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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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흰 나비 떼
흰 나비 떼 송종규 소금꽃 같은 흰나비들이 파밭에 앉아 있다 하늘은 온통 난장판, 흰나비들에게 어깨를 빌려 준 두 평 반 파밭이 튀밥처럼 가벼워진다 불청객처럼 들어와 앉은 쇠비름풀 하나의 그림자도 흘리지 않으려고 햇살은 두 손을 받쳐 들고 앉아 있다 쇠비름풀맛의 비리고 물컹하던 기억처럼 사람의 한 생애 또한 비릿한 맛, 머리가 허연 노인은 꽃잎과 고요 속으로 숨고 세상의 가장 후미진 곳에 호미 한 자루가 코를 박고 엎드려 있다 햇빛과 바람과 흰나비들이 쏘아 올린 들숨으로 세상은 찰랑거린다, 자욱해진다, 소금꽃 같은 흰나비들이 내 방에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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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이상한 기억
이상한 기억 송종규 동그란 스탠드 건너 당신은 앉아 있고 나는 세월 건너편 낡은 벤치에 앉아 있다 그 사이로 계곡이 있었던 듯하기도 하고 잠시, 여우비가 스쳤던 듯 하기도 하다 달빛이 얼굴 위에 소나기처럼 쏟아졌던 것 같기도 하고 간선도로에 자욱한 모래의 융단이 깔린 듯하기도 하다 수많은 이정표와 자동차 바퀴를 거슬러 올라가면 기껏, 소스라치는 마른 나뭇잎, 나뭇잎 한 장의 모질고 쓰린 기억들 세월 건너편 낡은 벤치 위에 당신은 앉아 있고 나는 동그란 스탠드 앞에 앉아 있다 안개가 많은 것들을 지운 듯 세상은 어렴풋하고 달력 속에서 나는 무릎을 세우고 엎드려 울었다 어느 순간 덜컥, 빗금을 그으며 계곡 또는 단애가 들어섰을 것이다 우리는 들판에 있었던 듯하고 못물 속에 깊숙이 가라앉았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아마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을 것이다 스탠드의 불이 나가고 당신은 세월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모래와 꽃과 바람을 받으며 여물어 갔다 세월인 당신, 얼룩인 당신, 가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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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2006년 시단의 결산과 전망
최정례 『레바논 감정』, 남진우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이정록 『의자』, 박찬일 『모자나무』, 최서림 『구멍』, 박라연 『우주 돌아가셨다』, 송종규 『녹슨 방』, 김영남 『푸른 밤의 여로』, 조말선 『둥근 발작』, 성미정 『상상 한 상자』 등이 그 예이다. 다른 시집들이 세계 속에 살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음에 비해, 박찬일의 시는 세계 속에서 살아감 자체에 대해 회의를 표시한다. 그는 삶의 곳곳에서 죽음의 표지들을 포착해낸다. 살아 있되 오히려 죽음이 친숙한 아이러니한 상황, 주체와 세계의 돌이킬 수 없는 불화와 단절이 그의 시의 바탕을 이룬다. 정반대로, 남진우의 시에서 세계는 오직 주체를 위해 존재한다. 사자나 곰 같은 동물의 형상으로 오는 ‘어떤 것’은 잠든 ‘나’를 흔들어 깨우고, 말을 걸어오고, 내 속에 머물다가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