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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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전부
전부 이병률 이 기차는 어디로 향하는 기차입니까, 라고 묻고 싶은데 이 나라 말을 알지를 못 합니다 이 기차가 어질어질한 속도로 당신을 데려가 어디에 내려놓을지를 알고 싶은데 물음은 물컹 내 귀에 되닿기만 합니다 당신 옆모습을 바라봐도 된다고 믿고 싶어서 발목은 춥지 않습니다 지도 위에 손가락을 올려 묻고도 싶은 겁니다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지금은 어디입니까 안녕, 이라는 이 나라 말만 알아서 그 말이 전부이기도 하여서 인사만 합니다 기차 밖으로 내리는 유난히 검은 어둠이 마음에 닿으려 합니다 마음이 자꾸 넘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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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아주 넓은 등이 있어
아주 넓은 등이 있어 이병률 종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었다가 나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었다가 돌을 잘 다루는 이 되고 싶었는데 이젠 다 집어 치우고 아주 넓은 등 하나를 가져 달(月)도 착란도 내려놓고 아주 넓은 등이 있어 가끔은 사원처럼 돌아봐도 되겠다 싶은데 오래 울 양으로다가 고깃국 한 사발 마시고 손도 깨끗하게 씻어 말리고 내 넓은 등짝에 내 얼굴을 묻고 한 삼백년 등이 다 닳도록 얼굴을 묻고 종이를 잊고 나무와 돌을 잊고 한 시절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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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그럼
그럼 이병률 당신이 물었습니다 내가 그곳에 도착하면 뭔가 필요한 것이 없겠냐구요 그럼, 이파리를 모아 주세요 하루에 한 장씩 아니면 며칠에 한 장씩도 좋습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그걸 가져다 문에 바르거나 창가에 놓아두게요 내가 도착하게 되면 그 나라의 나뭇잎들을 흔들어서 내가 알아볼 수 있게 해주겠어요? 그럼 나도 갈 때 한 장씩 모아서 가겠습니다 나도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그 이파리들을 어떻게든 흔들어 볼게요 아마도 내가 가져가는 나뭇잎은 납작해져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운 이파리들을 시집 속에 넣어 둔답니다 사실 마음에 넣어 두기도 한답니다 그럼 12월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