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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비평 한국 음식 비평의 인정 투쟁과 그 과제
{ 비평 · 이용재 }
한국 음식 비평의 인정 투쟁과 그 과제
빵 한 덩이의 속내
3호선 압구정역. 긴 구내를 걷는데 한 간이 매장의 빵이 눈에 들어 온다. 이름하여 ‘치아바타 (ciabatta).’ 나는 그 매장을 오가며 오랫동안 관찰해왔다. 분명히 신제품이 맞다. 그래서 눈에 더 잘 들어온다. 하 지만 문제가 있다. 그 빵은 전혀 치아바타처럼 생기지 않았다. 단면이 너부죽하지 않고 둥글다. 차라리 짤막한 바게트라 보는 게 맞다. 그럼 치아바타가 아니다. 생김새에서 이름을 따왔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어 로 ‘슬리퍼’를 치아바타라 부른다. 맞다, 치아바타는 이탈리아 빵이다. 프랑스 빵 바게트도 사정은 마찬가지. 생김새에서 이름을 따왔다. 같 은 반죽이라도 두 번째 발효 직전에 빚는 모양에 따라 각기 다른 이 름을 지어준다. 원통형이면 바게트 (baguette), 이삭을 닮았으면 에피 (epi)다.
음식, 특히 제과제빵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이 정도는 입에 담을 수 있다. 특히 음식 저널리즘 종사자에게는 기본이다. 정말 다들 여기까지는 읊는다. 이미 문서화된 음식의 어원, 역사 등을 나열 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한국 음식 저널리즘의 몸통이다. 평양냉면 이라면 전문적으로는 ‘조선 순조 (純祖) 때 학자 홍석모 (洪錫謨)가 세 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에 ‘한겨울 음식으로는 평 안도의 냉면이 으뜸’이라는 말이 나온다’라고 역사를 언급하거나(매 체 기자식, 「집중탐구: 냉면 맛의 비밀」, <월간조선> 2011 년 7월호, http:// 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107100032& ctcd=F&cpage=10), 그보다 간단하게는 ‘수육은 대개 쇠고기, 편육은 돼지고기’임을 구분하는 격(맛집 블로거식)이다. 기존 자료만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이렇게 몸통은 언제나 튼실하지만, 언제나 머리가 없다. 정작 역사 며 명칭이 이해를 돕는 음식의 핵심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맛 말이 다. ‘슬리퍼처럼 생겨 치아바타’라는 사실보다 그 이유가 더 중요하 다. 치아바타는 왜 하필 너부죽할까. 그 이유가 빵의 정체성은 물론, 맛과도 관련 있다. 제빵의 인과관계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 무도 말하지 않는다. 정답이 의외로 간단한데도 그렇다. 밀가루 대비 물의 비율이 여느 빵보다 높아 반죽이 처진다. 제빵의 핵심은 계량 이다. 밀가루 양을 기준으로 다른 재료의 비율을 백분율화한다. 이른 바 제빵사의 백분율 (Baker’s Percentage)이다. ‘물 60퍼센트’라면 밀가 루 무게 대비 물을 60퍼센트 써 반죽한다는 의미다. 또한 아무 빵집 에 들어가 집어든 아무 빵의 평균적인 밀가루 대 물의 비율이다. 탄성 이 적당해 다루기 쉽다. 치아바타는 이 비율을 훌쩍 넘긴다. 대개 물 이 70퍼센트 이상이다. 반죽이 거의 흐르다시피 묽고, 끈적거려 다루 기도 훨씬 어렵다. 발효를 시켜도 봉긋하게 솟아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슬리퍼’다.
수분의 차이가 궁극적으로 맛에도 영향을 미치는가? 물론이다. 총 체적인 경험으로서 맛 (flavor)은 기본 다섯 가지 맛 (taste , 짠맛, 단맛, 쓴 맛, 신맛, 감칠맛), 향 (aroma), 질감 (texture)의 복합체다. 이 가운데 빵 반죽의 수분 차이는 질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제빵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공간 전체를 데워 재료를 익히는 오븐 굽기는 두 단계의 과정이다. 첫째, 공간의 열 에너지가 옮겨가면서 반죽 내부의 수분이 빠져나온다. 제빵사가 ‘말리기’라 일컫는 과정이다. 또한 두 번에 걸 쳐 반죽을 부풀린 효모가 마지막으로 열에 반응하면서 한 단계 더 빵 을 부풀리고 장렬히 숨을 거둔다. 이때 효모가 불어넣은 공기 방울의 흔적이 빵의 속살에 남는다. 소위 ‘기공’이다.
치아바타는 반죽의 물 비율이 높아 공기 방울의 크기가 굉장히 불 규칙하고, 이 흔적이 그대로 남은 속살의 질감은 성긴 한편 촉촉하다. 물 비율이 높은 반죽의 특징이자 장점인데, ‘열린 속살 (open crumb)’ 로 통하며 이루기 쉽지 않다. 언급한 것처럼 일단 반죽 다루기부터 어 렵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반죽의 힘이 빠져 주저앉아버릴 수 있다. 대량 생산하는 ‘공장빵’의 속살이 100 퍼센트 닫혀 있는, 즉 조밀하고 규칙적인 이유가 있는 것. 따라서 슬리퍼처럼 길고 너부죽하더라도 기공이 조밀하다면 그건 치아바타가 아니다. 쉽게 만들기 위해 정체 성을 희생시킨 방증이다. 한편 두 번째는 맛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단 계다. 수분이 다 날아간 다음, 빵 겉면의 아미노산과 당 등이 열과 반응해 노릇한 색과 더불어 복잡한 맛을 들인다. 처음 발견한 프랑스 화학자의 성을 따서 마이야르 반응이라 부른다. 구운 스테이크의 표면 이나 간장의 짙은 색도 같은 원리 덕분이다. ‘탔다’는 이유로 겉이 노 릇한 빵을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고기도 마찬가지), 허연 빵 껍 데기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 물론 그 ‘치아바타’도 허여멀건 했지 만, 일단 모양에 집중하겠다.
한국 음식 문화의 현실과 음식 비평의 인정 투쟁
지하철역 간이 매장에서 팔리는 빵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길다면 참으로 길게 늘어놓았다. 이름과 생김새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문제 라고 했다. 이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실의 두 가지 얼굴이다. 아수라 백작처럼 두 상반된 것이 아닌, 같지만 크기가 다른 두 얼굴이 다. 작게는 무관심의 현실이다. 빵 하나를 만들면서도 이름과 생김새 사이의 잠재적 관계에 대해 따져보지 않는다. 그 결과 빵은 본질과 다 른 형식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다른 게 문제인가? 당연하다. 앞서 언 급한 것처럼 물 비율이 높을수록 빵 반죽은 다루기가 어렵다. 쉽게 다 루기 위해 빵의 정체성을 침해하면서까지 물 비율을 줄인다는 혐의가 짙다. 그 빵은 그냥 다른 게 아니라, 편하게 만들기 위해 달라졌다. 따 라서 열등하다.
그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열등한 빵을 먹고 산다. 선택은 다양해 보 이지만, 거의 대부분 열등하다. 따라서 침소봉대의 위기는 상존하지 만 현실의 더 큰, 두 번째 얼굴이 보인다. 양적 성장이 질적 성장을 담 보하지 않는 현실이다. 본디 이탈리아가 고향인 빵을 지하철 간이 매장에서도 살 수 있다. 이탈리아와 한국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줄었다.
밥이 주식이라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자랑스러워까지 하는 나라가 한 국이니, 밥과 빵 사이의 심정적 거리도 줄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 면 긍정적인 것 아닐까? 다양성의 확보만큼은 장려해야 하는 것 아닐 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그저 맛없는 빵이 한 종류 더 늘었을 뿐 이다. 지하철역까지 진출했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치아바타는 이미 많 이 대중화된 빵이다. 잘 만든 건 없지만 대부분 모양이라도 닮았다. 최소한 문법이라도 흉내낸다는 의미다. 하지만 분명 신제품인 빵이 그마저도 파괴했다. 결국 이것은 퇴보다.
음식을 둘러싼 현실도 치아바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소위 요리 전 성시대라고 한다. ‘쿡방’이 장르화되었고 그에 힘입어 셰프라 불리는 존재가 TV 쇼의 단골 출연자로 자리잡았다. 모두가 음식을 말한다. 관 련 서적이 쏟아져나온다. 식을 줄 모르는 ‘인문학’의 인기와 만나 ‘음 식 인문학’ 책이 잘 팔린다. 이 모든 것의 기초인 블로그나 트위터 등 SNS 는 음식점 유랑과 요리 시연 이야기 및 사진으로 진작 포화상태 다. 하지만 식탁은 여전히 초라하다. 식종과 가격 불문, 맛이 없다(‘맛 없음’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차차 규정하겠다). 혹자는 ‘세계 음식이 한데 모인 서울’이라 말하지만 모두 귤이었던 탱자다. 높은 임대료와 요식 자영업의 아마추어리즘, 음식과 요리에 대한 몰이해가 한데 뭉 쳐 실패는 거의 예견된 것이다. 잘 만든 한 접시를 찾기 위해 많은 노 력을 기울여야 한다. 외식만의 문제라고? 식탁을 스스로 차리기 위한 노력은 더 부질없다. 식재료는 질도, 다양성도 크게 떨어진다. 거의 비슷한 품종이라 한정된 조리법만 적용할 수 있는 감자 두 종류, 당도 로만 품질을 가르는 사과 등만이 소비자를 찾고 있다. 묵은 경구 빌어다 쓰는 걸 극도로 경계하지만 진정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판국 아닌가. “음식을 예전에 비해 더 유행이 타는 대상으로 취급한 나 머지, 식사는 더 사소한 문제가 되어버린”(『식탁의 기쁨』, 15쪽, 애덤 고 프닉, 이용재 옮김, 책읽는수요일, 2014) 현실이다.
이렇게 식사가 더 사소해진 현실 속에서 음식 비평의 필요성이 고 개를 든다. 비평의 본질, 즉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 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하는 행위’에 기댄 필요성이다. 음식이 왜 굳이 유행의 대상인지는 사실 납득하기 어렵지만, 이왕 쏠리는 관심으로 탄력 받아 음식을 담론의 장에 올려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하지 만 대상인 식사 .食事, ‘먹는 일’이니 결국 음식과 얽힌 모든 제반 사 안 및 행위.가 한없이 사소해지는 현실에서 음식 비평 또한 자유롭 지 않다. 그 사소함의 진창을 헤치고 ‘인정 투쟁’을 벌여야 하는 현실 에 처해 있다. 그렇다, ‘인정 투쟁’이라고 했다. ‘음식평론가’라는 직함 을 내걸고 전업으로 글을 쓰고 있지만, 이것은 인정해야 할 엄연한 현 실이다. 인정 투쟁의 과제는 여러 갈래다. 빠짐없이 구체적인 답을 제 시해야 하는, 촘촘한 과제다.
서양 음식 비평의 역사
대체 과제는 얼마나 촘촘한가. 음식 비평의 존재 자체를 증명해야 할 정도로 촘촘하다. 음식 비평 자체가 존재하며, 또한 한국에서도 가 능하다는 증명이다. 음식 문화 연구가가 “한식 조리법의 표준화도 이 뤄지지 않은 마당에 음식 비평은 어불성설이다(「음식 평론은 넘치고 담 론은 없다」, <경향신문> 2010 년 2월 2일자)”라고 말하는 현실이다. 5년 전 기사지만 아직도 유효하다. “입맛은 주관적이라 음식을 평가할 수 없다”거나 “한국에서 음식 비평이란 시기상조다”, 심지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는 주장마저 음식 비평의 존재 가능성을 일축하 려 든다. 더구나 이러한 회의가 음식 저널리즘 종사자로부터 나온다. 심지어 ‘음식비평가’라는 직함으로 공식 활동을 하는 존재도 거의 없 다시피하다. 하지만 이런 한국의 현실과 상관없이 음식 비평은 이미 존재한다. “음식이 당신을 정의한다(정확하게는 “ Tell me what you eat, and I will tell you who you are ”, 즉 ‘먹는 음식을 말해준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소’)”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익숙할 것이다. 소 위 음식의 전성시대를 맞아, 더 이상 다양할 수 없는 맥락으로 각자의 음식 세계관을 정당화하기 위해 쓰이는 경구다. 안 들어보기가 더 어렵다.
경구의 최초 발화자는 프랑스인 장 앙텔므 브리야사바랭 (Jean Anthelme Brillat-Savarin, 1755~1826)이다. 최초의 음식평론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저서 『미식 예찬』(홍서연 옮김, 르네상스, 2004)은 『맛의 생리 학(Physiologie du gout)』이라는 원제답게 나름 맛의 과학적 인과관계 분석을 통한 원리 이해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안타깝게도 비과학적이 다. 하지만 당시의 과학기술을 감안하면 적절하다. ‘기나피 (幾那皮, 키 니네의 원료)의 비만 치료 효과’ 등을 논하는 글(『미식예찬』, 323쪽)을 읽고 있노라면, 평양냉면집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메밀의 효능에 대한 글을 읽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어여쁜 비만 여성에게 승마 권하는 세 가지 조건(같은 책, 312 쪽)”은 어떠한가. 그는 본디 변호사이 자 정치가였으니, 궁극적으로 ‘풍류를 즐기는 마초’였다.
2010 년대에 “활기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말, 최신 유행에 맞게 재단된 새 여성용 승마복, 친절하고 잘 생긴 승마 교관 청년이 필요하 지만 이 모든 조건을 갖추는 것은 매우 드물며, 따라서 그녀들은 승마 를 하지 않는다(같은 책, 323~324 쪽)” 같은 문구를 읽고 있노라면 우스 꽝스럽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로 이해도 간다. 18~19세기는 석탄 오 븐의 일산화탄소에 프랑스 최고의 셰프1)가 요절하는 시대였다. 현재 이상적이라 여기는 비평과는 거리가 멀지만, 시대 맥락으로 보정하면 최소한의 역할은 한다.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했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숙적이었다는 그리모 드 라 레이니에르 (Alexandre Balthazar Laurent Grimod de La Reyniere, 1758~1837)가 음식 비평의 양대 선구자 노릇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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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앙토넹 카렘( Marie-Antoine Careme, 1784~1883 ). 프랑스 요리의 정수라 할 수 있는 4대 소스 의 문법을 최초로 정립한 셰프. 이후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Auguste Escoffier, 1846~1935) 가 5대 소스로 문법을 한 번 더 정리한 것이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다.
한편 브리야사바랭의 사후 약 70 년 뒤인 1900 년대에는, 타이어 회 사가 역사에 남을 새 시도를 선보였다. 요즘의 개념으로 치자면 ‘찾아 가는 맛집 (destination restaurant)’ 목록이 담긴 가이드북을 내기 시작 한 것. 차로 ‘맛집’을 찾아다닐수록 타이어가 빨리 닳아 소비가 촉 진될 거라는, 의외로 간단한 논리였다. 이 가이드북이 바로 프랑스 의 <미슐랭 가이드 (Michelin Guide)>다. 레스토랑에 별점(및 포크. 별 아랫등급으로 존재한다)을 매기는 시도는 비평의 가치 판단을 객관화 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A지역의 ‘가’ 레스토랑과 B지역의 ‘나’ 레 스토랑이 각자의 방법으로 좋다고 해도, 같은 수의 별을 받았다면 그 ‘좋음’의 수준이 호환 가능하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 한마디로 다른 레스토랑끼리 수평 및 수직 비교가 가능해졌다.
약 한 세기 동안 권위를 누렸지만, 항공기를 지나 인터넷 시대에 <미슐랭 가이드>의 위상은 많이 축소되었다. 이유는 크게 두 갈래다. 먼저 공신력을 향한 의구심이다. 신분을 비밀에 부친다는 평가단 .복 수 인력이라는 의미.의 방문 횟수를 비롯한 투명성 및 공정성, 프랑 스 음식 위주의 편향성 등이 내부 폭로 2)를 통해 도마에 올랐다. 인터 넷 시대의 정보 권력 분산 또한 약화를 가속화시켰다. 가이드 ‘북’ 자 체의 필요가 급격하게 감소한 것은 물론, 비슷한 정보를 덜 권위적 으로 생산 및 공유하는 인터넷 기반 플랫폼이 증가한 것. 옐프 (www. yelp.com)등의 평가 공유 사이트가 대표적인 예다. 물론 이러한 대안 에 결함이 없는 건 아니다. 여전히 평가의 공정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또한 인터넷 시대의 특징인 정보의 ‘질보다 양’에 기대어 성 장해 미슐랭과 수평 비교는 불가능하다. 아무래도 전문성은 떨어진다 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플랫폼의 출현이 미슐랭의 권위를 약화시 킨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2015 년, <미슐랭 가이드>는 3천만 달러 의 적자를 예상하고 있는 실정이다 (「Star-crossed」, James Boxell , <파이 낸셜타임스> 2011 년 7월 15일자, http://www.ft.com/cms/s/2/b02d5c1aadcb-11e0-9038-00144feabdc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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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슐랭 평가단이었던 파스칼 레미( Pascal Remy )가 2004 년 『 L’Inspecteur se Met a Table 』이라는 책을 썼다.
한편 현재 음식 비평의 최전선에는 신문의 레스토랑 리뷰가 존재 한다. 플랫폼 전이 시대에 신문 또한 본질적인 위기를 겪고 있지만 음 식은 오히려 인터넷의 접근성을 활용한, 라이프스타일 위주 콘텐츠로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시연 비디오 등의 시각성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한 음식 콘텐츠와 문화 비평의 영역이 겹치는 지점에 레스토랑 리뷰가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뉴욕타임 스>다. 1960 년대 초반 출범했는데, 일단 입지 조건이 돕는다. <뉴욕타 임스>의 근거지인 맨해튼은 다민족국가로서 미국의 상징과 같은 도 시다. 실제로 이민자의 관문 역할도 했다. 출신국 문화의 향수와 유럽 을 향한 동경.또는 자격지심?. 이 한데 어우러져 원동력으로 작용, 단일 도시로는 세계 최고의 음식 공동체다. 거기에 미슐랭식 별점. 한 개 더 많은 네 개가 최고점.으로 수평 및 수직 비교 가능한 객관 화 지표를 갖췄다.
이래저래 주 1회 실리는 <뉴욕타임스> 레스토랑 리뷰는, 미국 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미슐랭에 뒤지지 않는 권위를 지닌다. 관련 일화 도 많다. 가장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수배령’이다. 미슐랭 과 달리 <뉴욕타임스>의 레스토랑 리뷰는 1인 실명 체제로 운영된다. 평가자의 존재가 노출된다는 말이다. 평판은 즉 매상이니, 레스토랑 에서는 당연히 촉각을 세운다. 담당 기자의 이름과 얼굴 사진을 레스 토랑 주방에 붙여놓고 직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방문 발견 시 제보 하라는 것. 기자에게는 ‘서비스’ 조의 음식이, 직원에게는 ‘현상금’인 휴가와 포상금이 나간다. 이를 막고자 변장 및 메소드 연기로 무장해 레스토랑을 방문했다는 루스 라이쉴 (Ruth Reichl , 담당 기간 1993~1999) 의 일화는 책 한 권3)을 채울 정도로 유명하다. 이렇게 레스토랑 리뷰는 다른 문화 곁가지의 비평 기사와 더불어 미국 신문 문화면 콘텐츠의 한 국면을 맡는다. 인지도 차이야 있겠지만 도시의 이름을 제호에 내건 지역 신문은 대개 레스토랑 리뷰에 지면을 할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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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Garlic and Sapphires: The Secret Life of a Critic in Disguise 』. <뉴욕타임스>에서 레스 토랑 리뷰를 맡은 기자들이 대부분 그 시절의 회고록을 펴낸다는 사실 또한 지면의 위상 을 말해준다.
음식 비평의 접근과 방법론
신문 레스토랑 리뷰의 존재는 무엇을 시사하는가. 이를 뜯어보는 것이 한국 음식 비평의 인정 투쟁에 실마리를 제시한다. 바깥으로부 터 안으로 들어오며 살펴보자. 첫째, 비평 대상으로서 음식이다. 음식 은 어떻게 문학, 음악, 미술 등과 함께 비평의 대상으로서 지위를 누 릴 수 있을까. 달리 말해, 음식도 예술의 범주에 속할 수 있는 것일 까? 이에 대해 영국의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는 “요리 예술의 장점 은 다른 동물이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창조물로 우리를 기쁘게 하 면서도 우리가 뼈와 위장을 가진 영혼-육체적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 워준다는 것(『철학이 있는 식탁』, 297 쪽, 줄리언 바지니, 이용재 옮김, 이마, 2015)”이라 밝힌다. 음식이 예술에 속할 수 없는 이유로 가장 흔하게 꼽는 물질성 (corporeality) 또는 먹어서 사라지므로 떨쳐버릴 수 없는 덧없음(ephemerality)이 오히려 음식의 예술성을 강화한다는 논리다. 이는 비단 엘불리 (El Bulli) 등, 리뷰의 주 대상인 고급 레스토랑에만 적용할 수 있는 논리가 아니다. 물론, 그런 종류의 현대요리 (modernist cuisine) 레스토랑이 바지니의 요리 예술 논리에 더 잘 들어맞는 것은 사실이다. 서양 요리 기술의 기본을 바탕으로 물리 및 화학적 조작을 가한 질감 변화 등을 가해, 극도의 극장성 (theatricality)을 추구하기 때 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육체적 속성을 만족시켜준다면, 즉 육체 를 통한 감각 또는 생리학적 변화를 바탕으로 영혼에 호소한다면 음식이 비평의 대상이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두 번째는 평가의 대상이다. 무엇을 보는가. 음식 비평의 최전선이 ‘레스토랑 리뷰’라는 형식으로 존재하는 데 주목한다. 당연히 음식이 중심이지만, 총체적인 외식 경험이 비평의 대상이다. 2011 년부터 <뉴 욕타임스>의 레스토랑 비평을 맡고 있는 피트 웰스 (Pete Wells)는 인 터뷰에서 “때로 음식이 가장 떨어져 접객이나 분위기를 더 논하는 경 우도 있다. 하지만 리뷰의 초점은 바뀔 수 있어도, 기준은 그대로다. 특히 음식에 그렇다. 언제나 사려 깊은 조리, 세부 사항, 적합한 가격, 그리고 당연히 맛을 본다”고 자신의 평가 철학을 밝힌다 (「Pete Wells, Restaurant Critic, Answers Readers’ Questions 」, <뉴욕타임스> 2012 년 12월 3일자). 이러한 평가 철학이 세 번째, 평가의 방법론 설명에 필요한 멍 석을 깔아준다. ‘사려 깊은 조리, 세부 사항, 적합한 가격’은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앞에서도 언급한 공식, ‘총체적 경험으로서 맛 (flavor)= 맛(taste)+향(aroma)+질감(texture)’을 음식 평가의 기본 원칙으로 활 용한다. 해당 음식이 맛있으려면 ‘사려 깊은 조리’가 필요한데, 이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가능하다. 첫째, 재료와 조리의 내부 논 리 이해다. 재료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최적의 조리법을 고안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둘째, 이러한 이해의 바탕 위에 서 ‘세부 사항’을 잘 지켜야 한다. 재료의 익힌 상태, 간 등이 적절해 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이라는 치킨을 예로 들어보자. 닭은 ‘빈 캔버스’라고 불릴 정도로 중립적인 맛을 지녔으며, 살이 섬 세하면서도 부위마다 특성이 달라 익히기가 의외로 쉽지 않다. 따라서 ‘옷’을 입혀 보호하는 조리법인 튀김이 최적의 조리법이다. 이것이 ‘사려 깊은 조리’의 방편이다. 한편 이러한 원칙에 입각해 실제로 튀 길 때에는 속살은 너무 익어 뻣뻣하지 않은 한편, 겉은 타지 않으면서 도 바삭하게 익혀야 한다. 요즘은 여기에 과학이 길잡이 역할을 맡는 다. 반도체와 허벌 망원경보다 ‘물은 100 ℃에서 끓는다’의 과학이다. 의무교육의 장 안에서 배운 수준이면 요리에서 필요한 사물 변화의 이치를 밝히기에 충분하다는 말이다. 튀김이라면 열의 전도, 물의 증 발,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마이야르 반응이면 충분하다. 한편 거의 대 부분의 음식점에서 지키지 않지만, 살과 튀김옷에 골고루 간을 분배 하는 것 또한 ‘세부 사항’에 신경 쓰는 방편이다.
이 몇 가지 요소를 준수하지 않았을 때, 음식은 맛있어지는 데 실 패한다. 기술적 실패로 인한 맛없음이다. 원인이 방만일 수도, 혹은 숙련도 부족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같은 실패다. 여기에 ‘적합 한 가격’이 설정하는 재료의 수준이 또 다른 맛없음의 영역을 설정 한다. 가격과 재료의 관계는 크게 둘로 나뉜다. 첫 번째는 희귀성이 다. ‘세계 3대 미식 재료’라 일컫는 철갑상어 알이나 송로버섯, 부풀 어 오른 거위 간 등이 여기에 속한다. 맛있음을 절대적으로 보장하므 로 비싸다. 두 번째는 신선도다. 싼 재료일수록 신선도가 떨어지고, ‘GIGO(Garbage In Garbage Out)’의 원칙에 따라 음식 맛도 떨어진다. 물론, 두 영역 사이에 느슨히 겹치는 부분도 있다는 사족은 달아둬야 하겠다. 여기까지가 기본적인 완성도의 영역이다. 이 영역이 일정 수 준 담보되어야 비평의 진짜 영역인 취향을 논할 수 있다. 맛 (flavor)의 전 영역에 걸쳐 취향 논쟁이 가능하지만 특히 결정적인 표정을 좌우 하는 향에서 취향이 많이 갈린다. 대표적인 예가 요즘 부쩍 는 베트남 쌀국수의 고수다. 한편 서비스는 정서적 실패로 인한 맛없음을 좌우한다. 가격대가 올라갈수록 서비스의 중요성 또한 커지는데, 한국의 레스토랑이 특히 이 측면의 세부 사항에서 공통적으로 취약하다. 예 약 확인 전화를 걸지 않는 등 자질구레하지만 중요한 요소에 특히 그 러한 현실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여기까지 늘어놓으면 반문이 바로 꼬리를 잇는다. 그래서 그 ‘잘’ 과 ‘적절함’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입맛은 주관적인 것’ 아 닌가? “ De gustibus non est disputandum ”이라는 말도 있다. ‘취향 (=입맛)은 논쟁 대상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이래저래 음식의 평가, 더 나아가 비평은 무용하다는 게 요지다. 쉽게 반박 가능하다. 일단 모 든 판단은 주관적이지만, 그 판단 체계를 구축하는 요소는 한없이 객 관적일 수 있다. 또한 능력이든 지식이든, 주관적 판단력 자체의 차이 도 분명히 존재한다. ‘입맛’의 가장 바깥쪽 영역, 즉 생리적인 맛(미각) 부터 그렇다. ‘입맛은 주관적인 것’이라는 말로 무용론을 제기하는 부 류는 음식 평가가 미각만으로 가능한 것이라 전제하는 오류를 범한 다. 설사 진짜 그렇다고 해도 시각이나 청각처럼 능력의 차이가 분명 히 존재한다. 단위 면적당 맛 봉오리의 밀도가 높은 사람이 맛도 더 많이 느낀다. 이 밀도를 측정하는 검사도 있으며 ‘슈퍼테이스터 (super taster)’라 일컫는 우수 집단도 존재한다 (『Taste What You’re Missing』, p.17., Barb Stuckey, Simon & Schuster, 2013).
그렇다면 지식은 어떠한가. 딱히 부연 설명이 필요 없다. “아는 게 힘이다”라는 말은 왜 존재하는가. 뻔하지만 진실이다. 미술사학자 유 홍준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인기를 얻기 시작할 때, “아는 만큼 보인다”는 슬로건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다른 어느 분야라고 예외겠는가. 음식을 판단하는 지식 기반이 다르다면, 평가 또한 달라질 수밖 에 없는 것이다. 이는 이미 포화상태인 역사 등의 ‘인문학’적 지식은 물론, 음식의 물질성에 충실한 기술적인 측면까지 아우른다. 아주 자 명한 문제 아닐까. 비평가의 존재 의미나 권위에 회의를 품는 것과 비 평 자체의 존재를 무시하는 건 별개다. ‘입맛은 주관적이다’라는 말에 는 후자의 의도가 짙게 배어 있다. 우문 (愚問)에 우답 (愚答)하자면, 모 든 다른 분야의 예술과 그 비평 또한 한없이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돌아간다. 개개의 비평, 또는 비평자의 평가나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그렇다고 해당 문화 분야의 비평 자체의 존재 를 부정하는 경우는 없다. 음식 비평도 마찬가지다. ‘주관적 입맛’ 논 쟁은 음식 비평의 인정 투쟁에 본질적으로 아무런 과제를 안기지 못 한다.
음식 비평과 한국의 정서적 풍경
우리나라의 사정은 어떠한가. 레스토랑 리뷰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 지 않는다. 정치적 색채와 상관없이 가장 풍성한 문화면을 자랑하는 <조선일보>조차 시도하지 않는다. 언론 자체의 역사가 짧아서? 그렇 다고 보기도 어렵다. 1851 년에 창간됐으니, <뉴욕타임스>가 오래되기 는 했다. 하지만 <조선일보>도 1920 년 창간되었다. 70년의 차이가 커 보이기는 해도, 100 년이 코앞이다. 역사나 저력이 딸려서라고만 볼 수 없다. 이유는 따로 있다. 일단은 정서적 측면이다. 꽤 폭이 넓으니 아주 바깥쪽, 즉 음식 외적인 문제부터 훑어야 한다. 하지만 간단하다. 2015 년의 한국에는 제대로 된 비평 문화가 없다. 비평의 토양이 몹시 황폐하다. 그 단적인 예가 최근 문학계에서 불거져 나온 신경숙 표절 논쟁이다. 문학 비평을 논하는 지면이 아니므로 현상 이상을 언급하 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논란의 와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개념(또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주례사 비평’이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쁜 점은 말하지 않는다. 좋은 점은 찾아내 말해준다. 비평할 비 (批)자는 원래 ‘손 (手)으로 치다’는 뜻이었다. 이후 ‘치다 →때리다→(때려서) 바 로잡다 →비평 (批評)하다’ 등의 뜻이 생긴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주례 사 비평은 결국 비평이 아니다.
평론이 존재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다른 예술 제반 분야의 사정 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례사’처럼 극단적이고 면구스러운 표현까 지 쓰지 않을 뿐이다. ‘비평가’라고 칭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해설자’ 다. 평가나 가치 판단보다 설명의 비중이 더 크다. 좋은 점만 말하지 않지만 비평이라고 보기 어렵다. 영화가 대표적이다. 이유가 뭘까. 일 단 문화권을 막론한 경향이 있다. 비평을 지양하는 글에서 기술적 인 요소를 배제하는 것이다. 모를 수도 있고, 갈수록 복잡한 것 또는 글 읽기를 싫어하는 요즘의 경향 .반 (反)지성주의?. 를 수용한 결과 일 수도 있다. 대신 서사, 캐릭터 등에 집중한다. 그 탓에 “비평이 일 종의 라이프스타일 저널리즘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Please, critics, write about the filmmaking」, Matt Zoller Seitz, http://www.rogerebert.com/mzs/please-critics-write-about-the-filmmaking).
한편 한국만의 특수성도 분명 존재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한 문제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일단 학벌, 혈연, 지연 등으로 연결된 좁은 사회가 문제다. 모두가 얽혀 있다 보니 비평 시 고려해야 할 입장이 너무 많다. 또한 비판과 비난의 적절한 문법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다. 쓰고 말하거나 읽고 듣거나, 적절히 표현할 줄도 흡수할 줄 도 모른다. 나의 창작물에 대한 비판을 나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받 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수동적 공격성 (passive-aggressive)도 한몫 거든다. 끝없이 에두르거나 말을 돌려 의도를 감춰야 살아남는 다. 이런 현실 속에서 직설적이고 경제적인 화법은 공격적이라 낙인 찍힌다.
이 모든 여건 위에 음식이 내재한 정서적 및 감각적 특성이 얽혀 음식 비평의 인정 투쟁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든다. 전자는 ‘밥상머 리에서 투정 말라’는 가난의 가치관이고, 후자는 앞서도 언급한, ‘입 맛은 주관적인 것’이라는 면피용 상대주의다. 그 둘이 손을 맞잡으면, 국수주의에 무한 수렴하는 민족주의가 빗장을 쥐어준다. ‘한식이니까 우수하다’는, 고 이규태나 이어령식의 논리다. 꿈보다 좋은 해몽이랄 까. 비빔밥이 가장 좋은 예다. 간편함을 좇아야 하는 궁여지책의 산물 이었을 가능성 높은 비빔밥이, “고립식이 아니라 관계와 융합을 통한 혼합식의 김치 문화를 극단화한 음식”(『디지로그』, 145 쪽, 이어령 지음, 생각의 나무, 2006)으로 탈바꿈하는 논리다. 맵고 단 고추장이 맛을, 깨 를 태우듯 볶아 짠 기름이 향을, 찰기 많은 단립종 쌀이 질감을 압도 하는 음식이 비빔밥이다. 이래도 저래도 같은 맛의 비빔밥의 가치를 민족주의가 격상시킨다. 그래봐야 본질은 바뀌지 않으니 가치를 올려 주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자기 만족 외에 큰 의미는 없다. 또한, 서양 음식도 각 요소가 고립되지 않는다. 소스가 접시에 담긴 모든 요소의 맛과 질감을 한데 아우르는 역할을 맡는다.
그렇게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그고, 매체는 음식 문화에 관한 비판적 시각을 원칙적으로 봉쇄한다. 저널리즘은 존재하지만 엄연히 그 일부 여야 할 비평은 찾아볼 수 없다. 레스토랑 리뷰 같은 건 안 된다. 오직 장점만을 말하는 ‘맛집 추천’만이 유효하다. 한국의 음식 문화에 대한 비판도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정체성을 두고 갈림길에 놓인 한식은 절대 도마에 오를 수 없다. 이러한 정서가 한국에 음식 비평이 존재하 지 못하게 만드는 진짜 걸림돌이다. “표준화되지 않은 한식 조리법” (「음식 평론은 넘치고 담론은 없다」, <경향신문> 2010 년 2월 2일자)이 문제 가 아닌 것이다. 또한 조금 덧붙이자면, 한식의 조리법은 설사 성문화 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표준화된 상태다. ‘양념+재료’의 문법이 이 미 공감대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치에 맞는지 여부를 따지는 건 별개 문제지만 성문화도 되었다. 굳이 쇠고기에는 간장, 돼지고기에 는 고추장 바탕 양념을 쓰는 경우가 좋은 예다.
굳이 <뉴욕타임스>와 <조선일보>의 토양을 비교한 이유도 이런 현 실을 비교하기 위해서다. 경험도 해보았다. 2014 년, 토요일 문화면의 음식 칼럼을 격주로 연재한 적이 있다. 구체적인 주제 등에 대한 언질 없이 제안을 받아 한식을 위시한 한국 음식 문화의 개선점을 위주로 기획, 원고를 두 편 써 보냈다. 유행인 단팥빵을 비롯, 소위 ‘건강빵’ 의 천연발효종 무용론(건강 효과가 검증된 바 없으며, 단맛 중심 단팥빵에 는 의미가 없다)과 뚝배기 등 국물 음식의 극단적인 온도가 주제였다. 결과는 반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한다는 게 요지였다. 물론 반려의 행간은 아주 넓었다. 비판을 원하지 않는 것. 메우느라 우여곡 절을 겪었다. 서너 차례 수정해도 소재와 논조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 하지 못해 심지어 연재 시작 전 고사까지 해보았다. 결국 시작은 했지만 이후도 순탄치는 않았다. 끊이지 않는 원칙적 의견 조율의 어려움으로 양측 모두 지쳐버린 것. 결국 연재는 예정보다도 훨씬 일찍 막을 내렸다.
인정 투쟁의 과제 분류
인정 투쟁을 벌이는 입장에서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 까. 나는 현실을 50대 50의 조합으로 인식한다. 위에서 언급한 정서 적 이유의 근간이 둘로 나뉘는데, 각각 변화 가능 및 불가능한 것으 로 본다는 말이다. 후자부터 살펴보자. 간단히 말해 현존하는 주류 음 식 세계관의 안티테제다. 역사학자 레이철 로던 (Rachel Laudan)의 표 현을 빌자면, 음식 모더니즘 (Culinary Modernism , 주류)에 반하는 러다 이즘(Luddism , 비주류)이다.4) 빠르고 효율적인 현대적 대량 생산에 반 대하는 모든 과거 회귀, 또는 보수적 개념을 한데 아우를 수 있다. 유 기농을 비롯해 동물복지, 제철 및 지역주의, 유전자 조작 식품 (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반대를 비롯해 공정무역, 슬로푸드, 소 량 생산 공방 음식 (artisanal food , 치즈나 빵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화학 조미료나 설탕, 밀가루, 고기의 마블링 (marbling , 살결 사이의 낀 지방) 처럼 개별 식재료에 대한 음모론에 가까운 건강유해론까지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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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세한 설명은 저자의 『 A Plea for Culinary Modernism 』을 참고할 것. https://www.jacobinmag.com/2015/05/slow-food-artisanal-natural-preservatives/
러다이즘은 세계적인 경향인데다가, 기본적으로 두려움에 호소하 는 전략을 쓰기 때문에 너무 잘 먹힌다. 또한 수용자는 대개 정치적 입장을 바탕으로 종교에 가까운 신념을 품고 있으므로 쉽사리 설득 당하지도 않는다. 과학에 바탕한 반론이 존재하더라도 인정하지 않는 것. 음식 러다이즘의 기세가 꺾일 거라 생각하지 않는 이유다. MSG 유해론이 가장 높은 인지도에 빛나는 예다. 아무리 무해론을 설명해 도 믿지 않는 사람은 믿지 않을 뿐이다. ‘어쨌든 언젠가는 건강에 나 쁜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는 입장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 상관없이 반론은 필요하다. 적어도 입지의 고착화는 막아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현존하는 악(모더니즘)과 선(러다이즘)의 이분법 구도 말 이다. 비판적 고찰 없이 모더니즘을 어둠으로, 러다이즘을 빛으로 인 식하지만 현실은 정확히 그렇지 않다. 선악의 위치도 고정된 것이 아 니며 그 사이에 엄연한 회색지대가 존재한다. 또한 흔히 모호함을 의 미하는 원래 표현 “ shades of grey ”와 달리 그 음영이 아주 선명하다 는 것 또한 증명할 필요는 있다. 한마디로 칼로 무 자르듯 간단한 문 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위에서 나열한 모든 모더니즘.러다이즘의 대립 관계에, 논박에 가 까운 부연 설명이 가능하다. 이제는 실생활에 가장 널리 퍼진 유기 농을 예로 들어보자. 큰 그림을 본다면, 유기농은 결국 자연 선호 사 상.이제 ‘주의’라 일컬을 시기는 지났다.이다. 농약, 화학비료 등 으로 인간이 몰아붙이는 단품종 대량 경작 (monoculture)에서 벗어나, 자연 조건과 지력에 의존하는 다품종 소량 경작 (multiculture)의 소규 모 네트워크를 연결하자는 개념 5)이다. 장밋빛으로 들리지만 일단 전 제 자체에 결함이 있다. 자연이 정확하게 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 간은 오랜 세월에 걸쳐, 문자 그대로 입맛에 맞게 자연을 뜯어고쳤다. 맛과 생산량의 개선을 위한 품종개량 말이다. 따라서 진짜 자연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만큼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해야 유지 관리가 가능하다. 미국 전역의 사정이 똑같지 만, 특히 유기농산물의 최대 생산지인 캘리포니아 주의 생산력은 불 법 이민 노동력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나머 지 자원도 마찬가지다. 하루 아침에 지구 전체 식재료가 유기농으로 전환된다고 가정해보자. 현재 지구의 자원, 특히 물로는 감당할 수가 없다. 지구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없다는 말이다. 맛과 영양, 안전 의 문제에서도 유기농이 월등히 우월하다고 보기 어렵다. 유기농이 맛과 영양의 우월함을 자동적으로 보장하지 않으며, 비유기농과 비교 해 안전도의 격차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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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국의 셰프 댄 바버( Dan Barber )의 근저 『 The Third Plate 』가 이에 대해 논하고 있다.
러다이트 주의의 거의 모든 논리가 이런 식으로 부연 설명 및 논박 가능하다. GMO ? 인류가 지금까지 해온 품종개량의 일부다. 1930 년 이후, 인류는 방사능 노출을 통한 품종개량도 지속적으로 실행해왔 다. 또한 음모론 이상으로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이 밝혀진 바 없고, 아프리카 등 만성 기근에 시달리는 지역에는 유효한 해법이다. 지역 주의는 어떤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거리 에 반비례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집약적 재배 및 사육과 운송 체계가 ‘탄소 발자국 (carbon footprint)’를 최소화한다. 공교롭게도 양의 해를 맞아 한국에서 인지도를 넓히는 양고기의 경우처럼, 뉴질랜드 등에서 수입하는 것이 가까운 대관령의 것보다 환경에 영향을 덜 미칠 수 있 다는 말이다. 곡물 비육과 마블링은? 풀 먹인 고기는 특유의 누린내 를 풍길 수 있으며 마블링이 없으면 고기는 더 질길 수도 맛이 떨어 질 수도 있다. 지방이 맛의 매개체이기 때문. 하지만 풀 먹인 고기의 가격이 더 높다. 소비자는 때로 그 사실조차 모른 채 풀 먹은 고기가 우월할 거라는 생각에 선택의 폭을 넓히려다 망설이게 된다.
물론 음식 러다이즘에는 긍정적인 역할도 있다. 한마디로 다양성을 확보해준다. ‘더 많은 인력=품질의 향상=가치 제고’라는 공식에 입각, 음식 러다이즘은 고급 외식의 핵심이다. 일단 재료부터 그렇다. 유기 농 목장의 고기, 손 낚시로 잡은 생선, 소규모 공방의 빵이나 치즈, 레 스토랑 자체 운영의 텃밭 등에서 나온 채소 등을 쓴다. 이를 많은 요 리사의 분업 체계를 이용, 손질 및 요리한다. 단순 노동력이 아닌, 문 제 해결 능력을 지닌 고급 노동력의 집약적 접근이다. 하지만 고급 외 식 자체를 음식 러다이즘의 발현이라 보기는 어렵다. 기술집약적 측 면도 있기 때문. 저온 조리기, 원심 분리기 등 최신 과학기술의 산물 인 조리기구로 효율성을 좇는다. 말하자면 ‘흑묘백묘론’에 입각한 절 충적 접근이며 인간과 기계의 혼재다. 손님에게 최고의 경험을 선사 한다는 원칙 아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맛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결국 음식 러다이즘 또한 양날의 칼로, 본질적으로는 회색지대의 뚜렷한 음영에 공헌한다.
한편 나머지 절반은 한국 음식 저널리즘 종사자 다수가 견지하는 포지션인 ‘부엌의 타자’다. 바뀔 수 있고 또 바뀌어야 한다. 음식의 울 타리 안쪽에서도 당연히 의미 있지만, 사실 바깥쪽에서 더 중요하다. 이는 결국 오랜 세월 고착된 부엌의 성역학관계를 해체할 기회와 맞 닿아 있기 때문이다. 삶의 영역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의 경계 및 차별 철폐에 부엌의 타자 몰아내기가 핵심 과업이라는 말이다. 사 실 음식 저널리즘 전체를 볼 때 변화 또는 전이는 이미 현재진행형이 다. 브리야사바랭 같은 마초 관료가 선구자 역할을 했지만, 이제 서 양 음식 저널리즘에서 부엌의 타자는 발언권을 계속해서 잃어가고 있 다. 대략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앞서 말한 성역학관계의 변화다. 남녀평등을 넘어 동성결혼 합법화까지, 성역할을 향한 보수적 편견 의 해체가 얼개를 잡고 있다. 둘째, 앞서 언급한 인간의 육체적 속성 에 얽힌 음식만의 특성이다. 조리의 기술적 측면이 요리 이해의 열쇠 인데, 삶과 육체에 워낙 밀접하다 보니 비평이 필요한 여느 예술 분야 보다 더 쉽고도 깊은 이해가 가능하다. 셋째, 이를 위한 여건이 인간 역사에서 여느 때보다 잘 발달되어 있다. 한마디로 조리 교육이 대중 적이고 또한 체계적이라는 말이다. 동네 조리기구 전문점에서 벌이는 간단한 시연 및 체험 수업부터 18~24개월에 이르는 조리학교 정식 입학까지 다양하다. 부엌의 타자로부터 벗어나고픈 의지만 있다면 방 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여건을 바탕으로 요즘은 요리학교 졸업 후 바로 음식 저널리즘-비평 쪽으로 선회하는 경우도 눈에 띈다.
이에 비하면 한국 음식 저널리즘은 갈 길이 멀다. 선구자 격인 허 균(1569~1618)과 정약용 (1762~1836) 이래 아직까지도 주방의 타자. 남성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비판적이든 아니든, 음식 문화를 활발히 논한 인물들을 살펴보라. 공통점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이규태나 이어령은 물론, 여러 권의 맛집 유랑기와 더불어 “선주후면 (先酒後麵, 술을 먼저 마시고 면을 먹는다는 뜻)”이라는 표현을 남긴 소설 가 백파 홍성유도 있다. 스스로를 “먹을 것만 탐한 사람”이라 지칭하 는 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부임지, 심지어 유배지마저 특산물이 있는 지방으로 로비를 벌여 갔다는 450 년 전의 사대부 남성 허균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포지션이다. 좋게 말하면 풍류를 누리는 캐릭터였고, 나쁘게 말하면 ‘에미야 국이 짜다’를 고민 없이 뱉을 주방의 타자다. 음식 저널리즘 종사자들이 ‘음식 비평은 시기상조다’와 같은 발언을 하 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 대부분이 부엌의 타자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그럴 의향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학 (學)’이나 정치의 경계로 음식을 몰아붙인다. 대표적 존재가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이 다. 주방의 타자라는 공통점 아래, 그의 포지션은 일종의 ‘하이브리 드’다. 소위 ‘ 386 세대’의 반미 및 반자본주의와 <농민신문>기자의 전 력이 한데 엮인 음식 러다이즘과 부엌의 타자에 충실한 보수적 가부 장적 태도를 각각 절반씩 취한다. 그 결과 ‘음식의 문제를 정치로 해 결한다’가 그의 전방위적 비판의 만트라다.
최근의 백종원 비판이 그의 포지션을 잘 보여준다. 음식 러다이즘에 입각해 백종원이 즐겨 쓰는 설탕을 비판하는 한편 “인간은 적당히 짜 고 달기만 하면 맛있다고 느낀다. 그 밸런스를 맞추는 것은 쉽다(<한국 일보> ‘눈( SNS )사람’ 인터뷰, http://interview.hankookilbo.com/v/c607ba 4cca144794a8a7caf36db10589/#1000)”며 주방의 타자로서 조리의 육체 성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었다. 이러한 비판이 공격을 받자 특유의 ‘엄 마론’을 펼쳤다. ‘엄마가 맞벌이를 나가 사랑을 받지 못한 80년대 이후 출생자들이 백종원을 ‘대리 엄마’로 인식한다(「‘백주부’ 백종원에 열광? 맞벌이엄마 사랑 결핍 때문」, 황교익, <문화일보> 2015 년 7월 10일자)’는 것 이다. 양육과 조리를 비롯한 가사 노동은 여성의 몫이라는 가부장적 시각이다. 여기에 “국가는 엄마가 자신의 품에서 자식을 온전히 키울 때까지, 적어도 6세까지, 경제적으로 완벽히 보장해주어야 한다(「말 하지 않은 것도 말하였다 하는가」, 황교익 블로그, 2015 년 7월 12일, http://foodi2.blog.me/220418145724)”는 정치적 포지션.포퓰리즘?. 이 모 두를 한데 아우른다.
이러한 황교익의 극단적인 포지션이 한국 음식 비평의 인정 투쟁 의 마지막이자 사실은 처음인 과제를 설정한다. 음식을 바라보는 온 갖 필터의 범람 속에서, 음식을 음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맛에 대 해 더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식을 예전에 비해 더 유행이 타 는 대상으로 취급한 나머지, 식사는 더 사소한 문제가 되어버린” 현 실이라고 했다. 우리는 음식과의 관계 조절에 능숙하지 않다. 대개 너 무나도 가깝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거리를 벌리고 만다. 음식을 정치 의 산물이나 추억의 매개체 취급함으로써 한없이 영혼의 영역으로 보 낸다. 또한 정반대로, 때워야 하는 에너지원.음식이라기보다 연료. 으로만 인식해 한없이 육체적 영역으로 보내기도 한다. 필요한 건 균 형이다. 육체로 화한 영혼으로서 인간이자 개별적 존재를 만족시켜주 는 음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맨 처음 언급했던, 가치를 높여주는 비평이다. 사실은 중립 지점을 찾아주는 비평이지만, 외적 가치에 휩쓸려 워낙 산지사방에 흩어진 음식의 좌표를 감안하면 그 제자리를 찾아줄 때 역설적으로 음식의 가치가 올라간다.
이용재
1975 년 경기 수원 출생. 저서 『외식의 품격』, 역서 『철학이 있는 식탁』, 『식탁의 기쁨』, 『뉴욕의 맛 모모푸쿠』, 『모든 것을 먹어본 남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