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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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낮의 책 밤의 책
낮의 책 밤의 책 장혜령 바다가 책이라면 파도는 바다의 무수한 페이지들이다. 달은 이 책의 보이지 않는 저자다. 그는 책으로부터 38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오늘도 페이지를 쓰고, 또다시 쓰기를 거듭한다. 책은 그래서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같았던 적이 없다. 바다가 언제 처음 쓰이기 시작했는지 아는 사람은 지구상에 없다. 다만 우리는 40억 년 전과 만 년 전의 책이 다르고, 4만 년 전과 오늘의 책이 다르리라 상상할 따름이다. 다 쓴 페이지를 넘기려고 달이 책장 한끝을 잡아당길 때, 밀물이 인다. 만 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반대쪽 페이지에도 밀물이 인다. 책이 너무 커서 한쪽 페이지가 낮에 속해 있다면 반대쪽 페이지는 밤에 속해 있다. 책의 절반은 달에 의해 바뀌지만, 나머지 절반은 그 자신의 꿈속에서 스스로를 바꿔낸다. 그래서, 저자는 한 권의 책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썼고 무엇을 쓰지 않았는지 다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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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파도에게
파도에게 장혜령 1. 프랑시스 퐁주는 바다가 누구에게도 깊이 읽힌 적 없는 거대한 책이라 했다. 바다가 책이라면 파도는 바다의 무수한 페이지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해안가를 서성이며 파도를 넘겨다보거나, 배를 타고 물살의 표면을 오르내리며 그것을 읽었다고 믿을 뿐이다. 퐁주는 파도가 먼 곳으로부터 와서 말을 꺼내며 죽음을 맞는다고 썼다. 파도의 뒤를 따라 밀려오던 것들 또한 파도를 따라 말하며 마지막 숨을 거둔다. 모두가 서로 다른 상대를 향해 단 한 번 이름을 부른다.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는 그래서 수천의 이름들이 맞부딪히는 소리다. 2. 안개 낀 새벽, 인적 없는 길을 걷다가 누군가 부르는 듯해 뒤돌아볼 때가 있다. 파도의 마지막 말을 들은 안개가 젖은 몸을 끌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말하려고, 대신 말하려고. 먼 곳에서부터 그것은 왔다. 그래선가, 언젠가부터 나는 안개를 파도의 노래라 부른다. 노래는 누군가의 말이었다가 어느 누구나의 말이 된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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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백지와 마주하기-서序
백지白紙라는 흰 손의 손등을, 뒤집어도 손등뿐인 흰 꽃잎의 배면을 생각했다. * 일본 사람들은 생각하다라는 단어로 사고하는 것과 느끼는 것 양쪽 모두를 표현했다. - 장혜령, 「눈의 손등」 부분(『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문학동네, 2021) “새의 날개를 닮은, 고요히 물결치는 백白의 입구로 들어가라” 그녀가 말했다. “그것이 너의 내부다. 너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은 희었고 내 앞에서 슬픔처럼 부드럽게 벌어지며 열렸다. 나는 걸었다. 빛의 계조를 따라 어두운 흰빛에서 밝은 흰빛으로, 점점 더 밝은 흰빛으로. - 장혜령, 「백」 부분(『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문학동네, 2021) 언어가 언어라서 함의하고 있는 고통이 스스로를 향하건 타자를 향하건 언어는 존재 자체로 구제불능인 병적 상태-중증 환자-수동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