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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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시간
시간 함기석 본다 숲을 지나다 벌레의 알들을 본다 알이 붙어 있는 작은 꽃잎을 본다 꽃이 뿌리내린 둥근 무덤을 본다 만삭 임산부의 둥근 자궁을 본다 내생의 아기인 꿈꾸는 시체를 본다 숨 쉬는 무덤 아래 지구 내부를 본다 주검의 검은 퇴적층을 뚫고 본다 핵을 뚫고 반대편 지구를 본다 뒤집힌 도시의 뒤집힌 인간들을 본다 뒤집힌 빌딩 뒤의 뒤집힌 하늘을 본다 뒤집힌 하늘 뒤의 광대한 우주를 본다 광대한 우주 속의 광대한 알들을 본다 알들을 감싼 빛과 어둠과 침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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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낙타의 시간
낙타의 시간 박종희 정년을 마친 낙타가 한가로이 오수(午睡)에 빠져 있다. 두 무릎을 꿇고 엎드린 늙은 낙타의 등으로 누더기가 된 햇살이 쏟아진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살포시 눈을 뜨는데 웬만한 일은 눈감아주고 살아왔다는 듯, 아래로 오긋이 내려 깐 두 눈이 무덤덤해 보인다. 휘어지도록 많은 짐을 지고 걷는 낙타는 지치고 허기지면 등이 낮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체념하고 살아온 세월이 길었다는 듯 성숙한 여인의 젖무덤 같던 봉우리가 겨우 흔적만 남았다. 동병상련의 마음 때문일까. 사막을 벗어나 조락(凋落)의 시간에 든 그의 굽은 등과 야윈 발에 자꾸 눈길이 머문다. 사막에 길을 내느라 만신창이가 된 낙타의 발가락을 보면서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 꼼짝달싹할 수 없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우리도 별빛을 의지해 걷는 낙타의 운명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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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연두의 시간
연두의 시간 덕분에 산천은 더 푸르게 물들 것이다. 세상의 온갖 어지러움도 제 자리를 잡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아무 일 없듯이 잘 돌아갈 것이다. 연두는 나처럼 가난한 사람도 소소한 일상의 품으로 돌려보내리라. 산다는 것이 갚을 수 없는 부채지만 연두는 괜찮다고 토닥여 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