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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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이별
이별 안성호 가로등 밑, 옷걸이에 걸린 노란 우의처럼 고개 숙인 그녀 벤치를 지나는 누군가 그녀의 뒷덜미를 낚아채서 몸에 딱 맞게 단추를 채우고 가버렸다 흩어지는 발자국마다 이내 비가 몰려든다 하굣길 여중생들이 주전부리하듯 빗물이 길 위로 몰려다니고 고인 빗물 속에 가로등 불빛은 파문을 일으키며 구겨졌다 펴졌다 나는 오랫동안 먹다 남은 두부처럼 천천히 상해 갔다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그 사이로 구불구불 비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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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그림자의 집
그림자의 집 안성호 내 그림자는 창 너머 앞집 창가에 놓인 화병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그림자는 무릎을 꺾고 걸어 나와서 내 그림자를 끌어당겨 집으로 들어가버린다 그녀의 집은 극장인지 모른다 커튼 뒤 어른거리는 그림자들의 천국 不具한 욕망들의 집 그녀는 방문을 잠근 채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리고 내 그림자는 납작해진 넙치 마냥 그녀의 집을 유영하고 있다. 그녀가 불을 끄고 창문을 닫는다 누군가 골목길을 뛰어온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린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 뒤로 그림자 하나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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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물색환
물색환 안성호 한 달째 물색환(物色丸)을 생각하고 있었다. 담배도 소용없었다. 창밖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사물의 색을 손가락으로 굴려 둥글게 만들어보았지만 몸 안에서 만져지는 것은 구슬처럼 둥근 환(丸)이 되지 못했다. 한약방 같은 곳에 전화를 걸어 알아도 봤고, 한의학 서적을 뒤적거리기도 했지만 교수에게 이것이 바로 물색환입니다,라고 말할 것은 못 되었다. 그렇다고 십전대보탕 같은 것으로 몸보신을 해서 사람의 머리가 맑아지고, 머릿속에 든 생각들이 잘 정리된 서랍처럼 정갈하다고 해서 문학과 통하는 건 또 아니지 않던가. 애초, 교수가 많은 문하생 중 하필이면 왜 날 지목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태 만에 걸려온 전화였을 게다. 교수는 대뜸 전화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강군인가? 자네 지금도 소설을 쓰는가? 그렇담, 자네 나랑 같이 물색환을 만들어볼 생각 없나?” 교수의 생뚱한 질문에 잠시 정황을 파악하느라 잇댈 말조차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