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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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낮의 책 밤의 책
낮의 책 밤의 책 장혜령 바다가 책이라면 파도는 바다의 무수한 페이지들이다. 달은 이 책의 보이지 않는 저자다. 그는 책으로부터 38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오늘도 페이지를 쓰고, 또다시 쓰기를 거듭한다. 책은 그래서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같았던 적이 없다. 바다가 언제 처음 쓰이기 시작했는지 아는 사람은 지구상에 없다. 다만 우리는 40억 년 전과 만 년 전의 책이 다르고, 4만 년 전과 오늘의 책이 다르리라 상상할 따름이다. 다 쓴 페이지를 넘기려고 달이 책장 한끝을 잡아당길 때, 밀물이 인다. 만 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반대쪽 페이지에도 밀물이 인다. 책이 너무 커서 한쪽 페이지가 낮에 속해 있다면 반대쪽 페이지는 밤에 속해 있다. 책의 절반은 달에 의해 바뀌지만, 나머지 절반은 그 자신의 꿈속에서 스스로를 바꿔낸다. 그래서, 저자는 한 권의 책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썼고 무엇을 쓰지 않았는지 다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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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오늘의 책
오늘의 책 백애송 서가에 꽂혀 있는 그녀를 읽는다 속내를 잘 보여주지 않는 그녀는 한 걸음 뒤에 있다 행간과 자간에 감추어진 마음과 마음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우리는 통하지 않았다 올 것이라는 말을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겠다고, 했지만 오라고, 했다 자꾸 나가려는 마음은 유예되었고 단절된 대화는 부재를 만들었다 세상은 아직도 온통 모르는 것들 투성이 읽어야 할 책들이 많다 더디게 아주 더디게 오는 그녀들 오늘의 책, 그녀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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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몰로코후의 책
몰로코후의 책 문보영 몰로코후가 언제부터 못을 뽑았는지는 알 수 없다 오래전 나라를 잃은 몰로코후는 전 세계로 흩어졌고 그들은 숲 가장자리를 따라 여행했다 몰로코후는 ‘못을 뽑는 존재’라는 뜻으로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못을 뽑아 왔다 앙뚜안의 날개뼈에 박힌 못을 발견한 몰로코후들은 그녀가 모래 위에 엎드려 잘 때 몰래 다가가 담요를 걷고 작은 못을 비틀어 뽑았다 앙뚜안의 입장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못이어서 꽤나 소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몰로코후가 못을 뽑는 건 그들의 타고난 본성일 뿐이다 온갖 사물들을 갉아먹는 토끼처럼 몰로코후는 못을 뽑는다 인간과 사물을 가리지 않고 뽑는다 모래 서점에는 액자가 걸릴 수 없다 벽에 뭔가를 걸어 기념하는 일은 몰로코후를 상처 입힌다 못이 뽑힌 자들은 불쾌해하거나 시원해하거나 못이 있는지 몰랐다며 어리둥절해하지만 대부분은 못이 너무 오래 박혀 있었기 때문에 사라져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몰로코후는 못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