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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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제1회] 거울
거울을 응시하면서 시인 이상은 최초로 자신이 탄생했던 충격적인 시점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거울 속의 이미지를 내면에 들여놓으면서 ‘내’가 탄생했다는 것이 ‘거울단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상은 위대한 걸음, 어쩌면 자기 해체적인 걸음을 떼려고 합니다. 「거울」이란 시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모던보이는 말합니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다”고 말입니다. 이상은 거울 속의 나, 혹은 나의 내면에 각인된 거울 속의 이미지를 진단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나’를 의심할 수 없이 분명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로 상징되는 근대문명을 배우기에 급급했던 시절, 코기토 자체를 문제 삼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상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겁니다. 그는 가장 모던한 시인이면서 동시에 가장 모던했기에 모던의 한계에까지 이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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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8월_시_벽] 벽
벽 하재연 뻑뻑해진 몸이 더 이상은 너를 통과할 수 없게 된 그때 어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무해해 저 너머에서 누군가 외쳤다. 내게서 튀어나온 모서리들을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던 순간은 어제의 뒤로 간 어제들에게서 시작되었나? 나를 복제한 입자들이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이 세계 밀가루 반죽처럼 물렁해진 나의 팔과 다리는 한 덩이로 뒤섞이면서 차츰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로 되어가고 있었다. 《글틴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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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달면 삼키고 쓰면 글이다] 1화 : 자하문로, 이상과 윤동주.
사진에 담긴 이상은 대체로 머리가 풍성하고 눈동자와 흰자의 구별이 어려우며, 턱선이 날렵해 앳되면서도 유약해 보였다. 그러나 구본웅이 표현한 이상은 상대를 깔아 보는 듯한 시선과 초승달처럼 휜 턱, 듬성듬성한 수염 자국, 그리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가 반항적인 작품 세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구본웅의 그림으로 이상의 분위기를 유추하다 보니 생소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김해경. 이상의 본명이었다. 본명이 따로 있으리라곤 아예 염두에 두지 못했다. 작가로서 한국 문학의 거목의 본명조차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아무튼 구본웅의 그림과 이상의 본명처럼 이상의 이미지를 곱씹게 하는 작품을 최근에 읽었다. 그전까지 접한 『오감도』와 『날개』엔 무기력한 절규가 풀풀 풍겼다. 하지만 문예지 『중앙』에 실린 『내 동생 옥희 보아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연인의 손을 잡고 밤도망을 친 막내 여동생 옥희에게 보내는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