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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학 다시 읽기 58_이태의『남부군』과 이병주의 『지리산』 (상)
1. 표절 여부의 문제
『남부군』(두레, 1988)은 최초로 공개되는 지리산 수기이다. 쓴 자는 본명이 이우태( 李愚兌)인 이태( 李泰)인데, 그는 1922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서울신문』기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좌경하여 평 양의‘조선중앙통신사’(북한국영통신) 기자로 대전 방면에 내려와 있다가 나중에 전주지사의 보도관이 되었다. 때는 1950년 9월 26일 추석이었다. 전주지사의 책임자는 평양에서 내려온 김상원이라는 사람 이었고, 그를 포함하여 모두 네 명이 직원이었다. 조선중앙통신사는 물론 정부기관이라 노동당의 지시를 받지만, 한편으로는 소관 도내의 『노동신문』(노동당 기관지), 『인민보』(인민위원회 기관지) 등을 지휘, 조정하는 위치에 있었다.
인민군이 UN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전면적으로 후퇴하자, 그 잔당들은 빨치산이 되어 소백산과 지리산에 집결하여 잠복했다가 투쟁을 계속했다. 군경의 토벌작전이 이어졌는데 그 통계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1949년 이래 5여 년간 교전 횟수는 실로 10,717회, 전몰군경 측의 수는 6,333명, 빨치산 측은 줄잡아‘1만 수천’을 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니까 피아 2만의 생명이 희생된 것이다. 지리산 빨치산 부대의 가장 악명 높은 지도자는 남부군의 이현상( 李鉉相). 그 부대의 정식 명칭은 독립 제4지대, 일명 나팔부대였다. 이 강력한 빨치산의 괴멸과정은 어떠했을까. 작가 이태는 이렇게 썼다.
나는 기구한 운명으로 이 병단의 일원이 되었고 신문기자라는 전직 때문에 전사( 戰史) 편찬이라는 소임을 담당하면서 이 부대의 궤멸하는 과정을 스스로 겪고 보며 기록해왔다. 그 경위도 이 기록〔수기.인용자〕에서 차차 밝혀질 것이다.(「머리말..나는 왜 이 기록을 썼는가?」, 『남부군』상권, 두레, 1988, p.15)
잇따라 그는 또 이렇게 적었다.
이 기록은 소재이지 역사 자체는 아니다. 소재에는 주관이 없다. 소재는 미화될 수도 비하할 것도 아니다. 의도적으로 분식된 것은 기록이 아니라 창작이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 사실보도를 업으로 하는 기자였다. 되도록 객관적으로 모든 사실을 기록에 남기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 자료들은 이 기록 속에 적은 그대로의 연유로 해서 내 손에서 떠나 가버렸다. 나는 언젠가는 그러한 내 체험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같은 것을 느끼며 체포된 직후 N 수용소에서 다시 이 작업을 시작했다.(pp.15-16)
작가 이태는 석방된 후 놀랍게도 야당 국회의원(1963-1967)을 지냈고, 1997년에 사망했다.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빨치산에 대한 흥미에서도 아니었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태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흥미 때문도 아니다. 다만 다음의 기록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럭저럭 20여년을 기다려야 했다고 적은 이태의 다음의 기록.
그동안 파렴치한 한 문인으로 해서 기록의 일부〔자기의.인용자〕가 소설 속에 표절되기도 했고 그 때문에 가까스로 만난 보완의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이제 국가의 기밀도 공개하는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모든 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관조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나는 이 기록의 출판을 결심했다.(pp.16-17)
필자가 주목한 대목은“파렴치한 한 문인으로 해서 기록의 일부가 소설 속에 표절되기도 했고”에 있다. 대체 그‘파렴치한 한 문인’이란 누구일까? 문득 필자의 머리를 스치는 것은 대하소설『지리산』 (1972-1978)의 작가 이병주였다. 분명히 이 소설은 무려 6년에 걸쳐 『세대』지에 연재되었다. 그러므로『남부군』보다 먼저 씌어졌다. 그렇다면 혹시 이『지리산』은『남부군』과 관련성이 있을까. 있다면 어떤 것일까. 필자는 이에 두 작품을 면밀히 읽고 분석해 볼 수 밖에 없다.
2. 『남부군』의 전모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진 것은 1950년 9월 15일이었다. 전황의 주도권은 이제부터 UN군 및 남쪽이 장악한 셈이었다.
1950년 9월 26일은 추석. 마산 전선에서 부상한 인민군 패잔병들이 북상하고 있었다.
이태 일행의 보도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빨치산으로 들어갈 수 밖에. 순창군 구림면 엽운산 산채에 들기. 빨치산은 세 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또 빨치산에는 삼금( 三禁)이란 것이 있다. 곧 소리, 능선, 연기가 그것. 연기란 낮, 밤에는 불빛을 가림이다. 엽운산 산채에서 그들을 보았다.
하루는 완전 무장에 따발총을 멘 수백의 인민군 편제부대가 찾아듦으로써 아지트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 지휘자는‘남해 여단장’이라고 불리는 초로의 장군이었다. 그는 만주 항일 빨치산 출신으로 인민군의 고위 간부들이 모두 그의 빨치산 동료라는 얘기였는데 대열의 선두에서 소를 타고 들어오는 폼이 유유자적, 마치 동양화에 나오는 어옹(漁翁) 같았다. 그런데 이 남해 여단장은 끝내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연합군에 투항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유격투쟁에 협력하지도 않았다. 무슨 생각이었던지 다만 방랑객처럼 이 산채 저 산채를 유랑하며 표연히 왔다 갔다가 표연히 사라지곤했다. 그 동안 부하들은 자꾸만 이산돼갔지만 가는 자는 쫓지 않고 오는 자는 막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엽운산에서 1개 중대 백여 명이 도당위원장의 권유로 도당 산하에 남아 있게 되었는데 남해 여단장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표연히 어디론가 떠나가버렸다. 결국 남해 여단은 전남도 유격부대에 의해 무장해제당하고, 노장군은 투쟁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총살됐다는 후문이 있었다. 이 풍채 좋은 초로의 장군은 어떤 당적 과오 때문에 중앙의 요직에서 여단장으로 격하되어 전선에 보내진 데 불만을 품고 앙앙불락 했었다는 기록을 오래 전에 어디에서 본 적이 있으나 지금 상고할 방도는 없다.(pp.61-62)
소를 탄 남해 여단장, 이는『남부군』속에서는 썩 이색적인 에피소드에 속하지 않는가 싶다. 이 책을 오래전에 읽은 필자가 이 대목에 밑줄을 친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빨치산 전법은 모택동 주석의 전법 그대로 적진아퇴, 적주아요, 적피아타, 적퇴아주 등등 16자 전법이 그것. 이 전법을 익혀야 진짜 빨치산이 된다. 누가? 얼치기 지식인들이 그들이다.
다시 말해서 통일을 저해하는 세력은 현실 변혁을바라지 않는, 지주 계급을 대표하는 모당과 친일 모리배 군상, 그리고 그 세력을 타고 앉은 이승만 일파라고 생각하는 청년들도 많았으며 이들은 그대로 좌익이 돼버렸다. 그러니까 그 저해세력을 물리치지 않고서는 통일은 영원히 불가능하고 물리치는 수단은 폭력적일 수도 있다는 급진 과격론도 나왔던것이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이런저런 동인으로 해서 6·25 전 남한 천지에 그 많은 좌익 동조자를 만들어 낸 것은 공산당이 아니라 남한의 극우세력이었다.
요컨대 전쟁 전 좌익 동조자의 상당부분은 정확히 말해서 사회불만층들이지 진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이 바로 20대 청년 시절의 내 모습이었고 나는 그것을 정의라고 믿으며그것에서 법열(法悅) 같은 기쁨까지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p.81)
작가 이태가‘스스로를 포함한 당시의 지식인’을 말해놓은 것이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병주의『관부연락선』의 유태림도 그러했을까. 『지리산』의 박태영도 그러했을까. 검토해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태의 태생은 충북 제천. 그러나 부모가 살고 있는 곳은 서울이었다.
서울의 아버지 어머니는 안녕하실까? 나 때문에 곤욕을 겪고 계시지나 않을까. 서울을 떠나오던 전날 밤 부민관에서 소련 영화〈석화(石花)〉를 같이 구경하고 헤어진 여의전의 이윤화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난 여름 7월 초 용산 대폭격 때 그녀를 추켜세운 나의 기사때문에 화를 입지나 않았는지…….(p.119)
또 이런 대목은 어떠할까.
기왕에 부연한다면 전우의 죽음을 보고 분노에 불타 적진에 뛰어드는 것이 전쟁 드라마의 정석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분노보다 공포가 앞서는 것이 화선( 火線)에 선 병사들의 공통된 심정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정규군도 그렇고 이 시기의 빨치산들은 그랬다고 본다. ‘간부 보전’이라는 명분 아래 하급 부대나 하급자를 희생시키는 사례를 앞으로 이 기록은 보여주게 될 것이다.(pp.128-129)
이태의 수기가 특히 보여주고자 한 관점이기도 하다. 이들은 중공군 개입도 모른채, 군경 합동 토벌대를 상대로 싸워야했다.
1951년 3월 20일 자정..전선에서는 연합군이 다시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향해 물밀듯 올라가고 있던 무렵.회문산을 탈출하는 전북도당 유격사령부의 길고 긴 대열이 내리 퍼붓는 찬비와 어둠을 타고 미륵정이계곡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p.201)
이들은 덕유산으로 옮겼고 그들 속에는 여성 빨치산도 많았다.
공산사회의 다른 분야에서나 마찬가지로 여자 대원이 수월찮게 있었다. 좌익운동에 가담한 여성 중에는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쉽게 말해서 겁없는 여성들이 비교적 많았고, ‘순교자’감상에 사로잡혀 있는 이른바‘열성당원’이 적지 않았다. 좌익에 투신하고 있는 애인에 대한 사랑이 그렇게 만든 경우도 있었다.(p.217)
이른바 산중처(山中妻)도 버젓이 있었다. 1951년 4-5월에 걸쳐 이름모를 전염병이 산중 생활의 중대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1951년 5월 백운산으로 이동. 승리사단(조선인민 유격 남부군)에 속해 덕유산으로 이동.
한국은 남로당 잔당 숙청에 돌입. 남로당은 뿔뿔이 지리산 산악지대로 도피, 이때 남로당 연락부장이며 일제 때 전경의 검거를 피해 지리산에 은신한 경험이 있는‘이현상’이 자진하여 지리산에 들어갔다. 이‘지리산 유격대’는 1949년 7월부터는 공식 명칭이‘제2병단’이 된다. 여기에는 문화부장 김태준(45), 시부 유진오(26), 음악부 유호진(21) 등이 참여했는데, 이것이‘지리산 문화공작대 사건’이다. 이들은 후일 체포되어 전부 총살된다.
제2병단의 당시 편제, 약 500명.
제5연대(이이회) 동부 지리산.
제6연대(이현상) 지리산.
제7연대(박종하) 백운산.
제8연대(맹모) 조계산.
제9연대(장금호) 덕유산.
남도부, 본명 하준수( 河準洙)에 관해서는 앞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당시 해주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차 월북했다가 대의원으로 선출되지는 못하고 강동학원에서 군사교관으로 있다가 제3병단〔김달삼 사령관.인용자〕의 간부로 남하하게 된 것이다. 그는 6·25 초에 김달삼과 함께 제7군단(일명 766부대)을 이끌고 동해안 주문진으로 상륙 침투해왔다. 이때 그는 인민군 소장의 계급을 수여받았으며 (후에 중장으로 승진) 54년에 남부군의 마지막 게릴라로 체포됨으로써 유명해졌다.(p.256)
이 남도부, 곧 하준수는 이병주의『관부연락선』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고독한 영웅 이 현상은 어떠했을까.
다만 이현상은 김일성 일파와의 타협을 완강히 거부하여 월북을 마다하고 남한 빨치산에의 투신을 자청한 터였다. 이승엽은 평양으로 피신하여 김일성 내각의 각료의 반열에 올라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지금은‘조선인민 유격대 총사령관’의 직책을 가지고 이현상에게 지시를 내린 것이다. 철저한 반김일성파였던 이현상으로서 빨치산으로의 반전명령이 크게 불만될 것은 없었을 것이다.(p.266)
이현상, 그는 어떤 인물인가.
〔1950년.인용자〕이현상은 이때 만 50세의 중년이었다. 대한제국의 명맥이 경각에 달렸던 1901년 그는 충남(당시는 전북)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의 중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창고보를 거쳐 서울 중앙고 보로 전학한 그는 그곳을 중퇴하고 보성전문별과를 졸업하게 되는데, 고보(지금의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국권은 군국주의 일본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었고 1925년에는 박헌영의 밑에서 김삼룡 등과 더불어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성공한 지 8년 후의 일이다.
1928년 조공당(ML당)이 일본 경찰의 발본색원적 탄압으로 붕괴되고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국제공산당)의 소위 1국 1당 원칙에 의해 그 명맥마저 일본 공산당에 흡수 소멸되자 박헌영을 정점으로 이관술(李觀述), 권오직(權五稷) 등과 함께‘경성 콤뮤니스트 클럽(약칭 경성 콤클럽)’을 만들기도 했다. 제2차 대전 말기 일제 경찰의 발악적 탄압이 시작되어 동료 공산주의자들의 투옥 전향이 속출하자 출옥 중이던 그는 한때 지리산으로 운신하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그는 지상으로 나와 (……) 북한정권의 요직에 참여한 동료들을 외면하고는 48년 11월 겨울이 휘몰아쳐오는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5년 후 그 지리산에서 파란 많던 생애를 마친다. 북한 정권은 53년 2월 5일 이현상에게‘공화국 영웅’의 칭호를 수여했다.(p.275)
이현상을 본 이태의 묘사.
그는 모든 남부군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흠앙을 받고 있었으며,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언제나 절대적인 신의 계시처럼 대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누구도 듣는 데서나 안 듣는 데서나 그의 이름은 커녕 직함조차 부르는 법이 없고 그저‘선생님’이었다. (……) 말단 대원이던 나로서는그와 대화할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진회색인 조털을 입힌 반코트를 입고 눈보라치는 산마루에 서서 첩첩 연봉을 바라보고 있던 이현상의 어딘가 우수에 잠긴 듯하던 옆모습은 지금도 선명한 인상을 남기고있다.(p.282)
이상이 상권의 전모이다.
3. 『남부군』의 기록 방식
이태의 수기에는 포로로 잡힌 경찰관 30여 명을 훈계하여 돌려보냈다는 점을 기록해놓았다. 그들은 간단한 심사를 마친 후 서너 명의 부상자를 들것에 실려 보냈다. 다시는 경찰에 들어가지 않겠다는‘서약서’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이들 석방된 경찰관을 통해서 그 당시 관계자들 사이에 화젯거리가 된 경찰과 빨치산의 회담이 제안되었다. 빨치산 측이 지정한 곳은 장계읍으로 빠지는 국도 중간쯤에 있는 외딴 집. 시간은 이튿날 아침 8시. 쌍방 무장 없이 나온다는 조건이었다. 그 실행 경위를 이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서울 부대가 평지 마을의 보루대를 공격할 무렵에는 명덕분지를 둘러싼 고지의 요소요소는 이미 빨치산들에 의해서 장악돼 있었다. 깃대봉 능선은 전북 720과 장수부대가, 육십령재 일대는 그 밖의 연합부대가 방어선을 펴고 외부로부터 오는 응원부대에 대비하고 있었다.
(……)
그 날 저녁은 양념을 제대로 한 고깃국에 흰 쌀밥을 배가 터지도록 먹었는데밤에는또찰떡이간식으로배급됐다. 많이들먹고어서힘들을 차리라는 고참병의 말과 함께. 이튿날 아침 8시 장계읍으로 가는 외딴 집에서경찰과빨치산 사이의 기상천외의‘회담’이시작됐을무렵에는 국민학교 게양대에 인공기까지 펄럭이고 아이들은 여느 때와 같이 재잘거리며 등교하고 있었다. 이날의 회담 광경을 나는 훗날, 빨치산 측 대표로 나갔던 이봉각으로부터 자세히 들었다. 빨치산 대표 일행이 약속한 장소로 나가자 곧이어 장수경찰서의 경무주임이라는 금테모자를 쓴 경찰간부를 장으로 한 경찰 측 일행이 나타났다. 가벼운 인사를 교환한 후 빨치산 측이 준비해간 돼지고기와 막걸리를 내놓으니까 경찰 간부가 잔을 받으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과자나 뭐 단 것을 좀 사올 걸 그랬네요. 산에선 단것이 귀할텐테…….”
꽤 담대해 보이는 사나이였다고 한다. 술이 두어 순배 오간 후 경찰 간부가 먼저 허두를 꺼냈다.
“하고싶다 는말씀을 들읍시다.”
“간단히 말씀 드려서 어제 우리가 점령한 명덕분지 3개 리를 해방지구로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해방지구요?”
“바꿔 말하면 현재 우리 측이 방어선을 치고 있는 구역 내에 대해서 공격을 말아달라 이겁니다. 그대신…….”
“그래서요?”
“우리는 어느 기간 동안 이 구역 내에 정착하고 다른 곳에 대한 공격을 일체하지 않겠다, 이 말입니다. 당신들은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겠지만 우리도 당신네들을 괴롭힐 만한 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피차 공연한 피를 더 이상 흘리지 않도록 하자는 겁니다.”
“정전을 하자는 말씀이군요.”
그렇지요, 일정한 군사분계선을 두고 말입니다. 무력으로 우리를 섬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당신네들에게도 이것이 더 이상 희생을 내지 않는 유일한 해결방법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38선만도 다시 없는 비극인데 여기 또 하나 38선을 만들자는 말입니까. 아무튼 이것은 나 혼자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니까 돌아가서 상사에게 당신들의 뜻을 정확히 보고하겠습니다. 그리고 회답을 드리지요.”
“시한을 정합시다.”
“그래야지요. 오늘 정오까지로 합시다. 정오까지 이곳에 회답을 보내지 않으면‘노오’입니다.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합니다.”
빨치산 측의 이 터무니없는 요구가 받아들여질 리 없었음은 물론이다. 다만 그렇게 해서 총성이 중단된 몇 시간 동안에 승리사단은 마을 사람들을 총동원해서 막대한 양의 보급물자를 덕유산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시간을 번 것은 토벌군 측도 마찬가지였다.(pp.26-28)
이병주의 『지리산』에서도 양측의 타협 대목이 있거니와, 미군정청 경찰서장(함양경찰서장) T와 하준수의 면담. 이러한 것은 한갓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나 눈여겨볼 것이다. 가령『관부연락선』에서 하준수가 강달호의 자수를 권하는 대목. 하준수, 그는 바로 남도부가아니었던가. 남부군부사령관.
남부군의 문화공작 대원의 모습도 생생히 묘사되어 눈길을 끈다. 그 중 작가 이동규의 죽음과 그의 시.
작가 이동규는 희곡「낙랑공주와 호동왕자」로 남한에서도 약간 이름이 알려졌던 사람이다. 월북 후 문예총(북조선문화예술총동맹)의 서기장으로있었다. 50이넘은나이덕으로모두들 동무라부르지않고‘이선생’이라고 존대했다. 문예총의 직위로는 내각의 부상급(차관급)에 해당된다는 말을 가끔 약간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사실 그가 북한인이었다면 사령부의 객원 대우는 받았을 것이다.) 침식을 같이 하다 보니 나와는 좋은 말벗이 되었다. 보기에도 약질인 그는 행군 대열을 따르는 것만도 큰 고역으로 보였다. 군의 2차 공세 때 안경을 잃어버린 후로는 심한 근시때문에 두 팔을 헤엄치듯이 내저으며 걷는 바람에 젊은대원들이 보기만 하면 웃어댔다.
52년 2월 남부군이 거림골 무기고트라는데 머물고 있을 때 화가 양지하가 연필로 이동규의 얼굴을 스케치해서‘이선생의 빨치산 모습’이라는 제목을 달아 그에게 주었다. 그는 좋은 기념품이 생겼다면서 그것을 배낭에 넣고 다녔다. 그런데 그해 5월 내가 N수용소에 있을 때 205 경찰연대의 정보과장이 환자 트에서 사살된 시체의 배낭 속에 들어 있었다면서 보여준 그림이 바로 그것이었다. 죽은 그 빨치산은 동상으로 발이 거의 썩어 없어져 버렸더라고 했다.
그는 (경남부대 당시) 산중에서 몇 편의 시를 남겼다. 문외한인 내가 봐도 별 대단한 작품은 못 되는 듯 싶지만 불운했던 한 작가의 처참한 죽음을 회상하며그의 절필이 된 시와 노래 한 편씩을 여기 기록하고자 한다.
내고향
높은 산 저너머 푸른 하늘 우러르면
구름 밖 멀리 내 고향이 아득하다.
삿부시 눈 감으면 떠오르는 마을 모습
두툼한 볏집 지붕 위에 박꽃 피고
버드나무 강둑 사이로 시냇물 흐르는
다정하고도 평화스런 마을, 아아, 그러나 지금……(이하략)
지리산 유격대의 노래
지리산 첩첩산악 손아귀에 거머 잡고
험악한 태산준령 평지같이 넘나드네
지동치듯 부는 바람 우리 호통 외치고
깊은 골에 흐르는 물승리를 노래한다.
(후렴)
우리는 용감한 지리산 빨치산
최후의 승리위해 목숨걸고 싸운다.
이동규와 최문희는 원래 50년 여름 경남지방에 문화공작 요원으로 내려왔다가 인민군 후퇴 때 경남도당 유격대에 투신한 터였다. 최문희의 경우는 이때 당 중앙 간부부 부부장인 강규찬과 강의 처인 전남 여맹위원장 조인희 등과 함께 북상을 기도하다가 무주 덕유산 밑 월성리에서 경남도당 유격대를 만나 합류하게 되었다고 한다.(조인희는 전남도당으로 돌아갔다 후일 자결했다.)(pp.100-102)
『남부군』에는 비트라는 것이 자주 등장한다. 비트는 인근의 부역자들이 은신하고 있는‘비밀 아지트’를 가리키는 말. 인원이 적고 부근의 마을에 연고자가 있어 은밀히 보급을 받아가며 은신하고 있는 것이니까 아지트의 방탄시설이나 식량준비가 비교적 갖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타나지 않으니까 종적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빨치산 정찰대는 이곳을 그냥 지나쳐야 했다. 노출될 염려때문이었다.
이태는 또 이렇게 썼다.
일반 대대와 접촉이 적었던 나로서는 대원이 탈출했다는 얘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 탈출한 생각만 있다면 기회는 얼마라도 있었다. (……) 탈출사건이 빈발해서 이 시기 지휘본부는 큰 골치를 앓았다는 이야기를 후일 들은 적이 있다. 군 기록에도 작전 때마다 많은 투항 귀순자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p.151)
남부군괴멸과정의보고문.
우리가 토벌군의 제 3차 작전이라고 생각했던 이 시기의 토벌상황이 몇 가지 기록에 나와 있다. 그에 의하면 이때의 작전은 3월 1일부터 15일간 계속된 것으로 보이며 전에 비해 발표된 전과 숫자가 매우 적은 것이 눈에 띈다. 빨치산의 잔존 세력이 미미해서 그런 숫자밖에 나올 수 없었던 것 같다. 발표 숫자가 기록마다 다르기 때문에 일단 그대로 옮겨놓는다.
52. 3. 16. 경남경찰국발표. 3월 1일부터 3월 15일에 걸친 경남 서부지구 토벌전에서 사살 100명의 전과를 올림.(후에 3월 중 종합 전과 교전 129회, 사살 377, 생포귀순 50이라고 발표)
52. 3. 17. 지리산지구 경찰 전투사령부 발표. 지리산지구에서 공비 사살21, 생포귀순21. .이하『한국전란2년지』에서.
52. 3. 1. 서남지구산악지대공비소탕전에서사살16, 생포3. 3. 4. 서남지구에서사살8, 생포17, 귀순3.
3. 5. 경찰당국발표, 서남지구공비소탕전에서283명사살, 15명 생포.
3. 7. 지리산지구 토벌작전 본격화. 8개소에서 57명 사살, 24명 생포.
3. 8. 지리산지구군토벌작전3일째, 5명사살.
3. 9. 지리산지구경찰대전과, 사살43명, 생포4명.
3. 11. 국방부보도과발표지리산지구잔비완전격멸. 12월1일부터 3월 9일까지의 100일간의 전과 종합, 사살 귀순 19,345명, 3월 10일 현재 잔비 약 1,200명.(pp.228-229)
53년 9월 18일 11시 5분, 드디어 남한 빨치산의 총수 이현상이 전투 경찰 제2연대 소속 경사 김용식 이하 33명의 매복조에 걸려, 빗점골 어느 골짜기에서 10여 발의 총탄을 맞고 벌집처럼 되어 쓰러졌다. 이 때 이현상의 측근에는 2명(어떤 기록에는 4명)의 대원이 있었는데 모두 함께 사살됐다. (그 위치가 벽점골· 갈매기봉·반야봉 동쪽 5킬로 지점의 무명고지 등 기록마다 다르지만 반야봉 부근에는 갈매기봉이라는 산이 없고 많은 기록에는‘벽점골’로되어있는데‘벽점골’은빗 점골의 와전일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 얼마 전 구례군 토지면 산중에서 생포한 전 전남도당 의무과장이며 제5지구 기요과 부과장인 이형련(당시 29세, 경성의 전출신 의사)의 자백으로 이현상이 빗점골 부근에 잠복 중이라는것을 알고서 경사의 4개 경찰 연대를 총동원해서 수색했으나 일단 실패하고 그 작전에서 생포한 제5지구 간부 강건서, 김진영, 김은석등으로부터 보다 상세한 정보를 얻어 매복조를 배치했다는것이다. 이 때 이현상의 나이 52세, 그의 피묻은 유류품은 그 후 서울 창경원에서 일반에게 공개됐다. 그의 시중을 들던 하여인은 이현상의 권고로 그보다 훨씬 전에 귀순하여 우여곡절 끝에 지금도 어딘가에서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공교롭게도 이현상의 죽음과 전후해서 그의 동료이며 상사이던 조선인민유격대사령관 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계 간부들이‘미국 간첩’의 죄명으로 사형대에 서고 그 죄상 속에 남한 빨치산이 들어있었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남과 북에서 버림받은 고독한‘혁명가’도 짙어가는 지리산의 가을과 함께 마침내 파란 많던 생애를 마치고 만 것이다.
필자는 연전에 대성골을 거쳐 세석평전에 오르는 산행을 하면서 지금은 취학개선사업으로 전혀 모습이 달라진 의신 마을에서 하룻밤 민박을 한 적이 있다. 빗점골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의신 마을이지만 기록에 나오는‘갈매기봉’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전사에 나오는 갈매기봉은어디일까? 그러나 놀라운 일로는 민박집 주인인 초로의 내외는 이현상에해 아주 소상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거기서 2십리쯤 되는 면 소재지 화개장 밖으로는 일생 동안 나가본 적이 없다는 최라는 그 촌로 내외는 영지버섯으로 담갔다는 약주를 권하면서 사변 당시의 회고담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토벌대의 소개 명령으로 마을이 소각됐지요. 그러나 산전이나 부쳐 먹던 우리가 가면 어딜 갑니까? 얼마 후 슬금슬금 기어들어와 초막을 짓고 사는데 다시 소각명령이 내려 또 마을을 떠나야 했지요. 두 번 불탄 셈이지요.”
“빨치산들이 들어왔을 텐데 그땐 어땠어요?”
“어쩌다 산사람들이 들어와 감자나 수수 같은 것을 거둬갔지만 그 밖에 별 해꼬지는 안 했어요. 한번은 그게 가을 무렵인데 뒷산에서 산 사람들 습격을 받아 토벌대가 13명이 죽고 5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포로로 잡힌 토벌대원들이 발가벗긴 채 늘어서 있는 것을 봤지요.”(그것은 51년 9월 말경 남부군의 서남부 지리산 주변 작전 때의 일로 그 촌로의 기억이 너무나 정확한 것이 신기스러웠다.)
“이현상이라는 아주 높은 빨치산 대장이 있었는데 나도 한 번 악수를 한 적이 있어요.”주인 아주머니의 얘기다.
“무섭지않았어요?”
“그땐 열여섯 살 때니까 어려서 무서운지 어쩐지 몰랐어요. 그냥 사람 좋은 아저씨 같았어요.”
“시중드는여자는없었나요?”
“그런 여자는 없었고 아주 잘생긴 남자 호위병이 꼭 붙어 다녔는데 음식물을 주면 그 호위병이 반드시 먼저 먹어보고 나서 얼마 후에야 이현상에게 갖다 바치곤 하더군요.”
“그 이현상이 빗점골 어디선가 사살됐다고 하던데요?”
“예. 빗점골 합수내 근처의 절터골 돌밭 어귀에서 맞아 죽었다더군요. 그 근처에 가면 지금도 귀신 우는 소리가 들린다 해서 사람들이 잘 안가지요.”
영감이 핀잔을줬다.
“귀신은 무슨 귀신…… 거기가 워낙 험한 곳이 돼서 자칫하면 길을 잃고 큰 고생을 하니까 사람들이 범접하지 않는거지.”
사실 빗점골에서 주 능선인 토끼봉으로 오르는 루트는 지금도 등산로도 나 있지 않은 전인미답의 비경이다.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이던‘공화국영웅’이현상은 그 곳에서 그 전설적 생애를 마친것이다.
뒤이어 11월 28일, 전57사단장이며 경남도 유격대 사령관인 이영회(李永檜)가 62명의 대원과 함께 상봉골(천왕봉 동북방의 어느 골짜기?) 에서 전경 제5연대수색대와 교전하여 이영회는 사살되고 나머지도 거의 섬멸되고 말았다. 62명이라는 숫자에는 다소 의문이 있으나 어쨌든 이것이 빨치산 편제부대와의 마지막 교전 기록이 된다. 이 기술은『공비토벌사』에 의한 것인데 지금‘상봉골’에서 50킬로나 서쪽인 남원군 만복대 기슭, 시암재에 이영회를 사살한 곳이라는 전공기념 표지판이 세워져 있으니 어느 편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다만 이영회가 주로 배회하던 근거지는‘상봉골’로 기록돼 있는 천왕봉 동북지역이었다.
이때 이영회의 나이 26세, 검붉은 근육질 얼굴에 강철 같은 인상을 풍기던 중키의 젊은이였으며 유격전의 귀신이라고 불리우리만치 실전에 능했고 경남부대를 혼자 손으로 지탱해간 유능한 지휘자였다.(……)
경남유격대를 상징하던 이영회의 죽음과 함께 지리산 주변, 아니 남한 전역의 빨치산 편제부대는 자취를 감췄다. 이어서 닥쳐온 겨울, 유명무명의 빨치산 잔존자들은 거의 모두 소멸(掃滅)되고 남은 기십명이 변복하고 각 지방 도시로 숨어 들어‘망실공비’라는 이름으로 전투경찰 아닌 정보경찰의 수배 대상이 됐다. 이듬해 54년 1월 15일, 그중의 한 사람인 제4지구당 군사부장 남도부가 체포됨으로써 남한 빨치산의 이름은 일체의 기록에서 사라져 버린다.
남도부, 본명 하준수( 河俊洙)는 지리산하인 경남 함양 태생으로 체포 당시 34세의 청년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깡마른 체구였던 그는‘가라데(唐手)’의 명수로 알려져 있었다. 진주중학(구제)을 중퇴하고 일본 대학에 진학했는데 가라데 6단으로 일본 대학의 주장선수였다고 한다. 일제 말 학병을 기피하여 지리산에 은신한 경력이 있으며 대구 10월 폭동에 관계하고 다시 지리산에 도피, 야산대 활동을 시작했다. 48년 8월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차 월북했다가 김달삼의 제3병단 부사령으로 남하 침투한다. 일단 재차 월북하지만 6·25와 함께‘인민군 중장’의 계급을 가지고 제7군단 유격대를 이끌고 내려왔다. 김달삼 이래 사뭇 동해지구 빨치산의 리더였던 그도 마침내 사형대의 이슬이 되어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끝)(pp.246-250)
(2015년 가을호에 하편 게재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