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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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가구를 보는 이유
가구를 보는 이유 문보영 명암을 넣기 전에 형태를 바로잡아 주세요. 그림 선생은 빠진 앞니의 형태를 바로잡으며 너에게 말한다. 빠진 앞니의 인간은 철봉에 매달린 채 웃고 있다. 그 옆에는 개가. 길을 잘못 들어서 여기까지 오게 된. 흰 개가, 매달린 채 웃는 인간을 올려다보고 있다. 회피적인 꼬리를 흔드는 그것은. 무엇이든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형태가… 그림 선생은 더러워진 지우개를 갈색 앞치마에 문대고. 그것을 빠진 앞니에 갖다 댄다. 끝까지 안 보시는군요, 당신은. 어디까지 봐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지요. 철봉의 형태는 직접 고쳐 보세요. 너는 더 이상의 관찰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자세히 바라보는 일에 진력이 났으므로. 너는. 철봉을 본다. 지진이 나면 철봉에 매달려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나만 빼고 세상만 흔들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는 버릇은 미덕이지만. 명암을 넣기 전에 바라봤다.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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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일기를 쓰는 이유
일기를 쓰는 이유 문순태 4월의 눈부신 햇살 아래 쪼그리고 앉아서 풀을 뽑는다. 한 달 내내 비가 오지 않아 땅이 단단하게 굳어 있어 잘 뽑히지 않는다. 바람은 가볍고 깔깔하다. 별장에 딸린 꽤 널찍한 묵정밭에는 온갖 잡초들이 우북하게 자라 있다. 내 생각 같아서는 제초제를 뿌렸으면 싶지만 별장 주인인 조 박사는 기어코 풀을 뽑아야 한다고 했다. 아침 먹고 시작해서 해가 정수리 위에 덩싯 올라오기까지 쉬지 않고 풀을 뽑았는데도 흙이 드러난 맨땅은 겨우 멍석 두어 장 넓이만큼이나 될까. 마당의 풀을 다 뽑자면 사흘도 더 걸릴 것 같다. 처음엔 이까짓 풀을 뽑는 일 정도야 누워서 코딱지 파는 것쯤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쪼그리고 앉아 있자니 허리가 아프고 관절도 삐걱거렸다. 손톱이 상했는지 풀의 밑동을 잡아챌 때마다 손가락 끝이 욱신거렸다. 차라리 등짐을 지고 말지 쪼그리고 앉아서 풀을 뽑기란 너무 답답하고 짜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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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쉼표를 못 찍는 이유
쉼표를 못 찍는 이유 김사이 낯선 여인숙 성큼 마음을 들여놓고 서성거리다 가만히 벽을 쓸어내리니 삶의 집착들이 울툭불툭 거칠게 숨을 쉰다 잠시 내버려두고 온 저곳에서 질기게 따라와 낯선 나를 못마땅해 한다 엄살도 허락하지 않은 이 시간 방 너머 방의 기척에 아랫도리가 간질거린다 서른일곱 살 파닥거리는 성감에 안도하다 문득 지금껏 내 몸뚱이는 환희에 찬 소리를 질러 봤던가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눈물 나게 웃는다 시큼한 이불 냄새는 내 구린내 같다 잔뜩 부려 놓고 온 미움까지 그리워진다 사실 멀리 떠나온 것도 아닌데 잠깐 벗어난 이곳 또한 현실이었으니 쌓이고 쌓여 커져 가는 욕망의 뒷구멍 징그럽게 끌어당긴다 서방도 새끼도 없으면서 덜 벌고 덜 쓰고 덜 먹어도 끝내, 자유롭지 못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