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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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희망
희망 ― 간빙기 오은 얼음이 녹으면 뭐가 됩니까? 생물이 됩니다. 움직입니다. 생물은 어디로 움직입니까?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생물이 생물을 위로하기 위해 위로, 위로, 더 위로. 높은 데에 올라가야 사람들이 쳐다봅니다. 위는 위험하고, 위는 경이롭습니다. 너무 아파서 앞세울 수 없었던 사정들이 생물과 함께 드러나고 있습니다. 움직임으로 높은 데에서는 크나큰 비가 내립니다. 짜고 축축한 것이 자꾸 내립니다. 간절하게 허공을 두드립니다. 아래에는 아직 반쯤은 얼어 있는 생물이 서 있습니다. 벌써 반쯤은 녹아 있는 생물이 앉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이유로 춥습니다. 뜨겁습니다. 얼음과 얼음 사이 생물과 생물 사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갑니다. 마음을 품으면서, 그 마음을 서로에게 기꺼이 들키면서 우리는 지금 자발적으로 녹고 있습니다. 평형 상태로 요동하고 있습니다. 반쯤 물에 잠겨 열린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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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살인자, 여자들의 희망 2009
살인자, 여자들의 희망 2009 김종호 등장인물: 여자 남자 형사 목소리 인형1:실물 크기의 실리콘 인형 인형2:실물 크기의 마리오네트 ※ 이 제목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의 1909년 작 동명의 단막극에서 따왔다. 이 글이 희곡이라면, 연출 의도에 따라 각각의 장을 순서대로 상연하거나, 1장과 2장을 한 무대에서 동시에 상연하는 것도 가능하다. 여자와 남자, 인형1ㆍ2가 서로의 이중체(Double)인 것처럼, 1장과 2장 역시 서로의 이중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연이 아니라 낭독을 위한 경우 역시 따로/같이 낭독해도 무방하다. 그 둘 모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대체 이 글이 소설이든 희곡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1장. 살인자 2장. 여자 어두운 실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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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중얼거리는 나무
희망 없이, 희망 없이도. 나는 두 번씩 다짐하는 습관이 있다. 그건 의미를 흐리는 어법. 어순이 필요 없는 중얼거림처럼 나를 견디게 하는 어법. 다시 실오라기처럼 흔들리는 등을 향해 두 번 묻고 두 번 읽는다. 검은 숲의 행간 너머 간극 너머 극한 쪽을 향한 네 뒤에서. 죄 없이 고개를 숙인 네 뒤에서 발음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주머니에 숨기고 나는 중얼거린다. 등불 등불. 그건 슬픔이 부르는 바람 같은 것. 고독한 자의 방언 같은 것. 다시 어떻게든 어디선가 또 기어이 나는 중얼거린다. 중얼거리며 부푼다. 검은 산들이 가린 지평선이 불타는 동안 나를 지나가던 문장들. 단추가 사라진 코트처럼 펄럭거리며 차가운 들판 너머 가계를 잃어버린 나무의 꿈속까지. 죄 없는 새들이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