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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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비어 있는 방
비어 있는 방 유선혜 고대인들은 영혼이 없다고 말하면 재판장에 세워졌다 영혼은 텅 비어 있는 직사각형 무딘 가위에 잘려 당신의 손을 베이게 하지 않는 벽지 공간이 되어 당신의 사생활을 가만히 바라보는 책장 지나가는 사람이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가고 당신이 오래 머물 듯이 기웃거리는 곳 영혼에는 불가능한 것들이 머문다 둥근 삼각형, 뜨다 만 곰 인형, 혹은 추리소설 속 괴도 뤼팽 당신이 네모라고 부르면 원이 되고 직선이라고 부르면 점이 되는 방에 당신은 영혼을 임대하고 어느새 침실이 생기고 춥다고 말하면 보일러가 켜지고 샤워를 하면 온수가 나오고 만두를 사오면 전자레인지가 나타나는 당신이 켠 구석의 스탠드에서 잠시 낮은 채도가 번진다 가능하다고 말하면 세계가 생기는 이제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현대인은 지하철역 앞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영혼을 사랑으로 감싸십니다 임대는 끝의 개념을 내포한다 당신은 온통 짐을 빼고 다시 영혼은 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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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마주 보지 않고
마주 보지 않고 유선혜 말하자면, 섬과 섬 사이에도 땅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저기까지 걸어서 갈 수 있지만 계속 여기에 서 있고 파도가 바다 쪽으로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길 기다렸다. 피가 거꾸로 흐르면 안 되잖아. 심장에 있는 판막은 혈액이 거꾸로 흐르지 않고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도록 해준다. 우리는 정해진 방향으로만 서로를 바라보고 나는 우리의 언어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바다는 하늘과 아무래도 다른 채도지만 흐름이 틈새를 서서히 실어 나른다. 섬의 공기는 고막을 뚫고 고요를 만들고. 나무 나무, 풀 풀, 돌 돌, 구멍이 나버린 숲 숲, 그리고 귀 귀 찰랑인다는 말을 고르고 싶지는 않은데 꽤 선명하게 보이는 걸 어떡해. 목소리가 섬과 섬을 가로막고 있잖아. 저기까지 걸어서 갈 수도 있다. 머리끝까지 젖고 말 테지만. 피는 전승되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