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 > 시인수첩
이성복 이후의 현대시인론 ‘과거의 짐’과 감수성 변화의 의미―장석남의 시세계
1
세계 문학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역사 속에서 시인들의 감수성 변화는 시대정신Zeitgeist의 바람 앞에 움직이는 기후 풍향계와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 문학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화”가 시대정신이었던 70년대와 80년대 우리 사회의 많은 시인들은 억압적인 사회 현실에 저항하는 시적인 감수성을 보였다. 그러나 제5공화국이 끝남과 동시에 소련과 동구東歐의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게 되자, 우리 시단의 일부 젊은 시인들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감수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산업화를 반대하며 문명의 누추함과 그것이 가져온 어두운 사회현실을 고발하고 풍자하는 저항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이른바 “신서정파”의 하얀 기치를 들고 그들의 선배 시인들이 노래했던 자연과 인간의 관계 및 인간의 존재문제를 새로이 탐색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80년대가 끝나갈 무렵, 그러니까 1987년 장석남이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시단에 나와 80년대 말과 90년대를 거쳐 지금까지 우리 시단에서 크게 주목받는 시인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도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새로운 감수성은 한恨에 뿌리를 둔 선배 시인들의 풀어진 센티멘털리즘에서 깨끗이 벗어나 한시漢詩에 나타난 전통적인 여백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수용·발전시켜 따뜻하면서도 명징함을 느끼게 할 정도로 결곡하고 단단한 우아함과 객관성을 가져오는 지극히 압축된 절제의 미학을 보였다. 그래서 그는 비평가들과 많은 독자들의 갈채 속에 전통적인 한국 서정시에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석남은 1965년 8월 3일 인천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외딴 섬, 덕적도 서포리 해변의 갯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훗날 그가 기억했던 것처럼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을 연상시킬 만큼 궁핍했다. 파도 소리를 듣고 자라던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어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자신이 크레파스나 그림물감을 가질 수 있는 형편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림에 대한 꿈을 접었고, 그 대신 무엇인가 만들기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는 팽이와 연, 딱총과 화살, 바람개비와 새덫 등을 만들고, 집안에 새 못이 없어 무거운 낡은 연장을 사용해서 사과 궤짝 같은 것에 박힌 못을 빼내어 썰매를 만들어 얼음을 지치기도 했다. 또 그는 나무를 깎아 원시적인 조각품과 같은 어떤 형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미美에 대한 의식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1992년 그는 서포초등학교 6학년 2학기 때, 뭍으로 나와 인천송현초등학교로 전학했다. 그 후 그는 인천남중을 거쳐 제물포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책 읽기에 열중하며 옛 개항장 거리를 걸으며 시인의 꿈을 키웠다. 그는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로 진학해서 20대 초반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1999년그는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을 출간한 후 2012년 『고요는 도망가지 마라』까지 일곱 권의 시집과 두 권의 산문집을 펴냈다. 이후 중학교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은 후 인하대학 국문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지금은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며 시 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동안 그가 발표한 여러 편의 시집으로 〈김수영문학상〉(1992)을 시작으로 해서, 〈현대문학상〉(1999), 〈미당문학상〉(2010), 그리고 〈김달진문학상〉(2012) 등과 같은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하고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자기의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2
젝슨 베이트Jackson Bate는 자신의 저서 『과거의 짐과 영국시인』에서 새로이 출발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창작과정에서 부딪치는 가장 큰 딜레마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배 시인들이 이룩해놓은 위대한 예술적 업적, 즉 “과거의 짐”과의 관계에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처음 출발하는 시인들은 전통적인 역사의 화랑 속에 있는 거대한 문화적 유산에 대해 자의식적으로 느끼는 심리적 위협 때문에 자유롭게 시를 쓰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천재적인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는 그의 친구 우드 하우스에게 “시로 쓸 독창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시가 지닌 부富는 모두 다 소진되었고(모든 시의 아름다움은 이미 다 사용되었다고 말할 때, 그는 정말 실의에 빠져 있었다)”라고 말했다. 괴테 역시 “우리들 가운데 아무도 그렇게 ‘오리지널’하지 못하다. 우리들이 짧은 인생 동안 이룩한 대부분의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가져온 것이다”라고 말했다.1)
사실, 문학사 속에 나타난 우주의 진리와 인간의 삶에 대한 보편적 주제를 면밀히 따져보면,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같은 위대한 작품도 덴마크의 옛 전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오리지널”하지 않다. 그래서 시대적으로 뒤에 오는 시인들이 끝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선배 예술가들의 업적을 찬양하고 노래하며 그들이 사용했던 주제를 되풀이하는 창조적인 모방과정에서 자신의 재능을 통해 전통을 확대하는 것이다.2)
━━━━━
1) W. Jackson Bate, The Burden of the Past and the English Poet. London: Chatto & Windus, 1971. 4-5.
2) 잭슨 베이트의 이러한 주장은 헤럴드 블룸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즉 거울 속의 얼룩처럼 현전現前의 세계에 묻혀 있는 “진실”을 은유적으로 해석하려는 인간 행위에 바탕을 둔 텍스트는 하나로 완성될 수 없고 “그 이후나 통시적인 면에서”다른 텍스트들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는 해체이론에 의해서도 크게 뒷받침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선배 시인들의 다양하고 방대한 업적들이 “영원한 현재”로 존재하는 “성스러운 문학의 숲”에서 장석남이 이렇게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시대정신과 관련된 그의 감수성의 변화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창작과정의 딜레마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고전적인 한시漢詩에 나타난 여백의 미학을 계승·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보여준 이른바 “새로운 감수성”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석남도 일생을 두고 추구하고 있는 주제는 “오리지널”한 것이 아니라, 선배 시인들이 이미 취급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시에는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경험은 물론 자연의 변화에 대한 많은 그림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문학사의 정전正典반열에 오른 다른 많은 한국 시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주제,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편력 과정에서 인간이 인식론적으로 발견한 빛과 그림자를 객관적인 이미지를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다시 말해, 그는 예술적으로 찬란한 업적을 남긴 선배 시인들이 취급한 “영원한 주제”를 되풀이해서 다시 사용하면서도 그만이 가진 독특한 언어 감각과 새로이 발견한 이미지들의 결합을 통해 그것을 형상화해서 미학적으로 표현하는데 놀라우리만큼 새로운 감수성을 보였다.
그의 시가 선배 시인들이 다루었던 동일한 주제 의식을 반복해서 사용하면서도 차별화된 면모를 보이는 것은 그가 체험한 인식론적 과정보다는 인식론적 발견의 결과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나 언어적인 측면에서 그의 시는 지적인 성숙함과 깊은 관계가 있는 연역적인 방법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가 경험한 처절한 아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적인 부분은 생략되어 묻혀버리거나 아니면 여백의 미학으로 승화되어 흐릿하고 우아한 빛 속에 낮은음계의 울림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에도 인식과정의 진폭은 짧지만, 생의 여정과 함께하는 절제된 많은 감정이 백색 프리즘처럼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 그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구심으로 만화경kaleidoscope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의 데뷔작「맨발로 걷기」의 경우를 두고 한번 생각해보자.
생각난 듯이 눈이 내렸다
눈은 점점 길바닥 위에 몸을 포개어
제 고요를 쌓고 가끔
바람에 몰리기도 하면서
무언가 한 가지씩만 덮고 있었다
나는 나의 뒤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걸었다
그 후 내
발자국이 작은 냇물을 이루어
근해에 나가 물살에 시달리는지
자주 꿈결에 물소리를 들었고
발이 시렸다
또 다시 나무에 싹이 나고
나는 나무에 오르고 싶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잘못 자란 생각 끝에서 꽃이 피었다
생각 위에 찍힌 생각이 생각에
지워지는 것으로
— 「맨발로 걷기」 전문
이 작품은 짧은 진폭을 가지고 있지만, 화자話者는 평범한 이미지들을 조금도 지나침 없이 자연스럽게 엮어 자신이 살아온 삶의 편력에 나타난 시적인 진실을 독백 형식으로 조용히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눈의 이미지는 죽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화자가 “생각난 눈”이라 말하고 있는 것은 눈에 대한 낭만적 감정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죽음을 집요하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인듯하다. 그래서 눈에 묻힌 그의 “발자국”이 잃어버린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을 새삼 밝힐 필요가 없다. 그는 이렇게 잃어버린 시간과 함께하는 죽음을 의식하지만, 삶과 죽음 그리고 재생이라는 순환과정이 일어나고 있는 신비스러운 우주적인 근원을 상징하는 “바다”를 생각한다. 이어서 그는 무엇인가 이루어져 가고 만들어가는 우주의 원리에 따라 자라나는 나무의 이미지를 통해 계속되는 삶의 계단에서 자유롭고 순수한 명상과 사색 끝에 찾아오는 현현顯現의 순간처럼 깨달음의 즐거움으로 상징되는 꽃을 피우기도 하며 시간과 함께하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물결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각들을 노래한다.
이 시의 구조를 읽으며 특히 주목할 것은 화자가 생명의 출발을 의미하는 싹이 나는 나무의 이미지가 아닌 성숙한 죽음을 나타내는 눈발의 이미지를 사용해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인이 비록 젊은 나이지만, 일찍 삶의 부조리한 비극적 현실에 눈을 뜨고 짧은 시간 동안 치열한 사색과 독서를 통해 그것에 대한 많은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인간 의식은 아픔과 시련을 거친 후 “환”하게 여명처럼 밝아온다는 인식론적인 경험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비극의 탄생”처럼 어둠과의 싸움이 빛을 가져온다는 실존적 삶의 현실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을 배경으로 지극히 압축된 절제의 미학의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저녁해가 지다 말고
내 얼굴에 왔다
낮불을 켜놓은
내 얼굴
얼굴을 버리고 놀다보면
저녁해를 비키는
새도 될 수 있으련만
— 「저녁해가 지다 말고」 전문
장석남이 그의 시에서 석양빛이 비치는 저녁을 수없이 노래한 것을 시간이 지나갔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이다. 그가 특히 이 시에서 그리고 있는 “저녁해”는 그것이 밟고 온 발자국 뒤에 아침과 대낮, 그리고 오후에 걸친 긴 시간이 죽어 깔려 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하루라는 시간의 무게로 살아온 힘겨운 삶의 결과로 인해 마음이 “낮불을 켜놓은”듯이 밝아진다고 함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저녁 해를 비키는 새도” 될 수 있다는 것은 “새”로 상징되는 영혼을 담은 그의 마음이 많은 힘겨운 시간의 무게를 견디며 지난 후 “환한 빛”으로 밝아 옴을 의미한다.
이렇게 장석남이 보이지 않는 어려운 삶의 현실을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의식을 인식론적으로 승화시키며 초월적인 이상세계로 “망명”한다는 주제는 시의 초기에서부터 지금까지 시 전편에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에게 김수영문학상을 가져다준 수작「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은 이것에 대한 또 다른 예이다.
1
찌르라기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떼들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
저녁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
찌르라기떼 속에
환한 봉분 하나 보인다
2
누군가 찌르라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봄 햇빛 너무 빽빽해
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
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서 저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가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
찌르라기떼 가고 마음엔 늘
누군가 쌀을 안친다
아궁이 앞이 환하다
—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전문
앞에서 살펴본 시편「저녁해가 지다 말고」의 배경을 거울로 해서 아름다운 이 시편을 다시 생각해보자. 저녁 하늘을 날아가는 찌르라기떼는 어두운 이쪽의 현실 세계와 대낮처럼 환하게 밝은 저쪽의 초월적 세계를 넘나드는 맑고 투명한 영혼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들이다. 이것은 찌르라기떼가 밝은 “봄 하늘”을 몰고 오고 그것들의 울음 속에 “환한 봉분”이 있다는 것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다시 말해, 화자가 “저녁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찌르라기떼 속에 환한 봉분이 하나 보인다”고 노래한 것은 “봉분”이 상징하는 죽음의 세계를 갈구하며 그쪽으로 날아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떼들의 울음은 슬픔만이 아니라 “환한 봉분”의 세계로 나르는 과정에서 느끼는 순수한 환희의 소리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또 이 새떼들의 울음을 “쌀 씻어 안치는 소리”와 비유한 것은 그것이 하얀 쌀을 씻고 또 씻어 맑고 투명하게 만들어 “쌀 안치는”물소리처럼 어둠과 싸우며 스스로의 더러움을 씻어내고 순수함 속에 “환한”저승 세계로 날아 들어가는 즐거움을 나타내기 위함일 것이다. 이 작품의 후반부에서 화자가 새떼들이 날아간 후에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어 안치는 소리를 들으며 “아궁이 앞이 환하다”고 표현 한 것 또한 화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낙원”, 즉 초월적인 이상세계로의 “망명”을 위해서는 물과 불의 정화작용이 함께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앞에서 논의한 두 편의 초기 작품들과 다른 시적 분위기와 이미지들을 통해 보다 간결한 미학적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는 시편「마당에 배를 매다」(2001) 역시 이러한 주제의식을 다루고 있음은 위에서 언급한 사실을 다시금 증명하고 있다.
마당에
綠陰가득한
배를 매다
마당 밖으로 나가는 징검다리
끝에
몇 포기 저녁별
연필 깎는 소리처럼
떠서
이 세상에 온 모든 生들
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를
마당가의 풀들과 나와는 지금
가슴 속에 쌓고 있는가
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영혼
혹은,
갈증
배를 풀어
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갈 날이
곧 오리라
오, 사랑해야 하리
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
뒷모습들
— 「마당에 배를 매다」 전문
여기서 장석남이 사용한 물의 이미지는, 공감각synesthesia을 일으키는 “쌀 씻어 안치는 소리”와 그가 즐겨 사용하는 “물 긷는 소리”등에서처럼 각고刻苦의 시련을 겪은 다음에 찾아오는 밝은 의식세계와 “존재의 틈”사이에서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현현의 빛과 함께 그의 시세계에 구조적으로 분수噴水와 같은 “살아 있는 기둥”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물은 전통적으로 생명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그의 시에서 그가 물의 이미지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죄와 같은 더러움을 씻어내는 기능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인간은 물론 꽃과 나무 등과 같은 자연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의 흐름, 즉 생명체의 생성과정과 삶과 죽음의 순환과정에서도 핵심적인 요소로써 작용하고 있는 기능을 의미한다.
빗방울 떨어지며 후두둑 나를 읽는다
지운 문장文章처럼 나는
가책받은 얼굴로 빗속에 서 있다
대추나무의
약한 열매들이 빨리 미련을 버리고
비에게 자리를 내준다
나와 자리를 바꾸자는 빗물 소리
가책받은 목소리로 나는 이 순간 經을 읽는 것이다
빗물이 시커먼 눈을 뜨고 또랑으로 들어간다
— 「가책받은 얼굴로」 전문
내가 반 웃고
당신이 반 웃고
아기 낳으면
돌멩이 같은 아기 낳으면
그 돌멩이 꽃처럼 피어
깊고 아득히 골짜기로 올라가리라
아무도 그곳까지 이르진 못하리라
가끔 시냇물에 붉은 꽃이 섞여내려
마을을 환히 적시리라
사람들, 한 잠도 자지 못하리
— 「그리운 시냇가」 전문
실제로 그가 유년시절 새벽에 들었던 “물 긷는 소리”로 시인이 된 후에도 지우지 않고 물소리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그것이 더러움을 씻어내는 소리인 동시에 순환적인 세대교체를 통해 인간과 세상을 정화하고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소리로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그가 집 안에 연못을 만들어 수국水菊과 연蓮을 키우며 잔잔하게 고여 있는 물속에 비친 정원 들여다 보기를 좋아하는 것도 이러한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장석남은 일곱 권의 시집을 내면서 위에서 인용한 작품들 못지않게 아름답고 훌륭한 많은 작품을 썼다. 대부분의 이들 시편도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삶의 편력과 함께하는 인식론적인 과정에 나타난 빛과 그림자를 하늘과 땅, 강과 바다, 눈과 비, 별과 구름, 나뭇잎과 꽃, 그리고 바윗돌 등과 같은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조용한 수묵화水墨畵로 그리고 있다. 물론 그의 시에지 붕과 발코니, 돌계단, “작은 망치 소리 들리는 구두 수선집” “雨傘들” “室內樂”, 그리고 눈 오는 골목길 풍경 등과 같은 도시의 이미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이미지를 주로 사용해서 그의 시적 주제를 형상화한 것은 그가 어네스트 펜놀로사Ernest Fenollosa가 “언어는‘인간과 자연이 친족관계’에 있는 은유에서 탄생한다”3)고 말한 중국 한시漢詩의 시학詩學에서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3) Hugh Kenner, The Pound Era.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1. 289.
3
장석남이 80년대 말과 90년대의 한국 시단에서 대표적인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우리 시단에서 흔들림 없이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되풀이해서 언급한 “오리지널”한 것과 거리가 있는 주제의식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감수성”으로 낯설고 새롭게 형상화해서 표현할 수 있는 그의 탁월한 언어 감각과 시학 때문이라는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장석남은 20대에 시인으로 시단에 등단해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그 때부터 그는 성숙한 감정교육으로 준비된 면모를 보였다. 그래서 다른 많은 젊은 시인들이 빠지기 쉬운 낭만적 센티멘털리즘이나 흑은 지나친 욕망으로 인한 좌절의 늪이나 가파른 삶의 비탈길에서 벗어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연과 인간과 삶의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며 생각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이며 시를 썼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두 번째 시집의 제목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에서 잘 반영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비록 그는 앞서 간 많은 선배 시인들처럼 시적인 목표를 초월적인 이상향에 두고 의식적으로 그것에 접근하는 길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는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 나타날 수 있는 경험의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인식론적으로 발견한 빛을 중심으로 해서만 작품을 써왔다.
그래서 그의 시는 간결하고 지적이면서도 따뜻한 낯섦을 느끼게 하는 지극히 절제된 언어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지와 이미지, 그리고 생각과 생각을 연결하는 시적 거리를 차단해버리거나 혹은 넓힌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독자들의 상상력을 초대하고 참여하게 하는 시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것이 한恨을 바탕으로 쓴 전통적인 한국시들과는 달리 지나친 감정을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우아하게 만들어 “서리 빛”과 같은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가져다 주면서도 또 다른 한편, “싸락눈”처럼 따뜻하면서도 여물고 단단한 느낌의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지적할 필요가 없다.
겨울 이른 아침
맑은 공기 속에 싸락눈 쏟아지기 시작하자
동그마한 흙마당에
나보다도 더 작은
하나님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떠
왔다갔다하시네
살구나무들이
뿌리를 가지런히하는 소리
싸락눈 제일 많이 쌓이는
그 그늘
모퉁이에서 들리네
— 「외딴집」 전문
어린 시절 무적霧笛소리를 듣고 자란 그는 시인이 되어서 쓴「종소리를 찾아서」라는 산문에서 “새들도 종소리를 따라 날며 신을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의 근원을 찾으려는 욕망을 보였다. 그리고 그의 시적 주제에도 역시 낭만적인 색채가 전혀 없지 않기 때문에 상징주의 시처럼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지극히 절제된 낮은음계로 승화시켜 나타내고 있다. 그의 시적 분위기는 언제나 적요寂寥함을 잃지 않고, 시의 색채 역시 그가 즐겨 노래했던 라일락과 싸리꽃, 무꽃 그리고 배꽃 등과 같이 찬란하지 않고 조용한 흰빛이거나 흰빛에 가깝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사실과 유기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석남이 그의 시에서 “고요”와 함께하는 절제된 여백의 미학을 명징함을 느낄 정도로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켜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선배 시인 서정주와 김수영, 그리고 김종삼 등 여러 선배 시인들의 영향을 받고 에즈라 파운드처럼 한시漢詩에도 깊이 천착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자칫 고졸古拙한 미학으로 잘못 인식되어 묻혀버릴 수 있는 동양적인 여백의 미학을 그만이 가진 “개인의 재능”과 함께하는 “새로운 감수성”을 통해 현대적으로 발전시켰다. 들꽃같이 숨어 있는 모국어의 속살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과 그것의 숨결 소리를 새로이 발견한 것은 오직 시인 장석남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