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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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밤
밤 김신우 밤이 되었군요. 밖에서 돌아온 남편은 버릇처럼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자기 방으로 들어가요. 아침이면 빈 깡통들은 재활용 상자에 분류되어 버려져 있고 책상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어요. 남편의 깔끔한 성격을 잘 알기에 밤늦게 방에서 술을 마신다고 잔소리를 할 필요는 없죠. 남편이 왔다 간 건지 종종 착각이 들 정도로 남편은 자기 주변에 존재감을 표시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조용히 들어와 자기만의 공간 속에 머물다 다시 일하러 나가죠. 안주라도 챙겨 줄까 싶어 안방 문을 열고 나가려다 나는 이내 그만두어요. 간신히 잠든 아기가 깨서 울 것만 같아 불안하거든요. 아기는 아주 조그만 기척에도 예민하게 굴어요. 낯가림이 심해 엄마 품으로만 파고들며 유난스레 울죠. 베이비시터를 썼다 몇 시간 만에 그만둔 이후로는 남에게 맡기는 일도 엄두가 안 난답니다. “보통 까칠한 아기가 아니네. 막무가내로 울기만 하고 영 붙여 주지를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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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밤
밤 박형준 눈길 위 수목들이 알코올을 뿜어대는 밤이었다 나이테에서 입김을 내뿜으며 달려간 말발굽들 별이 된 밤이었다 공중에 홀려서 수목들은 밤하늘로 잠겨들고 있는 밤이었다 하늘의 얼음장을 깨뜨리는 수목에서 노래가 떨어지는 밤이었다 너무도 살고 싶은 밤이었다 수목 속에서 작은 손가락이 힘줄을 튕겨서 나는 소리 적막한 눈길에 나무가 우는 소리 내 슬픔 하나하나가 당신을 위한 찬양인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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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젯밤에 무명실로 칭칭 감아 놓은 손끝이 여태 욱신거린다. 봉숭아 꽃잎에 백반가루를 너무 많이 넣어 찧었나. 작년보다 진하게 꽃물을 들이려고 조금 욕심을 부렸다. 다섯 손가락 끝마디가 검붉게 물들어서 찬바람이 불 때까지는 아버지 눈을 조심해야겠지만 오래오래 봉숭아 꽃물을 보고 싶었다. 손톱이 더디 자라면 좋겠는데, 애가 탈수록 더 잘 자란다. 그렇듯 간절히 바라는 일은 등을 보이기 일쑤이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예감하기 때문에 간절해지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내 경우는 그랬다. 무엇을 바라게 되면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반드시 되어야 한다고 마음을 졸이고 애를 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욕심이 질기다며 내게 눈살을 찌푸리신다. 계집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