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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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우리들은 꽃인가
우리들은 꽃인가 정희성 칠십 년대 시인들 몇이 만나 얘기를 나누다가 불쑥 문정희 시인이 물었다 우리들이 꽃인가요? 나는 아득히 멀리 두고 온 별을 생각했다 생각 끝에 나는 꽃을 피운 적이 없다고 했다 벌도 나비도 날아들지 않는 이 맥 빠진 불임의 시대 좀처럼 시는 내게로 오지 않고 어느 날 문득 나는 방전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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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물구나무서서 보다
물구나무서서 보다 정희성 이것은 정말 거꾸로 된 세상* 집 잃은 시민들이 시위하다 불타 죽은 아침 억울해 울면서 항복하듯 다리를 들고 팔목이 시도록 맨손으로 우리는 이 땅을 디딜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가난이 제 탓만도 아닌데 우리들의 시대는 집이 헐린 채 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도심 속의 테러리스트라 부르고 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 사람들한테 쫓겨 가자 지구로 간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요르단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소년은 언젠가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장난감 총을 들고 전사의 꿈을 키우고 있고 아마 머지않아 테러리스트가 될 것이다 이것은 정말 거꾸로 된 세상, 이상한 나라의 황혼이 짙어지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기 시작하고 지금 집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죄를 지어 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서둘러 촛불을 들고 어두운 감옥으로 가리라 감옥 밖이 차라리 감옥인 세상이기에 *하이네의 「거꾸로 된 세상」의 첫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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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맞수
맞수 정희성 바둑판을 무겁게 만든 건 이유가 있어서일 게다. 장기를 잘 두던 앞집 친구 일남이와 마주 앉으면 저녁 먹으라고 부르러 올 때까지 일어설 줄을 몰랐는데 그걸 늘 못 마땅히 여기던 아버지가 하루는 장기판 앞에 나를 불러 앉혔다. 열 판이면 열 판 아버지는 외퉁수에 몰려 쩔쩔 매었고 일수불퇴인지라 물려달라는 소리도 못 하고 내가 오줌 누러 갔다 와도 얼굴이 벌개진 채 그냥 그 자리에 앉아 끙끙 앓으며 장기알만 만지작거리시는 것이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남들이 늘 하는 대로 따먹은 상(象)이나 마(馬) 따위를 딸그락거리며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나 하고 약을 올렸던 것인데 그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 하며 장기판이 그만 박살이 나고 말았다. 이놈의 자식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