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7)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빛도 목소리도 없는 그곳에서
[기획특집] 시와 소설로 보는 2011년 명장면 빛도 목소리도 없는 그곳에서 — 한강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 노대원 어떤 책들은 독자에게 함께 앓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다른 어떤 책들은 독자에게 더 깊이 침잠하여, 더 오래 앓도록 간곡히 요청한다. 한강의 소설이 그렇다.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지성사, 2010)에서 작가는 누군가의 말을 빌려 상처가 나면 피가 멈추지 않는 고래들에 대해 말한 적 있다. 그렇게 그녀의 손에서 생명을 얻은 작중인물들은 모두 불치의 혈우병을 앓는 듯하다. 그들은 상처와 함께 태어나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와 더불어 살아가다 끝내 상처와 함께 어둠의 페이지 속으로 사그라진다. 우리는 안다. 아물지 않는 상처는 죽음으로 닿는 험로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는 또 기어이 알게 된다. 한강의 소설에서 만나게 되는 그 혈흔의 기록은 지독하게 어지럽고 아름다운 무늬가 되어 서서히 번져 나간다는 것을.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저물녘에 이르러 꽃은 왜 환하게 피어 있는가
[시와 소설로 보는 2011년 명장면] 저물녘에 이르러 꽃은 왜 환하게 피어 있는가 ─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창비) 홍기돈 일찍이 카뮈는 인간을 ‘부조리한 존재’로 파악한 바 있다. 어째서 인간이 부조리하다는 말인가. 그 자신이 결국 죽음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든, 지위든, 명예든 평생 쌓아올린 모든 것들이 무(無)로 돌아갈 것임을 인간은 진작부터 간파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삶을 이어 나가는 것이며, 삶 속에서 부ㆍ지위ㆍ명예 따위를 추구해 나가는 것일까. 다 부질없는 짓 아닌가. 이렇게 보자면, 어쩌면 우리네 삶이란 허물어질 모래성을 온 정성을 다해 쌓아올리는 어린아이의 한나절 장난질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도종환의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창비, 2011)는 이러한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에 정면으로 맞서는 시집이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언어
[기획특집] 시와 소설로 보는 2011년 명장면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언어 ─ 이홍섭 『터미널』(문학동네) 김문주 『터미널』은 문학의 가장 유서 깊은 주제인 시간에 관한 시집이다. 정주의 공간이 아니라 어딘가로 떠나는 경유지로서 터미널(terminal)은 그것의 어원이 내포하고 있는바, 이미 너무 오래 전부터 생(生)에 관한 비유의 공간이었다. 이 지극한 상투를 넘어서는 견결한 말의 힘을 이 시집은 웅숭 깊은 풍경으로 보여준다. 특정한 시적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시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삶에 관여하는 관계들을 시차(時差) 속에 마주 세우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풍경을 통해, 시는 생에 기숙한 본연의 슬픔을 읽는 이의 마음에 부려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