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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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잉태(孕胎)
잉태(孕胎) 이상인 검은깨 같은 모래들이 무진장 펼쳐진 여수 만성리 해수욕장, 날마다 남산만하게 부른 배를 쓸며 뜨거운 햇살에 땀 흘리고 있다. 아랫도리만 가린 사내들은 공룡 발자국을 찍으며 해안선을 돌아다니거나 고기잡이를 하는데 긴 파도소리는 불룩한 알 속에서 나는 희미한 울음소리를 희디흰 혀로 핥아내곤 했다. 드넓게 펼쳐진 검은 모래밭, 만성리 해안이 몇 만 년을 살아오면서 빚어 놓은 깊고 부드러운 자궁이었을까? 또 한 떼의 사내들이 파도 속으로 날쌘 민어처럼 뛰어들고 여기저기 햇볕에 잘 익은 둥실한 알들 해 기울자 쩍 실금 가더니 몸뻬 입은 늙은 여자아이들을 꺼내 놓는다. 해맑은 얼굴로 건강한 그림자를 데리고 푹푹 빠지는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다. 비로소 긴 하품을 하며 아쉬운 듯 오래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모태 자리들 수평선 위로 반짝이던 시원의 햇살들이 파도쳐 와 층층이 쟁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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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유자
유자 이상인 주먹만한 노란 향주머니들 반짝인다. 가을의 무게만큼 휘늘어진 모습이 풍성하고 탄력이 넘친다. 유자나무가 유자 한 알을 내게 건넨다. 유자나무도 봄부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군가에게 받았을 것이다. 그동안 천수(千手)에 매달아 놓고 즙과 향기가 진하게 배어들도록 한 번도 편히 앉거나 누워보지 못한 채 서서 기도하며 공을 들였던 것인데 무엇인가를 받는다는 일은 가꾸는 정성과 다시 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필요한 것 유자차를 담그려고 껍질을 벗기면 처음 건네준 분의 향기가 진동한다. 노란 맨살에서 쏴아 쏟아지는 말씀들 재어 놓았다가 차를 내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분의 마음이 혀끝을 통해 온몸으로 퍼진다. 나도 유자나무에게 받은 그 마음을 누군가에게 건네주고 있는 중이다. 내 몸을 통과하여 온전히 이동하고 있는 중이다. 어디에선가 꽃눈이 불거지고, 꽃이 피고 노란 향낭으로 흔들린다는 소식이 벌써 그 다음 곳까지 당도하고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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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서울, 과거와 첨단의 시간
그렇다 해서 인구 2만 시대의 인간보다 오늘날 서울 인구 1천만 시대 및 한반도 인구 7천만 이상인 시대의 인간이 더 나은 인간의 품성을 가진 것 같지는 않다. 서울은 고대의 자연관을 자신의 환경에 불러들였다. 근대도시의 시장성(市場性)만으로 된 도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세계 어느 도시와도 바꿀 수 없는 북한산과 한강을 가지고 있다. 그것으로도 심심했던지 도심 한복판에 남산을 놓아두었다. 어떤 도시 건축가와 최근의 한 시장은 남산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서 평면화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천민개발주의의 수작이었다. 근세조선 왕조 5백 년이 마감될 무렵 한반도는 타자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다. 뜻있는 지사(志士)들이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 그때의 이별가가 있다. ‘가노라 삼각산(북한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이렇듯이 조국의 수도로서 끝내는 망국의 수도가 되고 말 때도 서울은 북한산의 기상과 한강의 유구한 흐름으로 한국인의 역사와 꿈을 지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