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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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모듬내
모듬내 이은봉 내 몸속에도 시냇물이 흐른다 고향 마을의 모듬내, 이미 오래 전부터 시커멓게 오염되어 있다 발원지인 심장이 술과 고기와 담배 연기로 검게 찌들어 있기 때문일까 어지럽다 상류에서부터 비육우의 똥물이, 공장 폐수가 화학약품이 흘러들고 있기 때문일까 시냇가 여기저기 비닐조각, 헝겊조각 따위 널브러져 있다 맑은 물 찰찰찰 흐르지 못하고 탁한 물 끈적대는 모듬내 하수구를 뚫는 길다란 바지랑대 집어넣어 훌훌 뚫어버릴 수는 없을까 내 몸 속의 시냇물도 여기저기 웅덩이 패여 있다 흐르지 못하고 썩어가는 것들 웅덩이마다 고여 역한 냄새 풍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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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그 절
그 절 백무산 아름답기로 소문난 그 절 나와는 금생 인연이 한 발짝 모자라 누구나 가 본 그곳 발길 인연 한번 없다가 마음이 끓어 넘쳐 발길 닿았을 때 절은 이미 한 발짝 앞에서 불길 속으로 훌훌 벗고 떠나가고 없었네 그림자 한 벌은 벗어두고, 재로 지은 절 한 채 꼿꼿이 서 있었네 그래도 우리 인연 영 없진 않아 그림자 보고도 나는 황홀하여 얼른 달려가 두 손 모으고 재로 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문득, 밖이 나오네 세상에 사라지지 않는 물건 하나 재, 로 지은 세상의 모든 절 돌려주어 산에 청산에 가득한 그 절 그 절 만나고 오는 길 눈이 밝아져 세상길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네 재로 된 돌부리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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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령
령 이용임 죽은 여자 효정은 수다스럽다 계곡에 새로 묻힌 처녀의 골반이 오목하여 물빛 꽃 군락이 자그럽다, 하다 훌쩍 치마를 걷고 창틀에 앉아 갸웃거린다 효정은 발목이 부러져 비 궂은 날 창을 두드렸던 것인데, 그날부터 령에 묻힌 자들의 소식을 전해 온다 절 닮아 실족한 청년의 가슴 위로 삭은 잎사귀를 덮어 주었노라, 하다 눈이 붉어져 사람 먹고 핀 꽃이 얼마나 실한지 모르지 나비들이 왜 이명을 앓는지 모르지 큰 나무에 둥지를 튼 새들은 눈멀어 캄캄한 밤에만 나는 것을, 노래를 부르다 돌아간다 효정은 마당에 고인 구름 그늘에 웅크려 앉아 제가 꺾은 꽃을 던져 점을 치며 목련에 업혔다가 무겁다고 던져버린 꼬마는 이름도 쓸 줄 몰라 찾는 사람이나 있을까…… "얘, 너는 늘 뜨거운 것을 훌훌- 차는 맛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