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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
2호차 26석. 차표를 받자마자 바로 구구단의 4의 배수들이 머릿속에 정렬되면서 계산이 나왔다. 한숨. 지정된 좌석은 아쉽게도 복도자리여서, 여행을 차창 밖 풍경과 함께 하려던 나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몸조심 하고, 전화하는 거 잊지 말고. 꼭.” 이제 다 컸다. 아무리 자식이 그렇게 생각해도 부모의 눈엔 언제나 철부지인 모양이다. 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힘차게 고개만 한 번 끄덕여보이고는 어머니의 모습을 등졌다. 더 이상 눈을 마주하면 눈시울이 불거지는 것을 참기 힘들 것 같아서였다. 고작 열흘간의 일정이긴 하지만 처음 떠나는 나 홀로 여행. 기대와 우려라는 녀석들이 팽팽한 대립을 유지한 가운데, 틈이 생기면 곧 바로 주도권을 잡으려 눈치를 보고 있는 듯했다. “후우―.”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한 후 열차에 올랐다. 기차는 유치원 때 이후로 처음 타 보는 터라 3호차에 오르는 실수를 했다. 큰 실수는 아니지만 우려가 조금 기세를 탄 듯 뇌를 침식해 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러면 안 돼지. 생각을 떨쳐 내려는 듯, 만화 영화 주인공처럼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들었더니 잡념이 서서히 물러섰다. 내 자리를 찾아가니 역시나 복도 쪽 좌석이었다. 그리고 내 옆자리의 창가 자리엔 대학생 쯤 되어 보이는 여성이 앉아있었다. 곱살하게 생긴 그는 차창 밖을 멍청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 옆에 가만히 서있는 나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인사를 하려다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면 어떡하지? 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이제 열여섯이긴 해도 일단 남자 아닌가. 아니, 더욱이 사춘기 청소년이라면 더욱 경계할 지도 모른다. 그런 추측들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표정에도 나타났으리라. 역시 그냥 앉아서 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앉으려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혹시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건 아닐까? 혹은 무심코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낸 것은 아니었을까? 다행이도 그에게 별다른 이유는 없었던 듯 이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나는 결국 한 마디 인사 없이 자리에 앉았다. 목적지 도착까지는 네 시간 사십 분 정도 걸리는 모양이었다. 낮잠 한 잠을 자도 충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굳은 결심이고 뭐고 아무것도 변한 것 없는 자신을 탓하며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옆자리의 여성에게 혹시 모를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고개는 일부러 복도 쪽으로 기울였다. 열여섯. 평범하디 평범하게 살아온 나이기에 중학교 입학때 부터 고등학교 입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정도의 성적만 유지하면 적당한 인문계에 입학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수한 성적으로 사립 고등학교를 갈까, 평범한 성적으로 공립 고등학교를 갈까 하는 선택만이 문제였다. 즉, 성적 문제는 나에게 큰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어렸을 땐, 부모님이 떨어져 사시면 굉장히 슬플 것 같다고 생각한 적 있었다. 책이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굉장히 어둡고 쓸쓸하게 지내는 외톨이가 될 줄 알았다. 실제로 부모님이 한창 다투고 계실 때는 눈물샘이 하루라도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러나 내 나이가 중학생 즈음 되고 아버지의 얼굴을 볼 일이 뜸해진 직후에는 이렇다 할 정신적 시련은 없었다. 하도 지쳐서 감정이 메마른 것은 아닐까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봤지만 코미디 프로그램을 볼 땐 웃음이 나오고, 슬픈 영화를 볼 땐 눈시울이 불거지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 크게 비정상적인 일은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부모님의 이혼이 달갑다고는 절대 할 수 없지만 크게 이상한 일이냐고 묻는다면 난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헌데 그게 남들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아니, 정확하게 부모님의 이혼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닌 내막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불륜. 난 그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물론, 결코 옳은 일은 아니며 장래의 내가 그런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사람에 따라선 용서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한다. 사람에 따라선. 그래, 사람에 따라선 용서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수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의 아버지와 현수의 어머니. 둘에게 모두 책임이 있는 일이건만, 현수는 나의 부친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아니, 어쩌면 그냥 내 관점에서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현수는 아버지를 포함한 우리 가족 전체를 싫어했다. 나의 고통과 어떻게 다른 고통을 겪었을지는 모른다. 알 길도 없을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사건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나와 확연히 달랐다. 다른 초등학교 출신이 같은 중학교에 배정된 첫날 주먹다짐을 벌였다. 그런 건 서열을 정하고 싶어 하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흔해 빠진 일이지만, 안면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그것도 여럿에게 구타를 당한 건 그렇게 흔하지 않을 것이다. 학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나서도 현수 패거리는 나에게 한 시도 우호적인 입장을 취해보인 적이 없었다. 내가 선생님께 고자질하는 것도 아랑곳 않고 괴롭혔다. 너무도 노골적으로. 불현듯 빛이 달라진 것 같아 눈을 떴다. 약간 어두워서 터널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산 옆을 지나고 있을 뿐이었다. 눈을 굴려 엿보듯 본 창 밖에는 차도에만 있는 줄 알았던 낙석 사고를 대비한 철책이 있었다. 기지개를 키고 싶었으나 옆 사람에게 민폐가 될까 눈가를 비비고 나오는 하품에 입을 가렸다. 시계를 보니 고작 30분가량 지나있었다. 긴장 탓에 잠이 잘 오지 않는 것일까. 문득 옆을 보니 여자가 힐끗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기척에 잠시 본 것이었겠지만 순간적으로 무슨 실수를 한 것인가 등골이 오싹해졌다. “…….” 덜컹. 열차 안은 고요했다. 나와 옆 자리의 여자는 물론이고 거의 가득 들어찬 객석의 어느 누구하나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철로와 기차가 내는 소음 밖에 없었다. 조금 더 잘까 싶었지만 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옆 자리의 여자가 풍경도 심심했는지 시선을 정면으로 하고 나와 비슷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여행?” 동생은 잠든 단 둘뿐인 식탁. 어머니가 내게 물었다. “네. 열흘 정도.” 말과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니가 짐을 덜은 동시에 또 다른 짐을 어깨로 올리고 있음이 역역하게 들어나는 표정을 지으셨다. 쓴웃음. 잠시의 침묵이 있은 뒤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응, 그래. 여행도 좋지. 혼자 괜찮겠어?”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학교에서 돌아온 내가 본 것은 심각하게 통화 중이셨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수화기를 잡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표정이었다. 이윽고 나의 귀가를 확인하신 어머니의 관자놀이를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그럼 엄마가 돈은 줄게. 열흘이면 한 30만원 이면 되겠니?” 정확한 금액까진 계산해 보지 않았지만 얼추 괜찮을 것 같아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어머니도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시고는 말을 이으셨다. “그래…. 다니면서, 이것저것 생각도 좀 해보고. 가능하면, 가능하면 역시 고등학교는 가야지.” 어머니의 눈이 다시 그날처럼 불거졌다. 또 눈물이 흐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갔다 와서, 흡, 힘든 일 있으면…, 하, 엄마한테도 좋고, 아빠 찾아가서라도 말하고….” 어머니는 내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으셨던 것이겠지만,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고 계시는 것이 오히려 나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럼, …들어가서 잘게요.” 어머니의 대답을 듣지 않고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혹여나 어머니가 따라 들어오실까, 곧바로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눈물뿐만 아니라, 콧물까지 뒤집어쓴 베개는 이상한 악취를 풍겨왔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 다시는 약해지지 않겠다. 그런 나의 결심은 그날 딱 한번 무너졌다. 다음 날 아침, 나와 어머니의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동생은 나에겐 쌀쌀맞은 것과 반대로 어머니의 변화엔 민감했다. “어, 엄마, 울었어?” 그 질문에 어머니는 호기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어머니는 웃고 계셨다. 오랜만에 즐거운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리 세 가족은 각자의 일상으로 향했다. 밝게 웃는 얼굴로. 옆 좌석의 여자가 갑자기 일어났다. 그가 향한 방향은 화장실이었다. 순간 자리에 놓고 간 그의 짐엔 뭐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이렀지만 가볍게 억누를 수 있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향한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스낵바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편의상 매점이라고 부르기로 한 곳으로 향했다. 스낵바라고 해서 별다를 건 없었던 지라 나는 이온음료 하나를 뽑아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여자도 자리에 앉아있었다. 지금이라도 인사를 해볼까.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런 자잘한 것에서 내 결의가 무너지는 것이 다소 억울했다. 사춘기 접어들면서 유독 여성 앞에서 숫기가 없어졌다. 상대방이 나를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남중에 배정된 것을 알고 다소 안심한 적도 있었다. 인사를 하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비록 나 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지만 열 몇 살 이상 많아 보이는 건 아니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숙이는 대신 한 손을 올려 친근하게 하는 인사를 선택했다.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음료수 캔이 들려있지 않은 한 손을 치켜들으려는 했다. 멈칫. “이런….” 결심이 서면 상황이 따라주지 않는 이상한 법칙. 여자는 피곤한 듯 눈을 붙이고 있었다. 체육복이 갈기갈기 찢어져있었다. 누구의 소행임에는 이론이 없었다. 하지만 난 그에 대해 이견을 낼 수 없었다. 속으로 매우 분해하며, 운동장으로 향한 나는 손바닥 다섯 대라는 형을 선고받았다. 한 대, 두 대. 뒤쪽에서 그들이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크게 욕을 내뱉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다. 나란 놈은 왜 이렇게 한심한 걸까. 그런 자책을 했다. 세 대, 네 대.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선생님도 당황하셨는지 마지막 한 대를 때리려고 치켜든 손을 천천히 내리셨다. “사내새끼가 고작 그거 맞았다고 울기는….”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선생님도 조금은 미안하신 모양이었다. 내가 울고 있는 건 고작 30cm 자 크기의 나무막대에 맞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금껏 당해온 것이 한스러워서 아니, 당하고만 있었던 내 자신이 너무 비참해서 울었다.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사실이었다. 울고 있는 나를 보며 그들을 포함한 반 친구들 전체가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창피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외치고 싶었다. 이깟 매 백 대라도 맞아주겠다고. 난 그딴 걸로는 절대 울지 않는다고. 하지만 결국 난 찍소리 한 번 못 내고 내 자리로 향했다. “병신, 그거 맞았다고 우냐. 찌질이 새끼.” 크큭.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그의 주변의 인간들도 비열하게 웃기 시작했다. 분했다. 뭔가 항변하고 싶었다.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결심이 섰다. 오늘은 귀가가 조금 늦어질 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들을 향해 억지로 미소 지어보였다. 억지로 눈물을 틀어막은 탓인지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난 말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에게만 들릴 크기로. “병신들.” 그날 귀갓길은 확실히 아팠다. “아―!”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내고 눈을 뜨니 옆자리의 여자가 짐을 챙기고 있었다. 어느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깜짝 놀라 지금의 위치를 확인했더니, 아직 목적지인 태백 까진 한 시간 가량 남은 모양이었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핸드폰의 문자함을 확인 하려는데 옆의 여자가 일어났다. 이내 기차가 속도를 줄였다. 여자는 가방을 어깨에 멜까 들고 내릴까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내 결정을 내린 듯 그는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내 앞을 지나쳤다. 순간, 지금이 아니면 없다는 생각에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도 신경 쓰지 못했다. “아, 저기.” 자신을 부르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는지 여자가 뒤를 내 쪽을 돌아봤다. 순간 망설여졌지만, “안녕히…가세요.” 아, 역시 괜히 한 걸까. 날 이상한 취급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머릿속을 채웠다. 하지만 그런 것을 한꺼번에 날려버리 듯, 그는 미소 지었다. “학생도요.” 아마 다시는 얼굴 볼일도 없겠지만, 그 미소는 내 첫사랑이 되기에 충분했다. 태백에 도착한 나를 처음으로 맞아준 건 낡고 붉은 색의 벽을 가진 건물이었다. 기차역 옆에 붙어있는 관광 안내 데스크에 물어보니 버스 터미널인 듯했다. 나는 첫 행선지를 태백산 도립공원으로 정하고 버스를 찾았다. 오염되지 않은 탓인지, 좋은 꿈을 꾼 탓인지, 강원도의 하늘은 청명했다. 날씨가 눈물 나게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