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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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타인들의 타인
타인들의 타인 ― 17세 하재영 나는 부엌 식탁 아래 웅크려 앉아 있다. 불도 켜지 않고, 캄캄한 부엌, 식탁 아래. 나는 여기에서 음식을 먹는다. 하지만 내가 먹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단지 씹어 삼킬 무엇인지 모른다.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는 행위는 ‘먹다’가 아니라 ‘쑤셔 넣다’일지 모른다. 고로 나는, 씹어 삼킬 뭔가를, 입 속으로, 입 속으로, 꾸역꾸역 쑤셔 넣고 있는 중이다. 학원에서 돌아와 교복을 벗다가 옷핀이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옷핀. 터져 버린 호크와 올라가지 않는 지퍼 대신 스커트를 여며 주던 옷핀. 그 옷핀을 언제 잃어버린 걸까. 아니 그보다 교복이 불어나는 살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일 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십 킬로그램이 늘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키는 단 일 센티미터도 자라지 않았다. 늘어난 몸무게에 비례할 만큼 키가 컸다면 교복은 미니스커트가 되었겠으나 내 몸은 지금보다 덜 볼썽사나웠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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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설령 오래 걸릴지라도 2월은 자신의 손을 잡아 주는 달
설령 오래 걸릴지라도 2월은 자신의 손을 잡아 주는 달 권현형 이제 그만 아프자고 내게 속삭여 주었더니 차츰 나아졌다 설령 오래 걸릴지라도 2월은 자신의 손을 잡아 주는 달 지금 당장, 그런 말보다 차츰 나아질 거라는 말에 위로를 받는 날들 그리하여 가장 두려운 타인 나를 겪고 이해하느라 여러 세기가 지나갔다 가능성, 욕망, 사랑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어느 날의 검은 기억 낡은 기억의 안쪽에 상처받은 아이가 살고 있다 누가 당신의 악마인가, 물었을 때 '나'라고 대답한 가수 휘트니 휴스턴의 인터뷰를 아끼는 책 읽듯 읽었다 코카인도 마리화나도 아닌 자신과 싸우느라 생을 소진한 그녀의 자존심은 시적이기도 하고 산문적이기도 하다 길가에 고인 빗물이 맑기를 바라며 말하고 싶어 안달하지 않기로 한다 몇 시냐고 자꾸 물어보지 않기로 한다 심장 근처로 살랑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장미 화관을 쓰고 만찬을 하는 습관이 있던 옛 로마 사람처럼 차츰 장미를 좋아하는 습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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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증언과 시점
삼인칭 제한전지적 태도는 타인, 곧 증언자의 고통에 대해 오만하다(누가 있어 삼인칭으로 표상된 한 무젤만의 의식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인가!). 레비나스나 데리다가 그토록 경계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오만이다. 삼인칭 관찰자의 태도는 타인의 고통의 표면을 더듬을 뿐이다. 고통은 묘사되지만 여전히 재현 불가능한 영역에서만 묘사된다. 이인칭의 태도도 있겠으나, 그것은 일인칭 제한전지적 태도의 다른 말에 불과하다. 너(타인)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하는 화자(나!)는 실은 타인을 자신의 눈으로만 보는 나르시시스트일 경우가 허다하다. 상상계에는 윤리가 없다. 일인칭 주인공의 태도가 증언에 적합한 경우는 증언자 자신이 화자일 경우(가령 프리모 레비)다. 그러나 그럴 때 증언은 일종의 고백록이나 자서전 형식이 된다. 결국 일인칭 관찰자의 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