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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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최초의 기억
최초의 기억 남길순 매캐하다 타오르는 불의 끝에서 거인이 춤을 춘다 톡톡 터지는 소리가 나고 골짜기가 흐르고 큰 바위 곁을 돌아오는 물소리에 모든 소리가 묻힌다 통나무를 쌓은 단 옆에서 무엇이든 한 가지씩 불 속에 던져 넣기로 한다 깊숙한 곳에 푸른 불꽃이 인다 불 속에 누가 뒤척이는 것 같다 오래 보고 있는 눈동자 속에 모닥불이 타고 귀가 먹먹하도록 불이 물과 싸우고 있다 대나무처럼 큰 사람이 내 뒤에 서서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 숯을 뒤집으며 불을 살려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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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돌의 기억
돌의 기억 최호빈 창문을 기웃거리는 사람처럼 돌을 본다 돌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를 본다 돌은 어쩌면 땅을 딛고 있는 딱딱한 물 물고기는 돌처럼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 그러나 헤엄은 계속되고 있다 빛을 피해 조금씩 물고기가 얼굴의 위치를 옮기고 있다 그것은 물고기가 돌 속에서 숨 쉬는 이유 물고기는 돌의 주인 네가 돌에 구멍을 뚫자 한 방울의 물이 새어 나오고 물고기가 빠져나온다 물의 마법이 풀린다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것은 그저 돌의 그림자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 생각이 어딘가에 잠긴다 어딘가에서 생각이 궁금해진다 그것은 돌을 집어 들었던 너의 손에서 비린내가 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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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모르는 기억
모르는 기억 조우리 바닥에 앉자. 양말을 신어야 하니까. 오른쪽 먼저. 그리고 왼쪽도. 이제 일어난다. 뒤로 돌면 거울. 거울 옆에 선반. 손을 뻗어 빗을 꺼낸다. 머리를 빗는다. 오른쪽을 먼저 빗고. 왼쪽이랑 뒤쪽도, 꼼꼼하게. 지금 뭘 하고 있지? 준비. 준비를 하고 있다. 외출 준비. 곧 나간다. 밖으로. 얼마만이지? 밖으로 나가는 것. 외출은, 얼마만이지. 대답이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재영은 머리 빗기를 멈추고 가만히 거울을 본다. 머리카락이 제법 자랐다. 짧게 잘라 주세요, 했더니 귀 밑에 바짝 붙었던 머리카락이 이제는 어깨 너머까지 내려와 있다. 삼십 분 전에 가격표를 떼어낸 회색 스웨터. 새것의 냄새가 난다. 소유의 흔적이 없는 냄새. 몸에 감기지 않는 빳빳한 청바지 역시 그렇다. 재영은 제자리에서 몇 걸음 걸어 본다. 이대로 나갈 수는 없다. 코트를 입고 머플러도 둘러야 할 것이다. 이제는 그런 계절이 되었다. 재영은 그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