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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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이야기의 이야기
아버지는 어린 시절 부모님 없이 무척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어요. 책 읽기와 공부하기를 좋아했던 아버지에게는 그것이 평생의 한이 되었죠.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자식들에게만큼은 엄청난 교육의 혜택을 주고 싶어 했던 거예요. 그런 아버지 덕분에 우리 오빠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정말 잘했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늘 전교 3등 안에 드는 엄청난 수재였어요. 그런데 나는 늘 꼴찌만 도맡아 하고 있으니 부모님이 얼마나 속이 터졌겠어요. 그래서 나를 매일 혼내고, 다그치고, 때려 가면서까지 착실히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나는 이 모든 사실에 자꾸만 화가 났어요. 나는 왜 이토록 공부를 못 하는 하찮은 인간으로 태어난 건지, 그리하여 왜 이렇게 커다란 열등감에 휩싸여 살아야만 하는지 알 수 없어 화가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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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나를 위한 시간
언젠가 내가 말도 할 수 없던 시절, 맨발로 바깥으로 뛰쳐나가 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게 아빠와 나의 삶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것은 아니었을까. 승연은 아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녀는 궁금했다. 엄마는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어린 시절에 엄마는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하지만 과연 물을 수 있을까? 나는 그걸 듣고 싶은가? 이제 와서? 스스로도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바깥에서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이 환해지고, 커다란 사람이 들어왔다. 아빠. 승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왔니?” 키가 크고 늘 그렇듯 정장 차림―정장이지만 묘하게 후줄근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인 그녀의 아빠가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네.” “아이 아빠랑 아이는?” “집에 있어요.” 남편과 싸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고, 승연은 생각했다. 그럴 만도 하지. 아빠는 화장실로 들어가서 손을 씻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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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달을 잃어버린 아이,들1
안녕. 이영이 손을 흔들며 저 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끼이익, 차들이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클랙슨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영과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안녕, 푸념처럼 내뱉은 내 목소리가 클랙슨 소리에 묻혀들었다. 교보문고 뒷골목 어느 카페에서 나는 숨도 돌리지 않고 몇 잔의 데킬라를 연거푸 들이켰다. 가방을 열고 아껴두었던 마리화나를 꺼내 물었다. 후우, 한숨을 내쉴 때 어디서 날아왔는지 푸른 나비 한 마리가 펄럭거렸다. 이영이 만들어놓은 환상, 나는 이영과 찍은 사진을 바라보았다. 액정화면에 담긴 이영과 나. 이영의 이메일과 내 이메일을 액정화면에 띄우고 전송버튼을 눌렀다. 이영과 나의 알몸이, 이영과 나의 키스가, 보아를 닮은 이영이, 서태지를 닮은 내가, 트리니티를 닮은 이영이, 네오를 닮은 내가 차례로 전송됐다. 문득, 내 몸이 어딘가로 전송되는 느낌, 이것도 이영이 만들어 놓은 환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