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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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5월 월평] 어떻게 교감하고 소통하고 계십니까
[5월 월평] 어떻게 교감하고 소통하고 계십니까 김미정 인간은 자신들의 언어를 지극히 합리적이라 믿으며 문화의 축적과 의사소통의 도구로 삼지만, 실제로 그것은 대단히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해서 인간의 언어생활은 원초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한 오해의 연속일 뿐이며, 거기서 비롯된 언어의 횡포가 인간들을 핍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 E. 이오네스코, 「의자들」 여러분은 판토마임을 보신 일이 있나요. 대사 없이 몸짓만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무언극(無言劇)이라고도 하지요. 무대장치가 없거나 최소화된 상태에서 배우는 표정과 몸짓만으로 무언가를 표현해 냅니다.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이루어지는 극이지만, 우리는 배우가 표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또, 무용은 어떤가요. 판토마임보다 조금은 모방성이 덜하지만(‘마임’은 ‘mimic’에서 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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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월평] 작용과 반작용, 세상과 글쓰기
작용과 반작용, 세상과 글쓰기 김미정 “아이가 멀리 더 멀리 밀어내는 공, 그 호를 그리며 날아가는 공을. 정지된 내 생명을 먼 데로 밀어내는 것 같은 힘. 공이 지면에 쿵, 부딪칠 때마다 내 몸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이 깊고 과묵한 시간과 어둠이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 내가 사는 곳은 암흑도 사차원의 상태도 아니다. 이곳은 저 쇠공이 밀어내는 강한 힘으로 허공을 꿰뚫고 지나가는 세계다. 나는 보지 않고서도 쇠공을 던지고 줍고 다시 던지는 아이를 본다. 그 공이 날아가는 궤적도. 그것은 마치 내 힘의 크기 같아 보인다. 내가 보는 것이 현재다,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나는 또 무순에게 말한다. 네가 정말 위대한 투포환 선수가 되고 싶다면 너는 지금의 그 원처럼, 그 보호된 고독 속에서 네 삶을 살아야 할 거라고.” (조경란, 「학습의 生」, 『일요일의 철학』, 창비, 2013) 최근 저는 조경란 작가의 「학습의 生」이라는 소설을 읽었습니다. 소설은 시골의 한 소년과, 그곳에 새로 이사 온 한 여자 사이의 우정과 오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소년은 투포환 선수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다. 여자는 선생님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소년은 아마도 부모의 매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여자는 회복 불가능한 면역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소년도 여자도 고립되고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소년은 여자를 통해 투포환 선수를 꿈꾼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여자는 소년을 통해 잊고 있던 삶에 대한 의지를 떠올립니다. 우정이란 공감을 바탕으로 싹틉니다. 공감은 나와 너의 ‘공통적인’ 무엇이 접속하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우정, 관계란 것이 늘 그러하듯, 거기에는 사소한 오해와 어긋남이 개입하기도 합니다. 소년과 여자의 우정도 그런 과정을 겪습니다. 그렇지만 소설 속에서 그 오해와 어긋남은 사소한 것입니다. 소설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바깥으로부터의 중력에 맞설, 자기 안의 의지, 반작용의 힘을 깨닫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언제나 작용과 반작용을 거듭하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나를 둘러싼 바깥의 객관적인 조건, 상황들이 부정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중력이고 ‘작용’의 힘이라면, 그것을 수락하지 않고 내 안의 의지를 통해 거스르려고 하는 것이 곧 ‘반작용’의 힘일 것입니다. 그런 작용에 대한 반작용 없이 그냥 세계가 우리에게 가하는 힘을 수락하고 살아간다면, 삶은 얼마나 재미없고 안타까운 것일까요. 글을 쓴다는 것 역시 내게 가하는 세상의 무게에 ‘맞서겠다’는 내 안의 의지로부터 비롯되는 것 아닐까 합니다. 위에서 인용했듯, “내가 사는 곳은 암흑도 사차원의 상태도 아”닙니다. 이때 저 소년이 던지는 ‘쇠공’은 우리의 글쓰기를 비유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저 쇠공이 밀어내는 강한 힘으로 허공을 꿰뚫고 지나가는 세계”라는 구절에서, ‘쇠공’ 대신 ‘글쓰기’라는 말을 놓고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허공을 향해 던지는 쇠공, 글쓰기는 나를 둘러싼 익숙한, 혹은 혹독한 세계를 파열시키고 균열시킵니다. 이렇게 세상이 내게 가하는 힘과 교섭하거나 거스르는 행위 속에서, 진정한 ‘나만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 아닐까요. * 「가을날의 삽화―녹슨 삶을 위하여」에서 ‘가을날’의 풍경은 ‘저물어가는 삶’을 환유적으로 지시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가을은 시간적으로 쇠락하고 저물어가는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 역시 비슷한 이미지를 가집니다. 그런데 진술로 보았을 때에는 ‘가을날’과 ‘삶’이 사뭇 대조적으로 읽힙니다. 이 시는 일관되게 ‘~했을 때’ ‘~을 보았다’라는 진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했을 때’라는 말은, 뒤에 반전의 진술이 오게 되리라는 기대를 품게 합니다. 가령, “내 삶은/ 이도저도 아니었다고 여겼을 때” 화자는 “가을 나뭇잎”과 “가을 나무”와 “가을 숲”을 봅니다. 이 진술들은, 현재 펼쳐지고 있는 나의 삶의 비루함을 극복할 계기처럼 읽힙니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했듯, ‘세계(가을날)’와 ‘나(삶)’ 사이의 이미지적 유사함 때문에 실제 내용은 그렇게 읽히지 않습니다. ‘가을날’은 나의 ‘녹슨 삶’을 확인시켜주는 매개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극복케 할 계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즉, 이미지에 방점을 두고 읽을 때와, 진술구조에 방점을 두고 읽을 때,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한편 「청산에서 자라다」는 아주 따뜻한 느낌을 자아내는 산문입니다. 내용별로 문장과 단락이 잘 배치, 구분되어 있어서 가독성이 좋았습니다. ‘청산서예학원’에서의 유년이 현재의 ‘나’와 연속적으로 기억될 수 있는 경험도 개인적으로는 부러움을 자아냅니다. 공부의 성과(한자 자격증)보다도 사람(은사님)을 얻는 것의 소중함이, 진솔하고 귀중하게 잘 와닿았습니다. 그런데 유년의 에피소드들이 너무 자잘하게 흩뿌려져 있어서 약간 산만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여러 에피소드들 중에 한두 개를 선택하여 드라마틱한 리듬을 주었다면 글이 좀 더 강렬하고 탄력적이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 무언가를 쓰는 일은 외로운 일이고, 그것은 우리의 삶과도 닮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지만 사실 내 삶은 나만의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소통할 독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글이지만, 사실 글쓰기란 내가 오롯이 혼자 쓰는 행위입니다. 앞서 언급한 「학습의 生」에서 읽는 또 다른 메시지도 이런 것입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제 곧 본격적으로 푸름의 풍경이 펼쳐지겠지요. 이번 달 당선작을 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 달 이맘때쯤에는 그 풍경 및 기운이 스며든 글들이 제게 더 많이 도착해 있기를 소망해봅니다. 《글틴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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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3월 월평] 욕심 없는 글
욕심 없는 글 김미정(문학평론가) 글에 대한 욕심이 클수록 멋진 표현, 언어들을 구사하고 싶은 욕구도 커질 것입니다. 글 쓰는 많은 이들의 공통된 욕구이자 조심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전봇대 사진사」는 그런 욕심을 절제하고 최대한 자기만의 생각과 언어를 소박하고 꾸밈없는 문장 속에 녹인 것이 장점입니다. 사실 ‘전봇대’라는 사물에 ‘사진사’라는 인격을 부여한 것 자체는 사실 큰 기교는 아닙니다. 그런데, 평소에 내 입장(혹은 인간의 입장에서) 지나치는 일상들이 특정 사물의 시점에서 재구성될 때의 세계는 신선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단지 ‘전봇대’라는 사물만의 시점뿐 아니라, 글쓴이인 ‘나’와 일정 정도 교감을 나누는 사물이라는 점이 글 속에서 표현되어 있어서, 기계적인 의인화로 읽히지 않은 점도 좋았습니다. 또한 글에서 표현하는 ‘사진사’가 단지 세계를 포착하고 묘사하는 역할이 아니라, 어떤 시간적인 흐름과 그 변화들을 기억하고 반추케 하는 기록자, 저장소의 역할도 하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느 나이대건 사람에게는 추억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고, 변화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기 마련이겠지요. 또한 이 세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는 것이 있는 반면, 동시에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도 존재합니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고 사소한 사실이지만, 이런 당연하고 사소한 것을 일상 속에서 깨닫기란 쉽지 않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이 보여주는 주제(에 해당할 내용)도 울림을 주는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소 요설적인 부분이 눈에 띕니다. 작은 에피소드들이 생생한 느낌과 구체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전체 구성상 좀 더 압축적으로 제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장난감에 예술을 더하다」는 간결하고 정돈된 세련된 문장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짧은 글이지만 전체의 구도 속에서 각각의 요소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각 단락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잘 훈련된 글로 보였습니다.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열정’입니다. 〈마이클라우 아트토이전〉이라는 한 작가의 전시회에서 글쓴이가 발견한 것이 ‘열정’이고, 또한 글이 평면적인 관람기가 되지 않도록 인용한 고사가 ‘유기와 제갈공명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구성은, 글쓴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두 개의 텍스트가 잘 공명하고 있는지가 우선 관건일 것입니다. 수사가 배제되어 단정한 글은 그 자체가 장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독자들은 그런 이유 때문에 그 글이 일관되게 단정하고 이물감 없이 읽혀지기를 기대합니다. 즉, 글 전체가 잘 짜인 것을 기대하는 독자 입장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들이 한두 곳 눈에 띌 때면 그것이 단점으로 두드러지기도 하는 것이 함정인 것 같습니다. 가령, 글쓴이는 이 글 도입부의 고사(故事)를 통해 열정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원했겠지만, 실상 글 속에서는 제갈공명과 유기가 가졌던 ‘열정’의 차이가 썩 분별되어 읽히지 않습니다. ‘제갈공명이 만든 흙닭은 열정이 담겨져 있지만, 유기가 만든 흙닭은 열정이 담겨져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유기의 흙닭은 실패한 것이다.’ 이런 흐름이 잘 읽히지 않습니다. 즉, 〈마이클라우 아트토이전〉에서 느낀 ‘열정’의 소중함이 도입부의 고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도입부를 신선하게 하는 데에 고사는 유효했지만 이어지는 내용을 뒷받침하기에는 조금 미흡했다는 것이지요. 또한 글쓴이는, 전시회에서 만난 예술작품에서 ‘거리문화의 가치’와 ‘젊음에 대한 예찬’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작가의 ‘열정’과 좀 더 긴밀한 관련을 갖고 서술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광대의 광대일기」에서 화자의 실제 내면은 아주 격정적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격정은 여러 장치들을 통해 절제되어 있습니다. 제목과 설정(광대, 광대일기)이 암시하고 있듯 말이지요. 시 속에서 ‘나’는 두 번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를 봅니다. 여느 ‘거울’이 그러하듯, 이 시 속의 거울 역시 광대 가면 너머의 나를 드러내줄 것을 기대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직접 제시되지 않고 거울 바깥의 상황들(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지는 과일들, 수돗물 냄새, 말라비틀어진 꽃)을 통해 환유적으로 지시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시에서 ‘거울 속의 나’는 ‘진짜 나’가 아닌 것처럼 묘사됩니다. 6연 4행에서 괄호 속에 놓인 어구가 이미 거울 속의 나조차 분열되어 있음을 보여주지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시에서 진짜 진정성 있는 ‘나’라고 단언되지 않습니다. 화자가 처음부터 아예 ‘나’의 페르소나로 ‘광대’를 내세운 것도 그런 이유이겠지요. 즉 이 시는 통상적인 (서정)시에 기대되는 진정성 있는 ‘나’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성 있는 나’에 대한 실험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 시의 성공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시’라는 장르의 속성상 그런 것입니다. 이 시는 이렇게 끝납니다. “어딘가 가운데 끼어있다는 느낌 속에서,/ 아주 약간 난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지.” 사실 이 “끼어있다는 느낌 속에서” “난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것이 이 형식 실험의 끝일 것입니다.즉, 이것이 어디까지나 ‘광대’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광대의 가면 너머의 ‘나’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아이러니. 제가 이 시 자체의 독해보다도 형식 실험적 요소에 관심을 둔 것은, 이 시가 우리의 선배들이 해온 형식 실험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이 아쉽지만, 영향에의 불안과 그 흔적을 지우는 작업, 어렵지만 작가들이 필연적으로 거쳐간 작업일 것입니다. 각각의 형식(장르)과 내용이 잘 어우러진, 또한 글쓴이만의 개성과 정돈된 필체가 두루 조화를 이룬 글을 쓰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정말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건 계속 써보세요. 써가는 과정이 거듭될수록 조금씩 스스로의 글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고 조탁할 수 있는 감식안도 생기지 않을까요. 정진과 건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글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