짝 비틉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직된 흉부가 소총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도로와 아파트를 사이에 두고 서쪽으로 걸었습니다.
- 서효인, 「압구정」부분 ( 『문학과사회』, 2015년 여름호)
서효인의 시들은 과거의 경험을 서사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소년 시절과 입대를 앞둔 시절의 ‘나’는 친구와 함께 거리를 배회하다가 애초에 의도했던 곳이 아닌 지점에 도착해 있거나 원하지 않았던 공간에 갇혀 버린다. 소년들은 자기 앞에 있는 현실과 불화를 겪는 상태에 있지만 그렇다고 저항하거나 박차고 나가지 못한다. 자기가 맞서서 대결해야 할 대상이분명히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으레 성장기에 겪는 세계란 불만스럽고 모순적이지만 성인이 된 시인과도 화해할 수 없는 경험들은 자기서사를 실패하게 만드는 동인이자 그 경험을 반복적으로 서사하게 만드는 외상으로 작용하고 있다. 「금남로」에서는 5·18이, 「압구정」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소년의 서사에 삽입되는데, 폭력의 역사를 보여 주는 이 사건들은 소년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님에도 “상처”가 되어서 소년의 성장기를 “뒤따라” 온 것이다.
「금남로」에서 ‘나’는 참고서를 뒤적거리는 대신 뒷골목에서 여자를 사고 다시 엄마를 떠올리며 죄책감을 맛본다. 그러나 이 자책감의 출처는 소년에게 허용되지 않은 일상적 규범들을 어긴 데서 나온 것일 뿐 소년을 따라다니는 상처의 출처는 아니다. 소년은 “상처를 피해”걷다가 친구가 뱉어 놓은 침일지도 모르는 “물큰한”무엇을 밟고는 마치 그것을 밝혀내겠다는 듯이 뛰어간다. 배회하던 소년이 “관공서”를 향해 뛰어가는 계기는 타인의 흔적 또는 배설물에 불과하지만 그 흔적은 소년의 배회 서사를 중단시키는역할을한다. 「압구정」에서도마찬가지이다. 입대를앞둔 ‘나’와 친구는 바람을 쐬러 나온 것뿐인데, “길을 잃”거나, “소음차단벽”에 가로 막히는 등 자신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외부적 조건에 의해 갇혀 버린다. 그런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상상이 삽입되면서 현실의 강요를 따를 수밖에없는소년들의배회를중단시키는것이다. “당신은파병되었습니다. 베트남에서 강간하고 살인했습니다.”라는 진술과 함께 소년은 총검술을 배우고 살해하라는 명령을 이행해야만 하는 군인이 된다.
현실적 서사를 중단시키는 계기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기로하자. 소년이 우연히 만나는 타인의 흔적이나 길을 방해하는 외부적 조건들은 시적 주체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과거의 일이다. 국가의 이름으로 “사람 몇이 개처럼 죽”었던 금남로의 비극 그리고 국가라는 체제 안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전쟁의 비극은 소년의 경험을 초과하는 사회적 시간성의 맥락에 있기 때문에 서사주체인 ‘나’는 그것을 완벽하게 재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듯이 한국 사회의 경험은 ‘나’를 출현시킨 조건이고, 내 삶은 사회적 경험의 토대 위에서만 구성될 수 있다. ‘나’의 인식과 감각을 초과하는 사건들이 결국은 ‘나’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문제는 외상을 남긴 폭력의 역사까지도 내가 떠안아야 하는 몫이라는 점이다. 서효인은 이 책임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지만 언어를 통해 외상을 드러낼 수 없다는 한계 역시 자각하고 있다. 많은 증언들을 통해 보아왔듯이 폭력의 역사가 남긴 외상은 오히려 언어 밖에서 침묵하거나 주절대거나 신음하는 방식으로 증명되어 왔다. 서효인이 자신의 경험 외부에 있는 외상들을 “물큰한”감각의 대상으로 치환하거나 상상적 장면으로 전이시키는 재현 방법을 택하는 것도 재현 불가능성이란 맥락에 있다.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서효인은 언어를 “살짝 비트”는방법으로규범적세계와대립하는전략을취하기도한다. “너는내가 결국 개라는 걸 몰랐지. 멍멍 몰랐지. 할짝할짝 몰랐지.”라고 명랑하게 말할 때, 말하는 ‘나’는 자신이 규범 질서에 완전히 탈취당하지 않는 존재라는 걸 과감하게 표명한다.
서효인의 시에서 보았듯이 폭력이라는 문제가 국가로 상징되는 규범질서 안에서 합법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은 이 사회를 지탱하는 규범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걸 시사한다. 집단적 에토스가 사회 안에서 보편성을 획득할 때 그것이 윤리적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아도르노의 예견은 틀리지 않다. 폭력의 문제는 별도의 주제지만 최근 시들이 질서 체제 혹은 통치 시스템을 상징하는 국가의 폭력을 다양한 발화 형태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규범 자체의 폭력성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몇몇 시인들의 목소리를 예로 들면, 송경동 시인은 “이 사회가 삶을 이용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국가에게 묻는다.(「고귀한유산」, 『문학들』, 2015년여름호) “암소로 변신한 국가는 한가로이 풀을 뜯게 되는가”라고 역사에게 묻는 장석남의 시는 왕의 살해도구인 시칠리아의 암소를 끌어들여 권력에 눈이 먼 국가에서 일어날 비극을 암시한다(「나는묻는다」, 『시인동네』2015년여름호). 끝으로송승환의시에서 국가는 공동체로서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해 버린다. “國은/그 或을 둘레치고/큰 입으로 먹어 버린 형국/어떤 경우도/어떤 사람도/어쩌다도/없다/라는 뜻”이기에 “나는 국경을 넘는다”(「에스컬레이터Ⅳ」, 『문학들』, 2015년 여름호)는 시인의 결단은 국가 이후의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작품들은 발화의 형태는 다르지만 폭력의 심급으로 국가를 상정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죽음에 대한 책임을 국가에게묻는다. 국가라는 통치 시스템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을 목격하면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을 목격하면서 우리가 그랬듯이,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공동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그런 질문들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폭력이 제도와 시스템이 만들어 낸 정치적인 개념임을 어느 정도 확인해 왔다. 어쩌면 사회적 맥락 위에서 시작되는 자기서사가 ‘국가’의 폭력에 다가가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자기의 삶을 지탱하는 보편적 규범이 폭력을 재생산한다는 사실은 자기에 대한 말하기에서 시작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주먹이 있고 빗자루가 있고 혁대가 있고 한 바가지 물이 있지요. 그게 몸을 향해 날아왔어요. 심각한 것은 아니었어요. 가방을 메고 뛰쳐나왔다가 도로 들어갔어요. 흔한 해프닝이고 눈물범벅이고 말없이 화해되는 유년 시절의 일들입니다. 이제 더 이상 맞는 일은 없는데 주먹은 여기저기에 참 많습니다. 빈주먹이 나를 향해 날아옵니다. 내가 모른 척 방치한 것들입니다.
내가 지워지는 날들이 있어요. 내 죄가 나를 먹는 그런 날들. 다 먹힌 같은데 내일의 침묵 속에서 내가 다시 튀어나오겠지요. 길거리에 마구내뱉어진 내가 돌아갈 집은 헛된 망상처럼 높고 반듯하고 분명합니다.
- 이근화, 「내 죄가 나를 먹네」부분 ( 『문학과사회』, 2015년 여름호)
버틀러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데 필요한 서사1는 자아가 타자들의 고통과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형태라고 지적한다. 그녀에 따르면 양심의 가책을 통해 타자들과의 관계가 맺어지는 자기서사의 능력은 “자기자신을 설명하고, 그런 수단을 통해 자신의 행위를 책임지는”전제조건을 구성한다. 자기자신을 설명하는 것은 타자들과의 관계를 책임지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질적으로 나를 설명하는 말하기는 타자를 향한 말걸기의 시도이며, 타자들의 고통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떠안는 실천이다. 이 실천이 필요한 이유는 그런 말걸기가 보편적 규범에 저항하는 ‘나’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비록 자기서사의 주체는 규범 질서 안에서 발화 조건을 획득하고 있지만, 자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개입되는 타자성은 보편적 규범으로 행세하는 윤리적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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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버틀러는 우리에게 필요한 자기서사가 자기를 설명하는 것(giving an account)이라고 표현한다. 이야기하는 것(telling story)과 달리 자기자신을 설명하는 것은 타자를 향한 말걸기라는 점을 강조한 표현이다. 주체의 자기서사가 타자를 향한 ‘말걸기’의 행위라는 것은 ‘나’의 존재가 ‘너’라는 대상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Judith Butler, 양효실 역, 『윤리적 폭력 비판』, 인간사랑, 2013).
말걸기의 발화를 통해 타인의 죽음과 사회적 폭력에 대한 자책감을 드러내는 이근화의 시는 규범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폭력에 대한 죄책감을 떠안은 시적 주체를 등장시킨다. 이 시는 네 가지 단절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사건에서 ‘나’는 결혼식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음식을 먹고 나왔는데 축의금을 전달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일상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이 해프닝에서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에 개입하는 약한 규범이 드러난다. 두 번째 이야기는 광화문에 나갔다가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리본을 달고 추모 엽서를 썼던 일이다. 이 경험은 개인이 익명의 타인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나’는 아이들을 모르지만, 아이들의 죽음은 ‘나’에게 “죽음이 우리를 추격하고 있”으리란 생각을 안겨 준다. 여기서 등장하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음을 예비한 존재로서 타인의 고통에 손을 내미는 ‘죽음 공동체(AlphonsoLingis)’안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세 번째는 유년 시절에 경험한 학대와 폭력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는 개인과 사회의 규범 체제가 맺고 있는 관계가 드러난다. “흔한 해프닝”이었다고 말하는 ‘나’에겐 지워지지 않는 폭력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데 폭력에 의한 외상을 지닌 ‘나’는 희생자이지만 그것을 거부하지 못한 채 방치한 동조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여기저기에”발생하는 폭력을 두려워하는 한편 “내가 모른 척 방치한 것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통해 사회적 폭력에 대한 자책감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폭력이 되어 버린 규범 질서의 공모자가 되는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 자신이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빠진 시적 주체는 합법적인 규범들 안에서 ‘나’의 자책감은 “지워지고”, “길거리에 마구 내뱉어진” ‘나’의 파편성은 결국 “헛된 망상처럼 높고 반듯한”규범 질서 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며 아직 저질러지지 않은 죄를 고백한다.
절대적 대상을 향해 고백하는 ‘나’는 이중적이고, 그 이중성은 연의 구분이 없는 이 시에서 서사의 단절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타자의 죽음과 고통 앞에서 죄책감에 빠지는 수동적 자아와 사소한 일상에서도 규범 질서를 따르지 않을 수 없는 합리적 자아가 동시에 나타나 경합하면서 서사에 개입하고, 그로 인해 서사는 분절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를 읽는 입장에서는 단순히 합리성과 타자성의 갈등 국면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의 층위는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것에 구속되어 있으며, 그 관계들에 지탱하는 규범 혹은 윤리는 서로 이질적이다. ‘나’는 그런 이질적인 삶의장에 속박되어 있는 주체인 것이다.
속박된 자기에 대하여 시적 주체가 취하는 태도는 수동적이다. 폭력의 공모자라는 자책감을 드러내지만 현실을 개혁하거나 의지적으로 저항하기보다는 고백을 통해 타자들 앞에 자신을 내놓을 뿐이다. 그러나 오히려 일어나지 않은 일을 고백하는 ‘나’의 태도에서 우리는 완고한 거부의 자세를 발견할 수도 있다. 잠시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말을 빌면 수동성의 최초 단계로서 나타나는 거부는 “자아를 비우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자기 부정” ( 『카오스의 글쓰기』)이다. “내 죄가 나를 먹네”라는 말은 합리적 규범 세계가 ‘나’를 완전히 탈취해 버렸음을 인정하는 고백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안에서 내가 완전히 사라짐으로써 거기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기 부정의 표현이기도 하다.
결말에 대한 상상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갖기 위해 먼저 자기에 대해 알고자 했다. 덕분에 『고백록』은 자기서사의 고전이라 할 만한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을 향한 고백이자 길고 긴 자기서사의 여정 끝에서 만난 자신의 모습은 신 앞에서 한없이 미비한 인간, 신이라는 절대성에 귀의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 피조물이었다. 그의 결론은 신의 은총 없이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불완전함을 극복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상처와 고통마저 유희의 대상이 되거나 상품이 되어 소비되고 버려지는 이 시대에도 우리는 자신의 고통과 상처가 치유되길 바라며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써 나가고 있다. 우리의 이야기는 어떤 결말을 향해 쓰이고 또 쓰이길 반복하는 것일까? 한 시인은 자탄한다. “우스꽝스러운 몸동작으로 수면에 써 나갔던 모든 개인과 공동체의 서사여/두려움이 우리의 결말이었구나”(최금진, 「물위를걸어온자, 바실리스크도마뱀이야기」, 『시인동네』, 2015년 여름호). 시인의 부끄러움은 ‘나’와 ‘우리’자신의 훼손이 두려워 억지스러운 역사를 써 온 우리의 ‘죄’에서 비롯한다.
그렇다면 두려움 없는 서사는 어떤 모습으로 써 나가야 할 것인가, 우리는 묻는다. 이에 답하여 우리 시는 자기서사의 미래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사회와 공동체의 토대 위에서 쓰이는 시적 주체의 자기서사는 타자들에게 문장을 내어 주고, 문장 위에서 그들이 신음하고 머뭇대고 침묵할 수 있도록 ‘나’를 제공해 버린다. 그로 인해서 ‘나’는 단절된 삶의 의미를 봉합하지 못한 채 길을 잃을 테지만, 시인들은 주체의 죽음을 선고하는 자기서사의 실패가 “필요한 슬픔”이란 걸 보여 주고 있다. 실패는 ‘나’라는 주체가 얼마나 타자들에게 빚지고 있는지를 알려 주고는마침내 윤리적 말하기의 가능성을 향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장은영 201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