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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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여름 얼음 어른
여름 얼음 어른 이현호 어려서는 하성이와 잘 어울렸다 동네 친구들과 피구도 와리가리도 하고 얼음땡도 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우리는 얼음 하고 멈춰 있는 하성이 몰래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뒤로 하성이는 사라졌다 하성이는 녹아버렸다고 말한 친구는 이름도 까먹었지만 한여름이면 종종 하성이 생각이 난다 어른이 되며 몸과 마음이 얼어붙는 일이 많고 기다려도 아무도 땡 하러 오지 않는다 빈 유리잔에 얼음이 땡 하고 떨어지는 소리 어려서는 쓰기만 했던 것들을 이제는 너무 많이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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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무명 낭독회
무명 낭독회 이현호 일대가 정전이래요 식당에 있던 사람들은 밥도 못 먹고 계산도 못 해서 갇혀 있대요 밖으로 나갔던 서점 주인이 촛불을 들고 돌아오며 말한다 이곳을 처음으로 방문한 유명 시인의 낭독회였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도 죽고 삶을 생각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지만”이라는 구절을 막 읽었을 때 빛이 사라졌다 사람들의 윤곽만이 귀신처럼 떠 있는 반지하 “유명한 시인이 무명(無明)에 있네요.” 누군가 농담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모두의 주머니에서 한꺼번에 경보음이 울리고 정전 안내문자인 줄 알았던 그것은 우리보다 더 먼 지방의 소도시에서 지진이 발생했다고 한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 시인은 지금 시가 왔다고 말했다 다시 불이 들어오자 그는 방금 시가 다녀갔으므로 더 시를 읽을 필요 없다고 한다 그러면 이제 뭐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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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들개를 위하여
그것이 앞발보다 신성할 까닭은 없다 어둠의 골조가 단단하게 발기하는 시간 이현호 들개를 위하여 그것에 닿지 못한 혓바닥을 거스러미 인 앞발에 대어 본다 모든 걸 안다는 듯 칠 벗겨진 침묵을 껴입은 백양목들 맞닿을 수 없는 뿌리의 간극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왼쪽 가슴에 달무리 진다 강물의 사전 태양의 연대기 달의 참회록 들에도 없는 그것이 갈비뼈 틈에서 달그락거린다 외진 주둥이를 앞질러 굴러가는 낙엽을 보면 굶주림 또한 일이지만 살얼음 안개 속은 너무 차고 입을 벌리면 구절양장의 빈 방으로부터 바람배가 차오른다 그것만이 맹목의 구체 수십 억 년 바람의 기억이 무진무진 피어오르는 이곳의 먹잇감들은 모두 안개의 습속을 지닌 것인가 날마다 표정을 바꾸는 달의 이면을 향해 삽날 같은 긴 울음을 우는 일 오랜 방황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사라져 가는 소실점 속에서 그것의 내밀이 출렁인다 오선(五線)에 목매고 죽은 까만 열매들이 부르는 깊고 쓸쓸한 소야곡 불면에 월계관 씌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