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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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소원
소원 채길우 할머니가 등을 긁어 달라 하시면 윗옷을 들추고 등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낡고 해진 브래지어 호크를 푼다. 손톱을 세워서 위아래로 쓸어내릴 때 고속도로처럼 하얀 줄이 섰다가 진흙을 뒤집은 봄밭처럼 붉어진다. 할머니가 시원하다 살 것 같다 하시는 두껍게 눌린 진한 자국보다 먼 북쪽 그리고 동쪽에 있는 거기가 할머니 고향의 지도와 가깝다. 등에 맞댄 양손바닥만으로는 가릴 수 없어 문질러 지워도 보고 닦아도 보는 깊이 파인 살과 골의 건너편 미세한 봉분들이 돋아난 비좁은 자리마다 할머니 손은 이르지 않아서 내가 대신 매만지는 묽고 비린 땅을 위하여 마지막은 손톱을 거두고 피맺히지 않도록 지문으로만 닿아 보았다. 다시 브래지어 묶어 주고 옷을 내려 주자 가려움을 숨긴 너무 작은 뒷모습 나는 함부로 재단된 경계와 선 들에 뒤덮여 찢기고 바스러진 몸을 껴안으며 말한다. 할머니 오래오래 살아요 둘이 같이 손잡고 너머에 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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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아동청소년문학 사발의 소원
사발의 소원 변선아 저는 사발입니다. 아주머니가 장날에 감자를 캐서 판 돈으로 산 밥그릇이었지요. 아주머니는 갓 지은 밥을 고봉으로 올려 끼니마다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 아들은 삽으로 밭을 일구듯 숟가락으로 밥을 퍼 입 안에 넣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어머니.” 아주머니는 배불리 먹고 일어나는 아들을 볼 때마다 흐뭇하게 미소 지었습니다. 저도 덩달아 흐뭇했지요. 이상하게도 바닥이 긁혀 텅 비워질수록 제 배는 불렀습니다. 그런 어느 날이었어요. 더위가 기승을 부려 매미가 지천에서 쩌렁쩌렁 울던 때였습니다. 천둥보다 더 큰 소리가 새벽을 깨웠습니다. 마치 세상이 깨지는 소리 같았습니다. 그날 이후 마을 청년들은 아주머니 집으로 모이는 날이 잦았습니다. 아들과 청년들은 집을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서는 날, “가지 마라. 늙은 어미를 두고 어딜 간다는 거니?” 아주머니가 울며 말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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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소설 대원의 소원
대원의 소원 최아현 0 대원은 조금 어지러웠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너무 긴장한 탓이었다. 손바닥에서는 자꾸만 땀이 나 주머니 속 손수건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무사히 발권도 마쳤고, 시간이 남아 사진도 한 장 찍었다. 남들처럼 포스터 앞에서 찍고 싶었는데 찍어 줄 사람이 없어 고민하던 참이었다. 혼자 머뭇대던 대원에게 누군가 선뜻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아주 감사한 일이었다. 덕분에 대원도 방금 받아 따끈한 티켓과 혹시 몰라 챙겨 온 앨범과 함께 공연 포스터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집으로 돌아가 자랑할 사진 한 장은 건졌지만, 들어오는 길에 콘서트장 입구에 있던 매대를 꼼꼼하게 구경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재희가 콘서트장에 가면 굿즈라는 것을 판다고 했는데….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는 바람에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다음에도 올 기회가 생긴다면 꼭 여유롭게 와서 구경해야지.