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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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간병
간병 채길우 새하얗고 너른 침상 위로 너무 일찍 떨어진 감꽃에 어린 벌이 찾아와 있다. 싱그러운 초록과 비린 향기가 미처 식지 못한 꽃잎들을 벌이 허리 굽혀 어르고 매만진다. 창백한 꽃의 얼굴에 더 가까이 벌은 설익은 꿀이 말라붙은 입술을 핥고 푸석해진 화분을 살결에 펴 발라 준다. 꽃은 작고 벌은 서툴다. 하지만 꽃은 다 시들지 않았고 벌은 좀처럼 날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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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첼로
첼로 채길우 전통의상을 차려 입은 고산지대 아낙은 말도 통하지 않는 여행객들에게 자신이 키운 돼지를 팔려고 했다. 피부병 걸린 껍질이 들고 일어나 문드러지고 변색된 돼지는 허약하고 작았지만 아낙은 튼실하고 문제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앞발을 한데 붙들어 품에 들어올린 후 양 무릎으로 돼지 허리를 죄어 괬다. 아낙이 돼지의 희멀건 배를 한 손으로 쓰다듬어 주고 돼지는 날선 비명이 드리운 그림자만큼 긴 울음을 터뜨려 거품 문 입으로부터 공명하듯 침이 질질 흘러내리는 동안 햇살을 등지고 서서 현이 끊어진 채 풀풀 날리는 빛과 털과 텁텁한 공기 이상하리만치 아름다운 이국적 선율의 여러 가지 절망들이 눈부시도록 투명해 먼 나라의 허기와 영원까지도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처럼 낮고 오래 지속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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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승진
승진 채길우 야생 완두는 오랫동안 인간에게 길들여지면서 열매가 다 익은 후에도 자발적으로 깍지가 열려 씨앗을 퍼뜨리는 능력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었으므로 식용작물이 되었다. 꼬투리를 잡은 누군가의 손이 비틀린 멱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줄 때까지 입 꽉 다물어 속을 비치지 않았기에 사랑받았고 함부로 옷이 벗겨져 다섯 알 중 네 개를 잃고도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다는 산술로 계약을 따냈다. 완두는 좀처럼 터지지 않는다. 분노하지 않는 초록의 순종으로서 같은 껍질 속 똑같이 생긴 얼굴로 가지런히 줄 서 기다리며 선별과 배제는 우연이거나 더 높은 곳의 뜻임을 순순하게 다짐하는 겸손한 위치에서조차 간택되기 위해 무거워진 목을 늘어뜨린 비산도 탈출도 하지 않는 어여쁜 두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