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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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비망록
비망록 윤성택 시간을 겹겹 접으니 견고하게 뚫립니다 생생한 과거를 이제 펼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의 과거에 이르는 속성은 당신에 의해 결정된 것이니 내 청춘은 고백에 가깝습니다 이 불안하고 어리숙한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은 무모한 기대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많은 것이 사라졌다고 이해하겠습니다 한때의 결의도 사랑도 헌책에서 뜯겨져 나간 속지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곳의 공기에게 예감은 선물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기억이란 운명을 은유하면서 일생을 떠돌게 마련이니까요 태연한 그 여백을 오늘이라고 적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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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당신의 밤과 음악
당신의 밤과 음악* 윤성택 이어폰을 나눠 끼듯 갈라진 나뭇가지 사이 단풍나무를 돌아보고는 하였다 시들도록 서럽게 물들어 가는 잎잎이 환한 창마다 문자처럼 찍혀 있었다 계절을 탕진하고 더 이상 매달 것도 없는 그런 밤은 더욱 어두워서 외로웠으나 몇 굽이 넘어가면 잊어 간다는 것도 다만 아득해지는 그믐 속이었다 바라볼 때마다 낯설어지는 내면은 때때로 다른 기류로 이어지고 우리는 조금씩 다른 표정의 날이 많았다 손에 쥔 것을 끝내 놓아 주는 나무 아래 아무 말 없이 흩어지는 앙상한 길들, 막다른 겨울이 되어서야 무리를 이루었다 그 저녁에 고정된 나무들을 무어라 해야 할까 하늘이 흐리면 마음은 멀리까지 기압골을 그렸다 * KBS 1FM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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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그리운 목련
그리운 목련 윤성택 겹겹 바람을 껴입은 목련나무 봉오리 꼬깃꼬깃 잎들이 접혀 있다 지난해 북향 창가에 떨어진 채 타들어가듯 검어진 꽃잎들, 다시 뿌리로 끌어올려져 가지 끝 꽃받침에 편지처럼 물려 있다 두툼하게 말아 쥔 꽃눈을 들고 서성거리다 막다른 곳을 향해 뻗어가는 골목 끝에서 불빛 벙그는 밤, 불잉걸처럼 밝은 창문을 향해 마침내 목련은 접어두었던 면을 편다 나는 나를 잊고 너를 잊었으나 한 잎씩 천천히 환한 창에 대고 읽는다 목련 읽는 향기가 그윽하다 중심에서 하나씩 지는 꽃잎을 생각하면 몇 장 사연을 내밀한 틈에 어떻게 밀어 넣은 것인지 잊고 있던 그 자리에 왜 나를 세워둔 것인지 각오하듯 활짝 핀 목련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