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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절의 시인 김이듬/ 히스테리아와 미적 충동의 여로
신작시14호선
지하의 군중
맨끝
놓친 튜브
스프링 노트에서 떨어져나간 페이지
□성 라자로
거대한 입술이 빨아들이는 파이프 안
왼편에는 집시
□마들렌느
한 문장도 말하지 않은 날
□아우스터리츠
일어나면 접히는 의자
□생떼밀리옹의 정원
방으로 가는 단어 번역자
남은 한 구역
□미테랑 도서관
소매치기의 빈손
현기증
내벽 보수공사
검표원
□올랭피야드
인터뷰이
처음엔 한사코 입을 열지 않는다
카메라를 피한다
알제리에서 온 젊은 여자 아미나는 2년 넘게 노숙하고 있지만
이곳을 떠날 의사가 없다
다시 찾아간 늦가을 저녁 철로 변에 그녀가 누워있다
이리 들어와
이불 안은 더럽고 따뜻하다
지하철 환풍기 위에 자리를 잡아 열기가 이불을 데운다
머리에 히잡 두르기 싫었어
고향에서 도망쳐와 불법체류자로
왜 나는 조금 일찍 출발하지 못했을까
아미나는 자기 의지로 왔다고 하고
딱히 몰아낸 이를 댈 수는 없지만 난 내쫓긴 것 같은데
누구라도 동전을 던져주겠지
우리는 누워서 휘청거리는 행인을 본다
코카인
어쩌다 택시 안에 카메라를 놓고 내렸다고 해보자
어디로 갈 것인가
북쪽 노선 마지막 정거장에서
더 부정적으로 생각해보자
크리스의 형은 과다복용으로 사망했지만 크리스는 약을 한다
비둘기, 우오오오오
어쩌다 백 사십 년 전에 지어진 건물에 방을 구했다고 해보자
그것도 하녀의 방이었던 오층 구석
나는 복도를 오가는 큰 쥐를 본다
크리스의 어머니는 다리미를 들고 있다
내 아들이 저러지 않게 네가 도와줘
그 다음에 그녀가 뱉은 말은
여긴 전부 소독을 해야 돼
나는 휠체어를 타고 있다고 해보자
이 많은 계단을 어떻게 내려갈 것인가
우오오오, 제발 크리스
올라와 올라와
이상한 소굴에 방을 구한 건 여권을 분실한 것보다 낫다고 해보자
이 복도의 모든 창틀에서 환영을 보는 거라 해보자
신체적으로 나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 걸로 해보자
어쩌다 내 힘이 미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내 말이 흐름을 벗어나기를
계속적으로 내 인생에 갈림길이 생겨나기를
다음 주에는 꿀색 엉덩이를 흔들며 클럽에 갔다
크로와상 세 개 가지고 크리스가 왔다
문짝을 차며 우오오오오
불가해하게 부푸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기를
나라는 나라에 도착한 첫날 응답기를 버스에 놓고 내렸다고 해보자
하늘의 모빌
두 개의 빌딩 사이로 달이 뜰 때
빌딩은 기우뚱한다
두 개의 빌딩은 마주보고 떨며 비낀다
고대의 천문대처럼 초기 회교 사원처럼 건물은 흘러내리려고 한다
두 개의 빌딩 사이로 달이 뜰 때
그 달 너머 더 캄캄한 데로 가는 사람이 있었고
두 개의 빌딩 사이로 보름달 뜰 때
튼튼하고 육중한 다리를 벌려 달덩이를 낳은 내 어머니의 어머니가
내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나 어쩌다 이런 애를
나는 경악하며 달을 보았다
쿼터 셉템버 구월의 사분의 일이라는 역이 있어 그리 멀지 않아 둥그런 천장이 하늘같다는 평범한 생각이 들더라 거울이란 거지 지상으로 돌출한 것들을 반영하는 가령 솟은 언덕과 가느다란 꽃 암술 언 입술 쓰레기를 가득 담은 비닐봉지를 안고 나는 하늘을 봤어 더러운 행주로 닦은 거울 같은 하늘에 네가 비친다 네가 없으므로 네가 비쳐서 나는 너를 읽지 않고 너를 쓰지도 않아 흰 모래가 담긴 하늘에 발가락을 넣고 당연하지 그러려면 누워서 다리를 들어야지 청바지에 부츠까지 신었다면 곤란해 나는 하늘에 비친 너를 물걸레질하고 웃고 푸른 머그잔에 묻은 네 아랫입술 자국 같은 반달도 지운다 이제는 안녕 이 말만 수십 번 네 얼굴도 기억 안 나 네 페이스 북에 이젠 안 들어가 이 말도 수십 번 네가 없어서 네 그림자는 활력을 느낀다 너는 구름을 끌어 행진하고 내게 언쟁을 걸지만 쓰레기 가득 담은 비닐봉지를 안고 나는 공원벤치에서 앉았을 뿐 나뭇가지 거미줄에 달이 열린다 해도 멀리서 땅거미를 타고 내려오는 너를 바라보아도 언제나 황량했음을 깨달을 뿐
딴따라
한 모금 마시고 분다
한바탕 불고 두드리고 노래하다보면
내 나팔 안으로 기어들어오는 놈이 있다
아 샛길로 새지 말자
노래가 우선이야 돈과 섹스는 따라오는 거라고 풍각쟁이 할아비는 말씀하셨다
그래놓고 다음날 복상사
나팔을 높이 들고 부세요
따라딴, Taratantara
누가 죽는다는 건 누가 태어난다는 것 이런 소리도 소음도 음악소리도 깨고 부수고 두들기고 뚫고 드릴 드릴로 드디어 완성이다 국경을 초월한 잡소리 이러는 것 모두 다 내 스타일 아님
나는 남의 잔치에 불고 치고 노래한다
음식을 얻어먹을 때도 있다
국가를 초월한 음악이라니, 사랑이라니, 만국 의성어를 전쟁으로 번역하는 사람들이나 좋아하는 잡음. 아아, 누가 똥을 안 치웠어? 나는 개똥을 밟았을 뿐인데 그 개가 나를 따라온다 나를 좇아오다가 나의 수호견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한테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간다 건널목을 건너 내 방문 앞에 먼저 도착해있다
마다가스카르 섬에서는 Taratantara를 역사로 번역하더라도
나는 불어댄다 삐삐빼빼 삐익 끽, 이것은 나의 무의미한 소리라는 걸 아셔야죠
나팔에 코를 파묻으려고 개는 날뛰는데
저런 놈은 상종 말라고 잡아먹는 거라고 할아비는 말씀하셨다
그래놓고 분홍 저고리 위에 복상사
동네 편백나무 아래에서 노이로제 일으키는 북소리
나는 나팔을 불었다
나발 분다고 그러지 마요
나는 나팔꽃도 진달래꽃도 몰라요
연분홍 치마 고름이 날리든 찢어지든 샛길에 서서
꽃이 진다고 분다
전쟁이 나도 불고 치고 노래한다
초가집 집집마다 포탄이 떨어질 거라고 옛날부터 불고 다녔다
작품론
히스테리아와 미적 충동의 여로
홍용희
김이듬의 5편의 시편을 펼쳐본다. 5편 모두 이국적인 거리에서 씌어지고 있다. 일종의 여로형의 시편이다. 그러나 그의 여로는 뚜렷한 목적지가 없다.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그저 배회하고 있다. 이국적 도시의 풍속을 탐색하고 관찰하고 기록하는 고현학적 산책과는 처음부터 거리가멀다. 그에게는 굳이 파리여야 될 이유도 없다. 오직 한국만 아니면 될 것처럼 보인다.
다음 시편은 파리의 14호선 지하철에서 씌어지고 있다. 자신의 내면과 열차 속도에 따라 피상적으로 스쳐가는 외적 풍경이 기록되고 있다.
지하의 군중
맨끝
놓친 튜브
스프링 노트에서 떨어져나간 페이지
□성 라자로
거대한 입술이 빨아들이는 파이프 안
왼편에는 집시
□마들렌느
한 문장도 말하지 않은 날
아우스터리츠
일어나면 접히는 의자
□생떼밀리옹의 정원
방으로 가는 단어 번역자
남은 한 구역
□미테랑 도서관
소매치기의 빈손
현기증
내벽 보수공사
검표원
□올랭피야드
— 「14호선」 전문
연과 연의 연속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오직 연속성을 이루는 것은 후렴구처럼 명시되고 있는 파리 지하철 “14호선”의 역사를 이어주는 철로이다. 14호선은 파리 지하철 중에 가장 최근에 완성된 것으로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연의 성 리자로 역은 14호선의 출발지이다. 외적 상황이 간략하게 스케치되고 있다. 지하철의 가속도 앞에서 긴 호흡의 문장은 허용되기 어렵다. 2연 역시 역사(驛舍)에 대한 찰나적 묘사이다. 역사의 정경이 “거대한 입술이 빨아들이는 파이프 안”으로 느껴진다. 1연에 비해 심미적 주관성이 깊이 개입되고 있다. 3연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진술이다. 4, 5연에 걸쳐 생떼밀리옹의 정원과 미테랑 도서관 역사를 지나 마지막 연의 올랭피야드에 내린다. “소매치기의 빈손/ 현기증/내벽 보수공사/검표원” 등의 찰나적 상상과 현상의 무질서한 나열로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시적 묘파는 굳이 파리의 14호선이 아니어도 문제가 안된다. 파리 13호선이든 런던의 어느 지하철이든 그것은 상관없다. 그저 파리 14호선에서 마주치는 생각과 대상을 무연하게 스케치하고 있다. 그럼 김이듬은 왜 이런 배회하는 여로의 시편을 발표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 그가 파리의 지하철을 서성거리는 저간의 사정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 앞에 그는 다음과 같은 시편을 보여준다.
처음엔 한사코 입을 열지 않는다
카메라를 피한다
알제리에서 온 젊은 여자 아미나는 2년 넘게 노숙하고 있지만
이곳을 떠날 의사가 없다
다시 찾아간 늦가을 저녁 철로 변에 그녀가 누워있다
이리 들어와
이불 안은 더럽고 따뜻하다
지하철 환풍기 위에 자리를 잡아 열기가 이불을 데운다
머리에 히잡 두르기 싫었어
고향에서 도망쳐와 불법체류자로
왜 나는 조금 일찍 출발하지 못했을까
아미나는 자기 의지로 왔다고 하고
딱히 몰아낸 이를 댈 수는 없지만 난 내쫓긴 것 같은데
누구라도 동전을 던져주겠지
우리는 누워서 휘청거리는 행인을 본다
—「인터뷰이」 전문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서로 다른 둘이면서 하나이다. “인텨뷰이”는 알제리 출신이며 “2년 넘게 노숙” 생활을 하고 있다. 파리의 어느 “늦가을 저녁 철로변”이 그녀의 숙소이다. 늦가을의 추위를 “지하철 환풍기”에 의지해서 견뎌나가고 있다. “한사코 입을 열지 않”던 젊은 여자 아미나가 말을 하기 시작한다. “머리에 히잡 두르기 싫”어서 “고향에서 도망쳐 왔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인텨뷰어인 시적 화자는 “왜 나는 조금 일찍 출발하지 못했을까”라고 안타까워한다. 아미나와의 깊은 정서적 동질감의 표현이다. “딱히 몰아낸 이를 댈 수는 없지만” 자신도 “내쫓긴 것”은 틀림없다. 아미나는 “자기 의지”로 “고향에서 도망쳐”왔고 “난 내쫓긴 ”점이 다르다. “누구라도 동전을 던져주겠지/우리는 누워서 휘청거리는 행인을 본다”. “우리”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이미 나는 아미나와 한 통속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시적 화자를 한국에서 “내쫓”은 것은 무엇일까? “딱히 몰아낸 이를 댈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한국 사회의 풍속이 마치 알제리의 “히잡”처럼 그를 옥죄었던 것이다. 히잡은 이슬람 국가에서 여성을 억압, 관리, 통제, 소유하기 위한 복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슬람 경전 코란에서 명시된, ‘그녀들의 시선을 낮추고 순결을 지키며 밖으로 드러내는 것 외에는 유혹하는 어떤 것도 보여서는 아니’ 된다는 율법의 시행 장치가 히잡인 것이다. 알제리의 여성 차별의 억압구조를 피해 국경을 넘어 파리까지 왔다는 아미나의 전언에서 시적 화자는 한국 사회의 남성 중심적 억압 구조 속에 타자화 되었던 자신을 새삼 환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김이듬의 시적 여정이 히스테리아의 신경증과 연관되고 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히스테리아는 이미 그리이스 시대 히포크라스에 의해 명명된 질환으로 몸속에 떠돌아다니는 자궁(hysteria)을 가리킨다. 물론 이후 히스테리아는 비단 여성에 국한되는 질병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외상과 억압에 따른 충동적 증상을 가리킨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히스테리아란 성에 대한 기억과 환상이 억압되어 신체적 증후로 바뀐 경우로 설명한다.
김이듬은 바로 지난해에 시집 『히스테리아』를 간행한 바 있다. 그의 시편들에는 우리 사회의 잠재적 히스테리아의 억압적 욕동의 근육 감각이뜨겁게 숨 쉬고 있었다. 주류사회의 배타적 타자에 해당하는 소수자들, 즉 미혼모, 창녀, 장애인, 동성애자, 정신질환자, 거지, 가난한 노인 등이빈번하게 등장하여 무의식적 환상, 성애적 요소, 욕동을 상징할 수 있는 신체적 반응 등을 다채롭게 표출하고 있었다.
위의 시편에서 “알제리에서 온 젊은 여자 아미나”와 “나”의 월경(越境)은 기본적으로 히스테리아의 연속성에서 이해된다. 그는 불안을 자극하는 본능적 소망과 그것에 대한 방어 사이에서 여로형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의 그의 여로는 “택시”를 타고 전개된다.
어쩌다 택시 안에 카메라를 놓고 내렸다고 해보자
어디로 갈 것인가
북쪽 노선 마지막 정거장에서
더 부정적으로 생각해보자
크리스의 형은 과다복용으로 사망했지만 크리스는 약을 한다
비둘기, 우오오오오
어쩌다 백 사십 년 전에 지어진 건물에 방을 구했다고 해보자
그것도 하녀의 방이었던 오층 구석
나는 복도를 오가는 큰 쥐를 본다
크리스의 어머니는 다리미를 들고 있다
내 아들이 저러지 않게 네가 도와줘
그 다음에 그녀가 뱉은 말은
여긴 전부 소독을 해야 돼
나는 휠체어를 타고 있다고 해보자
이 많은 계단을 어떻게 내려갈 것인가
우오오오, 제발 크리스
올라와 올라와
이상한 소굴에 방을 구한 건 여권을 분실한 것보다 낫다고 해보자
이 복도의 모든 창틀에서 환영을 보는 거라 해보자
신체적으로 나는
— 「코카인」 일부
가정형의 어법을 통해 자신의 상황을 대상화하고 있다. 현실이 가정의 어법으로 치환되면서 실상과 가상의 경계가 무화되고 있다. 장소는 코카인 중독, 비둘기 소리, 큰 쥐 등이 혼재된 파리 뒷골목 슬럼가의 어느 낡고 오래된 집이다. “14호선”이 파리의 전면이라면 이곳은 그 후미진 뒷골목이다. “크리스의 형은 과다복용으로 사망했”고 크리스는 살아있으나 여전히 “약을 한다”. 견디기 어려운 열악한 곳이다. 이때 시적 화자는 어느새 적응의 논리를 찾는다. 더 나쁜 상황을 설정하고 보면 주변의 험악한 인물들도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나는 휠체어를 타고 있다고 해보자/ 이 많은 계단을 어떻게 내려갈 것인가” “제발 크리스/올라와 올라와”라고 하지 않겠는가. 가정형이 위로의 문맥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어느새 시적 화자는 떠나온 조국이 그리워진다. “이상한 소굴에 방을 구한 건 여권을 분실한 것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무한다. 여기에서 “여권”이란 귀국의 가능성을 가리킨다. 한국으로부터 “왜 나는 조금 일찍 출발하지 못했을까”라고 했던 어조와는 사뭇 다르다. 파리 역시 시적 화자를 “딱히 몰아낸 이를 댈 수는 없지만” 자신을 “내쫓”(「인텨뷰이」)고 있는 형국이다.
이때 그의 눈앞에 목도되는 것은 환상이다. 심리적 갈등이 신체적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대목으로 보인다.
두 개의 빌딩 사이로 달이 뜰 때
빌딩은 기우뚱한다
두 개의 빌딩은 마주보고 떨며 비낀다
고대의 천문대처럼 초기 회교 사원처럼 건물은 흘러내리려고 한다
두 개의 빌딩 사이로 달이 뜰 때
그 달 너머 더 캄캄한 데로 가는 사람이 있었고
두 개의 빌딩 사이로 보름달 뜰 때
튼튼하고 육중한 다리를 벌려 달덩이를 낳은 내 어머니의 어머니가
내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나 어쩌다 이런 애를
나는 경악하며 달을 보았다
—「하늘의 모빌」 일부
“두 개의 빌딩 사이로 달이 뜰 때” “건물은 초기 회교 사원처럼 흘러 내리려고 한다.” 무의식적 환상의 가시적 현상이다. 기억과 환상이 혼재되면서 경악스런 분위기가 배어나온다. 복잡한 환상이 떠오르는 일종의 불안 히스테리의 양상으로 해석된다. 여기에서 “두 개의 빌딩”은 한국과 파리의 무의식적 표상일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여로형에는 한국과 또 다른 나라와의 “국경을 초월한 잡소리”나 “만국 의성어”가 등장한다. 이미 뚜렷한 시제와 공간의 경계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남의 잔치에 불고치고 노래한다
음식을 먹을 때도 있다
국가를 초월한 음악이라니, 사랑이라니, 만국 의성어를 전쟁으로 번역하는 사람들이나 좋아하는 잡음. 아아, 누가 똥을 안 치웠어? 나는 개똥을 밟았을 뿐인데 그 개가 나를 따라온다 나를 좇아오다가 나의 수호견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한테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간다 건널목을 건너 내 방문 앞에 먼저 도착해있다
마다가스카르 섬에서는 Taratantara를 역사로 번역하더라도
나는 불어댄다 삐삐빼빼 삐익 끽, 이것은 나의 무의미한 소리라는 걸 아셔야죠
나팔에 코를 파묻으려고 개는 날뛰는데
저런 놈은 상종 말라고 잡아먹는 거라고 할아비는 말씀하셨다
—「딴따라」 일부
할아버지는 “분홍 저고리 위에 복상사” 한 풍각쟁이였다. 풍각쟁이의 “딴다라” 혹은 Taratantara는 “불어댄다 삐삐빼빼 삐익 끽” 의 의미로서 국경을 초월한 만국 의성어이다. “나는 남의 잔치에 불고치고 노래한다.” 시적 화자 역시 풍각쟁이의 삶을 산다. 할아버지가 살고 겪고 말했던 길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할아버지는 그의 가족사와 연관되지 않아도 무방하다. “풍각쟁이”로 표상되는 길 위의 인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세월 동안 일반화된 비주류의 특징적인 삶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고대에서부터 갈등, 억압, 차별의 심인성에서 비롯된 히스테리아가 있었던 것처럼 인간삶은 언제, 어디, 누구나 안주하지 못하는 불안과 소외감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보면, “풍각쟁이”의 “딴따라”는 히스테리아의 표출이면서 동시에 치유의 여정으로 해석된다. 김이듬의 시 세계가 그동안 많은 경우에 비주류의 삶을 드러내고 아파하고 노래하고 보살펴온 까닭이 어느 정도 이해된다. 앞으로는 그의 “풍각쟁이”의 여로가 히스테리아를 충격적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치유하는 힘으로 작용하길 바란다. “딴따라”의 궁극적인 역할이 여기에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1966년 경북 안동 출생.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꽃과 어둠의 산조』 『아름다운 결핍의 신화』 『대지의 문법과 시적 상상』 『현대시의 정신과 감각』 등이 있다. 젊은 평론가상, 애지문학상, 시와시학상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