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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으로부터 사랑을 지키는 방법 -심지아 시집 『로라와 로라』 (민음사, 2018)를 읽고-
거울을 바라보는 일은 어느 상황에서든 필요하다. 밥을 먹고 난 뒤에 입속에 남은 잔여물을 확인하거나, 잠에서 깨어나 눈곱을 떼거나, 침 자국을 닦거나, 머리를 정돈하거나,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거나 하는 인지하지 못하는 많은 일이 있다. 거울은 자기검열의 일차원적인 시작이다. 하지만 좌우 반전된 거울을 바라보는 일은 다르다. 평소에 나의 모습과는 너무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그것은 내가 보는 내가 아닌 타인이 보는 나의 모습이다. 평생을 살아도 못 볼 나의 모습이다. 어떠한 지점에서 영적임을 주기도 한다. 마치 평행 우주에서 난간 뒤에 숨어 내가 나를 쳐다보고, 유체이탈을 한 뒤 자신을 바라보는 일과 같다. 섬뜩함과 호기심이 동시에 드는 행위이다.심지아 시인의 시집 『로라와 로라』는 투명함을 갖고 있다. 화자가 불행에 맞서는 태도와 어쩌면 나와 다르지만 나와 같은 나를 견디는 일은 너무 투명하고 선명하다. 그의 시는 실체가 있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영혼, 즉 에너지 자체에 주목한다. 영혼으로서 자신을 바라본다. 괴리감을 느끼거나 낯설어하지 않는다.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로라와 로라, 한 사람처럼두 사람처럼, 다섯 사람처럼, 로라와 로라 의자의 이름처럼의자에 앉은 쌍둥이처럼의자에 앉은 이름이 같은 사람처럼의자에 앉은 이름이 다른 사람처럼의자에 앉은 긴 이름의 외계인처럼의자에 앉은 오후 다섯 시의 햇빛처럼의자가 많은 기차처럼한 개의 의자가 정지한 밤처럼한 개의 의자가 사라진 낮처럼사색하는 코끼리처럼사색을 중단한 사제처럼사색에 놓인 시체처럼로라와 로라,사랑했던 한 개의 이름처럼미워했던 한 개의 이름처럼개처럼 짖는 사람처럼개처럼 조용해진 사람처럼이름이 지워진 묘비명처럼로라와 로라,가장 나이며 가장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가장 너이며 가장 너의 것이 아닌 것처럼로라와 로라,책상 위로 팔을 올리는 감정처럼책상 위에 턱을 괴고얼굴이 비대칭으로 자라나는 로라와 로라 -「로라와 로라」 전문 이 시는 로라와 로라를 통해서 발화되고 있다. 같은 존재이지만 같은 존재가 아니다. 마치 대칭이 맞지 않는 얼굴 같은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자아와 내가 인지하는 나의 자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거울 자아 이론을 떠올릴 수 있다. 이론은 자신을 보는 것처럼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 혹은 타인이 나에게 기대한다고 생각되는 그 모습을 내 모습의 일부분으로 흡수하여 자아상을 형성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타인은 또 다른 나라고 볼 수 있다. 로라와 로라의 ‘로라’이다. 화자에게 완벽한 타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자신은 화자 자신이다. 사랑의 숙명 글쎄라고 말하는 일은 채소를 닮았다도마 위에 채소를 눕히고작은 조각으로 썰며 나는사랑을 느낀다 글쎄라고 말하며 달걀이 된다문고리를 만들며 꿈꾸기 좋은 곳끈적임은 고전적이고새로워 아무도 요청하지 않았는데꿈과 파괴 사이 반쯤 빚어진 형상으로 글쎄라고 말하면물컵에 잠긴다불규칙한 계단을 쌓는 싹들 토르소의 잘린 단면들모든 입가에는 부스러기들이 묻어 있다 시간은 도마가 된다글쎄라고 말하게 되는 곳 기하학적인 감정 속에서기하학적인 가능성 속에서 글쎄라고 말했다 여기야,부서지는 곳 -「부엌의 부흥」 전문 화자는 '글쎄'라고 말하는 일이 '채소'를 닮았다고 한다. '글쎄'는 사전에 의하면 '남의 물음이나 요구에 대하여 분명하지 않은 태도를 나타낼 때 쓰는 말. 해할 자리에 쓴다. 자신의 뜻을 다시 말하거나 고집할 때 쓰는 말.‘이 있다. 글쎄는 긍정적인 상황이 아닌 부정적인 상황에서 쓰인다. 화자는 왜 그것을 파괴하는 일에서 사랑을 느낀다고 하는 걸까? 우선 제목인 '부엌의 부흥'에 집중해야 한다. 부엌이 부흥하기 위해서는 부엌의 존재 목적인 요리가 필요하다.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달걀을 깨트리거나 채소를 자르며 파괴해야 한다. '채소'는 모든 시작과 끝의 의문이자 거절이다. 화자는 그것을 시간이라는 도마에 올려놓고 파괴해야 한다. 그것이 화자 자신이라도, 숙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화자가 숙명을 지키기 위한 태도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화자는 폭력에 처했을 때 그 폭력을 묵묵히 받아낸다. 「예배 시간」, 「딱딱함과 부드러움」, 「외출 직전」의 화자는 계속해서 맞는다. 그것을 즐거워하는 태도를 내비친다. 하지만 「외출 직전」의 화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는 울먹이며 말했지. 접시가 날아올 땐 식탁 아래로 몸을 감추라고. 알고 있잖아 캐롤린, 숨을 수 있는 곳은 너무 빤해. 소파 뒤거나, 닫히려는 문과 열리려는 문 사이라는 걸. -「외출 직전」 부분 화자가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즐기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애써 담담한 척하며 고인 우울을 덮는다. 오히려 불쌍해 보일 정도로 담담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화자가 캐롤린에게 하는 진술로 화자는 오래전부터 폭력에 노출된 사람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소파 뒤와 문 사이에 폭력을 피해 숨었지만, 그것이 무력하다고 느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자신만의 방법으로 맞선다.이 시집은 매력적이다. 시집에 화자의 변화가 나타난다. 기승전결이 있듯이 시집에도 화자의 심리선을 볼 수 있다. 폭력을 직면함으로써 폭력에 저항하는 화자는 시집의 후반에 갈수록 자신이 처한 상황을 타자에게 묻는다. 그것의 사유를 묻는다. 타당함에 관해 의구심을 갖는다. 숙명에 관해 의문을 품는다. 꿈이라는 가설 화자의 태도는 나를 해하는 사람에게 숨지 않음으로써 저항하거나 선생님이나 엄마와 같은 ‘어른’이라는 존재에 질문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일관적인 태도를 보이기 위해 문제를 직면해 의문을 드러낸 것일 수 있지만 꿈이라는 가설을 일부 시에 대입하면 해석의 폭이 넓어진다. 태도는 간단히 (직면함으로) 저항: 의문 제기로 요약된다. 우선, 저항하는 태도에 꿈을 대입해보면 화자는 모든 공간에서 무력하다. 현실에서는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에 의문을 갖는다. 무력한 화자가 꿈에서 더욱 무력한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와 –를 곱하면 +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꿈에서의 태도라면 그 또한 –와 –를 곱한 것으로, 자신을 지키는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꿈이라는 공간이 존재하는 걸까? 시에서 어떤 의미로 적용될까? 오래전 밤은 나를 열어 흐트러진 것들의 긴 해변을 넣어두었다 그런 해변이란 적적하고 소란스러운 것이라서 잠을 자다가 거리를 걷다가 아무 데서나 발이 푹 빠지며 나는 갸르릉 소리를 듣게 된다 내가 깨어나는 세계는 서랍의 형식을 하고 있다 내가 잠드는 세계는 서랍의 형식을 하고 있다 서랍 속에 담긴 채로 거나 서랍 밖으로 떨어진 채로 건축의 모호함을 듣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디가 없는 사람 모양 집으로 가다가 집을 잃어버리고 나는집으로 가고 싶다는 기억이거나 습관인지도나는 집을 버리고 싶은 사랑이거나 방향인지도 서랍을 갖지 않아도 서랍을 열 수 있어서 유령처럼 배가 고프다 거듭해서 서랍에 연루되는 서랍을 닫으며 서랍에서 쫓겨나거나 서랍을 잃어버리며 아무래도 서랍은 연못처럼 아무래도 서랍의 밖은 연못처럼들여다보게 되는 곳 물고기들의 무정과 다정이 좋아서 연못을 들여다본다너의 무정과 다정이 좋아서 나는 연못을 들여다본다 서랍을 열거하며 서랍을 망각하며 아무래도 서랍은 죽음을 경험하는 일에 가까워지는 곳 아무래도 서랍은 죽음을 보호하는 일에 가까워지는 곳 서랍이 많아서 서랍은 배가 고프다 서랍이 부족해서 우주는 배가 고프다 웃을 때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게 되어서 나는 나의 균열을 잘 바라볼 수 있다 -「빈칸의 경험」 전문 화자는 자신이 어디에서 깨어나든 그것이 서랍의 형식을 하고 있을 거란 걸 알고 있다. 그것이 빈 서랍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자신이 텅 비어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무기력함과 무력함에 대해 알고 있다. 그래서 꿈을 꾼 것이 아닐까. 서랍 안을 꿈으로든 현실으로든 가득히 채우고, 서랍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던 것이 아닐까. 비대칭인 얼굴도 마음도 자신도 사랑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것이 좌우 반전된 거울을 보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자기검열이라는 하나의 벽에서 벗어나 자기포용을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지 못할 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살아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분명 화자는 내게 다가와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다.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처럼 시간은 모든 걸 삼킨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숙명이며, 비대칭의 존재 이유이며, 심장이 대칭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