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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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경운기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 말에 따르면 좋은 일소는 주인이 지칠 때 같이 지친다는 것이다. 게다가 내 기억으로 아버지의 ‘워―’소리에 좌측으로 가야 하는지 우측으로 가야 하는지, 멈춰야 하는지 전진해야 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리는 소도 그 소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내 눈엔 그것이 퍽 신기했는데, 나로서는 아버지의 ‘워―’소리가 매양 한 가지 소리로만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소도 팔아치운 것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인가, 2학년 때인가였다. 일소 대신 경운기며 트럭이며, 트랙터가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마침내 경운기를 들여놓았다. 새것은 아니었고, 중고였다. 초기에 아버지는 경운기 다루는 법을 익힌다며, 그것을 끌고 논으로 밭으로 열심히 다녔다. 그리고 내 기억에 두 번인가 세 번인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고랑에 처박은 채 혼자 힘으로 도저히 꺼내놓지를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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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제15회] 안경
안경을 처음 착용했던 어린 시절. 불행히도 저는 안경이 가져다 준 철학적 의문을 해소할 수 있을 만큼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그저 어린 저에게 불쑥 찾아든 여러 인식론적인 딜레마들 때문에 아찔한 현기증만을 경험했을 뿐이지요. 아마 그때의 현기증은 제가 진짜 세계와 거짓된 세계를 구분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생겼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어쩜 어린 시절 저는 스스로에게 잘못된 질문을 던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는 그 질문 속에 갇혀 버리고 만 것이지요. 진짜인가 아니면 거짓인가가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 했던 겁니다. 두 세계 중 어느 세계가 나의 힘을 증가시켜주었는가? 혹은 두 세계 중 어느 세계가 내게 새로운 관점을 안겨주었는가? 이렇게 물어보았다면, 어린 시절 나는 쓸데없는 고뇌에 빠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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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좌천동 915번지」외 1편
이곳은 좌천동 915번지, 어린 시절 나의 옛집의 지번이다. 시들지 않는 꽃 화면 가득 빨간 베고니아꽃이 활짝 웃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한참 동안 엄마를 뵙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해진 딸을 꾸짖는 안부 문자다. 연락 없는 딸이 보고 싶은 엄마의 순수한 염려인 것을 알면서도 마음 한 구석 괜한 심통이 인다. 메시지를 보내온 마음과 그것을 받아든 마음이 괜한 엇박자를 놓는 까닭은 엄마에 대한 나의 오래된 앙금 때문이다. 엄마는 꽃을 좋아한다. 엄마의 정원에는 항상 꽃들이 만발했다. 한겨울에도 갖가지 꽃들이 계절을 잃어버린 채 피어 있다. 곧 죽어가던 화초도 엄마의 손길이 닿으면 신기하게도 다시 꽃봉오리를 피워 올렸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소질이 있다고 한다면 엄마는 꽃을 잘 키우는 탁월한 재능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어린 시절, 우리 삼 남매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엄마는 커다란 가방을 챙겨 우리 곁을 떠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